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마가복음5장22절-34절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진 여인)

남수연 2018. 11. 9. 16:13

지난 주일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새가족초청예배를 잘 마쳤습니다.

모든 성도님들이 그동안 해 오던 봉사의 자리에서 더욱 정성과 최선을 다해 섬겨 주신 것에 감사를 드립니다.

새가족들이 많이 오지 못해서 아쉬움이 남지만 우리가 기쁜 마음으로 할 일을 했기에 때가 되면 열매를 주시리라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예수님 안에서 복된 자녀가 되게 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 땅의 삶도 영원한 가치가 되도록 하나님을 위해 일할 수 있는 작은 사명을 주셨습니다.

특히 주님이 모두에게 공통으로 주신 최고의 사명은 땅 끝까지 구원의 복된 소식을 전파하는 것입니다.

앞으로도 우리가 이 사명을 조금씩이라도 감당해감으로써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축복하시는 우리교회와 성도님들이 되길 소망합니다.

전에 설교 중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일이 무엇인지를 시험해 보라는 말씀이 있었죠.

누군가를 전도하기 위해 기도하고 섬기고 신앙을 권유 할 때 얼마나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축복하시는지 직접 시험해 본 사람은 압니다.

모두가 다 이런 축복을 체험하며 살아가시길 권합니다.

오늘 나눌 말씀은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려주신 내용과 혈루증을 앓던 여인을 고쳐주신 이야기입니다.

공교롭게 두 사건이 얽혀서 일어났는데 공교롭게도 두 사건은 공통의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정말 많은 사람들의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마태복음8장에서 이런 예수님의 치유사역이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신 것이라고 풀어 줍니다.

누군가의 병을 고쳐주셨다는 것은 대신 그 병이 주님께 갔다는 뜻인 것이죠.

오늘 말씀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이 어떻게 우리 죄를 해결했는지 이해하는 단서를 제공합니다.

본문말씀에서 단지 내 문제도 예수님 앞에 가져가면 기적이 일어날 것이다로만 보면 성경의 의도를 다 읽어낸 게 아닙니다.

이렇게 실용적인 적용만을 찾게 되면 신앙생활이 잘 될 것 같지만 꼭 그렇지 않습니다.

말씀대로 적용한다고 당장 관절염이 낫고 비염이 낫는 게 아니잖아요?

성경대로 해 본다고 성경과 똑같이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왜 성경대로 안되는지 점점 불신이 쌓이게 됩니다.

우리는 먼저 그 많은 치유의 기적들 가운데 이 사건을 특별히 자세히 기록한 이유가 무엇일까, 야이로의 딸을 살리신 것과 혈루증 환자를 고치신 것이 동시에 일어난 것은 무슨 뜻이 있을까 이런 것을 이해하는 게 필요합니다.

그리고 이 사건을 들여다보는 가운데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그 마음을 읽어내야 합니다.

그래야 믿음이 확실해 지고 하나님께 대한 신뢰가 쌓이고 내 현실의 문제들을 믿음으로 해결해 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이 세 가지 은혜를 우리에게 충만히 내려주시길 간절히 기대합니다.

 

우선 혈루증을 앓는 여인의 이야기부터 풀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혈루증은 지속적으로 하혈을 하는 부인병의 일환입니다.

12년간 이 병을 앓고 있다니 그 고생은 말할 필요가 없겠죠.

26절에 보면 많은 의사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가진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 졌다고 합니다.

여인의 힘든 세월이 고스란히 느껴지죠.

부인과, 비뇨기과, 항문외과 이런 데는 선뜻 찾아가기가 좀 그렇잖아요?
이런 병을 갖고 12년간 이 의사 저 의사를 찾아다녔으니 몸과 마음은 지칠대로 지쳤을 것입니다.

재산은 다 써버렸는데 병세는 더 위중해졌다고 합니다.

그 사이 가정도 파탄 났을지 모릅니다.

