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은 3년여의 공생애 기간 중 많은 시간을 병들고 귀신들린 불쌍한 사람들을 치료하는 일에 사용하셨습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질병을 갖고 고통스럽게 살다가 주님 앞에 나온 병자들을 하나 하나 치료해 주시는 장면들은 참 은혜롭고 감동적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의 내용만큼 역동적이고 흥미진진하고 뜨거운 열기로 가득 찬 병고침의 현장은 없을 것 같습니다.
이 본문을 읽노라면 정말 걷잡을 수 없는 하나님 나라의 역동성이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가버나움의 한 집에 머물고 계셨습니다.
아마 베드로의 집으로 생각됩니다.
그러나 소문이 퍼지자 또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집 대문 앞 까지 인파로 꽉 들어찼습니다.
바로 전날 나병환자를 고친 소문이 이미 가버나움 전체에 퍼졌고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병도 고치기 위해 사람들이 몰려온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정말 기상천외한 사건이 발생합니다.
중풍병자를 누워있는 침상채로 떼 매고 온 일행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로 꽉 메워진 현관 진입에 실패하자 옥상으로 올라가 지붕을 뜯어내고 상에 줄을 매달아 환자를 예수님 앞에 내려놓은 사건입니다.
본문은 짧고 간단하게 기록되어 있지만 남의 지붕을 뜯어내고 집안으로 들어온 이 상황을 생각하면 어이도 없고 웃음이 나옵니다.
예수님이 한창 설교 중인 집 안은 지금 은혜와 긴장감이 팽팽하게 감돌고 있습니다.
같은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누가복음5장17절에 보면 그 곳에는 갈릴리의 각 마을과 유대와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들이 앉아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소문을 듣고 온 그들은 예수님의 말과 행동에서 꼬투리를 잡으려고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습니다.
그 때 천장에서 덜거덕 거리는 소리가 들리며 천장이 마구 뜯겨 나가기 시작합니다.
사람들이 웅성거립니다.
우리 주님은 천정을 올려다 보시고 빙긋이 웃으셨을 것 같습니다.
마치 특공대가 들이 닥치듯 결사적으로 지붕을 뜯어내고 있는 일행이 누구인지 주님은 이미 알고 계셨으니까요.
예수님은 주님 앞에 간절한 마음으로 도움을 구하며 나오는 자녀들이 누구인지 하나 하나 다 알고 계십니다.
집주인이 누구보다도 놀라 진상을 알아보러 밖으로 뛰어 나갔을 것입니다.
잠시 후 사람들 머리 위로 흙먼지가 우수수 쏟아지며 지붕에 구멍이 뚫립니다.
너뎃명의 남자들이 땀을 뻘뻘 흘리며 사람들의 고함을 아랑곳하지 않고 큰 침상이 들어갈 만한 구멍이 날 때까지 계속 천정을 뜯어 냅니다.
드디어 하늘에서 침상이 줄을 타고 내려옵니다.
어이가 없어 입을 딱 벌린 사람들 가운데로 내려진 사람은 혼자 힘으로는 꼼짝할 수 없는 한 중풍병자 였습니다.
주위는 갑자기 조용지고 모든 사람의 시선은 이 환자에게 집중됩니다.
초라하게 말라 비틀어진 몸을 제대로 가리지도 못하고 막상 그런 일을 벌인 환자 자신도 놀라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 때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을 보고 즉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5절입니다.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같은 내용을 기록한 마태복음9장에는 소자야 , 누가복음5장에는 이 사람아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떤 표현이든 예수님의 애정과 긍휼이 배어 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중풍병자는 물론 병을 고침 받기 위해 예수님께 나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 말씀을 통해 그가 구원에 대한 갈망이 앞섰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의 괴로움은 단지 몸을 뒤집을 수 조차 없는 중풍병 때문만이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은 이 저주 받은 병이 그의 죄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자신도 하나님께 형벌을 받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 병을 가져온 해결 받지 못한 죄로 인해 올 심판에 대한 공포가 그를 짓누르고 있었습니다.
질병으로 인한 인간의 고통은 죽음에 대한 공포와 심판에 대한 두려움을 동반하기에 더 괴로운 것입니다.
