어린 시절, 몸이 아파 누워있을 때 이마를 짚어주시는 부모님의 손길에 얼마나 마음이 편해졌었는지 기억하고 계실 것입니다.
아플 때나 맛볼 수 있었던 달콤한 복숭아 깡통의 맛도 아련합니다.
오늘 말씀에서 맹인을 자상하게 만져주고 치료해 주시는 예수님이 우리 모두에게 큰 위로와 용기를 주시길 원합니다.
성경은 모든 게 다 시간 순으로 기록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의미를 더 잘 이해하게 하기 위해 관련된 사건들과 어울리게 재배치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앞 뒤 사건과 함께 생각하면 본문의 의미가 더 분명해집니다.
오늘 말씀도 그렇게 살펴보면 더 깊은 은혜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마가는 8장까지 예수님께서 하나님이 보내신 구원자이심을 증명하는 주님의 기적과 가르침들을 진술합니다.
그 마지막 부분에 오늘 본문 맹인의 치료가 나오고 바로 이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실 계획을 처음으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리고 9장에서부터는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예루살렘을 향해 가시는 여정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가복음의 기록 특성상 맹인의 치료가 병자를 고치신 단순한 사건이 아니라 주님의 십자가의 대속과 서로 관련이 있으리라 추측할 수 있습니다.
또 본문 앞에 있는 사건은, 삼 년 반이나 주님을 따랐던 제자들이 여전히 주님의 사역을 제대로 깨닫지 못해서 질책을 받는 내용이 나옵니다.
예수님이 바리새인과 헤롯의 누룩을 조심하라고 말씀하시죠.
종교적인 위선과 세상 권력의 탐욕의 이스트가 우리를 과장되게 부풀리지 못하게 하라는 경고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실수로 떡을 챙겨오지 못한 것을 나무라시는 줄 알고 수군대는 모습을 보고 주님이 한탄을 하십니다.
너희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아무리 보여주고, 가리켜도 도무지 영적인 일은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연인에게는 아무리 천국의 일을 말해도 이 땅의 일로 밖에는 해석이 안됩니다.
예수님의 이 책망 뒤에 바로 이어서 맹인의 치료 이야기가 등장한 것입니다.
현재의 제자들의 상태가 바로 이 맹인과 다름이 없다는 복선이죠.
그러니까 맹인을 고치신 사건은 앞 뒤에 있는 이야기와 엮어 보면 ‘영적인 눈을 뜨게 하는 십자가의 구속 사건’을 더 쉽고 은혜롭게 안내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마가는 이것을 깨닫고 맹인을 고치시는 예수님의 행동을 유심히 연구해서 복음서에 수록해 놓은 것입니다.
이것을 전제로 해야 오늘 이야기에서 뭔가 걸리는 부분들이 쉽게 풀립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무엇보다 맹인을 대하시는 은혜로우신 예수님을 만날 수 있길 원하니다.
본문의 분위기를 보면 이 맹인은 보려고 하는 의지도 별로 없는 것 같이 보입니다.
오히려 그를 이끌고 온 사람들이 더 열의를 보입니다.
대체적으로 믿음이 있는 분들과 없는 분들의 차이죠.
맹인이 예수님께 고쳐 달라고 했다는 말은 없고 데려온 사람들이 간구했다고 합니다.
맹인을 이끌고 먼 길을 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를 데려온 사람들의 믿음에 예수님이 응답하십니다.
믿지 않는 분들을 우리의 믿음으로라도 데려와야 하는 이유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모여 있는 앞에서 즉시 고쳐주시는 게 아니라, 맹인의 손을 붙잡으시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셨다고 합니다.
왜 그러셨는지 묻기에 앞서 맹인의 손을 꽉 붙잡으시고 그의 걸음을 인도해서 같이 가시는 주님의 따뜻한 마음과 긍휼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우리말에서는 구별이 가지 않지만 헬라어 시제를 보면 계속 손을 잡고 계셨다고 볼 수 있습니다.
장애를 가진 사람에 대한 인식이 많이 달라졌어도 사람들은 여전히 그런 분들과 직접 접촉하기는 좀 꺼려합니다.
그게 장애인들의 또 다른 아픔일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손으로 그를 덥썩 잡으실 때 맹인의 마음이 어땠을까요?벌써 그 냉냉하고 딱딱해진 마음의 상처가 벌써 치료되었을 것 같습니다.
