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속에는 특이한 환상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중 오늘 본문의 마른 뼈가 다시 사람으로 살아나는 환상은 경이롭고도 기묘합니다.
인상에 남을만한 충격적인 특별한 환상이라면 분명히 전달할 중요한 메시지가 있다는 뜻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에스겔선지자를 마른 뼈들로 가득 찬 골짜기로 데려가십니다.
그 골짜기는 바벨론과의 큰 전쟁에서 패배하고 죽은 군인들의 시체가 쌓였던 곳일 수도 있고 환상 속의 장소일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에스겔선지자에게 이 마른 뼈들을 되살려 다시 큰 군대가 되게 하겠다고 하십니다.
에스겔은 하나님의 명령대로 마른 뼈를 향해 말씀을 대언합니다.
그러자 뼈에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오르고 가죽이 덮혀 몸이 됩니다.
또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가자 곧 살아나 큰 군대가 됩니다.
하나님이 희한한 환상을 통해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려는 것일까요?
오늘 환상을 통한 예언은 일차적으로 바벨론으로 잡혀온 포로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포로생활에서 이들을 해방시켜 고국으로 돌려보내신다는 것이죠.
각 성경의 내용은 우선 그때 말씀을 듣거나 읽은 사람들의 시대를 위한 것입니다.
그걸 무시하고 무작정 현대에 적용시킬 수는 없습니다.
과거에 왜 이 말씀을 주셨는지 역사를 살펴보며 현재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을 찾아내야 합니다.
이런 두 가지 측면에서 오늘 말씀을 보면 이 환상에서 큰 은혜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또 진액이 마른 뼈와 같은 심령이라면 오늘 말씀을 통해 생기와 활력을 얻게 되길 소망합니다.
우선은 이스라엘 포로귀환의 관점으로 본 환상입니다.
에스겔서의 배경은 이스라엘의 바벨론 포로 시대입니다.
제사장 출신의 에스겔도 바벨론으로 잡혀가 포로생활을 하던 중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습니다.
포로사회에 대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된 것이죠.
그때까지 아직 본토는 완전히 함락된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혹시 전투에서 이기면 다시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을거라는 실낱같은 희망을 가진 사람들에게 에스겔이 전하는 메시지는 헛된 희망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이미 멸망은 정해졌으니 기대해봤자 소용없다는 것이죠.
그동안의 잘못과 망해가는 이 순간까지 하나님을 배신하는 지도자와 백성들의 모습을 하나님은 낱낱이 드러내십니다.
그렇기에 심판은 피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에스겔의 예언대로 얼마 안 있어 수도 예루살렘성은 함락되고 성전은 파괴되어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는 역사 속에서 사라지게 됩니다.
그러자 그 때부터 에스겔선지자의 메시지는 달라집니다.
이제 모든 소망이 끊긴 포로 백성들에게 다시 소망을 가지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이들을 반드시 고국으로 돌려보내시고 다시 하나님을 섬기는 복된 민족이 되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미련과 세상에 대한 기대가 끊어질 때 하나님의 위로와 축복이 시작된다는 소망을 갖게 됩니다.
이런 절박한 상황에서 이스라엘사람들의 태도는 어땠을까요?
당시 사람들의 생각이 20장32절에서 이렇게 드러납니다.
너희가 스스로 이르기를 우리가 이방인 곧 여러 나라 족속 같이 되어서 목석을 경배하리라
기왕 이렇게 된 것 차라리 다른 나라 사람들처럼 목석이나 섬기며 살겠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원하셨던 게 이건 아니잖습니까?
부모에게 야단 맞은 아이가 심통을 부리며 아예 가출하겠다는 격이죠.
이 모습은 기회만 되고, 빌미가 생기면 하나님을 벗어나려는 인간의 본성을 그대로 말해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멀리하려는 핑계거리는 늘 넘쳐납니다.
이런 그들에게 하나님은 이렇게 단언하십니다.
너희 마음에 품은 것을 결코 이루지 못하리라
그렇게는 못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예언서를 읽다보면 정말 하나님의 고뇌와 한숨이 이런 대목에서 느껴집니다.
무지하고 악독한 죄인들을 앞에서 수준을 맞추시고 변론을 벌이시는 하나님을 성경에서 우리는 종종 만나 볼 수 있습니다.
왜 그러시겠어요, 사랑 때문에 밀당도 되는 것입니다.
