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서

네 떡을 물에 던져라 (전도서11장1절-10절)

남수연 2014. 1. 21. 16:34

전도서는 솔로몬이 기록한 지혜서입니다.

인생에 대한 예리한 통찰과 철학과 문학적인 매력이 넘치는 성경입니다.

그런데 전도서를 읽다보면 어디에다가 아멘을 해야 할지 몰라 좀 당황하게 됩니다.

솔로몬의 인생관을 따라가다 보면 모든 것이 헛되니 세상사의 가치를 어디다 둬야 할지 잠시 방황하게 됩니다.

그래서인지 어떤 불신자 문학가는 전도서가 토정비결 같다는 말을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분명히 전도서는 다른 성경들하고는 좀 느낌이 다릅니다.

본문 전도서를 기록한 저자는 솔로몬입니다.

솔로몬과 같이 지혜로운 자가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당대 최고의 지혜자인 솔로몬이 인생에 대해 내린 결론은 무엇일까요?

한마디로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예측할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고 답을 내릴 수도 없다는 것이죠.

그리고 살아보니 인간사가 다 헛되다는 것입니다.

2장25절에 이렇게 자신의 과거를 돌아봅니다.

아, 먹고 즐기는 일을 누가 나보다 더 해 보았으랴

평생 잘 먹고 즐긴 사람이 왜 이런 비관적인 인생 보고서를 기록한 것일까요?

그렇게 하고 싶은 만큼 다 해보고 살았다면 참 잘 살았다는 생각이 들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이 솔로몬이 해보지 않은 것이 딱 한 가지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끝까지 경외하는 것, 딱 그것 하나만 못해 본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부지런히 인생을 즐기고 달려보았더니 남는 것은 헛되다는 것이 전도서의 결론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생의 솔직한 심정을 1장14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일을 보았노라 보라 모두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

전도서에는 헛되다라는 말이 37번 나옵니다.

모든 권력과 부와 명예로 자기를 만족시키기 위해 살았더니 결과는 허무하고 헛되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육체의 욕심을 한껏 채우며 하나님을 배반한 덕에 이스라엘은 3대왕만에 남북으로 두 동강이 났으니 회환도 많았겠죠.

전도서 전체에 흐르는 묘한 허무감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없이 살아 왔던 솔로몬의 심경이 그대로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없는 인간의 스산함이 확 느껴지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빠진 인생의 헛헛함을 하나님은 그렇게 살아본 사람을 통해 이렇게 생생하게 기록하게 하신 것이죠.

오늘 본문은 전도서의 결론 부분에 해당합니다.

자기의 헛된 인생처럼 살지 않는 방법이라고나 할까요?

말씀을 통해 보람과 행복으로 꽉 찬 인생을 우리가 다 살아가는 비결을 배우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드립니다.

먼저 1절 말씀부터 3절까지를 한 주제로 보겠습니다.

인생이 손에 쥔 모래처럼 헛되게 사라지지 않으려면 어떻게 살아야 하냐는 것입니다.

너는 네 떡을 물 위에 던져라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

무슨 뜻인지 선뜻 이해하기가 어렵죠?

당시 문화적인 배경에서는 쉽게 이해될 수 있는 내용이었겠지만 지금 우리가 해석하기는 좀 애매합니다.

어떤 사람은 솔로몬이 선박을 제조해서 큰 무역을 했던 것을 경험삼아 위험하지만 해상무역을 하라는 뜻으로 해석합니다.

이런 해석은 전도서 전체의 기록목적에 잘 맞지 않는다고 봅니다.

지금 11장은 솔로몬이 인생에 대한 결론을 내리는 중인데 돈 버는 비법을 언급한다는 것은 좀 엉뚱하죠.

이 말씀은 2절과 같이 연관시켜 보면 자연스럽게 해석할 수가 있습니다.

일곱에게나 여덟에게 나눠 줄지어다. 무슨 재앙이 땅에 임할는지 네가 알지 못함이니라.

네 떡을 물 위에 던진다는 것과 일곱이나 여덟에게 나눠주라는 말이 같은 맥락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네가 가진 것을 다른 사람을 위해 쓰고 베풀라는 말씀입니다.

터키인들에게 이런 격언이 있다고 합니다.

