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본문 말씀은 예수님의 설교는 아니지만 에피소드 자체로 주시는 교훈과 메시지가 아주 큽니다.
본문 말씀에서 인생의 바다에서 풍랑을 만나 위태하게 흔들리고 있는 배 한척을 떠올리게 되죠.
흔히 성도들의 인생여정을 광야와 항해에 비유합니다.
또 이 항해는 주님의 교회가 함께 헤쳐 나가는 모습이기도 합니다.
가장 중요한 점은 그 배에는 예수님께서 함께 타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한 배를 탄 이 모습이 이미 교회입니다.
지난 2년간 코로나 팬데믹의 위태로운 바다를 넘어왔습니다.
전 세계가 겪어야 했던 이 팬데믹의 풍랑이 잦아든다 해도 올해 우리 각자 인생 항해 중에 어떤 풍파를 만나게 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오늘 말씀에서 우리의 인생 항해를 잘 이해하고 올해도 우리 가정과 교회가 파도를 잘 넘을 수 있게 되길 바랍니다.
1. 성도들의 삶의 풍랑은 우연히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35절을 보면 이 사건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알려줍니다.
그 날 저물 때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니
여기서 ‘그 날’은 지난주 설교하신 날과 같습니다.
예수님이 먼 동네에서 몰려 든 사람들에게 네 가지 밭의 비유를 설교하셨던 바로 그 날입니다.
종일 격무를 감당하셨던 예수님께서 저물어 가는 무렵에 제자들에게 갈릴리 바다를 건너 반대편으로 가자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데리고 이 호수를 건너가자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 날 항해에는 주님의 목적이 있기 때문에 그러셨겠죠.
마가복음의 이 부분이 시간대 별로 기록되었다면 건너편은 거라사인들이 사는 이방지역이고 거기엔 군대귀신 들린 거라사인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만나실 목적으로 피곤한 일과 끝에 갈릴리 호수를 건너가고 계신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제자들도 배워야 할 것이 있었던 것이죠.
그러니까 오늘 우리에게 주시려는 메시지는 아주 분명하게 정리가 됩니다.
예수님을 모신 성도들의 항해에도 풍랑을 만난다는 것이고, 심지어 주님께서 그 풍랑 속으로 우리를 데려가신다는 것이고, 그 풍랑과 그 항해에는 중요한 목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삶이 평안하고 잔잔하길 원합니다.
그러나 삶에는 늘 풍랑이 일렁이죠.
우리를 두렵게 하고 성가시게 하는 크고 작은 풍랑이 다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목적을 이루실 것이기에 높아지는 파도를 보며 두려워하거나 무서워만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먼저 결론을 이해하고 우리 마음 밭에 오늘 말씀을 잘 심어 결실해야겠습니다.
갈릴리호수는 굉장히 큰 호수입니다.
호수의 짧은 폭이 8킬로이고 긴 쪽은 20킬로 정도 됩니다.
한강 폭이 1킬로 정도인 것을 감안하면 성경에서 사람들이 갈릴리 바다라고 하는 게 이해되죠.
저도 갈릴리 호수에서 배를 타 봤는데 건너편이 꽤 아스라이 보입니다.
제자들이 이 갈릴리 바다를 건너가는 중 배가 전복될 것 같은 큰 풍랑을 만난 것입니다.
제가 건널 때는 갈릴리호수가 더할 나위 없이 잔잔했습니다.
그런데 갈릴리 호수는 지형적인 요인으로 한 번씩 풍랑이 몰아치면 바다 못지않게 위협적이라고 합니다.
전에 갈릴리 호수에 불어 닥치는 풍랑을 찍은 영상을 보았는데 키를 훌쩍 넘는 해일이 생길 정도로 무시무시하더군요.
그러나 제자들 중 다수가 이 갈릴리에서 어업에 종사했던 사람들이잖아요?
밤샘 조업도 종종했던 익숙한 일터였기에 큰 걱정 없이 배를 띄웠을 것입니다.
문제는 걱정했던 곳에서만 터지지 않죠.
일상이었던 일터, 가정, 잘 짜여 진 계획에서도 언제든 터질 수가 있습니다.
지난주 광주의 신축아파트 외벽 붕괴사고가 나 안타깝게도 인명피해가 많았습니다.
