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 한국축구 기적의 결승골에 모두가 즐거우셨습니까?
밖이 갑자기 떠들썩해서 TV를 틀어보니 결승골이 들어갔더군요.
골을 넣은 임창우선수가 그라운드에 엎드려 기도하는 모습이 참 아름다웠죠?
그런데 북한 선수들이 어찌나 짠해보이던지, 남북전이 한일전과 다른 것은 우리가 한민족이라서 그런가봅니다.
한편 지난 주 한 대형교회 목사가 사기혐의로 징역2년에 법정구속되었다는 소식을 들으신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 목사님이 북한에 천명 모이는 교회를 세우는 조건으로 미국선교단체에서 5억원을 지원받았다고 합니다.
그게 이행되지 않자 이자와 위약금으로 150억원을 물게 되었다고 하죠.
이 돈을 물지 않으려고 불법으로 위조된 문서를 법원에 제출했다 들통나 결국 구속된 것입니다.
13만명의 그 교회 교인들이 받을 충격이 어떨지, 그렇잖아도 기독교를 못마땅하게 보는 이 사회가 또 어떤 시선을 보낼 지 착찹 합니다.
또 한 가지 사건은 성추행사건으로 사임하고 신촌에 교회를 개척한 목사 이야기입니다.
최근 목사의 성추행사실을 폭로한 책이 발간되며 한 포털사이트에 검색어1위에 오르기도 했습니다.
이 분은 80명 교인이 모이던 교회를 삼만 명 교인들로 부흥시킨 스타목사였습니다.
이게 다 지난주에 일어난 일입니다.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인생에는 위기를 경고해 줄 파수꾼이 필요합니다.
인간은 자기가 무슨 짓을 하는 지 모를 만큼 어리석기 때문입니다.
캐디사건의 박희0 의원을 보십시오.
정치 말년에 그런 추문에 말려들지를 누가 알았겠습니까?
오늘 본문도 한없이 추락한 민족 이스라엘에 대한 말씀입니다.
한 때 하나님의 선민으로 다윗과 솔로몬왕 시대에 가나안을 재패했던 이스라엘이 지금 바벨론의 침략을 받고 나라가 완전히 사라질 위기에 놓였습니다.
이미 2차에 걸쳐 예루살렘은 유린당하고 많은 포로들이 바벨론 땅으로 끌려와 있는 상황입니다.
에스겔선지자는 바벨론의 1차 침략 때 바벨론 땅으로 끌려 와 포로 사회에서 하나님께 받은 말씀을 증거 했던 선지자입니다.
포로로 끌려간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선지자를 통해 그들이 회개하고 돌아오길 간절히 바라셨지만 마지막 경고까지 무시한 이스라엘은 본장21절에서 완전히 망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사로잡힌 지 열두째 해 열째 달 다섯째 날에 예루살렘에서부터 도망하여 온 자가 내게 나아와 말하기를 그 성이 함락되었다 하였는데
일차 포로가 잡혀온 지 12년만에 예루살렘이 완전히 함락되고 국가가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12년 동안 선지자 파수꾼을 세워 경고하고 죄악을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길 원하셨지만 그것 또한 수포가 되고 말았습니다.
오늘 하나님이 하시는 경고를 그들이 듣고 돌이켰다면 치욕스럽고 끔찍한 최후의 멸망은 분명히 면했을 것입니다.
2절부터 6절까지의 말씀을 보면 왜 이스라엘이 끝도 없이 추락해 처참하게 멸망했는지를 잘 보여주는 비유입니다.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심판의 칼을 보내실 때, 백성 중에 세워진 파수꾼이 그걸 보고 확실히 경고의 나팔을 불었지만 누군가 정신을 차리지 않다 칼에 맞아 죽었다면 자기 책임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칼이 임하는 걸 보고도 선지자가 경고나팔을 불지 않아서 백성이 칼맞아 죽었다면 그 죽음은 억울한 게 아니고 자기 죄 때문이란 말씀입니다.
그렇지만 나팔을 불지 않은 파수꾼에게도 책임을 물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지금 다 망했다는 건 무슨 뜻입니까?
파수꾼은 경고나팔을 제대로 불지 않았고 백성들은 자기 죄악 중에 죽었다는 말입니다.
깊은 시름을 앓고 있는 한국 교회에 큰 경각심을 주시는 말씀입니다.
오늘 이 말씀이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이 있을 것입니다.
