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중에 신비하고 어려운 책 중 하나가 에스겔서입니다.
유명한 주석가들조차 그럴듯한 해석을 내놓지 못하는 부분이 많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도 의미가 무엇인지 이해하기가 힘들죠?
그러나 성경은 쉬우면 쉬운 대로, 어려우면 어려운 대로 우리의 영에 알맞은 자양분이 되고 믿음을 더해주고 은혜 안에 살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말씀도 우리 각자에게 필요한 만큼, 각자가 이해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하나님이 은혜를 주실 줄 믿습니다.
오늘 본문1절부터 성전이 나옵니다.
에스겔서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를 꼽으라면 바로 이 ‘성전’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세운 성전은 세 개 였죠.
광야생활의 이동성전인 성막과 솔로몬이 지은 성전과 바벨론 포로 후에 돌아와서 세운 스룹바벨성전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있던 헤롯성전은 스룹바벨성전을 개축하고 증축한 것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성전은 이 중 무슨 성전일까요?
그 중에서 어떤 것도 오늘 본문에 나오는 성전은 아닙니다.
에스겔이 바벨론 포로상황에서 본 이 성전은 환상 속에만 있지 이 땅 어디에도 존재해본 적이 없는 신비한 성전입니다.
스룹바벨이 바벨론 포로귀환 뒤 돌아가서 세운 성전은 에스겔선지자가 보여준 성전 모형과 전혀 다릅니다.
환상 속에만 존재하는 성전이 바로 에스겔의 성전입니다.
이번에 제자 본문 설교를 준비하며 40장부터 천천히 다시 읽어보았는데요.
얼마나 큰 은혜를 받았는지 모릅니다.
이 부분은 에스겔 선지자에게 보여주신 새성전의 모습을 기록한 것입니다.
내용은 하나님이 에스겔선지자를 데려다 생전 처음 보는 성전을 보여주시며 그 모양과 길이를 하나 하나 다 측량해서 낱낱이 기록하게 하신 것입니다.
성전의 크기부터, 마당의 길이, 방들과 기둥들, 문짝의 길이, 심지어 벽의 두께까지 아무튼 눈에 보이는 것은 다 길이를 재 놓았습니다.
성경만 보면 실감이 나지 않는 데, 제가 이 설명대로 컴퓨터그래픽으로 그려놓은 그림을 보았는데 정말 웅장하고도 정교하고 아름답습니다.
그런데 이걸 보여주셨으니 그대로 지으라고 하셨다면 차라리 낫겠는 데, 그게 아니라 이 모양을 포로로 잡혀 온 이스라엘백성들에게 다 설명해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이 자기 죄악을 부끄럽게 생각하며 하나님의 말씀대로 지킬 거라는 겁니다.
말하자면 보이지도 않는 가상의 성전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라는 것이죠.
정말 하나님이 별 것을 다 시키시는 것 같지 않습니까?
제가 그 구절이 다 해석되지는 않았지만, 하나님이 직접 지으신 성전을 보이시며 그 구조를 세세하게 설명하고 치수까지 일일이 적어놓으신 그 말씀을 보고 있자니 묘한 기분에 압도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총총히 적어 놓은 암호와 같은 문장들 속에서 끈질기게 우리를 구원하실 계획을 세우고 이루어 가시는 그 하나님의 진실이 느껴져서 두려울 지경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성전은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이 성전을 해석하는 견해는 다양합니다.
앞으로 이스라엘에 지어질 제4성전 모형이다, 천국에서 보게 될 성전의 모형이다.
현재 짐승을 잡아서 제사를 드리던 이스라엘의 성전은 헤롯성전을 끝으로 지구상에서 사라졌습니다.
서기70년에 예루살렘을 침공한 로마제국의 티투스장군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었죠.
지금은 그 성전 터에 이슬람교의 황금돔 사원이 세워져있습니다.
앞으로도 영원히 제4성전은 세워지지 못할 것입니다.
그럼 천국에 세워질 성전이냐
그것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요한계시록에 보면 요한이 보니 그곳에는 성전이 없었다고 진술하거든요.
보수적인 학자들이 의견을 모으는 것은 에스겔의 성전은 눈에 보이는 종교적인 건축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헤롯왕이 46년 동안 공들여 개축한 헤롯성전을 보며 말씀하셨습니다.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만에 다시 세우리라.
이 말씀은 성전 된 주님의 육체를 가리키신 것이라고 요한복음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저 성전’이 아니라 ‘예수님의 몸이신 이 성전’을 말씀하는 것이죠.
