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구약성경 시대의 대 선지자 에스겔에 대해 살펴보며 본문을 통해 주
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에스겔 선지자가 활동한 시기는 이스라엘의 바벨론 포로시대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가 어느 정도 머리 속에 정리가 되어있는 게 좋습니다.
남의 나라 역사가 왜 중요하냐 하면 하나님께서 그 나라의 역사를 통해 자신을 계시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또 이스라엘의 긴 역사는 어찌 보면 우리 한 사람의 인생과 구원의 역사와도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인류역사 중심에 이스라엘역사를 두고 잘 살펴보시면 하나님의 구원의 섭리와 우리 인생에 대한 영적인 통찰력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좀 어렵더라도 신약과 구약의 말씀을 편식하지 않고 골고루 배우고 묵상하는 것이 좋겠죠.
오늘 본문 속에도 하나님께서 놀라운 은혜를 말씀하고 계시는 줄 믿습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깊은 지혜를 주셔서 그것을 깨닫게 해주시길 간절히 소원합니다. 아멘.
먼저 배경부터 살펴보겠습니다.
오늘 본문의 연대기는 주전 6백여년 경입니다.
우리나라는 이때가 삼국시대 이전인 고조선 시대죠.
세상에서 유일하게 하나님이 선택하시고 언약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을 삼으신 나라가 이스라엘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하나님께 보여 준 것은 도덕적으로 수준 미달인 삶과 영적 배신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대단히 몹쓸 민족 같지만 생각해보면 우리의 믿음 생활과 사실 큰 차이가 없음을 발견합니다.
우리가 단지 성경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믿어야 하는 것이 때로 답답하고 좀 막연하단 생각이 들 때도 있을 겁니다.
그들 역시 받은 율법을 지키며 우리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섬겨야 했습니다.
우리야 한권의 완성 된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전체 섭리를 볼 수 있지만 성경 속 등장인물들은 그것도 없었으니 상황이 더 안좋다고 볼 수 있죠.
지금 우리가 오직 믿음으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따라가는 것과 똑같은 게 그들의 삶이었습니다.
우리가 본성을 따라 살고 눈에 보이는 세상 풍조를 따르는 것이 더 쉽듯이 이스라엘사람들도 눈에 보이는 가나안의 문화와 우상을 따르는 것이 더 쉬웠을 것입니다.
십계명을 제대로 지키는 것 만도 죄인으로서는 큰 결심이 필요한 것입니다.
요즘은 성도들이 주일에 빠지지 않고 교회에 나오는 것만도 큰 믿음이라고들 합니다.
기왕이면 좀 편하게 믿을 수 있는 가나안의 우상 종교가 이스라엘백성들 구미에 더 맞았을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선택한 그들은 도덕적으로 타락하고 악한 영에 사로잡힌 가나안 사람들과 똑같이 추락하고 맙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하나님을 버린 그들을 돌이키려는 하나님의 끈질긴 간섭의 역사입니다.
양다리를 걸치고 편리하게 혼합 된 신앙생활을 하던 그들은 결국 하나님의 징벌을 당하고 맙니다.
진리가 아닌 것을 우리 신앙에 섞는 게 트인 것도 아니고 앞서가는 것도 절대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결국 바벨론제국의 침략을 받아 떼죽음을 당하고 예루살렘은 짓밟히고 남은 사람은 모조리 포로로 끌려가게 되고 맙니다.
바벨론으로의 포로후송은 한 십년 간격으로 세 차례에 걸쳐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이 점진적으로 그들을 징계하며 회개 할 기회를 주셨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거나 믿음이 나태해지면 정신차리라는 하나님의 징계가 따르죠.
그게 감사한 것이지 없으면 큰일 납니다.
히브리서 12장8절 말씀에 징계가 없으면 사생아라고 하지 않습니까?
대개 약한 신호로 부터 시작해서 정신 못 차리면 점점 강도가 세지죠.
그러나 이스라엘은 결국 회개하지 않고 돌이킬 기회를 다 놓쳐버리고 맙니다.
일차 포로로 끌려간 사람 중에 우리가 잘 아는 다니엘과 세 친구들이 있고 오늘 본문 저자인 에스겔 선지자도 포함됩니다.
에스겔은 바벨론의 그발강 가에서 처음 하나님을 만나 선지자로 부름을 받습니다.