“선을 행하고 그것을 물에 던져라 물고기가 몰라주면 하나님께서 알아주신다”

그러니까 솔로몬이 깨달은 것은 남을 위해 나눠주는 인생이 헛되지 않다는 것입니다.

전도서를 누구를 위해 기록했는지 다음 장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내 아들아 또 이것들로부터 경계를 받으라

죽기 전에 자식에게, 후손들에게 간곡히 교훈하는 유언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죽기 전에 자식들에게 유언한다면 정말 진실한 말을 남기지 않겠습니까?

작년에 작고한 잭 맥도널드라는 변호사의 기부에 세계가 깜짝 놀랐었죠.

쿠폰을 오려 모으고 팔꿈치에 구멍 난 스웨터를 입고 다닐 정도로 검소한 노인이 죽고 난 뒤 기부한 유산이 공개되었을 때 그가 그렇게 부자인지 몰랐다고 이웃사람들도 놀랐다고 합니다.

기부액이 무려 2천억이나 되었습니다.

이 분이 이렇게 자선활동을 한 것이 그 부모의 유언 때문이라고 들었습니다.

죽기 전에 자식들에게 무슨 유언을 남기시겠습니까?

분명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모아 혼자만 잘먹고 잘살라고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맡기신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적인 굶주림에 있는 사람들과 빈곤한 사람들을 돌보라는 것이었습니다.

남을 돕는 일은 마치 떡을 물에 던지는 것처럼 당장은 내게 좋은 결과가 없어 보일 수도 있습니다.

또 이런 말씀을 들으면 왜 힘들게 번 돈을 남을 위해 써야 하냐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인생을 면밀하게 살피고 연구한 지혜자는 말합니다.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

나를 위해 쓴 것은 다 사라지고 없어집니다.

좋은 음식을 먹고, 비싼 옷을 입고, 사치와 쾌락을 위해 쓴 모든 것들이야 말로 흘러가버린 강물처럼 자취도 없이 사라지고 없어집니다.

그러나 내 떡을 다른 사람을 위해 나눈 것만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도움을 받은 사람의 마음과 인생 속에 그게 남아있게 됩니다.

저도 사회생활에서 재미있는 모임도 있고 좋은 사람들도 많이 만났습니다.

그런데 마음속에 남아있는 사람은 제가 어려울 때 도움을 주었던 사람들입니다.

그 고마움은 그 사람을 떠올릴 때 마다 아직도 남아 있는 것을 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선을 베풀면 이 땅에서 남을 뿐 아니라 천국에도 남아있다고 성경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가진 것이 없어 예수님의 이름으로 찬 물 한 그릇을 대접했는데 예수님께서 그것을 기억해두셨다가 상을 주신다고 하시잖습니까?

또 2절에서 우리의 것을 일곱이나 여덟이나, 할 수 있다면 많은 사람에게 나눠주어야 되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합니까?

사람이 이 땅에서 어떤 재앙을 만날지 모르기 때문에 그 때를 위해서라고 말씀합니다.

3절에 보면 구름에 비가 가득하면 땅에 쏟아지며 나무가 남으로나 북으로나 쓰러지면 그 쓰러진 곳에 그냥 있으리라.

무슨 말씀입니까?

인생에서 부지불식간에 만나는 재앙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머리 위에서 구름이 만들어지고 비가 가득 채워지면 소나기가 머리 위로 쏟아집니다.

과로가 쌓이고, 죄가 쌓이고, 적자가 쌓이고, 상처가 쌓이면 우르르 쏟아지는재앙의 비를 맞는다는 것입니다.

또 소나기처럼 예측도 못하고, 이유도 모른 채 재앙을 당하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병마로, 어떤 사람은 사고로, 소나기 맞듯 여러가지 재앙을 만나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구름에 비가 가득하면 아무리 용을 써도 쏟아지는 것을 막을 수 없듯이 피할 수 없이 재난을 만나는 게 인간사라는 것이죠.

아무 어려움도 당하지 않을 때 사람들은 자신을 대단하게 생각합니다.

언제까지 지금 누리는 모든 것이 내게 있고 점점 더 번영하리라 생각하죠.

