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서

전도서7장1절-14절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남수연 2017. 9. 22. 14:53

성경은 우리의 이해와 풍부한 신앙정서를 위해 여러 장르의 말씀으로 기록되었습니다.

잠언이나 전도서 같은 성경은 삶의 지혜를 집중해서 다룬 것으로 지혜서라고 부릅니다.

전도서를 보면 마치 망원렌즈를 통해 세상을 사방에서 조망해 보여주는 것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전도서의 언어들은 사람의 마음을 꿰뚫는 것 같이 예리합니다.

그런 매력에 빠져 전도서를 읽게 되지만 전도서는 쉽게 맥이 잡히는 성경은 아닙니다.

짙게 풍기는 허무주의의 냄새는 물론이고 우리가 알고 있던 신앙의 관점과 다른 것 같은 이야기가 쏟아져 나옵니다.

저자인 솔로몬이 원칙과 해답 없이 말을 쏟아 놓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게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인생은 예측불가이고 인간이 통제할 수 없이 까다롭고 온통 부조리와 모순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될 줄 알았는데 결과가 이상하게 비틀어져 버리는 게 인생입니다.

그러니까 전도서에 이랬다 저랬다 하는 것 같은 말들은 솔로몬의 지혜가 인생을 제대로 관찰한 것입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죠.

사람이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수고와 마음에 애쓰는 것이 무슨 소득이 있으랴 일평생에 근심하며 수고하는 것이 슬픔뿐이라 그의 마음이 밤에도 쉬지 못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

인생을 좀 살아 본 사람들은 누구나 한편 공감할 말씀이죠.

그런데 곧 이어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이 먹고 마시며 수고하는 것보다 그의 마음을 더 기쁘게 하는 것은 없나니 내가 이것도 본즉 하나님의 손에서 나오는 것이로다

좀 전엔 슬픔이라고 했다 이번엔 기쁨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도 어떨 때는 세상이 살만하다 했다가 어떨 때는 이놈의 세상 지긋지긋하다 그러잖아요?

삶의 두 얼굴인 것입니다.

전도서는 인간의 입장에서 볼 때 솔직하게 인생을 잘 모르겠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만 나열해 놓으면 지혜서라고 할 수 없죠.

이 까다롭고 골치 아픈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잘 사는 것인지를 가르쳐야 지혜서인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는 솔로몬이 전달하고자 하는 인생의 지혜를 이미 깨달은 분도 있을 것입니다.

아직 인생의 의미와 목적을 시원하게 발견하지 못하고 예측불가한 인생 앞에서 막연함을 느끼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오늘 솔로몬을 통해 주신 말씀을 통해 가장 귀중한 지혜를 발견하고 깨닫는 시간이 되게 해주시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우리가 오늘 알고자 하는 것은 솔로몬의 관찰대로 고달프고 불공정하고 부조리한 이 세상을 어떤 식으로 살아갈 것이냐입니다.

물론 우리는 믿음의 방식으로 살아가지만 지혜서에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더 배우고 살아가는 지혜도 더 깨달으려는 것입니다.

1절부터 10절까지를 보면 낫다라는 단어가 계속 나옵니다.

좋은 이름이 좋은 기름보다 낫다,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낫다.

슬픔이 웃음보다 낫다, 지혜자의 책망을 듣는 게 우매자의 노래를 듣는 것보다 낫다.

일의 끝이 시작보다 낫다, 참는 마음이 교만한 마음보다 낫다.

이렇게 본문이 가르치는 대로 더 나은 쪽을 선택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지혜서가 더 낫다고 하는 것이 세상에서 선호하는 것과 반대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지혜서가 두 방식을 분명히 비교하기 때문에 세상이 어떤 입장에 있는지도 분명히 드러납니다.

세상은 분명히 나쁜 입장에 놓여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을 따르면 안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좋은 이름이 좋은 기름보다 낫다고 말씀 한데서 세상은 명예보다 실질적 이득을 좇는다는 것을 알 수 있죠.

사실 대부분 명분을 내세우지만 결국 실리잖아요?

탐욕과 뇌물이 사람의 명철을 망하게 한다는 말이 얼마나 현실적입니까?

세상은 탐욕과 뇌물로 굴러간다는 뜻입니다.