더 안 좋은 일은 이 혈루증이 사람들과 접촉해서는 안 되는 부정한 병으로 율법에 명시되었다는 것입니다.

민수기5장에 보면 이런 조항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모든 나병 환자와 유출증이 있는 자와 주검으로 부정하게 된 자를 다 진영 밖으로 내보내어.. 그들이 진영을 더럽히게 하지 말라 내가 그 진영 가운데에 거하느니라

공동체로부터 격리시켜야 할 세 종류의 사람들이 나오죠.

나병환자와 유출병 환자와 시체에 접촉된 자들입니다.

이런 사람과 접촉하는 자들도 똑같이 부정한 자라고 율법은 규정합니다.

왜 유독 이 세가지를 부정하게 보고 격리시켰을까요?

 

나병은 전염성을 고려했다 해도, 혈루증보다 더 심한 병도 많고 시체에 접촉했다고 무슨 피해를 주는 건 아니잖아요?
우선 나병은 그 끔찍한 외관으로 죄의 결과 생긴 질병을 대표합니다.

시체와 시체에 접촉한 것도 죄의 결과 생긴 죽음을 의미합니다.

피가 유출되는 병은 피와 생명을 똑같이 보시는 하나님의 관점에서 역시 생명이 아닌 죽음과 상관 된 것입니다.

이런 죄와 죽음이 결코 하나님과 동거할 수 없다는 것을 강력하게 각인시키기 위해 격리조치 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죄에 대한 경각심과 생명을 존중하고 악을 제재하는 효과도 있는 것이죠.

이 율법이 확장 된 것이 예수님 당시의 정결의식입니다.

모르는 사이에 유출병자나 시체만진 자들이 만진 물건에 접촉했을지도 모르기에 자꾸 씻는 것이죠.

특히 식사 전에는 반드시 손을 씻었는데 위생을 위해서가 아니라 정결의식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씻지 않고 드신다고 바리새인들이 비난했었잖아요?

그러니까 이 여인은 자기 몸이 괴로울 뿐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격리되었고, 죄인 취급을 받는 삼중고를 겪고 있었던 것입니다.

12년이란 긴 세월동안 처절한 불행 속에서 살았던 이 혈루증 여인은 하나님으로부터 격리 된 죄인들의 이중 삼중의 고통스런 삶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에 대한 책일 뿐 아니라 사람에 대한 책입니다.

성경에 의하면 사람이 행복했던 때는 유일하게 에덴동산에서 뿐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사랑과 보호를 거절하고 스스로 신이 되려고 선악과에 손을 댄 이후 창조의 축복이었던 행복은 인간사회에서 사라졌습니다.

가끔 행복하다고 느낄 때가 있으시죠?

그 행복이 얼마나 가던가요?

이 땅의 행복은 하나님이 우리를 복되게 하셨던 그 상태의 행복이 아닙니다.

인간에게 제일 먼저 사라진 행복은 사랑입니다.

아담과 하와의 완전했던 사랑은 범죄와 동시에 변질되고 서로를 탓하는 미움으로 바뀌잖아요?

그 이후 성경에는 타인에 대한 진실한 사랑을 찾아볼 수가 없고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디서 사랑을 찾아볼 수 있겠어요?

 

이성 간에 사랑에 끌려 결혼하지만 그게 사랑이 아니라 도파민이란 호르몬이라고 하잖아요?

길어야 3년이라고 합니다.

지난 주 기사를 보니 결혼을 앞 둔 남자가 혼수 문제로 다투다 여자를 찔러 죽였습니다.

연인 간의 이별에 앙심을 품고 보복하는 범죄가 날로 늘어갑니다.

이런 게 사랑인체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혼한 아내를 잔인하게 살해 한 남자가 사회적 공분을 일으키고 있죠.

그 자식들도 엄마가 맞는 것을 공포 속에서 봐야 했고 자식들이 매 맞을 때 이 엄마는 말리지도 못하고 구석에서 눈과 귀를 틀어막고 떨고 있었다고 합니다.