이 년 넘게 일했던 일터가 그 날 무너져 내릴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며칠 전 기사를 보니 우리나라에서 제일 소득이 높다던 울산이 고용위기 지역으로 지정되었다고 합니다.
거제, 창원 쪽 경제는 완전히 반 토막이 났다고 하더군요.
두 명 중 한명이 실직자라고 합니다.
그 곳은 개도 돈을 물고 다닌다 할 정도로 잘 사는 동네였습니다.
이번 대선에 출마 예정이었던 조용기목사님의 처남이고 강남금식기도원장인 김성광목사님이 지난 주 별세했다는 뉴스를 보았습니다.
이런 게 우리 인간의 한계인 것입니다.
영원한 것도 없고, 사람의 앞일을 과연 누가 장담할 수 있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는 최고의 지혜자 솔로몬의 말을 들어야 합니다.
전도서 7장14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 하나님이 이 두 가지를 병행하게 하사 사람으로 그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
인생의 끝까지 형통한 날과 곤고한 날을 번갈아 주시며 사람이 겸손히 하나님을 따르게 하시는 것이죠.
1) 그러나 성도들에게 이것은 우연이나 복불복이 아니라 섭리 안에서 일어납니다.
제자들은 그날 예수님이 건너가자 하신 그 익숙한 갈릴리 바다에서 죽음이 입을 벌리고 포효하는 것을 보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37절에 보면 물결이 배에 부딪쳐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배에 물이 들어오면 퍼내면 되지만 퍼내는 속도보다 물이 더 차오르면 배가 가라앉는 것이죠.
그런데 예수님은 이 난리통에 배 안에서 잠들어 계셨습니다.
38절,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더니
오늘 말씀은 단순히 예수님의 사역 중에 있었던 한 일화를 다루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요동치는 풍랑 속에서 제자들이 탄 작은 배가 솟구쳤다 가라 앉기를 반복합니다.
갈릴리 바다에서 잔뼈가 굵은 어부출신 제자들이 사투를 벌이는데 예수님은 배 뒤쪽에 있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곤히 잠들어 계신 그림을 떠올려보시기 바랍니다.
이 그림이 바로 성도들과 교회가 고난을 당할 때 떠올려야 하는 그림입니다.
우리는 이런 세상의 파고를 오르내리며 하나님의 구원의 목적지를 향해 항해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평안히 잠든 예수님의 모습에서 아, 이 모든 것이 하늘이 무너질 일이 아니구나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위급한 일이라면 예수님께서 일어나 조치를 취하셨겠죠.
마가가 이 복음서를 기록할 당시 교회는 마치 이 그림을 방불케 하는 사탄의 총공세에 고난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마가가 전해 준 옛날 예수님께서 풍랑 속에 잠들어 계신 모습을 볼 때 성령께서 성도들 마음에 같은 평안을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타신 배이고 주님이 평안히 주무시니 걱정할 필요가 없는 것이죠.
오늘 우리 마음에도 그런 평안을 주시길 축복드립니다.
교회와 성도들의 시련은 우연도 아니고 운이 나빠서 걸려든 것도 아닙니다.
이 풍랑 속 항해는 예수님이 주도하시고 예수님이 배에 함께 타고 계시다는 것이 우리 인생 항해에서 늘 기억해야 하는 것이죠.
주님이 배 안에 편안히 잠들어 계신 것은 단지 고단하셔서 깊은 잠에 빠지신게 아닙니다.
그렇다고 일부러 주무시는 척 하시는 것도 아닙니다.
주님의 구원 사역을 완수하기 까지 하나님아버지의 보호 안에 있기에 예수님은 그 안에서 편히 잠드실 수 있었고 그 기이한 평안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내일 일을 모르고 이 문제가 어떻게 될지 결과를 몰라서 불안하고 두려운 것이잖아요?
하나님이 계획하셨다면 결과도 이미 정해진 것이니 예수님은 편안히 주무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 배의 선장이 주님이시면 목적지가 정해져 있으니 우리도 안심할 수 있는 것이죠.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는 고난으로 인해 몰락하지 않습니다.
만일 그랬다면 성경이 왜 고난이 유익이라고 가르치시겠어요?
고난을 피하라고 하셨겠죠.
예수님이 함께 타신 우리 인생의 배, 가정의 배, 교회라는 배는 하나님의 뜻대로 항해해 갑니다.
어떤 풍랑이 목적지를 바꿀 수도 없고 우리의 운명을 바꿀 수도 없습니다.