마치 나무가 서 있을 땐 위용을 자랑하고 생명이 충천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태풍과 폭우에 쓰러지면 쓰러진 자리에 꼼짝 못하고 고사할 수 밖에 없습니다.

재작년인가 굉장한 강풍이 불었던 적이 있습니다.

잠실대로 가로수들이 뿌리 채 뽑혀 넘어져 이리 저리 쓰러져 있던 모습들이 떠오릅니다.

성내천 야산에도 나무들이 많이 넘어졌고 기울어진 나무들은 지금도 기울어진 채 꼼짝없이 그렇게 서있습니다.

사람이 언제까지 두 발로 제 가고 싶은 곳을 마음대로 다니며 활개 치며 살 것 같지만 재난을 만나 발이 묶이는 사람을 흔히 봅니다.

경제적으로 발이 묶이고, 우환으로 발이 묶이고, 진로가 막혀 발이 묶이고.

내가 내 것을 다 누리며 마냥 살 것 같지만 지혜자가 살펴본 결과 그렇지 못하더라는 것이죠.

이런 재앙을 만나기 전 선을 행할 수 있을 때 행하라는 뜻입니다.

건강할 때 봉사하고 돈 있을 때 베풀고 심적인 여유가 있을 때 다른 사람 형편을 좀 살피라는 것이죠.

연세대 총장을 지낸 박대0목사님이 일본에서 공부할 때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한 학생이 추운 겨울에도 신이 없어서 맨발에 조리를 끌고 다니는 것입니다.

너무 안쓰러워 목사님이 신던 낡은 구두 한 켤레를 주었다고 합니다.

한국에 돌아와 6.25 사변이 일어나 양식이 없어 몹시 굶주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헌 구두를 받았던 그 사람이 크게 성공하고 돌아와서 쌀 몇 가마니를 실고 와서 내려놓고 가더랍니다.

사람의 일이란 것이 언제 무슨 일을 당할 지 모르고 누가 나를 도와줄지 모르는 것입니다.

사람이 잊으면 하나님이 도와주십니다.

잠언19장17절은 말씀합니다.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어 드리는 것이니 그의 선행을 그에게 갚아 주시리라

나이가 먹어가니 사람들이 다들 안되고 가련하다는 생각이 갈수록 듭니다.

가족들도 생각하면 참 안쓰럽고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죠.

어쩜 다들 그렇게 곤고한 삶을 사는 지 누구 한사람을 떠올려도 마음이 짠해지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고 나눠 쓰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남들과 나누기에는 사실 우리 쓸 것도 부족한 형편이죠.

며칠 전 뉴스에 보니 숭실대에서 청소하시는 분들이 얼마씩 모아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 장학금을 마련하고 있다고 하더군요.

남을 돕는 일이 다 쓰고 남아서 하는 일은 아닙니다.

내가 줄 수 있는 것을 무엇이든 조금만 나누면 되는 것입니다.

물질이 아니면 말의 위로와 기도로 도울 수도 있는 것이죠.

육체의 생명을 살리는 떡이 없다면 영혼의 생명을 살리는 떡이 있지 않습니까?

복음이라면 더욱 귀한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선행과 자선은 궁극적으로 사람을 살리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입니다.

사람이 한 두번 도와준다고 인생이 바뀌진 않습니다.

어떨 때는 좀 도와주고 싶어도 표도 안날만큼 환경이 너무 절망적이라 엄두가 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누구든 예수님을 만나면 그 인생이 달라지지 않습니까?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분명히 하나님이 우리를 지도하시고 축복의 길로 인도하신다는 것은 너무나 분명한 사실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자선이고 근원적으로 그 사람을 살리는 것입니다.

물론 복음을 전하며 선을 베푸는 일이 당장 눈에 보이는 결실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마치 식량을 물에 허무하게 계속 던져 넣는 것 같다는 것입니다.

문희0집사님이 의료선교팀과 같이 단기선교를 갔었다고 합니다.

그 궁핍한 생활에 찌든 사람들이 수도 없이 몰려오는 데 그들의 빈곤과 질병이 그렇게 해서 조금도 나아질 가망성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한 두번 약을 준다 한들, 한끼 식사를 나눠준들 무슨 소용이 있냐는 막막한 생각이 들더라는 것입니다.