우리도 여러 사람들과 어울려 살고 있다지만 정작 힘든 문제가 있을 때, 우리를 만져주고 위로해줄 사람은 없는지 모릅니다.
예수님께서 홀로 삶의 문제들과 싸우다 지친 우리의 손도 덥썩 잡아주시고 길을 인도하신다는 확신을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시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마치 이마를 짚어 보고 또 짚어보는 부모의 마음 같이 자상하게, 또 실력 있는 의사같이 아픈 곳을 신중하게 다루며 끝까지 완치시키시는 주님을 꼭 느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 수 있는 가장 대표적인 방법이 성경말씀과 피조세계인 자연을 통해서입니다.
며칠 전에 제가 산책을 나갔다 휘영청 밝고 맑은 보름달을 바라보는 데,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영광이 느껴져서 몸이 휘청거리는 것 같았습니다.
신비주의는 아닙니다.
하나님의 위엄과 광대한 지식이 온 땅을 가득 매우고 있다는 걸 느낄 때마다 경이로운 행복감에 가슴이 벅차고 뿌듯합니다.
그리고 오늘 처럼 이렇게 말씀 속에서 드러나는 예수님의 인격이 우리 마음에 깊은 울림으로 체험되는 것입니다.
어쩌면 너무나 절망이 깊어 기대조차 할 수 없기에 맹인에겐 은혜에 대한 갈망도 없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이 먼저 덥썩 손을 잡고 맹인의 문제를 맡아 주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선택하고 붙잡은 것 같지만 예수님이 먼저 우리에게 손을 내밀어 붙잡으신 것입니다.
맹인을 긍휼히 여기신 그 마음이 우리에게도 동일하십니다.
이렇게 말씀을 대할 때, 성령께서 주님의 인격을 우리 영에 아로새겨 주셔서 점점 주님을 믿고 안심하고 따르게 되는 것이죠.
예수님께서 왜 맹인을 데리고 마을 밖으로 나갔다고 생각하십니까?
이런 부분은 정확하게 그 뜻을 해석하기에는 무리가 있죠.
차라리 주님과 맹인이 만난 그 순간의 상황들을 상상해 보는 것이 더 유익하리라 생각합니다.
오늘 마지못해 이끌려 온 것 같은 이 맹인은 어쩌면 눈 먼 자신의 모습이 많은 사람들에게 흥밋거리가 되는 것이 싫었을지 모릅니다.
많은 사람에게 관심 받는 게 좋은 사람도 있지만 싫은 사람도 있습니다.
특히 실패한 내 상황과 내 불행과 약점에 사람들의 시선이 쏠린다면 누가 좋겠습니까?
내 치부가 사람들 앞에 드러나 호기심의 대상이 된다면 치료가 되고도 우리 맘에 깊은 앙금이 남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예수님은 은밀하게 우리의 아픔을 만지시고 상처가 남지 않게 치료해주시지 않으셨던가요?
아마도 은밀히 치료받은 과거의 상처들이 다 있으실 겁니다.
또 예수님은 여러 병자들로 떠들썩한 북새통 속에 그냥 무더기로 나은 게 아님을 맹인에게 보여주시는 것일지 모릅니다.
예수님은 오직 한사람 맹인 앞에서 진지한 관계를 맺으며 그의 문제를 다루어 주시는 것이죠.
예수님은 우리와도 이런 개인적인 관계가 맺어지길 원하십니다.
카톨릭은 교회의 일원이 되면 단체로 구원을 받는다고 말합니다.
구원은 개인적입니다.
개인적으로 구원받은 사람들이 모인 것이 우주적인 주님의 교회인 것입니다.
우리는 반드시 개인적으로 예수님을 알아야 합니다.
친구를 사귀고 속마음과 사람 됨됨이를 알아가듯이, 가족들과 매일 부대끼며 속속들이 알듯이, 예수님과도 이런 인격관계가 맺어져야 합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어떻게 인격적인 관계를 맺습니까?
교회에서 함께 예배하고, 함께 신앙 훈련을 하는 것 이외에도 반드시 개인적인 시간을 내서 기도하고 말씀을 읽으며 주님에 대해 알아가야 합니다.