시대는 변해도 인간은 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분명한 음성을 듣도록 성령께서 우리의 귀를 열어주시길 간절히 소원합니다.
첫째는 우리에게도 하나님이 세우신 파수꾼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일차적으로 불신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어진 경고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도 파수꾼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우리의 원수나 대적 때문이 아닙니다.
2절에 보면 인자야 너는 네 민족에게 말하여 이르라 가령 내가 칼을 한 땅에 임하게 한다 하자 라고 말씀합니다.
파수꾼이 필요한 것은 원수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칼을 보내시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국가나 민족이나 개인이나 적을 대비하기 위해 파수꾼을 세우죠.
남북이 대치중인 우리는 경계병을 세우는 게 어떤 것인지 너무나 잘 압니다.
몇년 전 노크 귀순병 기억나실 것입니다.
한 북한 군인이 삼중 철책을 넘어 최전방 내무반까지 찾아와 친절하게 노크를 하고 귀순의사를 밝혔던 일이 있었죠.
당시 조카가 전방에서 복무하고 있었는데 그날 마침 근무조에 걸렸던 친구사병이 그 일로 영창신세 좀 졌다고 합니다.
경계병이 제대로 지키지 못하면 큰일 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곳곳에 방범CCTV를 달고, 현관엔 고기능 자물쇠를 달고 범죄에 방비합니다.
언제 닥칠지 모르는 재난에 대비해 보험을 들고 노년의 가난과 질병에 대비해 노후대책을 세우고 건강을 지키려고 애를 씁니다.
세상에서 자기 소유와 안전을 지키려고 엄청 여러 종류의 파수꾼을 세우지만 오늘 2절을 보면 이것으로 인생을 다 방비했다 생각하는 사람들의 어리석음을 말씀합니다.
내가 칼을 한 땅에 임하게 한다 하자.
가장 두려워해야 할 것은 하나님이 보내시는 칼입니다.
하나님이 심판의 칼을 보내시면 인간의 방비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알지만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하지 않고, 불순종하며 세속과 죄의 본성을 쫒아 멋대로 살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무엇으로 망했습니까?
하나님이 보내신 적국의 칼입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칼을 피하기 위해 우리에게 파수꾼이 필요한 것입니다.
칼 맞을 짓을 할 때 경고 나팔을 불어 줄 파수꾼이 필요하다는 것이죠.
그런데 그 파수꾼에 대해 7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꾼으로 삼음이 이와 같으니라. 그런즉 너는 내 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에게 경고할지어다.
이 말씀은 하나님이 친히 파수꾼을 세워주신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왜 멸망했습니까?
자기들이 세운 거짓 선지자와 지도자들의 안일한 위로와 거짓 메시지를 좋다고 듣고 하나님이 보낸 진짜 선지자들을 죽였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오늘 본문에서 비슷한 내용이 두 번 반복된 것 같지만 2절의 파수꾼비유와 에스겔을 파수꾼으로 세우시는 내용은 완전히 대비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2절에 보면 그 땅 백성이 자기들 가운데 하나를 택하여 파수꾼을 세웠다고 하시죠?
이 말씀은 참 선지자는 다 죽이고 자기끼리 코드가 맞는 선지자를 세우고 듣기 좋은 말만 서로 하다 칼이 오는 지도 모르고 피차 망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본장 30절을 보면 이 사람들이 정신을 못 차리고 포로사회에서도 여전히 악습을 되풀이 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이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자, 에스겔이 무슨 말을 하나 가서 들어보자
하나님은 이들에 대해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들은 네가 고운 음성으로 사랑의 노래를 하며 음악을 잘하는 자 같이 여겼나니 네 말을 듣고도 행하지 아니하거니와
듣기 좋은 말만 기대하고 에스겔의 경고는 대수롭지 않게 듣더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인들을 생각할 때 시사하는 바가 있지 않습니까?
조계종에서 조사한 종교만족도 설문조사에서 본인의 만족도가 가장 높은 종교가 기독교로 나왔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천주교와 불교를 기독교보다 더 신뢰한다는 통계가 나왔습니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우리끼리 위로하고 축복하고 교회 안에서 문화생활을 누리며 만족하는 것이라는 의미가 아니겠습니까?
그들만의 잔치라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때는 온 백성이 교회를 칭송했다고 사도행전은 분명히 증거합니다.
이스라엘이 그들만의 잔치를 하다 칼을 받은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7절에 에스겔을 세우실 때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는 지를 보십시오.
너는 내 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에게 경고할지어다.
