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거라사인과 군대귀신(마가복음5장1절-20절)

남수연 2015. 2. 11. 15:55

오늘 말씀은 거라사지방에 사는 귀신들린 사람을 예수님께서 고쳐주신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얻고 나를 포함해 인간을 아는 정확한 지식을 얻습니다.

나만 제대로 알아도 대단한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또 성경을 통해서만 배울 수 있는 것은 마귀와 귀신에 대한 지식입니다.

마귀와 귀신에 대해서 알 때 주의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계시해주신 선을 넘어가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악한 영들에 대해서도 분명한 성경지식을 우리가 정립해야 합니다.

사탄을 두려워 할 이유가 없지만, 사탄을 인식하지 못하고 사는 것도 아주 위태하고 무모한 일입니다.

성경은 마귀에 대해 무관심하라고 하지 않고 마귀를 대적하라고 하십니다.

보이지 않는 마귀를 어떻게 대적하겠습니까?마귀의 룰을 잘 알아야 내게 일어나는 일을 분별하고 악한 영이 나를 공격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 순간에 말씀과 믿음에 근거해서 내 마음과 행동을 분명하게 하는 것이 마귀를 대적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처럼 드러내놓고 귀신이 우리 앞에 설칠 때는 거의 없습니다.

오늘 거라사 사람은 우리 주변에서 미세하게 일어나는 귀신의 활동을 확대경을 이용해 크게 확대해서 보여주는 역할을 합니다.

우리가 잘 알아야 할 것은 귀신들은 사람들 중에, 그리고 사람의 내면에 자리 잡고, 진지를 구축하고 사람을 이용해 목적을 이루며 산다는 것입니다.

귀신들끼리 사는 것은 그들에게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귀신들이 공중이나 떠돈다는 생각은 틀린 것입니다.

그들은 인간사 속에서 삽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가 영적 전쟁에 더 관심을 갖고 승리함으로 우리의 가진 좋은 것들을 지켜 마귀에게 뺏기지 않게 되길 원합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바다를 건너 거라사라는 마을에 들어가셨습니다.

거라사는 일찍이 헬라문명이 발달했던 곳이었고 유대인들보다 로마인들이 많이 살던 곳입니다.

본문에서 돼지를 치고 있었다는 것은 유대문화권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유대인들은 율법대로 돼지고기를 먹지 않고 치지도 않습니다.

예수님이 거라사에 들어갔더니 무덤에서 귀신들린 사람이 쫒아 나와 예수님을 가로막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의 형편이 처참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귀신에게 이름을 물으니 군대라고 대답합니다.

여기서 원문의 군대라는 단어는 로마시대 6천명의 군인으로 된 군조직을 말합니다.

한 사람에게 수천명의 귀신이 들릴 수 있다는 것은 성경에서만 얻을 수 있는 정보입니다.

예수님께서 집을 나갔던 귀신이 일곱귀신을 데리고 들어온다는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귀신은 사람 안에 들어올 뿐 아니라 여러 귀신들이 들어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수천의 귀신이 들어왔으니 어떻게 이 사람이 온전할 수가 있겠습니까?

본문에 보면 이 사람이 무덤과 산에서 늘 소리를 지르며 돌로 자기 몸을 해치고 있었다고 합니다.

너무 끔찍한 광경입니다.

가족들이 어떻게 좀 해보려고 쇠고랑과 쇠사슬로 묶어 보았지만 귀신들의 괴력으로 다 끊어버려 아무도 그를 제어할 수 없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예수님이 배에서 내려 거라사 도시로 들어가시려는 것을 멀리서 알아보고 스스로 달려 나와 굴복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이여 우리 일에 상관하지 말라고 큰 소리로 부르짖었다고 합니다.

여기에서 사람의 모습을 통해 드러나는 귀신들의 활동과 증세들을 일부 발견할 수 있습니다.

 

1. 귀신들린 사람이 무덤 사이에서 거처했습니다.

무덤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무덤을 주거지로 선택한 것은 이 사람이 아니라 그 안에 있는 귀신입니다.

귀신은 마치 망자의 땅의 주인처럼 행세하며 사람들을 두렵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귀신은 사람이 본질적으로 가장 두려워 하는 것이 죽음이라는 것을 이용해 지배하는 것입니다.

