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youtube.com/watch?v=Ym21H_wU290&t=618s
2019년4월7일 주일설교 영상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을 묵상하는 사순절 기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지난 주는 강원도 산불로 모두의 마음이 타들어 갔던 것 같습니다.
기부금이 47억이 모였다고 하는 데, 산불로 삶의 터전을 잃어버린 분들께서 다시 일어서도록 더 많은 도움의 손길들이 함께 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십자가를 며칠 앞두고 일어난 한 사건을 진술하고 있습니다.
삼년간 예수님을 메시야로 알고 따랐던 제자들에겐 예수님이 곧 죽으실거란 사실이 혼란과 충격이었습니다.
십자가가 가까워 지자 여러 사람의 마음이 서서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예수님을 믿는다고 모인 사람들의 목적과 마음이 다 다르잖아요?
위기의 순간이 와야만 드러나는 게 있습니다.
위기가 오기 전까지는 자기가 마지막에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붙들지 자기도 잘 모릅니다.
예수님이 체포되셨을 때 제자들이 다 도망쳤잖아요?
제일 충격을 받았을 사람은 다름 아닌 바로 제자들 자신이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아주 유명한 향유를 부은 여인에 대한 말씀입니다.
제자들이 나름대로 믿었던 것은 십자가 앞에서 흔들리고 무너졌습니다.
그러나 늘 예수님께 주목했던 여인은 홀로 십자가의 길을 이해하고 힘을 다하여 주님께 헌신합니다.
십자가의 대속을 중심으로 예수님을 알고 믿어야 우리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기념하고 기억하라는 것은 언제나 하나님께 대한 것입니다.
사람을 기념하고 기억하게 하는 일은 별로 없죠.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여인의 일이 복음과 함께 전해져서 여인을 기억하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복음을 듣고 믿는 성도들에게 이 여인과 같은 무언가를 기대하신다는 뜻이겠죠.
그것을 오늘 말씀 속에서 잘 발견하고 행한다면 우리도 하나님께 영원히 기억되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될 수 있을 것입니다.
1. 오늘 사건의 전모를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이렇게 자세히 성경을 보면 예수님의 십자가 당시의 분위기를 느껴볼 수 있습니다.
1절과 2절을 보면 이때는 유대인의 큰 명절인 유월절과 무교절을 앞두고 있었습니다.
유월절은 조상들이 애굽에서 해방 된 날을 기념하는 절기죠.
해방 되던 그 밤에 조상들은 양을 잡아 그 피를 문에 발랐습니다.
죽음의 사자가 양의 피를 바른 이스라엘의 집을 건너 뛰고 애굽을 심판하셨던 그 날을 유월절로 기념하게 된 것입니다.
유월절부터 일주일 동안은 누룩이 들어가지 않은 딱딱한 빵을 먹는 무교절이란 절기를 지켰습니다.
전에 성찬식에 쓰려고 이 무교병을 주문해 봤는데 너무 딱딱하고 맛이 없어서 다 버렸던 적이 있습니다.
무교절은 여러 의미가 있지만 구원의 유월절을 지난 뒤엔 누룩이 상징하는 죄를 멀리하라는 것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유월절 절기에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습니다.
구약성경의 모든 기록과 상징들은 예수님을 가리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유월절 양의 의미는 죽음으로써 우리를 죄의 심판으로부터 지켜주실 예수님의 죽으심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본문 1절을 보면 당시 예루살렘에서는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이 모여 예수님을 죽일 모의를 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성전을 중심으로 누려오던 자기들의 권력에 위협을 느낀 것이죠.
그러나 유월절에는 로마로부터 해방되길 바라는 열망이 고조되는 때입니다.
지금 백성들이 메시야로 믿는 예수님을 잡아들이는 것은 큰 폭동의 우려가 있는 것이죠.
그래서 이들은 유월절만은 피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유월절양이 희생되던 그 날, 하나님의 유월절 양이 돼서 죽으셔야 했기에 그들의 계획은 예상 밖으로 흘러갑니다.
본문 마지막에 가룟유다가 이들을 찾아가 돈을 받고 사람들이 없을 때 예수님을 넘겨주기로 한 것입니다.
대제사장들도 원치 않았던 유월절에 결국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게 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이 확고한 일에는 사람이 어떻게 관여하고 환경이 어떻게 변해도 그 뜻대로 이뤄집니다.
우리를 위한 크고 중요한 계획들도 하나님의 뜻대로 이뤄짐을 믿고 늘 평안히 주님을 따르시길 축복드립니다.
예루살렘에 오신 예수님은 어린 나귀를 타고 입성하신 뒤 밤에는 성 밖 베다니라는 동네에 머무셨습니다.