파수꾼은 하나님의 입의 말을 그대로 전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정확하게 경고할 파수꾼은 하나님 자신 밖에 없으시다는 말씀입니다.
사람은 다 거기가 거기라 자기 유리한 대로 말하고 자기 듣기 좋은 말만 듣더라는 것이 이스라엘 역사가 보여주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를 하나님의 징계의 칼에서 대비할 수 있게 하는 파수꾼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께 듣고 선지자와 제자들이 명령하신 대로 기록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끼리 아무리 서로 좋은 말 해봤자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말씀이 경고하는 것을 들으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날마다 묵상하고 말씀이 오늘 내게 무얼 명령하시는 지를 주의해서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따른다고 하지만 얼마나 약하고 악한 존재들입니까?
앞 서 말씀드렸던 목사님들, 눈덮힌 산 속에서 산짐승도 무서워하지 않고 기도하던 분입니다.
하루 여덟시간을 기도했다는 분입니다.
이 분들이 모든 거짓을 버리라는 주님의 말씀의 경고를 받았더라면 위조문서를 만들어 사법부를 모독하고 그 죄로 2년 징역형을 살지는 않았을 텐데.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라는 말씀을 주의했더라면.
음란을 버리고 깨끗한 마음으로 형제와 자매를 대하라는 바울사도의 권면을 주의했더라면 성추행목사라는 치욕스런 딱지가 붙지 않았을 텐데.
우리는 이런 분들보다 더 기도도 적게 하고, 믿음의 담력도 부족하니 더욱 하나님의 말씀이 주시는 경고를 매일 주의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신구약성경에서 인간의 최고의 불행은 하나님의 말씀에 주의하지 않는 것이라고 수도 없이 반복, 또 반복해서 우리에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눈치가 없고 깨닫지를 못해서 그렇지 하나님의 명령대로 살지 않고 되는대로 살다가 칼에 베인 상처가 엄청 많이 있을 것입니다.
작은 상처가 무수히 나도 모르다 크게 베이고 나면 그때서야 하나님의 징계라는 것을 깨닫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기도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말씀대로 지키며 하루하루를 살아간다면 하나님은 오히려 우리의 상처를 고치시고 은혜로 우리 삶을 에워싸 주실 것입니다.
말씀대로 살지 않아서 삶이 고통스럽고 견디기가 힘이 든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의 속죄 덕분에 은혜 안에 살고 있으니 무슨 짓을 해도 하나님이 당연히 우리 편이 되셔야 한다고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오해이고 착각입니다.
하나님은 단 한번도 죄를 편들어 주신 일이 없고 악과 짝한 일이 없으십니다.
아무리 하나님이 택하시고 구속사의 파트너로 공들여 키우신 이스라엘일지라도 율법을 버리고 악행을 행할 때 하나님이 그들을 떠나셨습니다.
그들을 징치하시기 위해 이방국가의 침략이라는 칼을 보내셔서 맨발에 오랏줄로 묶어다 12000킬로미터나 먼 바벨론 땅에 포로로 팔아버리신 것입니다.
구약의 하나님은 심판하시는 두려운 하나님이고 신약의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십니까?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이 주신 계명을 따라 사는 것에 무관심하고 죄를 짓는다고 호적을 파지는 않으시지만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를 받으신 영의 아버지는 신실하게 우리를 징계하시며 거룩한 자녀가 되도록 절구공이로 우리의 죄와 더러움을 자근자근 빻기도 하신다는 것을.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는 순간 우리는 죄를 짓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를 잘 판단해보면 말씀대로 행하지 않는 순간 분명히 죄를 짓고 있다는 것입니다.
죄를 지으면 죄에 발목이 잡히고 죄의 열매가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 게 당연한 결과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성도들을 신실하게 징계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이스라엘에 보내신 하나님의 칼은 죽이는 칼이 아닙니다.
바벨론의 포로생활에서 다시 돌이키시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 이 칼은 완전히 멸절시키는 칼이 아니라 수술용 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시련과 아픔이 있다면 우리의 병든 곳을 수술하고 고치셔서 완전하게 회복시키시기 위함이라는 것이죠.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세워주신 파수꾼의 경고나팔에 항상 주의하고 즐거이 순종하며 사는 성도에겐 징계의 칼을 두려워 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렇게 살 때 매일 위로와 사랑과 풍성한 은혜 안에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길 간절히 원합니다.