그러니까 에스겔에게 보여주신 성전의 환상은 십자가와 부활의 사건을 통해 예수님 자신의 몸으로 지으실 최후의 성전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더 이상의 성전은 필요 없습니다.
요한계시록 21장 22절에서 요한사도가 천국에서 본 사실을 진술하죠?
성 안에 성전을 내가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 양이 그 성전이심이라
우리가 제대로 해석 못해서 그렇지 에스겔 성전의 설계도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구속을 완성해 나가는 치밀한 하나님의 섭리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컴퓨터가 고장났을 때 뜯어보면 알 수 없는 선들과 회로들이 복잡하게 얽혀있습니다.
그게 다 무슨 역할을 하는지 우리는 모르지만 그것은 컴퓨터가 작동하는 데 필수적인 것들입니다.
그걸 모른다고 컴퓨터를 못하지는 않습니다.
우리 눈으로, 또 이성으로 다 알 수 없지만 구원에 필요한 엄청나게 신비하고 실제적인 일들을 창세기부터 하나 하나 하나님이 다 계획하고 진행 해 오신 내용들이 성전의 설계도이고 그 완성 된 결과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사건이라는 것이죠.
아무나 불쑥 나타나 세상을 구하고, 아무나 메시야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43장에 보면 하나님의 빛나고 위엄있는 영광이 내려오셔서 바로 이 성전 안으로 들어가시는 장엄한 장면이 나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하나님과 원수되었던 우리의 죄를 다 씻으셨기에 하나님이 다시 우리 예배를 받으시게 되는 것입니다.
성전되신 예수님 안에서 드리는 예배가 아니면 그곳에는 하나님이 안계십니다.
지금 예수님 안에서 예배하고 계십니까, 그냥 눈에 보이는 교회에서 예배하고 계십니까?
우리가 눈에 보이지 않는 에스겔의 성전과 같이 성전되신 예수님 안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다면 하나님은 우리 예배를 받으시고 우리를 축복하십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 이 성전으로부터 일어나는 신비로운 일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그 성전 동쪽 문을 통해 성전으로 들어가신 뒤 성령이 에스겔선지자를 들어 성전 안으로 데려가셔서 둘러보게 하십니다.
지구상에 있지도 않은 성전에 지금 에스겔선지자가 들어간 것입니다.
단지 성전을 둘러보는 정도가 아니라 우리가 읽은 대로 성전에서 흘러나온 물에 발도 담그고 직접 건너가기도 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영적으로 이 성전 안에 있는 것입니다.
1절에 보면 에스겔에게 성전을 안내하는 사람이 나옵니다.
그라고 표현되었지만 누구인지 정확하지가 않습니다. 천사인 것 같기도 하고, 그 앞에 보면 나 여호와라고 표현되기도 해서 신비감을 더해줍니다.
그 때 에스겔이 놀라운 광경을 목격합니다.
성경은 에스겔이 본 신비한 장면에 우리 시선을 사로잡아 그 부분을 보여줍니다.
본문은 밋밋하게 번역되었지만 본래 느낌은 이렇습니다.
보라, 성전 문지방 밑에서 물이 흘러나오고 있다.
난데없이 성전 안에서 물이 졸졸 흘러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에스겔은 본래 제사장이었기에 성전에서 물이 흘러나올 수 없다는 걸 잘 압니다.
이 장면이 기이한 것이죠.
이 물이 동쪽을 향해 흐르다 제단 남쪽으로 방향을 좀 틀더니 다시 동쪽으로 흘러 성전 밖으로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에스겔이 성전 밖으로 나가 보니 동쪽 문의 오른 쪽으로 이 물들이 새어 나오고 있었습니다.
저는 이 부분들이 머리속에 잘 그려지지 않아서 종이에다 그림을 그리며 이해했습니다.
그 때 에스겔을 인도하던 사람이 줄자를 잡고 물이 흘러가는 동쪽 방향으로 천 척, 450미터를 측량하더니 건너보라고 합니다.
에스겔이 건너보았더니 물이 발목정도 까지 차는 깊이였습니다.
그리고 다시 450미터를 재더니 또 건너보라고 합니다.
이번엔 무릎에 오는 깊이였습니다.
그리고 다시 450미터를 재고 건너보라고 하는 데 물의 깊이가 허리만큼 차 올랐습니다.
또 다시 450미터를 측량했는데, 거기서 놀랄 장면이 펼쳐집니다.
원어로 하면 다시 ‘보라’라는 감탄사가 나옵니다.
