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겔

에스겔34장 (한 목자를 세우리니 : 대림절 두째 주일)

남수연 2017. 12. 13. 18:40

지난 주 트럼프대통령이 중동의 화약고에 불을 던져 국제사회가 술렁이고 있습니다.

지옥의 문을 열었다고도 하죠.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의 수도로 인정한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대로 예루살렘이 이스라엘의 수도라고 알고 있는데 새삼 그걸 인정한다는 말이 무엇인지 의아하신 분도 계실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예수님이 승천하시고 약40년 뒤, 서기70년에 로마제국에 의해 완전히 멸망하고 국가가 사라졌습니다.

예수님이 예언하셨던 대로죠.

선지자들을 통해 호소했고 마지막에 아들을 보내서 말씀하셨지만 끝까지 마음을 바꾸지 않은 결과 입니다.

그 뒤 1948년이 되어서야 다시 조상들의 땅으로 돌아가 주권국가를 세웠습니다.

그 사이 약2천년 동안 그 땅에 살고 있던 아랍인들과의 피의 전쟁이 그 때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예루살렘까지 점령했지만 국제사회에서는 전쟁으로 차지한 땅은 자국영토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입장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이 통치하지만 수도로 인정받지 못해 왔습니다.

그걸 트럼프대통령이 인정해준 것이죠.

예루살렘은 이슬람에게도 큰 의미가 있는 도시입니다.

이미 강력한 저항과 폭동이 시작되고 있어 큰 우려가 됩니다.

유대교인들은 예루살렘에 평화를 줄 다윗의 자손을 기다리고 있지만 이천년 타향살이에 이젠 누가 다윗가문인지 조차 알 방법이 없습니다.

이미 오신 다윗의 자손 예수님를 왕으로 믿지 않는 한 예루살렘엔 평화가 없습니다.

누구에게도, 어느 곳에도 예수님만이 고통을 종식시키시고 평화를 주십니다.

오늘이 대림절 둘째 주일입니다.

대림절기에 우리는 구약성경에 촘촘하게 빛나는 별처럼 예언되어 있는 메시야의 오심을 살펴보며 성탄을 맞이하려고 합니다.

신약성경에서 예수님과 사도들도 구약의 예언들을 근거로 예수님께서 다윗의 자손이요 메시야라는 것을 입증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구약성경 없이 예수님을 온전하게 알고 믿는 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구약성경이 보여주시는 메시야 예언은 예수님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갖게 할 뿐 아니라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더 풍성히 알게 해 줍니다.

이 절기에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오신 예수님을 더 깊이 묵상하며 삶 속에서 체험하고 가까워지는 은혜가 있으시길 빕니다.

 

먼저 이스라엘에 대한 엄중한 심판에 대한 예고입니다.

사람들은 자기 죄에 대해 대수롭지 않게 여깁니다.

지난 한 주간 죄 때문에 심각하게 고민하며 산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는 아닙니다.

창세기부터 지금까지 하나님이 골몰하신 것은 인간의 죄문제입니다.

그걸 해결하기 위해 예수님이 오신 것이잖아요?

지난 주에 살펴 본 대로 이스라엘은 이 죄 때문에 예레미야선지자의 최후의 경고를 받습니다.

그마저도 무시한 이스라엘은 결국 바벨론에 의해 멸망당합니다.

오늘 본문의 에스겔 선지자는 바벨론 포로사회에서 사역한 선지자입니다.

34장은 불량한 목자들의 대한 심판과 못된 양들에 대한 심판을 경고합니다.

이미 예루살렘이 완전히 함락당하고 망했음을 33장에서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전히 불량한 목자와 양들에 대해 질책하시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이들이 아직도 회개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33장에 포로사회의 유대인들이 어떤 상태인지를 보여줍니다.

그들이 하나님이 뭐라고 말씀하시는지 들으러 에스겔에게 왔다고 합니다.

31절 백성이 모이는 것 같이 네게 나아오며 내 백성처럼 네 앞에 앉아서 네 말을 들으나 그대로 행하지 아니하니 이는 그 입으로는 사랑을 나타내어도 마음으로는 이익을 따름이라

32절 그들은 네가 고운 음성으로 사랑의 노래를 하며 음악을 잘하는 자 같이 여겼나니 네 말을 듣고도 행하지 아니하거니와

심판을 받고 포로로 끌려 와서도 정신을 못차리고 있다는 말씀이죠?