오늘은 이 베다니에 사는 나병환자였던 시몬의 집에서 예수님 일행을 초대한 식사자리가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요한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무덤에서 살리셨던 나사로와 마르다와 마리아가 이 잔치를 주관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식사의 분위기는 그렇게 밝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미 세 차례나 이 유월절에 잡히셔서 십자가형을 받으실 것을 예고하셨거든요.
앞에 보면 제자들이 놀라고 두려워서 이 일을 언급하는 것조차 회피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계속 자기가 원하는 데 집착하고 예수님의 말씀과 일어날 현실을 직시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때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식사자리에서 일어난 것입니다.
한 여자가 고가의 나드향유가 든 옥합을 가져와 예수님 머리에 부은 것입니다.
마가복음에서는 여인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지만 요한복음에서는 이 여인이 나사로의 누이인 마리아라고 밝힙니다.
나드 향유는 당시 가장 비싼 향유였던 것 같습니다.
값이 삼백데나리온이라고 하잖아요?
삼백데나리온은 한 삼천만원 가량 됩니다.
현대에 가장 비싼 향수가 뭔지 궁금해서 좀 찾아 봤더니 클라이브 크리스찬이란 향수가 2억여원으로 기네스북에 올라 있다고 하더군요.
아가서에 솔로몬왕과 술람미여인의 사랑에서도 이 나도향유가 나옵니다.
마리아는 모두가 밥을 먹고 있는 방에 갑자기 들어와 이 비싼 나드향유 한 병을 예수님께 남김없이 쏟아 부은 것입니다.
이 광경에 제자들은 그야말로 멘붕이 온 것입니다.
이들이 그 광경을 보고 화를 내며 계속 마리아를 꾸짖었다고 합니다.
4절, 어찌하여 이 향유를 허비 하는가
5절,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하며 그 여자를 책망하는지라
이때 분위기가 참 싸했을 것 같습니다.
제자들이 지금 예수님께 드린 선물이 너무 과하다고 화를 내는 거잖아요?
마리아가 예수님께 낭비를 했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의 오만 불손한 행동에 예수님은 마음이 상하지 않으셨을까요?
마치 철없는 자식들이 부모를 무시할 때 묵묵히 듣고 있는 그런 마음이셨을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제자들의 이 말에 반발하며 주님을 위한 ‘거룩한 낭비’라는 말을 합니다.
깊은 사랑과 신뢰의 관계는 실리만으로 이뤄지지 않습니다.
왜 여전히 청혼하려는 청년들이 돈도 없으면서 그렇게 다이아몬드 반지를 사려고 하겠습니까?
계산적이고 실리만 있는 관계는 내 인생에 큰 의미가 없는 관계가 분명합니다.
하나님이 실리를 계산했다면 우리에겐 아무 소망이 없는 것입니다.
이 소동이 벌어진 가운데 예수님께서 마리아의 편을 드십니다.
오히려 마리아의 이 행동을 복음과 함께 전해서 그를 기억하게 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2. 마리아와 다른 제자들의 행동이 이렇게 달랐던 이유가 무엇일까요?
1) 먼저 제자들의 반응에서 그들에게 무엇이 문제였는지를 알수 있습니다.
삼년 반 동안 예수님을 따른 제자들은 예수님을 잘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십자가의 대속과 구원의 이치가 지금은 어둠 속의 별처럼 아주 명료하게 드러나 있지만 그때는 그게 아니었습니다.
제자들이 인식하는 예수님은 알다가도 모를 존재였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이 인간의 이해의 범위를 넘는 기적을 행할 때마다 이들이 놀라서 이구동성으로 한 말이 무엇입니까?
‘저가 뉘시기에’입니다.
하나님의 성육신인 예수님의 존재를 도저히 이해하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겉으로 보기에 전혀 다를 게 없는 완전한 사람이셨잖아요?
예수님에 대한 몰이해는 육체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겐 당연한 것입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기에 영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성령님을 통해 예수님의 존재와 사역을 인지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겐 예수님은 모호하고 먼 존재일 뿐입니다.
십자가와 부활이란 말을 모르는 사람은 없지만 알려고 하지도 않잖아요?
육적인 사람들의 관심은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이고, 세상의 이치외에는 알 수가 없고, 영적인 일을 믿지도 못합니다.
지금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있지만 주님 자체도 세상적 차원으로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대망하는 하나님 나라는 지금 살고 있는 사회를 그대로 예수님이 접수하시는 것 그 이상이 아닙니다.
정권만 바뀌는 것이죠.
그러니까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 이런 것은 알고 싶지도 않고 이해가 안되는 것입니다.