예수님의 대한 소문은 이미 온 이스라엘을 술렁이게 하고 있었습니다.
유대와 예루살렘에서 서기관들이 파견 되어 나올 정도였으니까요.
그도 소문으로 예수님의 기가 막힌 설교에 대해 들었습니다.
눈 먼자를 뜨게 하고 귀머거리가 듣게 되었다는 소식도 들었습니다.
그는 틀림없이 기다리던 메시야가 오셨음을 확신했습니다.
이사야35장4절부터 메시야의 오심이 이렇게 예언되어 있습니다.
겁내는 자들에게 이르기를 굳세어라,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너희 하나님이 오사 보복하시며 갚아 주실 것이라 하나님이 오사 너희를 구하시리라 하라
그 때에 맹인의 눈이 밝을 것이며 못 듣는 사람의 귀가 열릴 것이며
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 같이 뛸 것이며 말 못하는 자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
그는 메시야를 만나면 자신이 사슴 같이 뛸 것을 확신했습니다.
그 때 그의 귀에 그 분이 동네에 오셨다는 소식이 들렸습니다.
드디어 때가 온 것입니다.
그는 죽음과 심판에서 구원받길 원했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마음에 있는 이 죄로 인한 심판의 두려움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먼지를 뒤집어 쓰고 사투를 벌이듯 주님 앞으로 나온 그들의 믿음이 진짜임을 아셨습니다.
주님은 기꺼이 그의 모든 죄를 사해주십니다.
예수님을 진정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로 믿는 믿음이 있으십니까? 아멘.
진정한 믿음은 문제를 들고 예수님 앞으로 나가는 믿음입니다.
예수님 앞에만 가면 모든 문제가 해결 될 것을 믿었기에 그들은 장애물을 극복하고 주님 앞으로 나갑니다.
하나님께 아무 것도 기대하지 않는 사람은 욕심 없고 성숙한 믿음이 아닙니다.
오늘 주님은 남의 재산권을 침해해 가면서 까지 적극적으로 주님 앞에 나온 이들의 믿음을 아주 귀하게 보시고 사랑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허락도 없이 남의 집 기와를 벗겨내고 천장을 뚫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분명 시끄러운 소음과 흙 먼지로 방안이 엉망이 되고 사람들의 비난과 질책이 쏟아 질 게 뻔한 일이란 걸 왜 몰랐겠습니까?
믿음이 있었기에 이 모든 난관을 뚫고 그들은 예수님 앞에 당도한 것입니다.
죄인이 역경을 뚫고 하나님 앞으로 나가는 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지요.
그를 돕기 위해 여러 죄인들이 힘을 합쳐 하나님께 나가는 모습은 한층 더 아름다워 우리 주님을 감동시킨 것입니다.
이 장면을 목격한 제자들도 이 사건이 퍽 인상적이었나 봅니다.
같은 사건을 마태와 마가, 누가가 각각의 세 복음서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홀로 믿음을 지키는 것도 귀하고 감사한 일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가 서로를 격려하고 짐을 나누어 지며 힘을 합쳐서 아버지께 나가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은 자녀 된 우리를 교회의 가족으로 묶으시고 사랑하고 중보하며 함께 구원을 이루어 가길 원하십니다.
또 우리 가족이 주님의 사랑으로 하나가 되어 하나님 앞에 나오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혼자가 아니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전도서 4장 12절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능히 당하나니 삼 겹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
잠언9장 10절 혹시 저희가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붙들어 일으키려 니와 홀로 있어 넘어지고 붙들어 일으킬 자가 없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라
고난과 역경을 뚫고 서로를 위해 기도하며 우리의 질병과 마음의 고통을 나누어 지며 믿음의 길을 함께 하는 우리교회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병을 고치시는 예수님의 능력에 대해 좀 더 살펴보겠습니다.
이 세상에 참 다양한 교회가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교회에서는 병을 고치는 이적들은 초대교회 이후 사라졌다고 믿습니다.
질병으로 고통하다 병원에서 더 이상 치료할 수 없게 되면 속수무책으로 죽음을 맞이합니다.