손도 대지 못할 거대한 불행 앞에 계란으로 바위를 깨겠다고 하는 거나 마찬가지란 생각이 들었던 것이죠.

‘하나님, 도대체 왜 우리를 여기 보내신 거예요?

우리가 하는 이 일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다는 건가요?

그때 마음속에서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는 것이 깨달아졌습니다.

‘너는 계란이나 던져라, 바위를 깨는 것은 내가 할 일이다.’

누군가에게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을 전하기 위해 마음을 낮추고 자존심을 꺾으며 애를 쓰고 계십니까?

밥을 사주고 선물을 주고 일손을 거들어주고 계십니까?

지금은 떡을 물 위에 던지는 것 같지만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는 걸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도 개척한 다음부터 교회 인근에 참 전도지와 전도용품 많이 뿌렸습니다.

인근 상가 분들과도 어떻게든 관계를 갖고 전도 기회를 얻으려고 애를 썼지만 모든 것을 다 물에 던진 것처럼 남은 게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중국선교를 위해 중국 땅에 수많은 전도지를 뿌린 교회 목사님이 이런 말씀을 하더군요.

그 전도지로 엿을 싸서 먹던 사람이 무심코 전도지를 읽어보다 복음을 듣고 교회로 나오게 된 일도 있다는 것입니다.

마치 떡을 물에 던지는 것 같이 무모해 보인다 해도 반드시 결과가 있다는 것입니다.

선을 행하다 낙심하지 말지니 때가 이르면 반드시 거두리라.

교회와 성도들이 가장 최우선으로 행해야 할 것은 한 영혼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걸 위해 선을 베풀고 우리를 희생하는 것이죠.

우리는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손해보고 약자의 위치에 서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깍쟁이란 소리 들으면 전도는 거기서 끝입니다.

올해도 한 사람을 전도하기 위해 연초부터 기도하며 마음에 누군가를 품을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줄 믿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세상에 긍휼을 베풀고 서로 불쌍히 여기는 성도들이 다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2. 다음 4절부터 6절까지는 우리의 직업과 일에 대한 교훈입니다.

4절을 보면 풍세를 살펴보는 자는 파종하지 못할 것이요 구름만 바라보는 자는 거두지 못하리라.

풍세를 살피고 구름을 보고, 얼핏 보면 농사 전문가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파종할 때가 되면 어떻게든 씨를 뿌려야지 풍세만 살피고 있을 일이 아닙니다.

거둘 때가 되면 때를 놓치지 말고 거둬야지 구름을 보고 마냥 시기를 늦추고 있을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지나치게 환경이 준비 된 다음 일하려고 하면 결국 아무 것도 못한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우리는 다 준비되어서 일하는 것이 아니라 일하면서 준비가 되어가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농사를 앉아서 머리로만 지을 수 없듯이 생각을 이루려면 시작하고 노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며 안될 조건만 생각하고 좋은 미래를 포기하고 불만족한 환경 속에 자기를 맞추고 삽니다.

혹시 미래에 대한 계획을 갖고도 구체적인 준비나 노력을 안합니다.

뭔가 내 구미에 딱 맞는 기회가 오기를 요행으로 기다리고 있지 말고 무엇이든 시작하라는 말씀입니다.

박순0전도사라는 분의 간증을 제가 읽어보았습니다.

그 간증을 보고 나면 아무도 내가 준비가 안됬고, 가진 게 없고, 능력이 없어 못한다는 소리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불우한 가정에서 태어나 일찍 고아처럼 떠돌며 식모살이에 갖은 고생을 다 겪으며 성장한 분입니다.

초등학교3학년을 겨우 다녔지만 제대로 배우질 못해 한글을 몰랐습니다.

그런데 이 분이 어떻게 교회를 다니며 성경책을 한권 얻었습니다.

혼자 산 속에 버려진 폐가에 살며 낮에는 남의 밭에서 일하고 밥을 얻어 먹고 밤이면 성경을 베껴쓰기 시작했습니다.

16살이 될 때 시작했는 데 2년만에 성경필사를 마쳤을 때 한글이 저절로 터득이 되더랍니다.