또 그렇게 해서 깨달은 것들을 적극적으로 지켜가야 합니다.
그게 바로 내가 하나님을 살아계신 존재로 믿는 인격 대 인격의 관계를 맺겠다는 마음입니다.
듣기만 하고 지키지 않는 것은 사실은 믿지 않는다는 것이고, 믿지 않는 허상과는 관계가 생길 수가 없습니다.
인격적인 관계라 함은 상대의 말이 내 행동에 영향을 준다는 것 아닙니까?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이 모든 인류의 죄를 위한 속죄의 죽음이라는 것은 광범위하게 인정합니다.
그런데 삶은 과거와 전혀 달라지지 않습니다.
여전히 세속적인 죄를 좋아하고, 세상적인 모든 게 다 따르고 싶고 부럽고, 좋아 보이는 것입니다.
그 십자가의 피흘리시고 고통당하시는 죽음이 바로 이런 내 죄 때문이라는 것을 아직 체험적, 인격적으로 알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이걸 알면 정말 바보스럽게도 예수님이 나 한 사람 때문에 죽으셨다는 확신이 생깁니다.
오지랖 넓게도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바로 나 때문에 죽으셨다고 주장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희생하고 포기하고도 주님을 따르는 것 아니겠습니까?
십자가의 주님을 나의 구주로 인격적인 관계를 맺으시려면 이 사실을 믿을 뿐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행하며 따르시기를 결심해야 합니다.
우리를 개인적으로 은밀히 사귀시는 예수님은 오늘 맹인에게 좋은 일을 하신 것처럼 우리에게도 좋은 일을 하실 줄 믿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너희는 나의 친구’라고 하십니다.
누구든 주님 앞에 나와 도움을 구하는 사람들에게 거절하지 않으시고 가장 적절한 도움을 도에 넘치지 않게 알맞게 베풀어 주십니다.
주님과의 은밀한 시간을 통해 진정한 친구가 되시는 모두가 되길 원합니다.
다음은 예수님께서 맹인을 치료하는 방법을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의미를 살펴보겠습니다.
예수님이 병자들을 치료할 때는 주로 안수를 하시거나, 말씀만으로 고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맹인의 치료는 좀 특별합니다.
눈에다 침을 뱉으시고 안수하셨다는 것입니다.
마가는 유독 앞 장에서도 예수님께서 침을 뱉어서 귀머거리를 고치신 기사를 기록했습니다.
이게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요?
우리가 모기 물리면 침바르는 것 같은 그런 침의 치료효과를 이용하는 것은 분명 아닐 것입니다.
왜 하필 환자들이 더럽게 생각하고 거부감이 드는 침을 사용하는 것일까요?그런 행위에 대해서는 제자들도 좀 부끄럽게 생각하고 좋아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품격이 좀 없어 보이잖습니까?
그러나 예수님께서 좀 이상한 행동을 보이셨다면, 거기엔 의도가 있습니다.
이것은 본문 뒤에 이어서 나오는 제자들과의 대화와 연결해서 답을 찾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맹인은 아직 영적인 눈이 떠지지 않은 죄인의 상태를 말합니다.
맹인의 눈이 떠진다는 것은 구원받은 것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눈에 침을 뱉었다는 것은 ‘침뱉음’이라는 모멸적인 이미지와 구원이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침 뱉는다’는 꺼림직한 행동이 장차 일어날 무언가를 상징하는 것이죠.
영화 국제시장을 보면 흥남부두 피난선 위에서 아직 어린 장남에게 아버지가 자기의 무겁고 큰 옷을 입혀주고 낙오 된 딸을 찾아 배에서 내려가는 장면이 나옵니다.
아버지의 큰 옷은 이 아들이 장차 가장으로서 혹독한 삶을 살아야 될 운명을 암시하는 것이죠.
여기서 ‘침 뱉음’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마가는 이 사건 뒤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실 것을 비로서 제자들에게 밝히셨다고 기록합니다.
그리고 10장34절에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능욕하며 침 뱉으며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니 저는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니라
그리고 실제로 주님의 수난 중에 저들이 예수님께 침을 뱉었다는 내용을 두 번 마가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침’은 수치와 멸시를 받으며 십자가에서 죽으실 주님의 대속을 암시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메시야의 구원이 제자들조차 예상치 못했던 수치스런 침뱉음과 십자가의 고난의 죽음을 통해서라는 것을 드러내시는 것이죠.