큰 시련 중에 깨지는 사업과 인간관계와 가정들도 있지만 성도들의 경우에서는 그렇게 되는 것조차 어쩔 수 없는 시련 때문이 아닙니다.
그렇게 되게 하신 하나님의 더 큰 계획이 있는 것이죠.
우리가 힘든 일을 만날 때 이 사실을 기억하는 게 좋습니다.
모든 시련은 하나님의 감독아래 준비된 일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대부분의 고난들이 내 잘못 된 선택과 대응에서 나온 것이지만 하나님이 허용하셨기에 일어난 것입니다.
일어나지 않았으면 더 좋았었을 것 같은 일들은 더더욱 필연적으로 일어나야 했던 일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허용하지 않으셨다면 그런 큰 일이 절대 안 일어났겠죠.
참새 한 마리가 새총에 잡혀 시장에서 팔리는 것도 하나님이 관할하고 계시다고 하셨잖아요?
내 모든 일이 어찌 보면 연출가이신 하나님에 의해 펼쳐지고 있는 것이죠.
하나님만이 다음 장면을 아시고, 해피엔딩을 만들 과정으로 인도해 가십니다.
그래서 과거 우리의 풍랑으로 고통당했던 때를 돌아보면 성도들은 누구나 고난이 내게 유익이었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지금도 어떤 분은 세찬 물결에 옷이 흠뻑 젖어가며 삶의 사투를 벌이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예수님과 한 배를 타고 일어남을 믿고 복된 결말을 기대하시길 축복드립니다.
2) 이 풍랑의 장면은 가정이나 교회나 공동체가 함께 시련을 감당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제자들은 주님을 따라 다니며 서로 서열 다툼을 좀 했죠.
그러나 배가 당장 가라앉고 광풍에 뒤집어 질 위기에 있을 때 제자들은 ‘아, 우리가 한 배를 타고 있구나’ 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함께 물을 퍼내고 함께 돛대를 움켜잡고 버티며 함께 타고 있는 배를 지켜내게 합니다.
편안하게 탑승했던 손님에서 진정한 동승자가 되는 것이죠.
가정에 힘든 일이 있고, 교회가 시련을 당할 때 함께 물을 퍼내는 공동체가 되길 하나님은 지켜보십니다.
2. 광풍과 풍랑을 주시는 목적은 제자들의 참 모습이 드러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똑같은 제자들의 모습이 복음서와 사도행전이 완전히 다릅니다.
성령받기 전 복음서 제자들의 모습이야말로 친숙한 우리들 모습 같습니다.
그 말은 사도행전 이후 성령 받은 우리가 성령충만하게 살지 못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제자들이 더 이상 버티지 못할 것 같은 마지막 순간이 되어서야 예수님을 깨웁니다.
38절, 선생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니
1) 풍랑은 그동안 인생을 항해하는 배의 주인이 누구였는지를 보여줍니다.
갈릴리 호수의 그 지독한 풍랑을 만나자 베테랑 어부들은 당연히 노를 저어 호수를 건널 생각이었습니다.
삶이 평안하고 내 손 안에서 관리 될 때 사람들은 아주 쉽게 예수님이 지금 내 항해에 함께 하신다는 것을 잊어버립니다.
심지어 예수님이 내 배의 선장인데도 말이죠.
당할 만큼 당하고 힘이 다 빠지도록 버티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깨웠습니다.
우리도 지독히도 고집스럽게 내 힘으로 해나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으십니까?
죽어도 내 인생을 내가 책임지려고 하는 것이지만 오늘 말씀이 그렇지 않다는 걸 보여주시는 것이죠.
예수님이 이 사건을 통해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것 봐라, 자신만만한 일이라고 너의 힘으로 되는 게 아니다.’
‘일상이 비상상황이 되지 않고 일상이 될 수 있는 것이 네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내가 하는 것은 똑같다 해도 환경이라는 변수는 항상 광풍과 파도를 몰고 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모든 일에 주님의 인도하심을 구하고 지혜주시길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가 우리 눈에는 매일 반복되는 출근길이고 뻔한 하루 일과표 같지만 그 길 안에도 보이지 않는 투명 미로가 얽혀있습니다.
어느 날은 하루 종일 이 투명한 미로를 헤매며 ‘오늘 왜 이러지? 왜 하는 일마다 이래?’ 이런 말을 중얼거리게 되는 것입니다.