그의 활동은 바벨론 포로들 가운데서 이루어집니다.
에스겔서 앞부분은 주로 심판에 대한 메시지입니다.
그는 1차 포로 후송 후에도 선택된 민족이라는 빽만 믿고 여전히 교만하게 구는 이스라엘을 향해 더 큰 하나님의 심판과 멸망을 예언합니다.
심판에 대한 본서의 강력한 메시지에서 우리는 심판하시는 두려운 하나님을 보며 화들짝 놀라게 됩니다.
회개하지 않는 이스라엘을 심판하기 위해 하나님이 칼을 마광하신다는 말씀도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죄를 창기에 비교해 좀 노골적으로 언급한 부분도 있어서 유대인들에게 에스겔서는 19세 이상 관람가라고 합니다.
그러나 에스겔서 전체에 흐르는 두려운 하나님의 심판은 죄인을 향한 포기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보셔야 합니다.
절대로 가서는 안될 길을 가는 자녀를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 쓰는 말로 다리 몽댕이를 뿌러뜨려서라도 잡아두어야죠.
그러나 끝까지 회개하지 않는 이스라엘은 결국 바벨론의 세 번째 침략으로 초토화 되고 나라는 완전히 이 땅에서 사라지고 맙니다.
하나님은 오랜시간 이스라엘의 심판을 연기하고 기회를 주시는 걸 보게 됩니다.
그리고 주님은 지금도 죄인이 돌이켜 회개하고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기다리고 계시는 줄 믿습니다. 아멘.
전반부는 죄에 대한 심판을 강력하게 선포해 회개를 촉구하지만 이미 모든 것이 끝장 나버린 후반부에서는 먼 이국 땅에 끌려와 괴로운 포로생활을 하는 이스라엘을 향해 하나님의 회복을 예언하며 위로하는 메시지를 전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부분이죠.
그들을 이전 보다 더 대우하고 더 풍성한 축복을 주시겠다는 약속이 본문의 앞 장 부터 시작해서 끝까지 이어집니다.
우리의 삶도 이 부분부터 시작해서 하나님아버지의 약속하신 풍성한 복을 누리는 삶이 되기를 간절히 축복드립니다. 아멘.
그러면 본문으로 들어갑니다.
32절을 보면 내가 이렇게 행함은 너희를 위함이 아닌 줄 알리라고 말씀하시죠.
이렇게 엄청난 축복을 약속해 주시고 하시는 말씀이 ‘이거 너희들 이뻐서 주는거 아닌 줄 알지? 이런 말씀입니다.
그들이 오랜 징벌을 받고 있음에도 아직 자격을 갖추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충분히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돌이키지 않았다는 것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자녀에 대한 징계의 끝은 심판이 아니라 구원이라는 것을 보게 됩니다.
아이를 키우다 보면 못 된 짓을 할 때가 있지 않습니까?
부모라면 당연히 훈계해서 고쳐주어야죠.
못된 버릇이 뿌리 뽑힐 때까지 벌을 세우는 부모는 참 대단한 사람입니다.
대개 애는 끝까지 고집을 부리고 나중엔 오히려 부모가 더 애걸복걸합니다.
어서 잘못했다고 말하지 못해 라며 어떻게서든 면죄부를 주려 애를 쓰죠.
우리의 고난이 설령 우리 잘못과 불신앙에서 온다할지라도 하나님은 우리를 끝까지 외면하실 수 있는 분이 아니십니다.
주님의 옷자락을 붙잡고 눈물 콧물 흘리면 결국 시련을 거두시고 회복시키시는 주님의 은혜가 임하시는 줄 믿습니다. 아멘.
은혜 받을 조건이 한 개도 없는 우리를 사랑하시며 자녀 삼아주신 것을 깨달을 때 32절 처럼 비로서 우리는 우리 죄를 부끄러워 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스스로 이스라엘을 회복시키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본문의 앞 부분 22절을 보면 그 이유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이렇게 행함은 너희를 위함이 아니요 너희가 들어간 그 여러 나라에서 더럽힌 나의 거룩한 이름을 위함이라
이스라엘 족속이 여러 나라에서 더럽힌 내 거룩한 이름을 내가 아꼈노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은 적어도 두 가지 면에서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을 훼손했습니다.