그 결말이 무엇인지는 잠깐만 뉴스를 봐도 명백히 드러납니다.

또 죽음과 인생의 끝을 염두에 두는 것이 더 낫다고 지혜서는 말씀하지만 세상은 죽음을 묵상하며 살지 않습니다.

살 궁리를 하면서 살기에 바쁘죠.

이 땅에서 살 것만 생각하면 영원히 죽는다는 것이 성경의 진리입니다.

그렇다면 똑같은 세상을 살아가면서 성경이 말씀하는 가치와 세상이 좇는 가치가 왜 이렇게 다를까요?

사실을 어디까지 아느냐가 문제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가 있는 데 그것은 바로 지혜입니다.

사실을 사실대로 알게 하는 것이 바로 지혜입니다.

그러려면 겉만 봐선 안되고 속에 담긴 것까지 봐야 하죠.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는 것도 보아야 합니다.

세상은 겉으로 드러난 것만 보고 세상적 가치관을 만들어 낸 것입니다.

지혜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만물의 원인자이신 하나님, 이 세상의 내면의 실체까지 볼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이런 지혜를 가져야 오늘 솔로몬이 말한 더 나은 삶을 이해하게 되고 그렇게 살아 갈 의지가 생깁니다.

그걸 모르면 그냥 세상 가치대로 살고, 결과는 결코 더 낫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전도서는 세상에 대한 처세와 철학적인 지혜가 아니라 현세와 내세를 통찰하는 그 지혜를 가르치고 그 지혜를 얻으라는 책인 것입니다.

 

이 지혜가 얼마나 값진 것인지 11절에서 먼저 이렇게 말씀합니다.

지혜는 유산 같이 아름답고 햇빛을 보는 자에게 유익이 되도다.

지혜를 세상에서 가장 중시하는 재물, 상속받은 기업에 비유하는 것은 사람들이 가장 위대하게 여기는 돈에 견주어 그 가치를 비교해 주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돈만큼 대단하고 절실히 필요한 것이 또 있을까요?

어떤 목사님이 이런 말씀을 하더군요.

자기 어머니께서 치매에 걸리셔서 아들도 못 알아보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재산을 아들에게 넘겨줘야 하는 데 꿍쳐 놓고는 죽어도 내놓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자식은 못 알아보게 되도 돈은 알아본다는 것이죠.

이 목사님의 장모님은 아흔 살이신데, 반대로 정신은 말짱한데 몸을 가누지 못해 꼼짝없이 누워 지내고 계십니다.

노부모님들의 현실이죠.

그런데 간병인을 쓰자 해도 돈을 아낀다고 거부해서 딸들만 돌아가며 생고생을 한다고 합니다.

이런 걸 보면 사람이 죽을 때까지 의존하는 게 돈이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12절을 보면 지혜의 그늘 아래에 있음은 돈의 그늘 아래에 있음과 같다고 합니다.

돈이 그늘이 된다는 건 모두가 인정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돈 많은 사람들은 대개 하나님의 보호 같은 것 필요하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그런데 지혜도 돈처럼 그늘이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전도서가 말씀하려는 것은 돈 그늘에 기대는 것보다 지혜의 그늘이 더 좋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돈은 영원한 생명으로 살려낼 수 없지만 지혜는 그 지혜를 가진 자를 살리기 때문입니다.

돈이 사람에게 그늘이 되는 것은 해 아래, 이 땅에서 사는 동안입니다.

호흡이 끊어지는 순간 돈은 더 이상 사람과 동행하지 못합니다.

지혜는 이 땅 뿐 아니라 영원히 사는 곳까지 사람과 동행하고 인도합니다.

그렇다면 이 지혜가 무엇인지 정체가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하죠.

단순히 세상에서 말하는 뛰어난 지적능력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야 솔로몬이 지구상에서 최고의 지혜를 가졌던 사람입니다.

그 지혜로 이 세상과 인생을 손아귀에 쥐고 다뤄보려고 했지만 결론이 무엇입니까?

능력 밖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수고가 헛수고가 되었다고 고백한 것이죠.

최고의 지능, 최고의 권력을 가졌던 솔로몬이 백기를 들었다면 우리도 내 힘으로 살아보겠다는 걸 빨리 포기하는 게 낫습니다.