지금도 사람들에게 귀신이 저승사자인양 행세하고 있지만 마귀는 그럴 권한이 없습니다.

단지 사람을 이용해 점점 더 잔혹한 모습으로 죽음의 행각을 조장하는 것입니다.

마귀는 심판자가 아닙니다.

마귀에게 있는 미래는 단 한 가지 파멸뿐입니다.

마귀는 그것을 알고 있습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이 사건을 기록할 때 귀신들이 때가 되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러 오셨냐며 떨었다는 내용을 추가하고 있습니다.

귀신들에게는 소망이 없고 절망만 있습니다.

세상사람들이 내세를 몰라서 그나마 희망을 붙들고 사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소망이 없다면 그것보다 더 무서운 게 어디 있겠습니까?

신자들에겐 심지어 죽음조차도 절망이 아닙니다.

죽음이라는 문을 지나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영원한 천국의 유산을 상속받으러 들어가는 것이죠.

그런데 귀신이 우리를 미혹하고 시험하러 다가오면 이런 소망이 사라집니다.

왠지 모르게 귀신의 본질인 절망감이 스멀스멀 생겨납니다.

귀신에게 사로잡힐수록 이 거라사인처럼 점점 마귀의 속성을 드러냅니다.

피조물은 하나님의 영광이 투영될 때 가장 아름답습니다.

그래서 은혜를 받으면 얼굴도 성격도 왠지 아름다워졌다는 걸 느끼는 것입니다.

싸우고, 분노하고, 헐뜯을 때 거울을 보면 영락없는 마귀의 형상이지 않습니까?

근심과 걱정에 한껏 빠져 있을 때 우리 얼굴이 아름답지 않습니다.

우리의 모습이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를 받아 예수님의 형상을 드러내는지 귀신의 속성을 드러내고 있는지 항상 주의깊게 살펴야 합니다.

또 귀신들린 거라사인이 세상사람과 소통하지 못하는 무덤 벽속에 갇혀있다는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귀신이 우리 안에 깃들이면 마음에서 타인을 몰아냅니다.

타인에 대한 관대함과 관용이 점점 사라지고 배타적이고 옹졸한 마음으로 벽을 쌓고 있다면 악한 영의 사상들을 받아들이고 있는 것입니다.

좋고 싫음이 너무 분명한 것을 상당히 장점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은 분리하고 벽을 쌓는 귀신의 거처가 되기 쉽습니다.

자꾸 가족이나 다른 사람들의 꼴을 보기 싫어하고 마음의 문을 닫는 것을 주위해야 합니다.

내 기분이 그냥 좀 우울하고 그냥 저 사람이 싫은 것 뿐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거듭난 성도들은 자신이 그런 기분에 빠질 때 위기를 직감합니다.

분명히 마귀의 공격을 받고 있고 내가 그것을 받아들인다는 증거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믿음이 성숙할수록 사람들과의 벽이 없어지고 내가 속한 공동체를 세우려하고 소속감이 충만해집니다.

자신을 소외시키고 나만의 세상을 내가 좋아하는 대로 사는 방식은 성령의 인도가 아니라 귀신의 방식입니다.

잠언 181절에서도 말씀하죠.

무리에게서 스스로 나뉘는 자는 자기 소욕을 따르는 자라 온갖 참 지혜를 배척하느니라

성경은 모든 사람과 화평하라고 하십니다.

사람들에게서 배우고, 사람들과 어울리며 내게 주신 은사를 갖고 봉사하며 즐겁게 살 때 귀신은 우리 마음의 영토를 한뼘도 차지하지 못할 것입니다.

2. 귀신들린 사람은 괴력을 보입니다.

본문에서 군대 귀신이 들린 사람이 쇠고랑도 끊어 버렸다고 합니다.

우리가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귀신이라는 영적인 존재가 자연의 물질계에도 실제 물리적인 힘을 행사한다는 것입니다.

이상한 큰 힘, 비정상적인 기적 같은 것은 경계해야 합니다.

귀신의 괴력은 물리적인 힘만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을 공격해서 무섭게 제압하는 사나운 인격도 귀신의 영향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 보면 정말 사나워서 가까이 가기도 무섭습니다.

이것은 물리적인 괴력이 아니라 인격적인 괴력입니다.