첫째로 그들이 죄로 인해 전쟁에 지고 포로로 끌려가는 것이 결국 하나님의 능력이 부족해 백성을 뺏긴게 되버렸다는 것입니다.
이방민족에게 하나님의 이름이 영광스럽지 못하게 된 것이죠.
두 번 째는 패전이 설령 그들의 배신으로 인한 징계라 해도 결국은 배신당한 하나님의 명예가 더럽혀진 것입니다.
아내가 남편을 버리고 갔다면 그것은 어쨌든 남편에게 수치가 되는 것이죠.
우리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면서도 여전히 하나님과 세상 중에 세상을 선택하고 언제고 세상을 향해 달려갈 준비가 돼있는 것이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더럽히는 것이라는 것이죠.
우리가 어려움과 곤란에 빠질 때 믿지 않는 사람과 똑같이 근심과 염려로 맥을 못 추는 게 무능력한 하나님을 만드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난관을 돌파하지 못하고 매일 실패하는 걸 볼 때 우리가 믿는 예수님을 세상에서 얼마나 별 볼일 없고 무능한 신으로 여기겠냐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의 영광을 위해서도 매순간 믿음으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고난 중에도 기도로 담대함과 평안을 누리고 억울한 일에 너그럽고 잘 될 때 겸손한 우리의 모습이 곧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의 여정이 그런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풍성한 복을 주시길 간절히 원하시지만 우리의 육신의 축복을 매일 주시면 그것이 오히려 영적으로는 시험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쁘고 풍족한 날이 있으면 그 다음엔 어려움을 통해 우리 영적인 성숙과 축복도 함께 주시는 게 주님의 뜻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잘 아십니까?
원하는 대로 다 주시면 곧 먹튀, 먹고 튈 까봐 수급을 조절해 가시며 우리 영혼의 축복도 함께 주시는 줄 믿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온전히 신뢰하고 믿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드립니다. 아멘.
그렇게 살지 못해 이스라엘이 더럽힌 주님의 이름을 주님 스스로가 회복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사야48장11절 내가 나를 위하며 내가 나를 위하여 이를 이룰 것이라 어 찌 내 이름을 욕되게 하리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주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을 회복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실력을 보여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우리 삶에서도 날마다 하나님께서 실력을 발휘하시도록 모든 주도권을 드려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그리고 이 예언의 말씀은 70년 뒤 이스라엘 역사에서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페르시아가 바벨론을 정복한 후 이유 없이 이스라엘 포로를 본국으로 돌려보낸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뭐 독립운동을 했다는 역사적인 기록도 없습니다.
뜻밖의 해방에 유대인들이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그들의 감격을 시편126편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려 보내실 때에 우리는 꿈꾸는 것 같았도다
그 때에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찼었도다 그 때에 뭇 나라 가운데에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큰 일을 행하셨다 하였도다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성취되고 하나님은 스스로 영광을 받으십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여전히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형식적인 종교생활에 빠지고 선민이라는 교만 속에서 다시 하나님의 징계를 자초합니다.
그들의 모든 죄악을 대속하실 예수님을 거부하고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는 어처구니 없는 대죄를 짓게 되죠.
결국 또 다시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고 이스라엘은 본토에서 쫒겨나 세계 각국으로 흩어져 2천년 간 방랑자의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은 바벨론에서의 포로귀환 뿐 아니라 시대를 넘어 20세기에 와서도 그들에게 그대로 적용되고 성취되었습니다.
이 땅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던 이스라엘이 1948년 다시 가나안 땅에 돌아와 나라를 재건한 것입니다.
2천년 만에 자취도 없어진 나라를 다시 세운 기적 같은 사건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옛 영토를 완전하게 탈환하게 된 것은 10년 뒤 유명한 6일 전쟁을 통해서였습니다.
이스라엘을 팔레스타인에서 몰아내려는 이집트, 사우디, 요르단, 시리아, 레바논 연합군이 이스라엘을 포위하며 6일 전쟁이 발발합니다.
병력과 전차, 항공기 모든 면에서 이스라엘군은 아랍연합군과 상대가 되지 않았습니다.
누가 봐도 외부의 도움이 없이는 이스라엘의 승리는 불가능한 일이었죠.