솔로몬은 일평생을 낭비하고 실패와 허탈 속에서 노년에야 참 지혜를 알게 된 것입니다.

지혜가 생기니 인생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도서의 결론이 무엇입니까?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리라

세상에 이걸 깨닫는 사람이 얼마나 될 것 같습니까?

오늘 본문이 현실과 내세의 더 좋은 삶을 선택하도록 가르쳐 주시지만 이 지혜가 없다면 그저 이상적이고 아름다운 이야기일 뿐입니다.

지혜가 깨닫게 해주어야 내세를 생각하게 됩니다.

교만한 마음보다 참는 마음이 낫다는 것을 알게 되고 당장 눈앞의 뇌물보다 성도의 거룩한 이름을 선택합니다.

슬픔을 통해서도 웃음보다 더 귀한 것을 얻어내는 것입니다.

삶은 단순히 남보다 더 누리고 더 즐기며 사는 가벼움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이고 있는 묵직한 것임을 알게 되는 것이죠.

이런 지혜를 모두가 받으셔야 합니다.

 

어떻게 이런 지혜를 받을 수가 있습니까?

오직 예수님을 통해서만 받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그 나라에 대한 모든 비밀이 예수님 안에 감추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가지면 지혜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바로 지혜 자체라는 것을 명시한 성경은 너무나 많습니다.

솔로몬이 지은 또 다른 지혜서인 잠언을 보면 이미 지혜가 인격적인 존재로 설명된 부분들이 계속 나옵니다.

예를 들면 잠언120절에서 지혜가 사람들을 초청한다는 말을 합니다.

지혜가 길거리에서 부르며 광장에서 소리를 높이며

나의 책망을 듣고 돌이키라 보라 내가 나의 영을 너희에게 부어 주며 내 말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지혜는 하나님을 알고 경외하는 지식을 뛰어 넘어 성령을 부어주시는 하나님 자신이라는 놀라운 말씀입니다.

잠언8장에 보면 그 지혜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하나님이 하늘과 땅을 지으실 때) 그 곁에 있어서 창조자가 되어 날마다 그의 기뻐하신 바가 되었으며 항상 그 앞에서 즐거워하였으며

하나님이 세상을 만드시던 그 때 지혜가 함께 창조자가 되었다는 놀라운 말씀입니다.

지혜가 누구를 말하는 것일까요?

바로 태초부터 하나님아버지와 함께 하신 성자하나님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가장 큰 가치와 권세를 가진 돈과도 비교할 수 없는 지혜, 우리에게 생명까지 주시는 그늘이 되시는 분은 누구십니까?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 안에 있는 지혜를 얻게 되면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알아가게 됩니다.

그전까지 하나님은 알지 못하는 신일 뿐입니다.

 

솔로몬은 그 지혜로 위대하신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알고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을 보라 하나님께서 굽게 하신 것을 누가 능히 곧게 하겠느냐.

이 경외심과 경탄이 묻어 나오는 솔로몬의 고백을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을 보라.

하나님을 아는 지혜가 생기면 하나님이 일하고 계시는 게 보입니다.

이 엄청난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만물에 법칙을 심어 놓으신 하나님이 보입니다.

그 하나님이 지금도 일하시고 나를 위해 일하시는 게 보입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것은 영원하고 그 무엇으로도 바꿀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구부려 놓으시면 아무도 못 폅니다.

사람이 가장 미련한 것이 하나님이 구부리고 계신 것을 펴려고 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하나님이 구부리시고, 하나님이 펴시도록 자신을 맡기는 것이 지혜로운 것입니다.

뒤틀린 본성에서 나오는 죄와 제어하기 힘든 삶의 주도권을 하나님께 의탁할 때 하나님은 우리 인생을 구부리고 또 펴시며 가장 알맞은 모양을 이뤄가십니다.

왜 교회를 다니고 신앙생활을 하는데 여전히 삶이 불투명하고 혼돈이 있고 문제들이 정리가 안됩니까?

하나님이 구부릴 곳을 구부리고 펼 곳을 펴도록 자신을 맡기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런 답답한 인생을 인도하시기 위해 적절하게 준비하신 것이 있습니다.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 보아라 이 두 가지를 하나님이 병행하게 하사 사람이 그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

형통한 날과 곤고한 날을 나란히 준비하셔서 당하는 일들을 통해 사람들을 가르치고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늘 형통한 날이 계속되길 바라지만 그건 불가능한 희망사항입니다.