원어를 그대로 직역하면 ‘보라, 내가 건너지 못할 강! 왜냐하면 그 물이 깊었다. 헤엄칠 만한 물! 건너지 못할 강!’
에스겔이 깜짝 놀라서 그 광경을 정신없이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좀 전까지만 해도 어지간한 시내 같이 만만해 보이던 물줄기가 갑자기 헤엄칠 만큼 깊어 졌고 감히 건너지 못할 만큼 큰 강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강가로 돌아가 보니 강 좌우편에 나무가 심히 많았다고 합니다.
6절에서 안내하는 사람이 말하죠.
인자야 네가 이것을 보았느냐
이루어진 이 광경이 너무나 귀중한 진실이라는 것입니다.
또 이 말 속에서 이 일을 행하신 분도 이 사실을 너무 기뻐하시고 만족해 하신다는 느낌이 들지 않습니까?
그럼 여기까지에서 이 환상적인 체험들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성전에서 흘러나와 큰 강을 이루고 생명을 살리는 물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을 통해 인간을 구원하는 복음이란 것을 짐작하셨을 것입니다.
요한복음7장38절에서 예수님께서 소리쳐 선언했던 말씀이 있죠.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오늘 물줄기가 흐르는 곳마다 죽은 생명이 살아나는 환상은 복음을 듣고 믿는 사람들이 구원받고 영이 살아나는 것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생명 강의 깊이가 천척 단위로 측량되는 것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복음이 역사하는 데는 하나님께서 계산하고 재 보는 무언가에 따라 진행이 된다는 것입니다.
교회의 역사도 그렇고 개인의 신앙의 삶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하나님의 복음전파의 진전이나, 개인의 신앙의 성장이나, 삶의 변화와 성취들이 되는대로 이뤄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자로 재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으며 살아가는 모든 것들을 하나님이 모르시는 게 아니라 우리 행동을 달아보시고, 마음을 살피시며 거기에 따라 가장 합당하게 단계별로 인도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우리를 달아본 그 이상의 단계로 인도하지 않으십니다.
분량에 맞는 영과 육의 축복의 단계로 이끄시지, 절대로 우리가 허황된 데 기대를 하거나 노력이상의 공짜에 맛들이게 하지 않으십니다.
교회의 성장과 성숙에도 그 안의 모든 것을 달아보고 재보시는 하나님의 간섭하심이 있습니다.
또 구원받은 성도들이 이 땅에서 일하고 계획을 성취하는 과정 속에도 반드시 하나님의 치밀하신 판단에 따라 그 때와 축복을 허락하신다는 것이죠.
그런데 그 과정이 아주 서서히 일어나는 것 같지만 어느덧 폭발적인 성과로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역사도 그렇습니다.
제자들이 복음을 전하기 시작해서 1900년 동안 유럽을 넘어가지 못했습니다.
19세기에 와서야 복음이 세계로 불일 듯 번져나갔고 기독교 인구가 20억이 넘게 불어난 것입니다.
우리의 개인적인 신앙이 다 이런 단계로 나타납니다.
처음엔 믿음이 발목에 찰랑거릴 정도로 신앙생활을 하죠.
멋모르는 성도들이 제일 선호하는 믿음의 수준입니다.
언제든 철벅거리고 자기 의지대로 원하는 대로 다니고 세상과 교회를 넘나드는 자유분방한 신앙의 상태죠.
그러나 신앙은 점점 그 은혜가 깊어져서 내 마음대로 휘젓고 다닐 수 없을 만한 큰 은혜 속에 잠겨 져야 합니다.
신앙이 성장할수록 내가 본성적인 자유를 누리는 것이 내 삶의 화근이라는 것을 사실 저절로 깨닫게 됩니다.
자유롭게 휘젓고 다녔더니 수습불가의 낭패한 일들이 삶에 독버섯처럼 퍼져있는 것을 조만간 발견하게 되죠.
적당히 세속적인 신앙생활이 자유롭고 행복하다 생각하는 것은 내 독한 죄의 경향성을 모르는 순진할 때 생각입니다.
가장 행복하고 안정적이고 만족한 상태는 우리의 전인격이 하나님께 조화롭게 순종할 때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자유롭게 살아갈 영혼으로 창조하셔 놓고 왜 이제와서 매일 하나님께 의존하고 영향아래 살라고 하시겠습니까?