남의 설득과 설명이 통하지 않고 자기 생각으로 상대를 억눌러야 논쟁이 끝나는 사람들은 요주의입니다.

야고보서에서 너희 마음 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그것이 세상적이고 정욕적이고 마귀적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완전한 자들이 아닙니다.

내가 항상 옳고 모든 판단의 기준이 되는 사람은 내 안에 가만히 들어와 몹쓸 집을 짓고 있는 마귀의 조종을 의심해야 합니다.내가 잘못하고 있을 수 있다는 것도 인정해야 하고 다른 사람의 실수도 용납할 수 있는 너그러움이 성령을 따르는 마음입니다.

 

3. 귀신들린 사람은 자기 몸을 해칩니다.

본문에서 이 사람이 돌로 자기 몸을 해치고 있었다고 합니다.

사람의 몸이 얼마나 약하디 약합니까?

순식간에 베이고 깨지고 찢기면 정말 이렇게 얇은 살갗을 뒤집어 쓰고 이렇게 살아가는 게 기적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계란 같이 약해서 박살날 것 같은 게 우리 몸 아닙니까?

이 몸을 돌로 짓찌고 있다고 생각하면 오싹해집니다.

분명히 이 귀신들린 사람은 여기저기 깨지고 피가 나고 상처가 곪아 터진 흉측한 몰골을 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귀신이 우리에게 하려고 하는 짓이 이런 것입니다.

우리가 스스로를 자해해서 불행하게 만드는 것을 보고 즐기고 좋아합니다.

마귀의 목적은 자기의 심판 전에 더 많은 사람을 불행에 빠뜨리고 그걸 보시는 하나님께도 고통을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행복해야 합니다.

부정적인 생각으로 나를 비참하게 하고 연민과 동정에 빠져 비련의 주인공이 되어 가는 것을 단호하게 대적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그렇게 처량하고 불쌍한 존재들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에게 덧입혀 주시는 것은 사랑과 희락과 화평입니다.

나를 불행하게 하는 생각들을 대적해야 합니다.

복음은 큰 기쁨의 소식입니다.

신자들의 트레이드 마크는 단연코 기뻐하는 모습입니다.

항상 기뻐하라. 그렇게 바울사도를 통해 하나님께서 명령하셨잖아요.

어떤 게 정말 나를 행복하게 하고 나를 위하는 것인지를 우리가 잘 분별해야 합니다.

나를 스스로 무너뜨리는 생각과 감정들을 받아들여 불행한 상태로 있는 것을 경계하고 항상 기쁨 안에서 믿음으로 자신을 세워가야 합니다.

잠언141절은 말씀합니다.

무릇 지혜로운 여인은 그 집을 세우되 미련한 여인은 자기 손으로 그것을 허느니라

 

4. 귀신들린 사람은 예수님과 상관치 않으려고 합니다.

본문에서 군대 귀신들은 예수님을 분명히 알아 보았습니다.

7절을 보면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라고 말하는 것을 봅니다.

귀신은 과거 천상에서 부터 분명히 예수님의 존재를 알아왔습니다.

그렇지만 나와 당신이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왠 간섭이냐, 네 일이나 신경써라라는 관용적인 표현입니다.

귀신의 이런 성질은 역시 하나님께 간섭받는 것을 싫어하는 우리의 본성을 더 부축여 우리 심령을 하나님께 대해 더 강팍하게 만듭니다.

점점 더 예수님이 나와 상관되는 것을 싫어하게 합니다.

마치 권태기를 맞은 부부처럼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 이런 것이 다 귀찮고 싫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몰라서가 아닙니다.

알만큼 아는 데 싫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 많이 알고 성경을 많이 안다고 된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내가 매일 상관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야고보서219절에서 뭐라고 말씀합니까?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하나님을 알고 믿고 떨었다고 귀신들이 구원을 받습니까?

귀신이 구원받지 못하는 이유가 오늘 여기서 분명히 밝혀지는 것입니다.

나와 당신이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예수님과 관계를 맺기를 거부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상관이 없는 인간은 마귀와 똑같이 심판 아래 놓여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와 정말 상관이 있으십니까?

매일 점점 더 예수님과 상관을 하고 하나님을 더 가까이 하는 우리 모두가 되길 원합니다.