엄마를 살해 한 아버지를 사형시켜 달라고 한 세 딸의 청원이 그들의 고통이 어땠을지를 말해줍니다.

아담의 가정에서 사랑이 사라지자 부부관계에서만 문제가 생기는 게 아닙니다.

형이 동생을 죽이는 최초의 살인이 발생합니다.

뒤이어 문명을 빙자해 탐욕을 채우고 살인하고 타락한 후손들의 모습이 불과 창세기 6장 안에서 다 일어납니다.

우리가 사는 시대와 하나도 다르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활동 당시에도 병든 사람, 귀신들린 사람, 재산 문제로 형제와 싸우는 사람, 이혼문제, 자식이 죽어가는 사람, 모두가 다 행복하고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 잔뜩 몰려 왔습니다.

오늘 사건은 야이로라는 회당장의 문제에서 시작됩니다.

회당장은 유대교 회당을 관할하는 신앙 지도자입니다.

종들도 많이 둔 부자였습니다.

그런데 23절에 보면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다고 예수님 앞에 와 엎드려 간구합니다.

누가복음에 보면 이 딸은 야이로의 외동딸이고 열두살이라고 합니다.

아무리 존경받는 지위에 있는 사람이라 해도 불행은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여기 예수님 주위에 몰려 들끓고 있는 사람들은 다 우리의 불행했던 처지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27절에 보면 그러던 차에 여인이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었다고 합니다.

이 말은 그냥 풍문으로 들었다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샅샅이 확인했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생긴 예수님에 대한 확신은 절망 속에서 꺼져가던 여인에게 한줄기 강한 희망의 빛을 비추었습니다.

예수님의 옷자락만 만져도 병이 나을 것 같았습니다.

이런 믿음이 정말 있다면 지금도 병고침은 일어난다고 저는 믿습니다.

그러나 요즘은 의사에 대한 믿음이 보편적인 시대죠.

예수님이 우리에게도 이런 강력한 믿음과 소망이 되길 축복드립니다.

그러나 여인은 이미 동네에 소문난 부정한 여인이라 떳떳이 나설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수많은 군중 틈에 몸을 숨기고 예수님께 다가갔던 것이죠.

자신을 드러낼 용기도, 자격도 없는 여인은 몰래 주님의 옷자락에 손을 갖다 댔습니다.

그렇다면 율법대로 볼 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입니까?

여인의 부정함으로 예수님도 부정하게 되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병과 약함을 예수님이 짊어지셨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죄와 불행이 예수님께로 옮겨진 것이죠.

그런데 하나님이 세우신 영적원리는 둘 다 부정한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닙니다.

죄는 예수님께 전가되고 대신 제물이 되신 예수님께로부터 나온 능력이 여인의 혈루 근원을 말려 버리는 것입니다.

이 원리를 이미 구약성경에서 설명해 놓으셨습니다.

민수기에 보면 부정하게 된 사람이 나중에 정결하게 되는 규례가 나옵니다.

부정하게 된 사람이 정결하게 되기 위해서는 먼저 제사장이 속죄의 제물을 번제로 드려야 합니다.

그 제물이 다 타면 재가 남죠.

그 재나 잿물을 부정하게 된 사람에게 뿌리면 다시 정결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무죄한 제물이 결국 부정을 정결하게 바꾸어 버리는 것이죠.

만일 부정한 자가 정결하게 하는 이 물을 뿌리지 않으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백성 중에서 영영 끊어집니다.

부정하게 된 사람이 영원히 부정하지 않고 다시 정결하게 돼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돌아오는 길을 열어 준 것이죠.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속죄와 구원의 원리라는 것을 히브리서9장에서 이렇게 비교해서 해석해 줍니다.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를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하게 하여 거룩하게 하거든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

죽은 제물의 재가 부정한 것을 정결하게 하듯이 우리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의 피가 우리를 깨끗하게 해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한다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에 그 많은 규례와 의식들을 다 왜 기록해 놓으셨겠습니까?