타락한 우리의 자유의지가 죄와 불행으로 우리를 끌고 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자유분방한 죄성이 마음대로 휘젓고 다니지 못할 만큼 하나님의 성령의 통제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로운 다스림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 죄의 몸을 입고 살아가는 현재의 우리에게 가장 큰 유익입니다.
그것이 바로 생명강이 헤엄쳐야 할 만큼 충만한 단계인 것이죠.
우리의 믿음이 지금 어느 위치에 있는지를 잘 생각해 보길 원합니다.
무언가를 내 마음대로 결정하고 행동하려면 하나님이 의식되고, 들은 말씀들이 나를 주저하게 합니까?
은혜의 물줄기가 나를 에워싸고 있는 증거입니다.
그래도 결국 내 뜻이 앞서서 모든 것을 해결해 가고 있다면 아직 얕은 물에 담그고 있다는 뜻이죠.
본문에 보면 큰 강을 이룬 위치에 오니 비로소 주변에 울창한 나무들이 자라고 있다고 합니다.
찰박거리는 신앙에는 풍성하고 믿음직한 결실들이 자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다음 이어지는 두 번째 단락은 에스겔이 직접 본 게 아닙니다.
여기부터는 인도자가 장차 일어날 일을 말로 설명해 주는 내용입니다.
인도자의 말솜씨가 워낙 뛰어나서 마치 눈에 보이는 장면처럼 나타나죠.
강물을 이룬 성소의 물이 동쪽으로 계속 흘러서 죽음의 바다에 이르자 바다가 고쳐지고 다시 생명체가 살아서 번성하게 될거라고 합니다.
여기서 죽음의 바다는 이스라엘사람들이 당연히 떠올리는 사해바다일거예요.사해바다는 염도가 높아서 생물이 살 수 없습니다.
지금도 이스라엘의 사해바다에는 해마다 5억4천만톤의 갈릴리 호수의 물이 유입되고 있지만 그만큼 증발해 보리고 여전히 염도가 높은 죽음의 바다 상태가 됩니다.
남북이 80킬로미터에 달하는 이 광대한 소금바다에 생명체 한 마리가 살지 못하고 주변에 풀 한포기가 없으니 아름다운 죽음의 바다죠.
겉만 화려한 인간세상이 꼭 이렇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마시면 마실수록 짠 물에 갈증만 더해지고 생명은 절대 꽃필 수 없는 죽음의 바다입니다.
그런데 이 죽음의 바다로 성전에서 흐르는 물이 흘러들어가자 소금바다가 고쳐지는 놀라운 기적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사해바다가 담수호가 된다는 것은 이스라엘사람들의 상식으로는 정말 상상할 수 없는 희한한 일입니다.
그 고쳐진 바다에는 물고기가 번성하고, 물고기를 잡으려는 어부들이 모여드는 생기가 넘치고 웃음소리가 들려오는 너무나 행복한 광경이 된다는 것입니다.
성소에서 흘러나온 이 강물이 흐르는 곳마다 각처에서 모든 것이 살아난다고 10절에서 말씀합니다.
개인적으로 보자면 죽음의 바다는 바로 생명 없이 깊고 무겁게 출렁이던 우리 영혼의 바다 아니었습니까?
우리가 어떤 상황에서 어떤 사람으로 살고 있던지 예수님의 복음의 은혜를 만나고 그 안에서 부어주시는 생명수 안에서 살면 인생이 바뀝니다.
오늘 앞 부분에서도 보았듯이 시작은 졸졸 흐르는 작은 물줄기처럼 보이고,은혜는 그냥 문틈 사이로 스며나오는 것처럼 미약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의 물줄기는 날로 풍성해져 마침내 우리 삶을 충만하게 하고 웃음과 생기가 넘치는 삶으로 바꿔주시는 줄 믿습니다.
우리가 다 그렇게 점점 영과 육의 삶이 바뀌고 있습니다.
은혜의 물줄기 안에 살아가면 그렇게 우리가 열망하고 잡으려고 좇아가는 그 ‘잘 되는 나’의 꿈이 정말 하나님의 뜻 안에서 조화롭고 아름답게 이뤄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내 삶을 바꾸고 하나님을 섬겼더니 결과가 지금 어떻습니까?
점점 나아지고 있는 것이 서로 보이지 않습니까?
어린아이들은 믿음 안에서 성전에 심기운 나무처럼 윤기 있고 총명하고 강건하게 자라고, 청년들은 왠지 모를 미래의 소망으로 기대감을 갖고 한걸음씩 나가고 있습니다.