그런데 단 6일 만에 이스라엘은 아랍연합군을 대파하고 예루살렘과 가좌지구, 골란고원까지 옛 영토를 거의 되찾은 믿기 힘든 일이 벌어졌습니다.
누가 이스라엘군을 지원해준 것일까요?
그 전쟁에서 이해할 수 없는 신비한 일들이 이스라엘에 유리하게 일어났다는 수많은 증언들이 있습니다.
한 이스라엘 병사가 부대를 이탈 해 헤매다 수 천명의 이집트 군사들과 마주 쳤는 데 그 때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이집트 병사들이 그를 보자 모든 일제히 두 손을 들고 항복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군인은 어리둥절한 채 자기에게 투항 한 수 천명의 이집트 군사를 한 자루의 총으로 겨누며 자기 부대로 데리고 갔습니다.
이 어이없는 광경을 본 부대원들은 자기 눈을 의심했습니다.
그리고 이집트 장교를 심문하다 놀라운 증언을 듣습니다.
그들이 부대를 잃고 헤매던 한 이스라엘 병사를 만났을 때 그의 뒤에 수 천명의 천사가 손에 총을 들고 쏠 준비를 하고 서 있는 것을 다 같이 보았다는 것입니다.
그 순간 이집트군이 일제히 손을 번쩍 처든 것이죠.
우리는 이스라엘군과 싸울 준비는 되어있지만 하나님의 천사들과 싸울 준비는 되있지 않다고 그는 말했습니다.
또 다른 신기한 일은 이동 중이던 이스라엘 기갑부대에서 있었습니다.
선두에서 달리던 사령관의 차에 동승했던 상병이 멀리 앞에서 치솟는 거대한 불기둥을 보고 차를 돌리라고 소리쳤습니다.
사령관에 눈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다급한 상병의 목소리에 위험을 감지하고 모래 언덕 옆에 있는 길로 차를 돌렸습니다.
다른 차들도 뒤 따라 차의 방향을 돌렸고 한 대의 차만이 원래의 길로 들었섰는 데 엄청난 굉음과 함께 차가 폭발했습니다.
아랍군의 지뢰밭이 앞에 있었던 것이죠.
그런가 하면 이집트 부대가 이스라엘 남쪽 국경을 향해 진군하는 데 하늘에서 거대한 손이 나타나 기겁을 하고 퇴각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가장 놀라운 사건은 이스라엘이 예루살렘을 탈환할 때입니다.
당시 동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있던 요르단 군과 이스라엘군은 3일간을 총을 쏘며 팽팽히 대치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4일 째 되던 날 갑자기 요르단 진영의 총격이 멈추고 정적이 흘렀습니다.
함정이라 생각하고 정탐 대원을 보냈더니 그들이 보고하길 예루살렘에 요르단병사가 단 한명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저항하는 군인 한명 없이 예루살렘에 입성한 그들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습니다.
요르단 군대가 모든 군수품을 버려둔 채 밤 사이 예루살렘을 버리고 도망을 친 것입니다.
그들은 이렇게 2천년 만에 완전히 예루살렘으로 귀환할 수 있었고 그렇게 그리워하던 유일하게 남아있는 성전의 한 쪽 벽인 통곡의 벽을 만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회복의 약속은 현재도 미래도 하나님의 백성에겐 언제나 유효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 주님은 반드시 주의 백성을 어떤 고난과 역경의 현장에서도 이끌어 내주시는 줄 믿습니다.
우리가 소원하던 것을 응답받았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서입니다.
시편 106장 8 그러나 여호와께서 자기 이름을 위하여 저희를 구원하셨으 니 그 큰 권능을 알게 하려 하심이로다
그리고 우리를 구원하시는 목적에는 이방인이 있다는 것을 본문에서 여러 차례 암시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36절에 보면 너희 사방에 남은 이방 사람이 나 여호와가 무너진 곳을 건축하며 황폐한 자리에 심은 줄을 알리라 고 말씀하시죠?
이것은 이스라엘만을 구원하기로 선택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을 통해 온 민족에게 하나님을 알리고 주님의 영광을 알게 하기 위함이란 것입니다.
본문에는 황폐하다는 단어가 여러 번 반복되어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누가 봐도 예루살렘이 황폐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35절에 보면 이스라엘에게 다시 허락하신 땅은 에덴동산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완벽한 회복과 풍성한 축복의 땅을 주시겠다는 것이죠.