또 괴롭고 어두운 날 속에 모든 게 끝날 것 같지만 생각지도 않은데서 도움이 오고 기뻐할 날이 온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곤고한 날에 죽고 싶어도 못 죽습니다.

인생의 곤고한 날을 사람의 힘으로 피할 수 없고 형통한 날을 무한정 누릴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인간이 자신의 한계를 깨닫고 전능자를 찾고 의지하도록 디자인 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할 일은 형통한 날을 주실 때에 기뻐하는 것입니다.

오늘 건강이 형통해서 맑은 가을하늘 아래를 걸어서 교회에 나왔다면 기뻐할 일입니다.

큰 분란이 없고 소소한 행복을 느끼는 정도만 해도 형통한 삶임을 기억하고 기쁘게 살아가는 모두가 되시길 바랍니다.

지금 곤고한 시절을 지나는 분들은 되돌아 보라고 하십니다.

슬픔이 기쁨보다 나음은 마음을 좋게 하기 때문이라고 앞에서 말씀하셨죠.

곤고하고 괴로운 시절에 눈물짓는 것은 하나님을 경시하고 살아오던 삶을 되돌아 보고 돌이킬 수 있는 기회가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큰 일을 당해 곤고해지면 정신없이 탈출구를 찾으려 앞으로 내달립니다.

그러나 성경이 주시는 지혜는 오히려 되돌아 보라는 것입니다.

너무 힘들 때는 오히려 힘을 빼라는 말도 있잖아요.

되돌아 볼 때 어디서 문제가 시작되었는지가 보입니다.

뿐만 아니라 과거 힘든 일을 어떻게 지나왔는지, 힘든 일 뒤에 어떤 좋은 날들이 다시 찾아왔었는지를 되돌아 보고 용기를 내라는 것입니다.

그 때 도와주셨던 하나님께 다시 도움을 구하라는 것입니다.

지금의 곤고한 삶도 지나고 또 형통한 날들이 올 것입니다.

형통한 일들만 우리 삶에 있다면 우리 믿음은 훨씬 더 얄팍하고 형식적이 되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마음과 육체가 고난을 당하는 어두운 시절 하나님은 우리 영혼의 푸른 녹을 닦아 내십니다.

고통 당하는 그 아픔이 헛되지 않도록 우리의 마음을 강하게 연단하시고 믿음으로 예수님께 우리를 더욱 결속되게 하십니다.

사람들 편에서 보면 이런 예측불가의 인생이 종잡을 수 없어 두렵지만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을 의도적으로 이끌어 가신다는 것을 알면 어려운 일, 곤고한 일들도 용기를 얻어 헤쳐나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유명한 한 신학자는 이런 기도문을 남겼습니다.

하나님이여, 내가 바꿀 수 없는 일은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의 평정을, 내가 바꿀 수 있는 일은 바꿀 수 있는 용기를 주시옵소서. 그리고 이 둘의 차이를 분별할 줄 아는 지혜를 나에게 허락해 주시옵소서.”

곤고한 날에 되돌아 본다는 게 이런 것입니다.

모든 고통을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쓴 열매를 담담히 받아들이게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또 바꿀 수 있는 일이라면 하나님을 의지해서 힘써 벗어날 힘과 용기를 달라고 기도하며 이겨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혜는 세상일에 심취해 살아가는 데 어느날 갑자기 터득하게 되는 게 아닙니다.

잠언에서 지혜가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내게 들으며 날마다 내 문 곁에서 기다리며 문설주 옆에서 기다리는 자는 복이 있나니

예수님을 골똘히 생각하고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그 뜻을 깨달아 살기 원하실 때 주신다는 것입니다.

한 주간도 삶이 바쁘지만 성경을 펴고 읽으며 뜻을 생각하고, 내게 무엇을 고치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곰곰이 생각하며 살길 원합니다.

형통한 순간이나 곤고한 순간이나 예수님과 함께 하시길 바랍니다.

우리 삶의 구부러진 곳을 펴시고 헛된 세상에서 가장 나은 삶을 누리며 살도록 축복해 주실 것입니다.

 

2017년9월10일 주는나의산성교회 남수연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