이런 주님의 십자가 죽음에 베드로가 거세게 항의했다고 본문에 이어집니다.
그랬다가,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는 소리를 듣죠.
제자들이 다 이 말씀을 거북해 하고 힘들어 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셔서 성공적인 해방운동을 하셔야 제자들에게도 영광이 돌아가는 것이죠.
메사야가 치욕스런 십자가의 형틀에서 죽으신다는 것은 제자들이 상상도 못한 일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치를 떨며 거부하던 제자들에게 주님은 엄중히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제자들이 생각했던 것은 기독교가 아닙니다.
구원과 십자가는 필연적입니다.
고상하고 우아한 종교 행위로 우리의 죄가 용서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서 만신창이가 되고 피가 범벅이 된 채 얼굴에 침 세례를 받는 멸시와 모욕으로 만이 값이 치러질 만큼 우리의 죄가 무겁다는 것입니다.
성령을 받기 전까지는 아무도 자기 죄의 무게를 모릅니다.
지금 제자들도 메시야의 왕국이 권능과 영광으로 올 것을 기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러 교회에 나오는 게 세상에서 내가 남들보다 더 잘 살고, 성공을 이루고, 이 땅에서 행복하게 사는 것이 목적이면 그것은 기독교가 아닙니다.
물론 만복의 근원이신 하나님께 복을 구하고 받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만 이게 전부라면 그건 기독교가 아닙니다.
십자가를 거치지 않고는 영광의 구원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침뱉음을 받으시고 고난의 십자가를 지셔서 나를 구원하신 사실을 믿게 되면 우리도 누군가를 위해 그런 삶을 살아 영혼을 주님 앞으로 인도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 역시 누군가의 희생을 통한 복음전수와 섬김을 통해 여기까지 온 것 아니겠습니까?
주님은 이 사실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사실 부끄러워해야 할 사람이 누구입니까?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가 창피하고 부끄러워해야 맞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그렇지가 않습니다.
성도들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이나 죄나 구원과 같은 말을 하는 게 오히려 눈치 보이고 창피해 하며 숨기면서 합니다.
심지어 무슨 첩보작전처럼 내가 예수님을 믿는 것을 비밀스럽게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공개하고 나면 그 다음부터는 낮아져서 섬겨야 하는 걸 알기 때문에 밝히지를 않는 것 아니겠습니까?
저도 교직에 있을 때야 항상 지시하고 대접을 받는 입장이었지만 목사가 되어 특히 전도를 다닐 땐 한없이 낮춥니다.
한 사람이라도 나의 섬김으로 예수님 앞에 이끌려 오고 영의 눈을 뜨게 되는 것이 정말 천금보다 귀하고 값지기에 기꺼이 그럴 수가 있는 것입니다.
발작하듯이 주님의 십자가를 거부하던 베드로도 성령을 받고나자 복음을 전하다 십자가 형으로 역시 장렬하게 죽음을 맞았습니다.
주님을 위해 나를 낮춘 것만큼 영원한 세상에서 주님은 나를 높여 주실 것입니다.
또 이 땅에서 주님을 위해 낮아지고 섬긴 작은 희생을 생각할 때 마다 영원히 내 자신에게 참 잘했다는 흡족함으로 얼마나 행복감을 느끼겠습니까?
영혼을 주님 앞으로 인도하기 위해 받는 아름다운 멸시로 인해 우리의 마음이 매일 보람과 기쁨으로 넘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마지막으로 맹인의 치료가 두 단계로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물론 첫번째 안수가 미흡했다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의도적으로 한번에 눈이 보이게 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구원에 대해 영적인 눈이 열리는 과정을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것이라고 로이드 존스목사는 해석을 합니다.
첫 번 째 안수 뒤에 주님은 맹인에게 무엇이 보이냐고 물으십니다.
그는 ‘사람들이 보이나이다’ 라고 대답합니다.
그 말은 사실일까요, 거짓일까요?
그 다음에 이어서 하는 말을 보면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가는 것을 본다고 말합니다.
즉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가는 것을 보니, 아마도 사람이라고 넘겨짚었다는 것입니다.