욕심의 미로에 빠지고, 감정의 미로에 걸리고, 조급함의 미로에 빠져 똑같은 하루인데도 참 힘겹게 지나는 것이죠.
오늘 말씀에서 당연한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것 아니겠습니까?
매일의 안전한 항해를 위해서, 또 인생에 거센 폭풍우가 일어날 때 예수님을 깨워야 하는 것이죠.
물론 제자들이 예수님을 깨웠다고 하지만, 사실은 예수님이 제자들을 깨우신 것입니다.
거센 풍랑은 우리가 잠들어 계신 예수님을 깨우는 게 아니라 예수님이 우리를 깨우시는 것입니다.
광풍과 풍랑의 공포에 질려 예수님을 찾는 순간은 바로 내가 노젓고, 내가 방향키를 잡았던 육신의 삶을 돌이키라고 주님께서 우리를 깨우시는 것입니다.
아직도 내 인생의 운전대를 내가 움켜잡고 있지 않은지 생각하고 주님께 넘겨드리시길 축원드립니다.
풍랑은 깊은 것을 뒤집어 밖으로 드러나게 합니다.
두려운 마음, 죽을 것 같은 공포심, 망할 것 같은 걱정들이 엄습합니다.
한마디로 내게 믿음이 없었다는 게 드러나는 것이죠.
예수님이 죽은 사람을 살리시는 기적도 보았지만 내가 죽게 됐을 때 그런 믿음이 있냐하고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제자들은 그런 주님을 옆에 두고 죽음의 공포에 떨었습니다.
고난은 나에 대해 몰랐던 많은 것을 보게 해 줍니다.
내가 얼마나 남의 눈을 의식하던 사람인지, 내 안전만 생각했고, 허영과 허세로 꽉 찬, 믿음보다는 습관대로 살았던 것들이 여실히 드러나죠.
드러나지 않는 것은 예수님도 고치실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너희가 아픈 사람이란 걸 알고 내게 오라고 하신 것이죠.
풍랑이 우리에게 고마운 것은 내가 많이 아픈 사람이라는 걸 볼 수 있게 해 주는 것입니다.
고난은 저절로 나 자신을 돌아보고 성찰하게 합니다.
고난 당하면서도 멈추지 않고 직진만 한다면 이성 없는 짐승과 다름없죠.
인생의 풍파 없이 스스로 자신을 담금질하고 정금처럼 믿음과 인격을 정제해 갈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욥에게도 그런 시련이 필요했던 것이죠.
내게 남을 이해하고 배려하는 마음, 관대함과 믿음의 담대함이 조금이라도 성장했다면 십중팔구 한 풍파 당했다는 뜻일 것입니다.
믿음의 실력자는 예수님 안에서 고난을 많이 당한 사람이라고 보면 됩니다.
그것은 모든 것을 하나님께 의존하는 실력입니다.
사람은 본성적으로 독립적이고 주도적이라 남의 말을 잘 안 듣습니다.
제자들이 이 당시 예수님을 제대로 알았다면 자기들이 풍랑에 맞서겠다고 나섰겠습니까?
바람과 바다를 만드신 예수님께 맡겼겠죠.
내 힘으로 안되는 게 풍랑이고 고난인데 그걸 깨달아 전능자께 의존하는 게 신앙이고 실력입니다.
강풍과 풍랑이 이렇게 우리를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3. 광풍과 풍랑이 목적을 이루면 예수님은 광풍을 잔잔하게 하십니다.
잠에서 깨어나신 예수님은 즉시 이 상황을 정리해 주십니다.
39절,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 지더라
예수님께서 일어나셔서 무섭게 휘몰아치는 광풍과 바다를 향해 잠잠하라, 고요하라 말씀하시자 큰 고요함이 형성되었다는 것입니다.
마치 맹수가 조련사 앞에 얌전히 엎드리듯 그렇게 광적으로 달려들던 바다가 한순간 평정 되었습니다.
이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바람을 꾸짖으셨다고 합니다.
여기서 꾸짖는다는 단어는 마가복음에서 예수님이 귀신들을 내좇으실 때 썼던 단어입니다.
이것은 광풍이라는 자연현상 그 배후에 있는 악의 세력을 의도적으로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욥기를 보면 사탄이 광풍을 일으켜 집의 기둥을 무너뜨려 욥의 자녀들 10명이 한 자리에서 다 죽게 되잖아요?