우리 인생이 황폐하게 느껴진다면 에덴동산의 회복을 약속하신 하나님께 나가시길 바랍니다.
황폐했던 이스라엘을 목격했던 이방인들이 이스라엘이 누리게 된 에덴동산과 같은 축복을 보고 놀랍니다.
우리의 황폐했던 옛날을 아는 사람들이 이제 구원받고 우리 삶과 영혼에 풍성한 축복으로 변화되 가는 우리를 보고 놀라고 있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축복의 변화를 통해 가족과 이웃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고 그들을 구원하길 원하고 계십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 삶에 더욱 충만하게 하시고 우리 이웃에 복음이 증거되게 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드립니다. 아멘.
두 번째로 이 예언은 이미 발표되었고 이루어질 것이지만 그래도 우리가 구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자기 백성의 죄를 담당하시고 그들을 구원할 계획을 세우셨고 그것을 오늘 공표하셨습니다.
33절에 보면 그날은 내가 너희를 모든 죄악에서 정결하게 하는 날이라고 말씀합니다.
이제 우리가 다 아실 것입니다.
우리의 많은 죄와 허물은 그냥 정결해질 수 가 없습니다.
오직 주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맞교환 한 것임을 아셔야 합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모든 죄를 담당하셨기에 35절에 말씀하신대로 아담의 범죄로 쫒겨났던 에덴동산이 비로서 우리에게 회복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완전한 회복은 마지막 날에 반드시 우리에게 아름답게 이루어질 것입니다.
이 모든 일은 오로지 하나님이 기획하고 감독하고 출연까지 하신 일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우리가 할 일이 하나 있다고 말씀합니다.
놀라운 은혜와 구원의 역사에 우리를 끼워주시겠다는 것이죠.
그것은 37절의 말씀대로 그래도 이스라엘 족속이 이같이 자기들에게 이루어지기를 내게 구해야 할지라입니다.
물론 우리의 기도에 따라 하나님의 모든 계획이 조정되거나 무력화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다 하실 일을 왜 기도하라고 하십니까?
기도의 목적은 그들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것입니다.
포로생활 중에 그들이 기도할 마음이 생겼겠습니까?
기도는 커녕 하나님께 빈정 상한 마음으로 원망하고 불평했던 것이 그들의 모습입니다.
그들이 속담을 들어가며 이렇게 에스겔에게 하나님께 대한 불만을 터뜨립니다.
이스라엘 속담에 있는 대로 아비가 신 포도를 먹었으므로 아들의 이가 시다라는 것입니다.
곧 조상들 잘못으로 포로생활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죠.
하나님이 뭐라고 답변하신 줄 아십니까?
너희 중에 다시는 이 속담 쓰지 마라였습니다.
사실 나중에 예루살렘으로 귀환한 사람들은 모두 바벨론에서 출생한 사람들입니다.
70년 포로생활 동안 처음 이스라엘에서 잡혀간 사람들은 대부분 다 죽었겠죠.
내 잘못도 아닌 데 왜 지금 내가 노예생활을 하고 있냐는 것입니다.
우리도 일이 잘 되지 않고 실패하고 나면 왜 이 지경까지 그대로 두셨냐며 하나님이 방조하셨다고 섭섭해하고 원망할 때가 많습니다.
그런 마음이 자리 잡으면 기도도 나오지 않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의 약속과 인도를 믿고 기도하라고 오늘 주님이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탈출구가 보이지 않는 막막한 상황에서도 순종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며 하나님 앞에 나가면 하나님의 위로와 은혜가 임하기 시작합니다.
어느 순간 완강하던 마음도 풀리고 상황에 대해 낙관적인 마음이 생기고 평안이 찾아옵니다.
계속 기도하면 성령께서 지혜를 주셔서 문제의 실마리가 보이기 시작하는 것을 많이 경험하지 않았나요?
그러므로 기도해야 합니다.
또 기도해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기도하지 않는다 해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고 어느 시간이 지나면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고 인도해 주십니다.
우리가 믿음이 부족해도 다 그런 은혜로 여기까지 온 것이죠.