과거 가난하던 시절, 간호사나 광부로 일하러 독일로 가 한국식구들을 먹여 살렸던 교포들이 있습니다.

이들을 위로하기 위해 찾아가서 열린음악회 같은 것을 하잖아요?

가수들이 옛시절 구슬픈 노래를 부르면 이 분들이 눈물을 흘리며 고국에 대한 그리운 마음을 달랩니다.

에스겔의 설교와 예언을 들으러 나오는 이들이 그랬다는 것입니다.

노래하는 자들이 위로해 주듯이 하나님이 무슨 위로의 말씀을 하시려나 좀 들어보자고 모인다는 것이죠.

회개를 하고 악에서 돌이켜야 하는 데 그게 전혀 안되는 것입니다.

이런 걸 보면 사람이 자발적으로 죄를 깨닫고 살 길을 찾아 하나님께 나온다는 것은 백프로 불가능입니다.

무수히 경고를 받고 심판까지 받았음에도 여전히 그들이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 정신이 영원토록 바뀌지 않는다는 것이 겁나는 것입니다.

죽었는데 여전히 그 사람 그대로 깨어나 영원히 산다는게 얼마나 형벌입니까?

만일 천국이라 해도 우리 본성이 변하지 않고 영생한다면 그게 천국입니까?

천국에는 우리가 변화된 부활의 몸으로 살 것이기에 소망이 있는 것이죠.

악할 뿐 아니라, 아무리 말해도 안되고, 심판을 당해도 뉘우치고 돌이키지 않는다는 것이 본문이 보여주는 인간의 절망입니다.

그렇기에 다른 구원의 방법이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이죠.

하나님 편에서 마련한 속죄 없이는 아무도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이 속죄의 길을 예비하셨지만 사람이 제멋대로 사는 삶을 회개하고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것도 똑같이 어려운 일입니다.

올해 우리가 전도하려고 마음을 쓰고 공을 들인 사람들 중 한 사람도 오늘 여기 나와 있지 않습니다.

평생을 전도하려 애써도 단 한 사람을 주님께로 돌이키게 하기가 어렵습니다.

자기 삶이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 아래 있다는 것을 깨닫고 예수님의 대속을 믿는다는 것이 그만큼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을 믿게 된 것은 특별한 하나님의 은혜이고 기적 중에 기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도 그렇듯이 하나님의 축복은 반드시 심판과 함께 등장합니다.

심판과 구원은 절대 떨어져서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도 회개와 천국을 같이 외치셨습니다.

이스라엘의 해결되지 못한 죄로 인한 심판의 경고, 그 다음 구세주의 약속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알려면 오늘 본문에서 이스라엘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 우선입니다.

오늘 그들의 죄가 바로 우리 죄라는 것입니다.

 

20절에 보면 하나님의 양들을 심판하신다고 합니다.

내가 살진 양과 파리한 양 사이에서 심판하리라.

그들이 심판을 받아야 할 이유가 21절에 나옵니다.

너희가 옆구리와 어깨로 밀어뜨리고 모든 병든 자를 뿔로 받아 무리를 밖으로 흩어지게 하는도다.

쥐꼬리만한 권력만 있어도 갑질 하는 이 사회를 생각해 보면 됩니다.

그 어린 고등학교실습생들을 혹사시켜 죽음으로 내 몬 뉴스가 나온 지 얼마되지않아 산업체에서 군복무를 대신하는 청년들을 가혹하게 대우한 뉴스가 또 나왔습니다.

사람의 본성이 악하고 절대로 남 잘되는 꼴을 못 본다는 거예요.

낚시꾼들이 제일 기분 좋을 때가 언제인지 아시나요?

옆 사람이 대어를 낚아 올리다 놓치는 순간이 제일 신난다고 합니다.

청소년부들, 시험지 맞추다 내가 찍은 거 맞을 때도 좋지만 라이벌이 실수로 틀리는 것도 좋잖아요?

인간이 남이 잘되는 꼴을 배가 아파서 못 본다는 것입니다.

본문 앞에 보면 살진 양들이 기름진 풀을 뜯어 먹고 약한 양들이 못 먹게 발로 짓밟았다고 합니다.