그리고 어떤 교회에서는 오늘날도 신약 성경의 역사와 동일한 주님의 치유가 일어남을 믿고 기도합니다.
그리고 병을 고침 받습니다.
야고보서 5장 14절은 우리에게 이렇게 권면함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저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위하여 기도 할지니라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얻으리라
믿음의 기도를 통해 주께서 병든 자를 일으키신다고 명확하게 말씀하십니다.
오늘 우리가 주님의 능력을 어떻게 믿느냐에 따라 어떤 사람은 지금도 오늘 본문의 예수님이 베풀어 주셨던 기적적인 질병의 치료를 그대로 체험하며 살고 있습니다.
일부 사역자에게만 치유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의리파 영화배우 김보0씨를 아실겁니다.
그는 예수님을 믿고 3개월 밖에 되지 않았지만 아내의 갑상선암을 위해 기도하던 중 깨끗이 치유되는 기적을 경험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질병으로 인해 고통당하고 불행하게 사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통증으로 잠 못 이루고 두려움에 낙심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마음의 질병을 안고 걱정하며 절망가운데 살지 말라고 하십니다.
출애굽기 15장 26절에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가라사대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청종하고 나의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의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
하나님은 지금도 여전히 치료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죄로 인해 고통과 질병이 왔으나 이젠 모든 것이 해결되었음을 이사야 53장 5절에서 말씀하십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예수님께서 채찍에 맞으시고 피 흘리며 고통당하신 것은 죄의 결과로 우리에게 온 질병을 2천년 전에 다 담당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음을 믿을 때 구원을 얻듯이 예수님이 채찍의 맞으시고 고난 당하심으로 내 병을 치료하셨다고 믿을 때 치유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병약함 가운데 있습니까?
우리의 가족이 질병으로 고통 가운데 있습니까?
주님은 믿고 나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이 문제와 질병을 위해 주님 앞에 나와 기도하지 않는 것은 믿음이 없는 것이라고 오히려 책망하십니다.
나의 믿음의 확신이 비록 부족해도 주님의 권능과 말씀을 믿고 나오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드립니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 그렇게 센 척 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 앞이라면 우리가 무너지고 통곡한다 해도 좋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며 기다리시는 주님이 기뻐하시며 작은 자야 네 죄가 사해졌느니라 깨끗함을 받으라 말씀해 주실 줄 확신합니다. 아멘.
그런데 오늘 본문의 이 열기에 들뜬 떠들썩한 분위기와 상반 된 음산하고 냉혹한 눈들이 한 쪽 구석에서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한 구석에 모여 앉아 이 모든 북새통을 지켜보던 그들이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듣자 먹이를 나꿔 채듯이 심중에 비판을 시작합니다.
7절입니다.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신성 모독이로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이걸 해석하면 이렇습니다.
이 사람이 병 좀 고치더니 이젠 하나님 행세까지 하고 있네
이번엔 이 자를 고칠 자신이 없나보지?
그 때 예수님께서 8절에 그들이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는 줄을 예수께서 곧 중심에 아시고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것을 마음에 생각하느냐 책망하십니다.
마태복음9장에는 예수님께서 왜 악한 생각을 하느냐고 말씀하셨다고 기록합니다.
죄를 사하는 것은 당연히 죄를 지은 자의 상대편이 해야 할 일이죠.
옆에서 구경하는 사람이 아무리 용서해주고 싶어도 당사자만이 용서할 권리가 있는 것입니다.
영화 밀양에서 전도0씨가 연기했던 주인공 신애가 눈이 뒤집힌 게 뭐 때문입니까?
자기 아들을 죽인 살인범의 죄를 용서하려 이를 악물고 그를 찾아갔는 데 자기는 이미 하나님께 용서받았다는 죄인의 뻔뻔하고 평화스런 얼굴에 속이 뒤집혀 버립니다.
죄를 용서해 줄 권리가 있는 자신을 대신해 죄인을 용서해 주었다고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고 하나님을 향해 항변합니다.
물론 살인범도 신애도 다 하나님의 용서를 오해하는 모순투성이 죄인들입니다.
오늘 본문의 서기관들이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죄를 지은 인간을 용서해 줄 권한이 있는 하나님 당사자임을 몰라본 것입니다.