그러나 고난과 시련 중에 기도를 통한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를 체험하지 못한다면 고질적인 약점으로 또 다시 시련이 닥치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이스라엘이 회복을 약속하신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기도로 경건한 하나님의 백성이 됐을 것 같습니까?
아니요, 그들은 끝가지 순종 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약속대로 그들을 본토로 돌아오게 하십니다.
그러나 불순종으로 다시 나라를 잃고 다시 되찾고가 반복되는 것이 바로 이스라엘의 역사입니다.
우리 삶이 그런 패턴으로 늘 곤고한 인생이 되지 않으려면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구하는 사람에게 반드시 응답을 약속해 주신 것이 기도입니다.
그러니 왜 기도를 안하겠습니까?
과학적으로도 기도의 실제적 입증자료가 있습니다.
하버드 연구소에서 비어드 교수가 발표한 연구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그가 4백명의 심장병 환자들을 대상으로 반은 기도그룹을 만들어 기도를 해주게 하고 반은 그대로 두었습니다.
그 결과 기도를 받은 그룹이 회복이 훨씬 빠르고 고통도 덜했다는 것입니다.
또 한 생물학자가 재미있는 실험을 했는 데 세균들을 양 쪽 병에 나누어 담고 한쪽에다가는 세균이 죽으라고 계속 기도를 하고 나머지는 그냥 두었습니다.
일정 기간이 경과한 후 결과를 보니 기도를 받은 세균들의 활동은 미약해졌고 그냥 둔 세균들은 왕성하게 번식해 있더라는 것입니다.
기도하면 세균도 힘을 못쓰게 된다는 것이죠.
치유하는 기도의 능력이 과학적으로도 입중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1996년 뉴스위크의 통계를 보면 미국인들의 79%가 기도는 병이나 사고로부터 회복시키는 데 도움을 준다고 믿었고 56%는 자신이 직접 그런 경험을 했다는 응답을 했습니다.
그러니 주님께서 구하라고 말씀하신 것이죠.
기도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마시고 하나님이 다 들으신다는 믿음으로 마음을 쏟아놓으시길 바랍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신 말씀의 결론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과 우리를 위해서 스스로 일하시고 우리는 단지 기도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들의 기도를 모아놓은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얼마나 순진하게 하나님을 향해 기도하는 지 한번 들어보십시오.
스티븐의 기도입니다.
하나님, 돈이 많으세요? 아니면 그냥 유명하기만 하신가요?
글렌의 기도입니다.
하나님, 내가 하나님이라면요 지금 하나님 처럼 잘해내지 못할거예요, 하나님 파이팅!
크리스의 기도입니다.
하나님, 레모네이드를 팔고 26센트를 벌었어요, 이번 주일에 쬐금 드릴게요.
가이의 기도입니다.
하나님 눈이 너무 많이 와서 학교에 못 갔던 날 있잖아요, 기억하세요? 한번만 더 그랬으면 좋겠어요.
바바라의 기도입니다.
하나님 왜 밤만 되면 해를 숨기시나요? 제일 필요할 때인데요.
얘가 인생을 좀 아네요.
마가렛의 기도입니다.
하나님, 하나님이 어디든지 계시다니 마음이 놓여요. 말하고 싶은 건 그 뿐이예요.
미셀의 기도입니다.
하나님, 착한 사람은 빨리 죽는다면서요? 엄마가 말하는 걸 들었어요. 저는요, 항상 착하지는 않아요.
익명의 어린이의 기도입니다.
하나님, 휴가 때 계속 비가 와서 우리 아빤 무척 기분이 나쁘셨어요. 하나님한테 우리 아빠가 안 좋은 말을 하긴 했지만요 제가 대신 잘못을 빌테니 용서해 주세요.
죠이스의 기도입니다.
하나님, 남동생이 태어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제가 정말 갖고 싶다고 기도한 것은 강아지예요.
마빈의 기도입니다.
하나님, 코우 고모가 냉장고를 새로 샀어요. 우리는 냉장고 상자를 비밀 아지트로 삼을 거예요. 혹시 저를 찾을 때는 거기에 있다는 걸 기억하세요.
마지막 미쉘의 기도로 말씀을 맺습니다.
하나님, 내가 무얼 원하는지 다 아시는데 왜 기도를 해야 하나요?
그래도 하나님이 좋아하시면 기도할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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