당장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보다 더 이들에게 현실적인 것은 이 친숙한 세상입니다.
마리아가 예수님 몸 전체에 향유를 붓는 순간 예수님이 말씀했던 십자가의 죽으심과 장례절차가 생각날 만도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들에겐 그보다도 저 향유를 내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을 심방하겠다는 것이 더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것이죠.
하나님을 온전히 몰라도 얼마든지 구제와 봉사를 할 수 있다는 것을 제자들의 모습에서 발견합니다.
기독교의 테두리 안에서 하는 좋은 일 조차도 지금 제자들처럼 세상적 차원에서 할 수 있다는 것이죠.
심지어 진짜 믿음이 동기가 되어 선행을 한다 해도 백퍼센트 순수하지 않잖아요?
아무리 성령의 감동으로 시작해도 죄에 오염된 우리의 육신을 거쳐서 나오는 사이 이미 오염이 묻어서 나오는 것입니다.
본능적으로 거기엔 내 유익이 들어가 있습니다.
내게 돌아올 영향이 계산되고 있다는 것이죠.
그렇기에 우리가 어떤 봉사나 헌신을 했다고 그걸 순수하게 생각하는 건 순진무구한 생각입니다.
제자들이 삼년 반 예수님을 따르며 섬긴 것이 하나님나라를 받을 자격이 되는 게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나라는 하나님의 아들이 목숨을 버려 뿌리 자체가 죄로 오염 된 우리 대신 심판을 받음으로 속죄해 주셔야만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 제자들은 이 사실을 성령님을 통해 인지하지 못했던 것이죠.
단지 예수님을 따르고 헌신한 게 있으니 당연히 지분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벌써 경영에 참견하려고 하잖아요?
믿음을 놓고 하나님과 거래하면 안됩니다.
봉사나 헌신을 놓고 늘 거래하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거래도 비슷한 조건에서 의미가 있는 거지 하나님과 거래하면 우리가 손해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작은 수고와 헌신을 얼마나 크게 쳐 주시는데요?
우리가 그렇게 계산하지 않아도 하나님은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우리에게 안겨주신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잖아요?
마리아의 헌신은 제자들처럼 거래가 아니었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속죄의 죽음을 알고 주님의 장례를 준비한 것입니다.
향유를 부은 것은 단순한 감사의 의미가 아니라는 것이죠.
누가 향유를 그렇게 사용합니까?
그것은 장례에서 사용하는 방식입니다.
마리아의 성격상 퍼포먼스처럼 그렇게 향유를 부을 사람이 아닙니다.
마리아는 그들 중 유일하게 예수님의 십자가를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지금 어떻게 예수님을 섬겨야 할지를 알았던 것이죠.
지금은 죽으실 예수님 몸에 향유를 바를 때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죽으심은 자기의 모든 힘을 다해 마련한 삼백데나리온의 향유로 갚을 수 없는 사랑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대속으로 우리가 소유한 천국은 모든 게 다 완벽하게 준비 된 곳이잖아요?
단지 우리가 그 천국에서 영원히 살 것만이 행복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나 같은 사람을 위해 목숨을 주고 구원해 주신 그 사랑이 영원히 변하지 않고 나를 사랑하실 것이기에 우리가 영화를 누리는 것입니다.
그 사실을 깨닫고 믿어질 때 마리아처럼 힘을 다한 헌신도 아깝지가 않은 것입니다.
2) 마리아는 어떻게 제자들과 다를 수가 있었을까요?
예수님은 마리아에게서 무엇을 배우고 기억하라고 하시는 것일까요?
거액의 헌신을 말씀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제자들도 이미 자신의 생업을 다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잖아요?
자신을 불사르게 내어줄지라도 소용없는 헌신도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발견할 수 있는 마리아의 믿음에 대한 단서는 마리아가 특이할 정도로 예수님의 말씀에 빠져 들었다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항시 예수님이 오셨을 때 그 말씀을 듣기 위해 발 앞에 앉았던 여인이라는 걸 아실 것입니다.
누가복음에서도 예수님 앞에 가까이 앉아 말씀에 깊이 빠져 있던 마리아를 특이하게 보고 기록합니다.
우리나라는 큰 교회들이 많고 예배도 공연 같이 기획합니다.
많이 모인 이상 무언가 보여줘야 하잖아요?
분위기가 믿음이 아닙니다.
작은 교회라 해서 하나님이 안 계신 게 아닙니다.
어떤 환경에서건 예수님께 바짝 다가앉아 그 입의 말씀에 주의하지 않으면 예배의 가장 중요한 복을 놓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진심을 다해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은 우리를 말씀으로 만나주시고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데, 그 마음과 뜻을 알아야 할 것 아니예요?