 

지금까지 살펴 본 이런 성향들이 우리에게 있을 때 꼭 마귀가 우리 심정을 조종하고 있는 것이 아닐 수 도 있습니다.

우리의 죄의 본성이 그렇고 기질이 그렇고 믿음이 좀 약화되고 기분이 다운되서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상태라면 마귀가 우리 안에 자기 경향을 주입시킬 때 그 생각을 받아들이기 쉽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마귀의 생각을 받아들일 때 마귀는 사람의 심령 안에 자기의 거점을 확보합니다.

오늘 군대귀신 들린 사람도 시작은 그랬다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군대귀신이 덜컥 사람을 지배할 수 없습니다.

성령께서도 우리가 맨 정신으로 결정하고 받아들이길 원해야 우리 안에 오시듯이 마귀도 인간의 의지로 허용했기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마귀는 이렇게 기분을 사로잡아 사람들이 자기 의지로 그 생각들을 받아들이게 유도하는 것입니다.

악한 생각들을 믿음으로 대적하지 않으면 마귀가 우리 안에서 진을 치게 된다고 분명히 성경은 말씀합니다.

고린도후서 104절에서 말씀하는 것을 잘 들어보십시오.

우리의 싸우는 병기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이라

우리의 싸움이 마귀의 견고한 진에 맞서 싸우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마귀의 견고한 진이 어디 멀리 밖에 있겠습니까?

우리 심령에 있습니다.

마귀가 주는 생각을 내 생각이고 내 성격인 줄 알고 계속 받아들인 오래 묵은 심령은 쉽게 은혜의 상태로 들어가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항상 그 타령입니다.

마귀가 견고한 진을 치고 모든 하나님의 은혜와 좋은 것이 들어오는 길을 다 막아버리기 때문입니다.

마귀가 견고하게 진을 친 심령은 말씀을 들어도 다 막아냅니다.

말씀을 들어도 항상 귀에 들어오지 않고 깨달아지지 않는 상태라면 위태한 것입니다.

오늘 귀신들린 거라사인을 통해 확대해서 정확하게 드러내주신 귀신의 양상을 잘 기억하시고 우리 마음을 항상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성령께서 지배하시도록 기도와 말씀으로 최적의 상태를 유지하려고 애를 써야 합니다.

그리고 마음의 영토에 마귀를 받아들이지 않도록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합니다.

우리는 알든 모르든 매일 영적 전투에 가담해 있습니다.

승리하면 영과 육이 강하게 세워지고 실패하면 삶에 구멍이 나는 것입니다.우리 삶을 누가 보아도 안정되고 평안과 기쁨 안에 조화롭게 잘 유지해 나가는 것은 우리가 정신을 바짝 차리고 해야 할 일입니다.

 

다음은 예수님께서 귀신들린 거라시인에게서 귀신을 내 쫒고 구원시키시는 과정을 좀 살펴보겠습니다.

오늘 거라사인을 구하시는 과정에서 우리의 관심을 끄는 부분이 있죠.

귀신들이 그냥 나가지 않고 근처에서 방목하고 있는 돼지 떼에게로 들어가게 해달라고 간구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허락하십니다.

결과는 이천마리의 돼지 떼가 바다로 뛰어들어 익사했다는 것입니다.

돼지 2천마리를 돈으로 계산하면 한 마리를 20만원 정도로 봐도 무려 4억입니다.

어쩌자고 예수님은 이렇게 사건과 상관도 없는 사람들의 재산상에 엄청난 피해를 주신 것일까요?

또 기껏 들어가게 해 달라 사정해 놓고 돼지를 몰고 물 속으로 뛰어든 귀신들의 속셈은 또 무엇인지도 석연치가 않습니다.

의문이 가는 부분에는 대개 더 깊은 영적인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면 맞습니다.

여기에는 거라사인의 영혼을 놓고 예수님과 사탄의 진실이 극명하게 대조되어 드러나고 있는 것입니다.

귀신은 놀고 먹는 존재들이 아닙니다.

마귀는 타락하기 전 뛰어난 천사였습니다.

우리 인간들처럼 타락하며 많은 능력이 사라지고 흉측해 졌지만 여전히 세상을 쥐고 있을 만한 지략이 있습니다.