예수님께서 이렇게 바람을 꾸짖으신 것은 우리가 만나는 골치 아픈 문제들 배후에는 악한 영들이 관여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영적 싸움을 인식해 악을 대항하는 자세가 필요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변화산에서 내려오셨을 때 밑에 있던 제자들이 귀신들린 사람을 내쫒으려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습니다.
결국 주님께서 귀신을 내쫒으셨죠.
그때 제자들이 왜 우리는 안되냐고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외에는 이런 것들이 나갈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어떤 풍랑은 배후에 마귀가 도사리고 있기에 백방으로 처방을 해도 정말 기도 없이는 안됩니다.
예수님이 광기로 몰아치는 바람을 꾸짖고 거기에 요동하는 바닷물에게 명령하자 모두가 평안으로 돌아갔습니다.
생명체가 아닌 무생물이 어떻게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할 수 있는지 참 신비로운 일이죠.
뭘 들을 수 있고 지각이 있어야 순종할 것 아닙니까?
바람과 바다를 말씀으로 창조하셨던 하나님만이 가능하신 일입니다.
구약성경에서 바다와 풍랑을 다스리시는 것은 오직 그것을 창조하신 하나님만이 하신 일입니다.
시편89편 8절, 여호와 만군의 하나님이여 주와 같이 능력 있는 이가 누구리이까 9절, 주께서 바다의 파도를 다스리시며 그 파도가 일어날 때에 잔잔하게 하시나이다
시편107편2절, 이에 그들이 그들의 고통 때문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29광풍을 고요하게 하사 물결도 잔잔하게 하시는도다
이스라엘사람들에게 자연 만물에 역사하실 수 있는 분은 하나님 밖에 없으십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 자연을 다스리시는 모습에 경악하는 것입니다.
‘대체 저 분의 정체가 뭐지?’
제자들의 충격이 얼마나 컸는지 서로 주고 받는 말에서 드러납니다.
41절, 그들이 심히 두려워하여 서로 말하되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였더라
베테랑들은 알잖아요?
절대로 우연히는 그 광풍과 바다가 순식간에 정적이 흐를 만큼 고요해 질 수 없다는 것을요.
기도하는 사람들은 이 풍파를 하나님이 잠재우셨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오늘 제자들의 악전고투가 보여주듯이 여러 요인이 뒤섞여 일어나는 풍랑은 목적을 이룰 때까지는 견디며 버텨야 합니다.
다만 우리가 거센 풍랑이 잔잔해 지길 기도할 때 무엇이 먼저 잔잔해 지는 지 아십니까?
하나님은 우리 안에서 불안하고 두려워하며 격렬하게 뛰는 마음을 먼저 잠잠케 해 주십니다.
옷이 비바람에 흠뻑 젖고 쉴 새 없이 물을 퍼낼 상황이 되어도 오늘 평안히 잠드신 주님의 평강을 주시기에 넉넉히 풍파를 이겨내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인생의 모든 풍랑은 하나님을 찾게 하고, 하나님을 더 알게 되고, 그로 인해 나 자신도 알게 됩니다.
고난과 풍파가 나를 더 정결하고 거룩하게 제련해 줍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광풍도 주시고 파도도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불안해하든, 자신 있어 하든, 당연히 만나게 될 이런 상황을 다 관리할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해 보라고 하시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고 계시다는 믿음만이 쓸데없는 염려와 걱정에서 벗어나게 하고 싸워 이길 힘의 원천이 정확히 어디서 나오는지를 알게 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잖아요?
40절,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하시니
믿음이 없으면 두렵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이 잠잠케 하신 고요해진 바다를 보자 더 이상 바다를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이번엔 누구를 두려워합니까?
41절, 그들이 심히 두려워하여 서로 말하되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였더라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알수록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에게 다른 두려움은 없습니다.
평생 칼빈을 연구한 어느 분이 칼빈에 대해 이렇게 정의를 내렸습니다.
‘칼빈은 하나님을 어찌나 두려워했던지 다른 것은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우리의 풍랑가운데서 하나님이 이루시는 놀라운 기적과 영광을 보며 하나님을 경외하고 두려워함으로 오히려 삶의 모든 두려움이 사라지는 모두가 되시길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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