깨끗한 물을 마시고 다음 양들이 못 먹게 발로 밟아 흙탕물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약한 양들이 더러운 풀을 먹고 더러운 물을 마셨다는 것입니다.

요즘 말로 신분상승의 사다리를 탄 자가 올라간 다음엔 사다리를 발로 걷어찬다는 것입니다.

비정규직이 정규직 되는 걸 제일 불편해 하는 게 정규직 사람들입니다.

자기 밑의 사람이 자기 위치에 올라오는 걸 용납하지 못한다는 것이죠.

그런데 이게 세상 속에서만 일어나는 게 아니라 지금 하나님의 양 떼들 사이에서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성도들의 사회생활에도 교회생활에도 똑같다는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살찌고 난폭하게 구는 양들을 심판하실 때 너희가 나를 경외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이들이 우리도 에스겔선지자에게 가서 설교 들었다고 할거니까요.

하나님께 진정 회개한 믿음은 형제에 대한 관용으로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지극히 작은 형제에게 하지 않은 것이 곧 내게 하지 않은 것이라고 하셨잖아요?

오히려 박해하는 자를 위해서도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이 깊이 숨겨 둔 본성은 다 똑같습니다.

성경이 오늘도 그걸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람을 상대하고 세상을 사는 유일한 동기는 자기 사랑입니다.

사람들은 나만 중요하지 다른 건 사실 다 관심 없습니다.

예수님이 천국의 보좌에서 내려오셔서 십자가의 치욕스런 수난을 당하고 참을 수 없는 고통 속에서 우리를 속죄해 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모든 양떼들이 함께 하나님의 복을 누리며 서로 사랑하며 마음 편하게 예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세상에선 우리가 상처받고, 억울한 일을 당하기도 하고, 이해받지 못한다 할지라도 주님의 교회에서는 그게 아니잖아요?

그런데 세상이 하는 것처럼 그렇게 약한 자를 옆구리로 툭툭 치고 어깨로 밀어낸다는 것입니다.

마음이 상하고 병든 자를 업신여기고 교만한 뿔로 들이 받아 깊은 상처를 받고 양들이 떠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이잖아요?

간혹 식당에서 여자분들이 모여서 떠드는 소리를 들어보면 세상분들은 운동얘기나 집안 얘기하며 깔깔거립니다.

집사님, 권사님 호칭하시는 분들 보면 교회와 목사님, 교인들 험담하느라 여념이 없는 것을 종종 봅니다.

항상 남을 비판하고 갈등을 일으키는 것은 우리 모두를 평안한 목장에 넣으시고 축복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멸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도 이런 설교를 통해 미움의 감정을 누그러뜨리고, 마음을 좋게 가져야 합니다.

우리 안에는 온갖 더러움이 신앙과 인격과 윤리의 뚜껑아래 갇혀 있습니다.

본성을 아는 마귀가 약간만 시험해도 순간적으로 뚜껑이 열리는 것입니다.

안에 있는 게 튀어나오면 일이 얼마나 추하고 시끄러워지는지 모릅니다.

이 사실을 안다면 우리 입에 파수꾼을 세워달라고 기도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말씀을 통해서 깨닫고, 그런 우리 모습을 뉘우치고, 예수님이 지도하신대로 겸손과 사랑으로 사람들을 대하려고 다시 또 노력해야 합니다.

비록 완전치 못하다 할지라도 그런 우리를 하나님은 축복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가 서로를 세워주고 교회를 세우는 복된 성도들이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이렇게 심판 뒤에, 또 다시 심판받을 수밖에 없는, 이스라엘을 질책하신 뒤 하나님은 유일한 대책을 꺼내 놓으시는 것입니다.

23절 내가 한 목자를 그들 위에 세워 먹이게 하리니 그는 내 종 다윗이라.

그가 그들을 먹이고 그들의 목자가 될지라

다윗의 자손으로 보내주실 속죄의 메시야 외에는 방법이 없는 것입니다.

본성이 악하고 그로인해 현실이 파괴 된 사람들을 고치고 인도할 수 있는 목자는 그들을 지으신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고집 쎄서 들이받는 양, 병약해서 의기소침한 양, 상처받고 울고 있는 양, 미련해서 못 알아 듣는 양.

우리가 가진 모든 약함과 두려움과 못됨을 아시고 다루실 분은 참목자 되신 예수님 밖에 없으십니다.