다음 하나님은 우리에게 파수꾼의 사명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은 에스겔처럼 하나님을 대신해서 죄인들에게 경고해야 할 파수꾼이 되어야 합니다.
아무렴 이 고약한 세상에 에스겔 같은 선지자 한 명만을 파수꾼으로 세우시겠습니까?
목사만 파수꾼으로 세우시겠습니까?
복음을 깨닫고 예수님이 영생으로 가는 길이라는 것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은 다 세상을 향한 파수꾼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달으셨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악인에게 돌이켜 그 길에서 떠나라고 경고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칼이 가까왔음을 경고하는 나팔을 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파수꾼이 경고나팔을 불지 않아 죄인이 죄 가운데 죽을 경우 그 피를 네 손에서 찾겠다는 엄중한 말씀을 하십니다.
이 말씀은 전도하지 않아 이웃 사람이 죽으면 우리에게 책임을 물어 우리도 지옥 간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다만 가족과 이웃을 전도하지 않는다면 그들의 불행과 심판 중에 우리도 함께 어려움을 당할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가족 중에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 있을 경우 가정에 크고 작은 시련들이 끊이지 않는 것을 많이 봅니다.
그럴 경우 한 가족으로서 함께 고통을 당할 수 밖에 없는 것이죠.
사회나 국가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도들이 전도의 사명을 감당하지 않고 소극적으로 신앙생활을 할 경우 불신자들이 많아지면 사회가 부패하고 악이 만연하겠죠.
그 가운데 살아가는 성도들이 어떻게 홀로 평안 가운데 살 수 있겠습니까?
소돔 땅을 선택했던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소돔의 악행으로 인해 그 심령이 상했다고 말씀하지 않습니까?
소돔이 망할 때 하나님의 은혜로 겨우 몸 하나 건진 사실은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이 큽니다.음란하고 퇴폐적이고 비인격적인 사람들로 가득한 직장에서 근무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성도들이 적극적으로 전도하지 않은 결과는 결국 자기 자신도 폐해를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 편에서 보실 때, 분명히 믿지 않는 사람들의 멸망을 알면서도 입을 열지 않는 성도들이 야속하실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이 왜 직접 세우신 선지자에게 입을 열지 않을 경우 피 값을 찾겠다고 말씀하십니까?
복음을 듣지 못하고, 죄악 된 행위에 대한 경고를 듣지 못해 죽어가는 사람들도 세우신 선지자 못지않게 하나님께 귀중하다는 뜻입니다.
오래 전 미국 메사추세츠주의 한 법정에서 흥미로운 사건을 다룬 적이 있습니다.
어느 날 부둣가를 거닐던 사람이 로프에 걸려 깊은 바다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차가운 바닷 속에 빠지며 다리에 쥐가 난 이 사람은 허우적거리며 살려달라고 외쳤지만 결국 물에 빠져 죽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물에 빠져 죽은 사람으로 부터 불과 몇 미터도 되지 않은 거리에서 한 청년이 한가롭게 일광욕을 즐기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죽어가는 것을 바라만 보고 있었던 것이죠.
나중에 이 사실을 알게 된 익사자의 가족들이 분개해서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결과가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익사자의 가족이 재판에서 패소했습니다.
법정의 판결은 부둣가에 있던 사람이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해야 할 법적 책임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정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죄악의 깊은 물에 빠져 죽은 사람을 구하지 않은 책임을 멀뚱히 바라만 보고 있던 사람에게 반드시 물으신다는 말씀입니다.
제가 아는 한 교사가 성수대교가 붕괴되던 그날 아침 출근길에서 그 상황을 눈으로 목도했다고 합니다.
강남 집에서 출발해 택시를 타고 성수대교를 건너려는 순간, 앞에 있는 택시 바로 앞에서 성수대교가 끊어진 것입니다.
앞에 있던 택시가 순식간에 차를 돌리며 뒤에 있는 이 선생님이 탄 택시기사를 향해 소리를 치더랍니다.
‘돌려!’
선생님이 탄 택시기사가 노련한 덕에 아슬아슬하게 차를 돌려 위기를 모면한 것입니다.
만일 앞 차 운전자가 경고하지 않고 내뺐다면, 속도를 내던 뒷 차는 앞으로 곧장 달려 한강에 추락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우리가 믿고 있는 것이 정말 사실이라면 먼저 죽음의 다리를 건넌 사람들은 다 어떻게 되었을까요?
다음 주일엔 새가족초청예배를 드립니다.