이스라엘 나라엔 백성이 거룩하게 살게 하는 국법이지만 그 내면엔 다 예수님의 구원을 이해할 수 있게 실생활을 통해 가르쳐 놓으신 것입니다.

이천년 전에 죽으신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이 어떻게 해서 내 죄를 속죄하느냐, 어떻게 어제와 똑같은 내가 지금 의인이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느냐 이런 의혹을 풀어 주시기 위한 것이죠.

뒤 이어 나오는 야이로의 딸의 경우도 똑같습니다.

이런 소동이 일어나는 중에 결국 야이로의 딸이 죽었잖아요?

부정하게 된 또 하나의 경우가 부정한 시체에 접촉한 사람이었죠?

예수님은 죽은 야이로의 딸의 손을 붙잡습니다.

예수님이 시체에 닿아 부정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달리다굼, 소녀야 일어나라라고 말씀하시니까 소녀의 생명이 다시 돌아왔습니다.

이것도 똑같은 원리입니다.
죽은 소녀의 부정이 예수님께 옮겨 오고 예수님의 속죄를 통해 소녀의 부정한 죽음은 다시 깨끗한 생명의 상태로 돌아오는 것이죠.

예수님이 아직 십자가에서 죽지 않았지만 지금은 그 대속을 담보로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에 손을 내미는 믿음의 행위를 할 때 죄로 죽은 우리 영과 부정함이 깨끗한 영으로 살아나게 된 것을 두 사건을 통해 명확히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어려운 걸 우리가 오늘 알아 버렸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는다고 단순히 알고 있지만 성경을 통해 이런 원리들을 폭넓게 이해할 때 우리의 믿는 것이 무엇인지 더욱 확신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주님을 향해 손을 내밀어 우리의 모든 불행의 원인인 죄와 부정을 주님의 십자가에 맡기고 그 보혈로 다시 생명을 얻고 깨끗해져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되는 것입니다.

 

끝으로 오늘 본문 말씀에서 놓쳐서는 안 될 보배로운 내용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앞으로 나오는 모든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것만 알아서는 안 되고 예수님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오늘 이들을 치유하고 살리시는 내면엔 이런 구원의 원리들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이때 단지 이런 가르침만을 생각하고 하셨겠습니까?
그때 예수님은 정말 이들의 처지를 딱하게 여기시고 도와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고통 받는 사람을 따져가며 고쳐주신 적이 없습니다.

잘잘못을 따지기 전에 먼저 고쳐주십니다.

그리고 그 병이 죄된 습관으로 생겼을 경우,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는 말씀을 하시죠.

예수님 앞에 나온 야이로는 유대교의 지도자입니다.

유대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이단으로 정죄했잖아요?

그런데 자식을 위해 그 주님 앞에 무릎을 꿇은 야이로를 보고 사람들이 수군댔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때다하고 내가 구원자라고 선언하지도 않습니다.

그냥 두 말도 없이 서둘러 야이로와 함께 그의 집으로 향하십니다.

사람들은 좀 도와 줄 수 있는 처지에 있을 때 선뜻 해주지 않고 뜸도 들이고, 공치사도 하며 결국 아주 눈꼽만큼 도와줍니다.

방송인 전현0씨가 개그맨 이수0씨 어려울 때 1억을 빌려주었다고 해서 깜짝 놀랐습니다.

보통사람들에겐 사실 속 시원히 도와 줄 능력도 없죠.

상대의 형편과 심정을 알기에 도움 받은 처지는 항상 미안하고 왠지 불편스럽습니다.

하나님께 도움을 받은 다음엔 그렇지가 않습니다.

하나님께 큰 기도응답을 받았을 때 오히려 더 기쁨과 감사가 넘치잖아요?

왜 그럴까요?

마치 어린 자식들이 부모를 졸라서 뭘 받아내도 항상 당당한 것이 부모의 애정을 알기 때문인 것과 같은 것이죠.