자식들도 우리가 다룰 수 있는 게 아니라 예수님만이 다루실 수 있습니다.

능력도 안 되며 신경전 벌이지 말고 기도로 예수님께 맡기십시오.

제가 전에 몽골의 고비사막에서 대를 이어 낙타를 기르는 목동들의 다큐영화를 본 적이 있습니다.

그 목자들이 낙타를 돌보는 것은 요즘 상업적 목축업자들하고는 차원이 달랐습니다.

낙타는 그들의 양식의 공급줄이자 가족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그런데 낙타 중에 새끼를 낳아서 기르던 한 어미가 있었습니다.

새끼는 어미 젖을 물려고 애를 쓰는 데 이상하게 어미가 계속 새끼를 밀어내고 젖을 주지를 않는 것입니다.

어린 새끼는 어미가 젖을 주지 않으면 메마른 고비사막에서 갈증과 굶주림으로 죽을 수 밖에 없습니다.

고민하던 목자가 결심을 하고 해결책을 구하는데, 엉뚱하게도 마두금이라는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을 불러오는 것입니다.

낙타에게 음악을 연주해서 그 마음을 감동시키면 새끼에게 젖을 물릴 거라는 말이죠.

어미 낙타를 데려오고 그 앞에 악사가 앉아서 애잔한 가락의 곡을 연주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얼마간 그 연주를 듣고 있던 어미 낙타의 두 눈에서 눈물이 주루룩 흘러내리기 시작합니다.

목자는 울고 있는 어미 낙타를 계속 쓰다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잠시 후 새끼 낙타가 어미 곁으로 다가가자 어미 낙타가 다시 젖을 물리는 것입니다.

저는 그 광경이 참 신기하면서도 가슴이 찡하고 콧등이 시큰했습니다.

어미 낙타는 왜 새끼에게 젖을 물리지 않았을까요?

동물이라고 본능대로만 살겠습니까?

어쩌면 풀을 찾아 메마른 사막을 헤매는 그 삶이 고달프지 않았을까요?

태양은 뜨겁고 체력은 고갈되는 데 거기다 새끼까지 먹여 살려야 하는 사막의 삶에 의욕을 상실하지 않았을까요?

그 마음을 달래고 위로해주는 목자의 모습이 마치 우리 마음의 깊은 아픔과 슬픔을 들여다 보시는 목자되신 예수님을 생각나게 했습니다.

때로 우리도 그렇잖아요?
광야처럼 막막한 삶을 생각하면 무겁게 짊어진 모든 것을 내동댕이치고 그 자리에 주저앉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우리를 목자처럼 달래고 위로하고 새 힘을 주셔서 다시 일으켜주시잖아요?

그런 목자 예수님을 만나고, 함께 동행하고 있으신가요?

혹시 예수님을 양떼들 속에 둘러싸인 긴 곱슬머리에 훤칠한 모습을 한 그림 속 목자의 모습으로만 아시는 건 아닙니까?

목자가 먹여주는 시원한 물이 목으로 느껴지고, 신선한 풀의 향기가 입안에 감도는 그런 체험적인 관계가 되어야 합니다.

절벽 앞에 섰을 때 우리를 안전히 건네주신 예수님을 경험하면서 우리는 사는 것입니다.

어려움이 있을 때 마다 도와주시고, 병들어 신음하던 밤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예수님을 계속해서 우리 삶에서 체험해 가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또 다른 문제가 생겨도 그렇게 또 주님을 의지하고 계속 우리는 이겨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몽골의 그 황량한 사막에서 낙타가 어떻게 혼자 힘으로 생존하겠습니까?

낙타가 주변에 풀을 다 뜯어 먹으면 목자는 게르를 옮겨 풀이 있는 먼 곳으로 이동합니다.

오직 낙타를 먹이기 위해 목자는 고비사막을 맴돌고 있었습니다.

사막의 삶은 목자와 낙타 둘 사이가 전부인 것 같았습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를 절대로 떠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안심하고 따르도록 예수님의 모습을 목자로 성경에 그려 놓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조상으로 택하신 다윗도 목동이었고 왕이었습니다.

그의 후손으로 오실 영원한 메시야왕도 다윗같이 양을 돌보시는 목자입니다.

다윗의 뒤를 이은 솔로몬 왕조의 포악함에 하나님은 탄식하셨습니다.