본문에서 마귀는 거라사로 들어오시는 예수님을 막기 위해 황급히 무덤에서 튀어 나와 예수님을 향해 돌진해 온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거라사 도시로의 입성을 막겠다는 뜻 아니겠습니까?

10절에 보니 자기를 그 지방에서 내보내지 마시기를 간구했다고 합니다.

이미 자기 영역으로 거라사를 접수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앞에서 흉한 몰골로 사로잡힌 거라사 인질 한명을 두고 협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한 영혼을 얼마나 아끼시는지를 알기 때문에 그런 수작을 부리는 것입니다.

그 속셈이 무엇이겠습니까?

돼지를 몰사시켜 거액의 손실을 입히면 거라사 주민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를 계산했다는 것입니다.

과연 거라사 주민들이 어떤 반응을 보입니까?

17절을 보니 그들이 예수께 그 지방에서 떠나시기를 간구했다고 합니다.

아무도 손대지 못하던 귀신들린 사람이 멀쩡해져서 옷을 입고 앉아있는 모습을 보고 분명히 그들은 두려워했다고 15절에 말씀합니다.

그런데 떼를 지어 몰려와서 한다는 게 성안으로 예수님이 들어오지도 못하게 막았다는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자기의 재산과 일상에 대한 불안감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유대인인 예수님께서 돼지떼가 싫어서 죽였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유대인과 엄연히 다른 우상문화로 가득찬 거라사 도시에 예수님이 들어오시면 무슨 상황이 벌어질지 두렵고 싫다는 것입니다.

이게 귀신들이 훤히 알고 있는 자기백성 거라사 주민들의 실체입니다.

귀신들린 사람을 고치신 하나님의 아들 앞에 자기의 영혼에 대해 듣는 것보다 현실적인 내 문제가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옆에서 죽었던 사람이 살아난다고 그걸 보고 하나님을 믿을 것 같습니까?

죽은 나사로가 나흘만에 살아나는 기적 중에 기적을 보고 유대 종교인들이한 일은 예수님과 나사로를 같이 죽이려고 한 것입니다.

내 안위를 위협하고 당장 내 물질이 손해가 되는 게 문제지 영혼엔 관심조차 두지 않는 것이죠.

마귀는 이런 인간의 약점을 아는 간악한 존재입니다.

인간은 지금 당장 잘되면 귀신들린 채로 그냥 살아도 좋다고 할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은 성 안에 발도 들여놓지 못하시고 다시 갈릴리 호수 이쪽으로 돌아오십니다.

우리가 거부하면 하나님도 어쩌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고향에서 말씀을 전하실 때 그들이 저 목수가 언제 저런 지혜를 가졌냐며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마가복음 65절에 보면 거기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어 다만 소수의 병인에게 안수하여 고치실 뿐이었고 그들이 믿지 않는 것을 이상히 여기셨다고 기록합니다.

그렇다면 마귀의 그 계략을 다 아시는 예수님께서 왜 귀신들의 요청을 들어 주신 것일까요?그것은 먼저 사람이 구원받는 것이 얼마의 가치가 있는지를 돈으로 계산해 주신 것입니다.

마가복음 836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예수님의 이 말씀이 보통 우리가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하다고 하는 말씀입니다.

재계의 황제이고 14조의 재산을 가졌지만 작년 5월에 쓰러져 아직도 의식이 돌아오지 않은 삼성 이회장님을 떠올려보면 이 말씀이 실감이 납니다.

예수님은 마침 귀신들려 비참한 한 영혼이 4억의 가치보다 귀하다는 것을 실물 교육으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돼지의 생명은 아무 것도 아닌게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돼지도 사랑하신다는 것은 구약성경에서 이미 말씀해 놓으셨습니다.

요나서에서 니느웨성이 회개하고 심판을 벗어나는 모습을 보고 화를 내고 있는 괴상한 선지자 요나에게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돼지를 아끼신다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가축을 아끼지 않은 게 아니고, 재산을 잃은 사람의 절망을 무시하는 게 아니라 그 모든 것보다 한 영혼이 구원받는 게 더 중요하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고 계신 것입니다.

물론 귀신들린 한 영혼을 위해 2천마리의 돼지떼를 버리신 것은 영혼의 가치를 정확히 계산하신 게 아닙니다.