그래야 마리아처럼 움직여야 할 때가 언젠지, 무엇을 해야 할지를 아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보좌하며 말씀을 가르치시는 현장에 가장 많이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주최 측이란 게 그렇잖아요?
수많은 사람들이 운집한 현장을 관리하고 살피고 그런 일을 더 많이 하지 않았겠습니까?
하나님의 사역엔 이렇게 일선에서 뛰어야 하는 사역자들, 마르다 같은 봉사자들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마르다보다 마리아가 좋은 편을 택했다고 하신 것은 그렇다 할지라도 말씀을 듣고 받는 복을 놓치지는 말라는 뜻입니다.
은혜를 공급받지 못하면 봉사도 헌신도 어느 순간 탈진됩니다.
어차피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과 주님이 누구신지를 아는 데는 성령님의 관여가 필수입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을 바르게 인식할 수 있었던 것은 성령님의 역사 없이는 불가능했습니다.
다윗이 그 많은 메시야에 대한 시를 쓸 수 있었던 것은 성령께서 감동하셨기 때문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잖아요?
그러나 마리아가 예수님을 바르게 인지할 수 있었던 것은 단연코 예수님 발 아래서 듣던 그 복음의 말씀이 기초가 된 것입니다.
물론 후일에 제자들은 성령님의 오심을 통해 비로서 예수님을 바로 알게 됩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믿음에 실패했던 제자들은 그렇게 어수룩한 사람들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오해는 있었지만 강직하게 하나님 나라를 기다린 사람들이었고, 나다나엘처럼 간사하지 않은 순전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람의 타고난 본성과 단련된 인격과 종교심만으로는 절대로 예수님의 구원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이천년 전 예수님의 십자가의 의미와 나를 연결시켜 주시는 분은 오직 성령님이십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연결되어 있지 않으면 위기에 순간 예수님을 끝까지 붙잡지 못합니다.
죽음 같은 시험을 만날 때 그 강인했던 베드로도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하잖아요?
나중에 성령님이 오신 뒤 베드로는 죽음을 이기고 예수님의 뒤를 따르게 되잖아요?
그 다름을 만들어 내는 것은 성령님의 역할이십니다.
우리는 항상 말씀과 성령님을 구해야 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마리아의 헌신과 믿음과 사랑을 기록하고 기억하라고 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복음이 전해지는 곳에는 마리아처럼 성령의 감동을 받는 성도들이 있을거라는 뜻입니다.
성령께서 붙들어 주시기에 마리아와 같이 온 마음을 다해 기쁨으로 헌신하는 성도들이 예수님을 섬기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을 이해하지 못할 때 성령께서 한 사람, 주님의 말씀에 집중했던 마리아를 감동하셔서 헌신하게 하셨습니다.
주님의 대속으로 마리아 같은 많은 성도들이 구원을 받고 하나님께 헌신할 것을 보여주시며 성령께서 주님을 위로하시는 것입니다.
마리아가 드린 귀한 나드향유의 냄새는 십자가에서 피흘리시는 예수님을 감쌌을 것입니다.
마리아의 이 헌신이 예수님께 유일한 위로가 되었을 것입니다.
우리 중 누가 신앙으로 인해 목숨이 위협당하는 시련이 올 때 내가 끝까지 믿음을 지키겠노라고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제자들도 실패했는데요.
그러나 성령께서 그렇게 우리를 도와주셔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구원을 확신하게 하시고 끝까지 주님을 따르도록 축복해 주실 것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예수님이 명하신 말씀대로 주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복음이 우리에게 전해졌고 마리아의 사랑도 전해졌습니다.
예수님이 자신의 모든 것을 주신 복음과 마리아가 힘을 다하여 예수님을 사랑하고 헌신한 것은 아름답게 짝을 이룹니다.
신랑과 신부의 사랑 같은 것이죠.
우리도 마리아 같은 성도들이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그러기 위해 항상, 또 이 사순절에 예수님의 사랑과 고난의 의미를 알기 위해 성경을 펴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구하는 자마다 성령께서 기쁘게 역사해 주실 것입니다.
비둘기 같이 순진한 믿음만 가지고는 우리가 만나는 모든 위기를 이길 힘이 부족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뱀처럼 지혜로와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면 아무리 십자가의 때처럼 어둠이 닥치고 주변에서 무엇이라 떠들지라도 오직 시선을 예수님께 고정하고 믿음으로 승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 뒤에는 반드시 부활이 있습니다.
사순절에 주님의 십자가를 깊이 깨닫고 더 기쁘게 확신에 찬 부활을 맞이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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