완전히 보이는 상태가 아닙니다.
영적인 눈이 감긴 자연인들이 예수님 앞에 나와 하나님과 영적인 세계에 눈이 열리는 과정도 이렇다는 것입니다.
아직,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안 보이는 것 같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믿는 것 같다가도 어느날은 의심합니다.
하나님이 계신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아는 것 같기도 하고, 모르는 것 같기도 한 상태를 말합니다.
맹인이 모든 것을 밝히 보기 위해서는 분명하게 자기가 보는 것이 정확하지 않다는 것을 예수님께 말씀드려야 했습니다.
자기 자신이 영적으로 보는 것에 솔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 앞에서 마치 온전한 신앙이 있고, 영적인 눈이 열린 것 같이 행동하는 것은 다른 사람 뿐 아니라 나중엔 자기 자신도 속게 되는 맹독입니다.
지옥에 던져져야 마땅한 자기의 죄를 깨닫지 못했는데 회개하는 척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면서도 마치 큰 사랑을 받은 척하고, 죽음 뒤에 내가 대면하게 될 천국의 삶에 대해 확신하지 못하며 소망하는 척 하는 신앙인들이 얼마나 많을까요?
예수님은 오늘 분명히 맹인에게 묻습니다.
무엇이 보이느냐?완전히 보지 못하다고 했을 때, 그를 책망하지 않으시고 다시 그의 눈에 안수하셔서 모든 것을 밝히 보게 해 주신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아직 안 보이는 것을 은폐하지 말고 밝히 보게 되길 주님께 진실 되게 구해야 합니다.
또 내 신앙이 여전히 불분명한 것에 낙담하지 말고 소망으로 구해야 합니다.
칼빈은 예수님께서 은혜를 베푸실 때 어떤 사람에게는 한꺼번에, 어떤 사람에게는 한방울씩 주신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를 가장 정확하게 진단하신 예수님만의 투약방식인 것입니다.
구원을 확신하는 사람들도 내가 언제 구원받았는지를 떠올리면 명확하지 않습니다.
크게 은혜를 체험한 날 거듭났냐 하면, 사실 그렇다고 확언할 수도 없습니다.
그 전에도 분명히 하나님을 믿고 있었던 것은 부인할 수 없다는 것이죠.
어느 때인지 모르게 하나님이 나와 이 천지만물을 창조하셨다는 게 믿어지고, 내가 쌓아온 죄 위에 하나님의 진노가 기다린다는 것을 인식하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그 진노를 막아주셨다는 것이 믿어지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예수님은 그 사람을 집으로 보내시며 마을에는 들어가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 일이 일어난 벳새다는 이미 많은 이적을 행하셨는데도 회개하지 않아 심판을 경고하신 마을입니다.
더 이상의 기적이 그들에게 필요치 않다는 것입니다.
회개하지 않은 채 기적을 베푸시는 주님에게 열광하지 못하게 조치하신 것입니다.
또 마을 사람들이 웅성대며 모여 있는 곳에서 기적의 주인공이 되고, 열광의 대상이 되는 것은 막 구원받은 성도들에게 결코 유익되지 않습니다.
믿음은 눈이 휘둥그레지는 쇼가 아닙니다.
그는 먼저 집으로 돌아가 값없이 베풀어 주신 예수님의 은혜를 가족들과 나누며 자기를 위해 고생했을 가족들을 섬기며 그들을 주님께 인도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더 진실 되게 예수님을 알아가며 평범하게 이웃과 함께 주님을 따르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슨 대단한 사역에 부르심을 받았겠습니까?
이렇게 이 땅에서 우리에게 부여하신 귀중한 생의 나날에 소박하고 진실되게 예수님을 따르는 게 복된 삶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다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맹인 상태로 누군가에 이끌려 예수님 앞에 나왔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손으로 붙드시고, 모든 아픔과 상처를 만지시고 우리의 눈을 떠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 사랑을 보게 하신 줄 믿습니다.
또 아직 완전히 모든 것이 보이지 않는 분들은 모든 것이 밝히 보이기까지 주님의 손에 굳게 붙들려 점점 더 사랑의 주님을 보게 되시길 간절히 축원드립니다. 아멘.
2015년8월2일 주일설교 남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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