유태인들에게 치료할 수 없는 병이 생겼다는 것은 하나님께 죄를 지었다는 것으로 치부 됐습니다.
우리에게도 약간은 그런 죄의식이 있습니다.
불치병, 암 같은 질병에 걸리면 환자들이 공통적으로 느끼는 감정 중 하나가 크던 작던 창피를 느낀다는 것입니다.
마치 죄를 지어 벌을 받은 느낌이 들고 남들에게도 그렇게 비칠 것 같아 마음에 짐을 더 지게 되는 것이 질병의 일면입니다.
풍을 맞아 꼼짝 못하고 상에 누운 채 인간다운 삶을 살지 못하는 환자는 하나님께 죄를 지었을 것이 분명하고 죄를 용서해 줄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 밖에 없다는 것이 서기관들의 생각입니다.
어떻습니까?
서기관들의 말이 맞는 이야기 아닙니까?
그런데 왜 예수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악하다고 보셨을까요?
그들이 신성모독이라고 열을 올리는 모습을 보면 마치 하나님께 대한 거룩한 공경심이 꽤나 있어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분명히 그들의 마음을 읽으셨습니다.
예수님을 배척하는 이유는 하나님께 대한 공경이나 정의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미 예수님의 신적인 치유 능력을 보고 권세 있는 말씀을 들었다면 예수님이 구약성경에 예언되어 오던 그 메시야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다만 그들은 그런 메시야를 원치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5장42절에서 그들을 향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라 라고 책망하셨습니다.
44절에도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
그들은 자기들과 똑같은 인간 메시야를 원했습니다.
그들의 메시야는 로마의 압제에서 해방시켜주기만 하면 됩니다.
죄를 지적하고 회개하라는 메시야는 결코 필요치 않았습니다.
자신들의 죄가 예수님의 빛 가운데 드러나자 주님을 대적하고 죄인 취급하려 안간힘을 쓰고 있습니다.
지금 예수님은 그들의 시험대에 서 계십니다.
사람들은 이제 주님이 이 중환자를 어떻게 하실 것인지를 침을 삼키며 주목하고 있습니다.
이 때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향해 질문을 던집니다.
그럼 너 같으면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서 어느 것이 쉽겠느냐
예수님이 잘 쓰시는 화법 중에 하나입니다.
구경꾼이 되어 판단만 하는 그들을 이 문제 속에 던져 넣으시는 것입니다.
성도님들은 어느 말이 더 쉬울 것 같습니까?
어느 인간이 죄인을 향하여 내가 네 죄를 사한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 말이 쉽게 할 수 있는 말입니까?
그렇다면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는 말은요?
이 말을 하고 책임질 수 있겠습니까?
만일 내가 너희와 같은 인간이라면 그 어떤 말도 할 수 없을 거라는 겁니다.
그리고 주님은 당당하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인간의 죄를 사할 권세가 있는 하나님이다.
그리고 나는 인간의 모든 악함을 고치고 구원 할 그리스도이다.
보아라.
그리고 중풍병자를 향하여 말씀하십니다.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서기관들이 예수님의 전략에 완전히 말려들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병자가 일어나 환희에 넘쳐 누웠던 자리를 챙겨 들고 집으로 뛰어갔으니 예수님의 말씀대로 그의 죄가 사함 받았다는 것도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이죠.
예수님은 오늘 이 사건을 통해 그들이 메시야에 대해 오해하고 있는 부분을 고쳐주십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야는 죄를 사할 신적 권위가 있다는 것입니다.
메시야는 하나님의 대행자일 뿐 아니라 자기 스스로 그런 권세를 가진 하나님 자신이라는 것이죠.
유대의 지도자들은 그리스도가 단지 인간으로서 하나님의 일을 대행할 것이라고 알고 있었고 그렇게 가르쳤습니다.
하나님이 스스로 내려 오실 줄은 꿈에도 몰랐던 것입니다.
마가복음12장 35절에 보면 예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실새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 하느냐
라고 물으십니다.