누군가를 권해서 교회로 인도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전도를 해본 사람은 다 압니다.
친하면 친한대로 어렵고, 먼 관계라면 멀어서 어렵습니다.
착해서 잘 따라올 것 같은 사람도 절대 순순히 딸려오지 않는 것이 전도입니다.
이번에도 여전히 우리를 실망시키고 더 기다리게 하는 친구나 가족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분들을 위해 우리를 전도자로 보내시고 영혼의 파수꾼으로 보내신 줄 믿습니다.
우리는 입을 다물지 말고 경고의 나팔을 불어야 합니다.
파수꾼의 사명을 잘 감당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이 깨어 있을 수 있습니다.
자기가 자신의 파수꾼이 된다는 것입니다.
전도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축복은 자기 스스로의 믿음에 항상 경종을 울린다는 것입니다.
전도를 할 때 복음을 거부하는 사람들을 통해 우리가 믿게 된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이고 은혜인지 감사해 눈물이 납니다.
전도하는 한, 우리는 믿음에 확신과 견고함 위에 굳게 서고 하나님이 주시는 영육간의 축복을 풍성하게 누리게 됩니다.
며칠 전 한국마사회 탁구단 감독을 맡고 있는 현정0 씨가 음주운전으로 사고를 낸 뉴스를 보았습니다.
면허 취소에 해당될 만큼 많이 마시고 운전을 하다 사고를 냈더군요.
그걸 보며 참 여러 가지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현정0 씨가 한때 얼마나 많은 교회를 돌아다니며 간증을 했는지 모릅니다.
88올림픽에서 현정0 선수와 양영0 선수가 여자탁구복식에서 금메달을 획득했던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두 선수가 다 스타덤에 올랐고 현정0 씨는 계속 승승장구 성공가도 달렸습니다.
그런데 양영0 씨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 선교사가 되었습니다.
혹시라도 선교사의 일이 힘들어 본래의 자리로 돌아올까봐 백여만원의 올림픽 연금도 어려운 사람에게 양도하고 아무 것도 없이 하나님만 의지하고 떠났다고 합니다.
세월이 흘렀고 한 선수는 자기의 고급재규어 승용차를 만취상태에서 몰다 사람을 죽일 뻔했습니다.
한 선수는 먼 이국땅에서 가난과 슬픔과 절망 중에 빠진 영혼들에게 구원의 빛이신 예수님을 소개하며 많은 사람을 살리고 있습니다.
복음 전하는 것이 부담되고 거절당할 게 두려워 입을 다물면 모든 게 편할 것 같지만 그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전하지 않음으로 그들의 피값을 하나님께서 우리 손에서 찾으시는 데 어떻게 우리 삶이 형통하겠습니까?
전도하는 것이 당장은 힘들고 관계도 서먹해지는 것 같고, 귀찮다는 생각이 들지 모르지만 파수꾼의 사명을 애써서 감당할 때,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구하지 않은 것 까지 알아서 다 채워주시는 것을 무수히 경험했다고 많은 전도자들이 간증을 합니다.
우리가 다 전도에는 무능하고 게으른 사람들입니다.
그렇지만 오늘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으니 우리 남은 평생에 한 영혼에게라도 더 복음을 전하고 교회로 인도해서 예수님을 알게 하길 원합니다.
그들도 예수님을 만나면 구원을 받습니다.
지난 주일 학교 채플에서 예수님께서 십자가형을 선고받고 채찍에 맞으시고 피투성이가 되셔서 십자가를 끌고 가시고 못박히시는 영상을 보여주더군요.
눈뜨고 보기 힘든 참혹한 장면이었습니다.
그 때 제 마음 속에 선명하게 하나님의 음성이 깨달아졌습니다.
‘너를 살리기 위해 내 아들이 당하는 고난을 보고 있느냐?’
그래서 제가 눈물을 머금고 마음으로 대답했습니다.
‘네, 아버지. 제가 절대로 이 사실을 잊지 않게 해주세요. 그 사랑을 전하며 살게 해주세요.’
단지 나 하나만이 아니라 내 가족, 내 친구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죽으신 예수님을 평생에 전하며 살겠다고 우리가 마음 속에 결심할 때 하나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실지요.
오늘 하나님은 분명하게 그 마음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악인이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의 길에서 돌이켜 떠나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
우리의 순종으로 하나님께 기쁨을 드릴 때 하나님도 우리가 기뻐할 많은 것들로 우리에게 응답하실 것입니다.
2014년10월5일 남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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