예수님은 정말 기쁘게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심지어 몰래 와서 능력을 도둑질 해 간 여인에 대해서도 이게 무슨 경우없는 짓이냐고 책망하시지 않잖아요?

책망은커녕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이 말씀을 하시는 예수님의 눈빛이 어떠셨을까요?

그 믿음이 너무 대견해서 따뜻한 눈빛으로 이 여인을 바라보았을 것 같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찬송가 중에 나 어느날 꿈 속을 헤매며라는 찬송가가 있습니다.

거기에 그 동정의 눈빛과 음성을 나는 잊을 수 없겠네라는 가사가 있습니다.

오늘 이 여인을 바라보던 그 눈빛으로 지금 나를 바라보는 주님을 떠올려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살면서 이런 따뜻한 눈빛을 받기가 힘듭니다.

사람들은 눈빛에 그렇게 따뜻함을 담고 살지 않습니다.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의 눈빛은 냉정하거나, 경계심을 갖거나, 계산적인 눈빛입니다.

긴장을 풀고 살 수가 없는 세상이잖아요?

그런데 심지어 가족들에게도 따뜻한 눈빛을 잘 주지 않고 삽니다.

가족을 따뜻한 눈빛으로 바라보려고 해 보세요.

굉장히 어색함을 느끼실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따뜻한 동정의 눈빛을 보았던 여인은 주님을 절대로 잊지 못했을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가면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걸어가셨던 비아돌로로사라는 좁은 골목길이 있습니다.

주님이 넘어지셨던 자리마다 기념석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거기보면 예수님이 두 번째 넘어지신 자리에서 베로니카라는 여인이 손수건으로 피로 물든 예수님의 얼굴을 닦아 드렸다고 합니다.

예수님 당대에 살았던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는 이 혈루증여인이 바로 베로니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실을 확인할 수는 없지만 여인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그 길에 분명히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자기의 부정한 죄를 짊어지고 가신다는 걸 알았을 것입니다.

혈루증을 고쳐지던 그날 여인을 보셨던 주님의 눈빛이나, 넘어진 예수님께 다가와 울며 얼굴을 닦아드리는 여인을 바라보는 눈빛이나 똑같이 따뜻했을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우리를 그렇게 바라보시는 그 따뜻하고 인자한 눈빛을 항상 기억하시길 축복드립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먼저 손을 내밀어 십자가에서 우리를 속죄하신 예수님을 붙드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생명과 사랑이 우리의 영을 다시 살리고 하나님의 축복된 자녀가 되게 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랫동안 괴롭혀 온 문제들로 점점 지쳐가고 있지는 않으십니까?

여인은 세상에서 문제를 해결하려다 가진 것을 하나하나 잃어버리고 점점 상태는 악화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 앞에 나왔을 때 문제는 꿈같이 해결되었습니다.

우리의 모든 문제에 있어서도 가장 먼저 예수님 앞에 들고 나와 간구해야 합니다.

너무 늦었다면 더 늦기 전에라도 예수님 앞에 들고 오셔야 합니다.

축복을 도둑질이라도 하겠다는 믿음이 절망에 빠져 아예 나오지도 않는 믿음보다 더 낫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다윗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시편 6819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 곧 우리의 구원이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하나님이 우리 짐을 맡으시면 인생의 짐도 지금처럼 괴롭고 무겁지 않습니다.

마음이 기쁘면 짐도 가볍잖아요?

또 가장 완전하고 좋은 방법으로 우리 삶의 문제들이 해결될 수 있도록 성실하게 우리를 이끌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편안한 삶을 주셨다면 내일을 미리 염려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어떤 문제와 고난의 때에도 주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 문제를 맡아 주실 것입니다.

오직 우리는 매 순간 벽에 붙여 놓은 말씀처럼 항상 기뻐하고 쉬지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며 예수님과 동행하시길 축원드립니다.


2018년10월28일 남수연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