그 다음부터 수학책이고 과학책이고 명작, 철학서적까지 매일 밤마다 베끼며 모든 학문을 두루 두루 섭렵한 것입니다.

무려 7백권 이상의 전문 서적을 베꼈다고 합니다.

그동안도 우여곡절 인생은 말할 것도 없이 처절했습니다.

그런데 주일학교 교사를 하며 맡은 두 아이가 한글을 몰라 가르쳤더니 얼마 안되 신기하게 한글을 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두 아이 엄마가 과외를 가르쳐달라는 바람에 시작한 과외가 학원이 되어 나중에 원생7백명을 둔 학원장이 되었다고 합니다.

문학서적을 다 베끼다 보니 얼마나 필력이 좋아졌겠습니까?

책을 세 권이나 저술했습니다.

이희호 여사가 청와대 계실 때 그 책을 읽고 감동을 받아 일곱번이나 부르셔서 말씀을 나눴다고 하더군요.

지금 세계 여러 곳을 다니며 하나님이 자기에게 행하신 놀라운 일을 증거하고 믿음과 소망을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가진 것이 너무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박전도사님보다는 얼마나 많이 가졌습니까?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선하신 계획을 믿고 주저하지 말고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시작하지 않으면 하나님도 시작하지 않으십니다.

처음엔 무엇을 해야 할지, 길이 보이지 않고 꿈도 꿔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진실 되게 의지하면 신기하게 비전을 주십니다.

기도를 하다보면 하나님은 반드시 꿈을 갖게 하시고 소원을 품게 하십니다.

그 일을 위해 준비하고 노력하며 계속 기도할 때 우리 청년들 미래도 열리고 우리 학생들 입학의 문도 열릴 줄 믿습니다.

부모들에게도 안정적인 가정을 꾸려갈 지혜와 여건을 허락하실 것입니다.

5절에 보면 바람의 길이 어떠함과 아이 밴 자의 태에서 뼈가 어떻게 자라는지를 네가 알지 못함 같이 만사를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일을 네가 알지 못하느니라.

일을 시작하면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손길이 반드시 우리와 함께 일을 성취해 가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함께 하시는 방법이 이렇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보기엔 함께 계시는 것 같지도 않고 거들어 주시는 것 같지도 않지만 그게 하나님이 만사를 성취하시는 방법입니다.

하나님의 인도를 믿으시고 약한 무릎을 일으키고 손에 힘을 내시기 바랍니다.

6절에서 우리가 할 일을 분명히 말씀해주시지 않습니까?

너는 아침에 씨를 뿌리고 저녁에도 손을 놓지 말라. 이것이 잘 될는지 저 것이 잘될는지, 혹 둘이 다 잘될는지 알지 못함이니라.

하나님이 하실 일이 있고 우리가 할 일이 있습니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이 일, 저 일을 손에서 놓지 말고 부지런히 기도하며 계속하면 우리 길을 반드시 인도해주신다는 것입니다.

또 이 일이 잘 되지 않더라도 크게 낙심하지 말 것은 저 일이 잘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고 맡기고 최선을 다하는 데도 일이 잘 풀리지 않는다면 다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아무렴 하나님이 무능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이 무정하시겠습니까?

지난 주 우리 딸이 고등학교 때 친구들을 초대해서 스파게티를 만들어 먹겠다고 했습니다.

그 전날 밤에 제가 덜그럭거리며 주방도 좀 치워주고 밥도 먹을지 모르니 밥도 해놓고 김치도 썰어 담아 놓았습니다.

서원이가 그걸 못하겠습니까?

그런데도 자식에게 뭐를 좀 해줘야 할 지 부모들은 너무나 잘 알고 또 저절로 그걸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걸 하다 제가 생각했습니다.

인간부모도 이렇게 제 자식이 필요한 게 뭔지 살펴주는 데 하나님아버지께서 얼마나 내 형편을 아시고 도와주시겠냐는 것이죠.

지금 주님을 의지하고 기도하며 애를 쓰지만 일이 잘 되지 않는다면 되는 것보다 안되는 것이 더 내게 유익이라서 그렇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다른 일이 더 잘 될 수도 있고, 나중에 보면 두 가지가 다 잘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7절부터 10절까지 인생을 대하는 삶의 방식을 살펴보겠습니다.