영혼의 가치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자신의 목숨을 버리시며 그 가치를 정확히 계산해 주셨습니다.예수님이 자신을 못박으시고 구원해 내실만큼 영혼의 구원이 중요하고, 우리가 그럴 가치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삶에서 좋은 일이 가끔 생기고 기도하던 문제가 해결될 때, 그럴 때 아주 가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렇기에 삶이 곤고하고 힘든 시기를 지날 때 가장 힘든 게 무엇입니까?

과연 하나님이 계신가, 정말 사랑하시나 하는 생각이 자꾸 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시고 사랑하신다는 증거는 바로 이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사건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와 부활사건은 이 땅의 역사에서 실제 일어났던 분명한 사실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착각입니다.

의심이 오고 시험이 올 때 믿음의 실체가 드러납니다.

우리의 믿음은 이 땅에서 있었던 예수님의 역사성에 뿌리를 내려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은 하나님이 계시고 우리가 반드시 믿고 구원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명료하게 보여주는 역사적 사건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이번 갤럽에서 발표한 한국인의 종교실태에서 충격적인 결과가 많이 드러났습니다.

착하게만 살면 아무 종교든 구원받는다고 말한 사람이 70%에 가까웠습니다.

더 심각한 것은 기독교신자들 중 50%정도가 다른 종교를 믿어도 구원을 받는다고 대답했다는 것입니다.

그게 무슨 기독교인입니까?

기독교인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고 내 죄의 값을 대신 십자가에서 당하셨고 우리가 구원받을 유일한 길은 예수님 밖에 없다는 것을 믿는 사람 아닙니까?

한국교회의 번영이 다 허수인 것입니다.

신자도 아니고 교회도 아닌 것들이 반이나 섞여 있는 거대하고 기괴한 조직이라는 것이 드러난 것입니다.

혹시 아무거나 믿어도 구원받는다고 생각하시는 분은 없으리라 믿습니다.

우리 중에 오직 예수님이 우리의 유일한 소망이라는 것이 100% 믿어질 때까지 저는 질리도록 복음을 전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이 나를 위해 목숨을 버리고 나를 구원하셨다는 이 기쁜 복음의 소식이야말로 구원받은 신자들에게도 날마다 복된 소식이고 용기와 담대함을 주는 능력이 되는 줄 믿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돼지떼의 죽음을 허락한 것은 한 사람 안에 있던 수천명의 귀신의 존재를 가시적으로 분명하게 드러내 보여주시려 했던 것입니다.

말씀으로만 군대귀신이라는 막강한 영적 세력을 어떻게 이해시키겠습니까?

돼지를 떼죽음 시키는 귀신들의 행동을 통해 무사한 귀신들의 존재와 인간의 구원을 가로막는 사탄의 계략을 다 들추어 내시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돼지 2천마리보다 귀한 한 영혼을 보시는 예수님과 돼지 2천마리를 죽이면서 구원을 가로막는 사단의 대결을 보아야 합니다.

거라사주민들과 우리들에게 구원의 절박성과 귀신에 대한 경각심을 각인시키기 위해서는 4억도 약소합니다.

그래도 돼지 값이 아까우십니까?

그러실 것 없습니다.

예수님이 괜찮다고 생각하셔서 그랬다면 괜찮은 것입니다.

그래도 거라사 성읍 안에서 예수님이 하신 일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했을 사람들은 그나마 죽은 돼지의 주인들이었을 것입니다.

누가 알겠습니까?

그 일로 해서 파산한 그 사람들이 귀신의 사악한 존재를 깨닫고 예수님을 믿게 되었을지.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절대로 낭비는 없습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예수님께 은혜를 입은 귀신들린 거라사인이 영적인 우리의 모습이었다는 것을 인정하셨는지 모르겠습니다.

가망이 없이 버려진 거라사인을 찾아가신 것처럼 우리를 찾으러 오셔서 가장 존귀한 목숨을 주신 예수님은 한순간도 우리를 놓치 않으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스스로 우리의 마음상태를 항상 살펴야 합니다.

마귀의 일을 잘 분별하고 우리 마음을 내어주지 말고 대적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구원을 받은 거라사인이 예수님을 더 가까이서 따르기 원했던 것처럼 우리 영혼과 마음이 더욱 주님과 깊이 관계를 맺어가는 복된 모두가 되시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2014.2.8 주일설교 남수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