무거운 생애의 짐을 짊어지고 허덕이던 가장들, 부모들은 이 무거운 짐을 주님과 나눠지고 어느덧 기꺼운 마음으로 넉넉히 이것들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이미 인생의 후반전을 내달리는 장년 이후의 성도님들이야 좀 어쩔 수 없습니다.
매일 야금야금 힘이 빠져나가고 평생 일궜다고 생각했던 재산과 지위도 하루하루 쇠퇴해 갑니다.
그건 어쩔 수 없는 하나님의 법칙입니다.
그렇게 해서 손에 쥐었던 것을 하나하나 내려놓으며 아버지의 영원한 나라를 준비하고 사모하게 되는 것이죠.
그러나 우리의 육신은 나날이 후패하나 우리의 영혼은 절대 여기에 기죽지 않고 나날이 새롭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우리 장년 후반기를 사는 성도님들은 점점 믿음의 경륜 안에서 평온하고 견고해지는 것을 제가 봅니다.
성도들이 소박한 노년을 맞는 것을 보며 ‘저 사람 왜 저렇게 하나님을 믿는데도 되는 게 없어?’라고 사람들이 생각하지 않습니다.
나이 들면 다 똑같은 형편인데도 감사하며 은혜롭게 살아가는 평온한 모습을 보면서 오히려 ‘믿는 사람이 다르구나’라는 것을 그 사람들이 압니다.
노년에 집을 몇 채씩 끼고 있고, 자식들이 잘 나간다고 그걸 보고 하나님이 살아계시구나라고 느끼는 게 아닙니다.
어떤 처지와 여건 속에 있든 믿음에 굳게 서서 은혜의 물줄기 안에서 살아가시길 축원드립니다.
본문 중에서 우리에게 경고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11절에 진펄과 개펄은 되살아나지 못하고 소금 땅이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복음의 은혜가 모든 곳에 미치지는 않는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진펄과 개펄은 바닷물이 들락달락 하는 곳입니다.
진펄은 진흙으로 채워진 물웅덩이를 말합니다.
지난 여름 수련회 때 갯벌 체험하러 나가려고 할 때 팬션 주인이 비가 오래 와서 진흙 구덩이가 있어서 위험하니 나가지 말라고 했었죠.
겉으로 보기엔 그냥 갯벌 같은 데 웅덩이가 깊어서 패인 진펄에서는 발이 쑥 빠져 들어가 나올 수가 없다고 하더군요.
생수가 닿는 곳마다 살아나 나무들이 자라고 열매가 맺히고 잎사귀까지 버릴게 없는 생명의 복을 받는 데 진펄과 개펄은 소금땅으로 남겨진다는 것입니다.
진펄과 개펄은 왜 소성되지 못한다고 말씀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바닷물이 들락달락 하듯 깊은 곳을 향해 들어가지 못하고 들락달락하는 신앙을 말합니다.
환경이 문제가 되고, 믿음이 약해서 꾸준한 신앙생활을 못하는 것도 안타까운 일이지만 본문에서는 좀 더 근본적인 문제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길 주님을 믿는 자들에게 주시는 성령으로 인해 우리 배에서 생수의 강이 계속해서 흘러나온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말씀을 통해 이해하고 정말 삶을 돌이켜 예수님을 따를 때 우리의 죽은 영혼 안에 성령이 오시고 생수의 근원이 터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진펄과 개펄 같은 마음은 진정으로 회개하고 돌이키지 않았기에 아직 생수의 근원이 되살아나지 않은 것입니다.
근본적으로 예수님을 따르기를 작정한 게 아니라, 그냥 기분 따라, 환경 따라, 다른 사람의 영향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은혜의 자리에 들락달락만 하다보니 깊은 신앙의 체험으로 나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생명을 살리고 풍성하게 하는 성전에서 흘러나온 생명수 안에 우리의 몸과 마음을 푹 담그는 복된 삶을 살게 되길 소망합니다.
계속해서 은혜의 깊은 곳으로 나가야 합니다.
영적인 생명에는 휴식이 없습니다.
심장이 쉬지 않고 뛰어야 우리 생명이 유지되듯이 영적인 호흡인 기도와 말씀으로 영혼이 숨쉬게 해야 합니다.
기도를 조금만 쉬고, 말씀을 멀리하면 곧 심령과 환경이 메마르고 곤고해집니다.
정말 우리에게 유익한 게 무엇인지를 냉정하게 생각하며 기분과 환경에 따라 들락달락하는 믿음이 아니라 꾸준히 경건에 힘쓰는 우리 모두가 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아멘.
2015년10월4일 주일설교 남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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