그의 아들 르호보암이 왕이 되었을 때 백성들에게 이렇게 말할 정도입니다.

내 아버지는 너희의 멍에를 무겁게 하였으나 나는 너희의 멍에를 더욱 무겁게 할지라 내 아버지는 채찍으로 너희를 징계하였으나 나는 전갈 채찍으로 너희를 징치하리라

하나님은 다윗의 타락한 왕조가 아닌, 다윗의 다른 한 연약한 가지에서 목자같이 백성들을 사랑으로 인도하실 그리스도를 보내신 것입니다.

오늘 교독문 읽으시며 의문이 드는 것 없으셨습니까?

거기 보면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난다고 이사야선지자가 예언했죠?

이새는 다윗의 아버지입니다.

왜 다윗의 줄기라고 안하고 이새의 줄기라고 했을까 의문이 생기지 않습니까?

무지한 이스라엘이 타락한 유다왕조에서 오실 메시야를 기다릴까봐 아예 무명의 다윗의 부친 이름을 쓴 것 아니겠습니까?

지난 주 살펴본대로 혈통적으로 볼 때 예수님의 모친인 마리아는 솔로몬이 아닌 나단이라는 형제의 계보에서 태어나셨잖아요.

누가복음의 족보를 보면 그래서 맨 모르는 이름들 뿐입니다.

전혀 기대하지 않았고 관심을 받지도 않은 다윗의 아들의 혈통을 통해 예수님이 오신 것이죠.

그래서 그 왕은 화려한 왕궁이 아니라 그 분이 장차 인도하실 가축들의 우리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오늘도 우리의 삶의 고단함을 알고 수고로운 멍에를 벗고 쉬게 하실 목자의 품에 편히 안기시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끝으로 오늘 본문 25절 부터는 참 아름다운 축복과 위로의 말씀입니다.

다들 읽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셨을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근심 걱정 없는 평안하고 행복한 삶으로 우리를 인도하고 계십니다.

물론 우리의 신체는 점점 쇠약해지기도 합니다.

여기저기를 고쳐가면서 살아야 하는 게 정말 성가시고 힘듭니다.

청년들은 이해가 안 갈 것입니다.

전성기가 지나면 모든 것들이 점점 빠져 나가기 시작하죠.

그러나 예수님이 목자가 되신 성도의 삶은 형편에 관계없이 자기가 점점 더 부요해지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그 복은 날이 갈수록 더욱 풍성해 질 것입니다.

그런 복을 얻기 위한 조건은 단 하나입니다.

24나 여호와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내 종 다윗은 그들 중에 왕이 되리라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 되시기 위한 조건은 다윗의 자손인 그리스도를 왕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25절을 보면 하나님은 그 목자를 통해서만 화평의 언약을 맺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인간 그 누구를 통해 화평의 언약을 맺으신 적이 있습니까?

오늘 오직 다윗의 후손인 메시야를 통해 화평의 언약을 맺으신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3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예수님의 피가 화목제물이 되어 하나님과 우리사이가 화평하게 된 것입니다.

이 언약을 통해서만 우리는 저주받은 죄인의 삶에서 하나님이 돌보시는 양떼가 되어 안전하고 복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내 양 곧 내 초장의 양 너희는 사람이요 나는 너희 하나님이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말씀을 정리합니다.

오늘 말씀은 인간의 심판 받을 죄의 반복, 다윗가문의 한 목자, 화평의 언약과 축복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 단계를 우리가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는 때로 상처받고 병약한 양이지만, 한편 악을 품고 있는 포악한 양입니다.

우리도 이스라엘처럼 죄에 대해 공의로운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 안에 있는 속죄와 화평의 언약 때문에 심판대신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역사 이래로 아직까지 죄짓고, 심판받고, 구원받고,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는 역사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아직도 기다리고 있는 다윗의 자손이 바로 예수님임을 깨닫고 왕으로 받아들일 때 진정한 평화가 예루살렘과 유대인들에게 오는 것입니다.

누구든 하나님이 화평의 언약이신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지 않는 한 그들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 아래 놓여 있는 것입니다.

대림절, 우리 모두가 양을 위해 목숨을 버리신 선하신 목자 예수님을 더 깊이 묵상하고 더 현실에서 체험하는 은혜가 있기를 빕니다.

2017년12월10일 주는나의산성교회 남수연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