7절에서 갑자기 솔로몬은 짐짓 분위기를 바꿔 말합니다.

빛은 실로 아름다운 것이라. 눈으로 해를 보는 것이 즐거운 일이로다.

사람이 여러 해를 살면 항상 즐거워할지로다

우리의 눈으로 해를 바라보며 사는 해 아래의 삶이 즐겁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인간이 누리는 복이라는 것이죠.

‘소견서 써 줄테니 큰 병원에 가보십시오’ 이런 소리 들어보셨나요?

조금 전 까지 평범하고 지루하기만 했던 해아래 날이 갑자기 놓쳐버린 파랑새처럼 아름다워 보이지 않던가요?

거리를 활보하는 보통 사람들의 모습이 왜 그렇게 당당해 보이는 지.

구질구질해 보이던 좀 전의 내 삶으로 다시 돌아갈 수만 있다면 하는 간절함이 애절하게 끓어오르죠.

우리가 지금 바로 그런 소중한 날들을 받아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잃을 때 아쉬워하지 말고 지금 작은 것들에 만족하고 평범한 행복을 누리며 사는 것이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분깃이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제가 보톡스를 좀 맞았습니다.

이가 시려서 치과에 갔더니 이에 실금이 많이 갔다고 합니다.

이를 악무는 습관 때문에 근육이 이미 근육이 뭉쳐있어서 계속 이를 악물게 된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보톡스를 맞아서 근육을 이완시켜 줘야 한다는 겁니다.

너무 이를 악물고 사는 게 좋지 않습니다.

모두가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길 간절히 바랍니다.

9절에 보면 청년들이여 네 어린 때를 즐거워하며 네 청년의 날들을 마음에 기뻐하여 마음에 원하는 길들과 네 눈이 보는 대로 행하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그러나 하나님이 이 모든 일로 말미암아 너를 심판하실 줄 알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네 멋대로 살았다간 호된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 것이다라는 말씀은 아닌 것 같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모든 일에 주권자이시고 심판하실 것을 기억하며 적당하게 우리에게 주신 인생을 즐거워하며 기쁨을 누리며 성실하게 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하나님만 생각하며 거룩하게 살기는 어려운 일입니다.

우리의 겉과 속이 다 이 땅에 맞게 태어난 세속적인 사람들입니다.

모든 것을 행하고 누릴 때 다만 하나님 앞에 결산할 날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믿음 안에서 적당한 것을 누리며 영육간에 균형 있는 삶을 살라는 말씀입니다.

어떤 목사님이 하나님도 어쩔 수 없으신 것이 네 가지 있다고 하더군요.

과용한 지출, 과로한 건강, 과언하는 입술, 과식한 위장.

우리의 신앙이 현실 속에 골고루 스며들어 거룩하고 안정되고 조화로운 아름다운 삶이 되길 바랍니다.

우리가 평생을 즐거워하며 살기엔 힘드는 캄캄한 날들을 무수히 만납니다.

그래서 마지막 절에 근심을 떠나게 하라고 말씀합니다.

한 두가지로 깊이 근심하면 나머지 모든 것이 있으나마나 누리고 기뻐하지 못합니다.

어느 집이든 한 두가지 깊은 시름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 문제들을 근심으로 애를 태우지 말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며 선하게 해결될 방법을 찾으며 긍정적인 태도로 대면해야 합니다.

시간이 가고 힘써 노력하는 중에 반드시 하나님이 만사를 이루십니다.

또 악이 네 몸에서 물러가게 하라고 하십니다.

악을 행하고 악을 품고 있으면 하나님의 선하신 인도와 축복은 기대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청춘과 생명의 날은 덧없이 빨리 지나가고 우리는 전능자의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오늘 허망한 인생을 보내고 곧 전능하신 하나님을 대면할 솔로몬의 후회와 권고를 들었습니다.

12장에서 솔로몬은 이렇게 전도서를 마칩니다.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리라

우리는 오직 하나님을 경외하며 해아래서 사는 모든 날을 즐거워하며 감사하고 내게 주신 모든 것으로 나누며 예수님의 뜻을 실천하는 모두가 되길 축복드립니다. 아멘.

2014년1월12일 주일설교 남수연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