그리고 다윗이 지은 시편 110편을 인용하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다윗이 시편에 이렇게 기록하지 않았느냐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들로 네 발판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시며 아는 척하는 종교인들의 입을 막아버리십니다.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 많은 사람들이 즐겁게 듣더라
서기관들의 영적 무지함과 악함을 지적하시고 이 땅에 오실 메시야 그리스도는 다윗의 자손으로 오시지만 하나님 우편에 앉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밝히신 것입니다.
인간이 정말 알량한 지식으로 창조주 하나님을 판단하고 그 존재의 진위를 밝히겠다고 안간힘을 씁니다.
그리고는 쥐꼬리 만한 경험과 머리를 써서 하나님에 대해 어리석은 결론을 내립니다.
도0 김00씨가 도마복음이라는 외경을 연구하고 이렇게 말하는 걸 보았습니다.
도마복음은 1945년에 이집트에서 발견 된 영지주의 이단 문서입니다.
이 문서에는 예수님의 신적인 능력은 배재하고 가르침 부분만을 기록하고 있는 데 복음서의 내용과 비슷한 곳이 일부 있습니다.
그러나 전체적인 내용이 정통 기독교의 사상과 맞지 않는 이단성을 갖고 있는 문서입니다.
도0 김00씨는 올 4월 이 도마복음을 해설한 책을 내놓았습니다.
그는 방대한 기독교의 정경은 다 무시한 채 시편의 분량 보다도 적은 이 이단 문서하나를 가지고 기독교와 예수님을 정의 내립니다.
그는 ‘신의 아들 예수’, ‘숱한 기적과 부활을 선보인 예수’는 후대의 창작에 불과하다고 말합니다.
역사적 예수는 살아 생전 열심히 활동했으나 뚜렷한 성과는 남기지 못했기 때문에 이를 미화하고 포장하기 위해 온갖 기적과 부활이라는 이야기를 집어넣어 드라마화했다는 것이죠.
김00은 복음서 저자들을 아예 ‘작가’라 부릅니다.
그는 도마복음을 통해 상식적이면서 심오하고 건강한 모습의 살아있는 예수를 만날 수 있을 거라고 말합니다.
그게 바로 그가 원하는 것입니다.
상식적인 인간 예수님이죠.
죄를 사할 권세가 있는 하나님의 아들 창조주라고 예수님을 절대로 인정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냥 살아생전 열심히 활동했으나 실패하고 십자가에 사형당한 인간 예수라면 너그럽게 받아들일 용의가 있다는 말입니다.
주님은 이런 종류의 인간들에 대해 불쌍히 여기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어찌하여 이것을 마음에 생각하느냐
어찌하여 마음에 악한 생각을 하느냐
끝까지 예수님을 배척한 예루살렘을 향하여 예수님은 결국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누가복음19장 41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이르시되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
그리고 이어서 예루살렘에 임할 멸망과 심판을 예언하셨습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마치 렘브란트의 그림과 같이 빛과 어둠이 확연히 구분되는 두 세계가 한 화폭에 그려져 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과 용서를 믿고 즐거이 주님 앞에 거하는 무리들과 구석 음산한 곳 웅크리고 앉아 주님을 판단하며 은혜를 밀어내는 무리들입니다.
예수님의 빛 가운데 나오십시오.
주님은 오늘도 병든 가족과 친구들을 떼메고 주님 앞에 빛 가운데 나오기를 원하십니다.
올해가 가기 전에 구원 받지 못한 우리 가족을 끌고 주님 앞에 나올 수 있도록 간절히 기도하시기 원합니다.
우리가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예수님 앞으로 나오면 우리 모두를 긍휼히 여기시는 주님의 은혜가 임할 줄을 믿습니다.
그 날 중풍병자를 불쌍히 여기신 예수님이 질병과 두려움으로 고통 받는 우리들을 똑같이 불쌍히 여기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마음에 믿음과 확신이 부족한 것을 염려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내 마음에 확신을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사랑과 긍휼히 여기시는 마음을 믿는 것입니다.
모든 능력을 가지시고 지금도 일하시는 주님을 완전히 믿으시면 됩니다.
주님은 반드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우리를 고치시고 흔들리지 않는 평안과 능력 있는 삶으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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