힘으로 하자면야 인간이 한 주먹감이나 됩니까?
그러나 처음부터 그렇게 우리를 복종시키시려면 자유를 주지 않으셨겠고 선악과를 두실 이유도 없으셨죠.
무조건 복종하는 DNA를 만드셨다면 무슨 문제가 있었겠습니까?
개들의 DNA는 주인에게 복종하라고 지시합니다. 악독한 주인일지라도.
하나님이 그 사랑 때문에 우리에게 이 자유를 주시고 무슨 댓가를 치르셨는지 성경 전체가 말해줍니다.
만일 아담이 그 사랑을 알고 불순종이라는 나쁜 선택을 하지 않고 순종이라는 좋은 선택을 했다면 어땠을까요?지금도 우리는 좋은 것만 선택하면서 복되게 살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불순종한 나쁜 선택의 결과로 이젠 갖고 싶어도 좋은 것을 마음대로 가지지 못하는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본래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세상은 그게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도 선택의 기회는 있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다시 순종을 선택하고 믿음의 자녀가 된다면 우리는 점점 좋은 미래를 선택하며 누리고 사는 축복이 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자기들의 나쁜 선택으로 당한 수치를 회개할 생각 없이 하나님을 떠나겠다고 하며 또 신세타령이나 하고 앉아 있었습니다.
14절, 그들이 이르기를 우리의 뼈들이 말랐고 우리의 소망이 없어졌으니 우리는 다 멸절되었다 하느니라.
너희가 돌아오게 될 것이라는 선지자들의 말을 전혀 믿지 않았습니다.
사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심판하셨지만 비참한 포로생활을 하는 그들을 위로하시기에 더 조급해하십니다.
예레미야서를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 종 야곱아 두려워 말라 이스라엘아 놀라지 말라 내가 너를 원방에서 구원하고 네 자손을 포로된 땅에서 구원하리니 야곱이 돌아와서 태평과 안락을 얻을 것이라 너를 두렵게 할 자 없으리라
두려워마말라, 놀라지 말라. 막 안심시키시잖아요?
이게 무슨 이유이든 고통을 당하는 하나님의 자녀에 대한 마음이십니다.
그런데 그들은 스스로가 이젠 완전히 멸절되었다며 자포자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이스라엘을 마른 뼈로 보여주셨겠습니까?
이젠 뼈가 마르고 죽게 되었다는 그들의 넋두리를 그대로 반영하신 것입니다.
결국 자기들 말대로 무덤 같은 포로생활에서 뼈가 말라가는 고통을 70년이나 당하게 된 것이죠.
우리가 스스로를 처량하게 생각하고, 믿음이 없는 부정적인 말을 하는 것을 경계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말을 들으십니다.
이런 이스라엘사람들에게 하나님은 그래도 끝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12절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나오게 해서 고국으로 인도하겠다
그들이 스스로 고국으로 돌아올 능력이 없고, 하나님께 돌아올 생각도 없습니다.
이것이 오늘 골짜기에 가득한 마른 뼈 같은 이스라엘의 상태이자 모든 죄인들의 상태입니다.
그래서 내가 하겠다는 것입니다.
성경이 보여주는 위대한 진리는 인간의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이고 하나님이 이루시는 대 역사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 여기 와서 앉아 하나님을 예배하며 섬기게 된 것은 자의적으로 온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 없이 살려고 하던 사람들입니다.
우리 인생에 절대로 예수님을 끌어 들이고 싶어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데려와 복된 나라에 심으신 것입니다.
에스겔서에는 삼십 번 씩이나 반복되어 나오는 특별한 문장이 있습니다.
내가 이 일을 이룬 뒤에 내가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리라.
구원을 받은 뒤에야 사람들은 ‘아, 하나님이 나를 위해 이런 기막힌 일을 하셨구나’ 라고 깨닫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모태에서 이미 택하시고, 죄가 있으면 천국에 올수 없기에예수님을 보내셔서 죄값을 청산해주시고, 미꾸라지처럼 요리조리 빠져나가던 나를 붙잡아다 구원을 주셨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죠.
이것을 알 때 너희가 자기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라고도 하십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나면 정말 내 자신이 부끄러워요.
오늘 마른 뼈가 살아나는 환상은 일차적으로 바벨론 포로가 되어 무덤에 갇힌 이스라엘, 뼈가 말라가는 이스라엘을 귀국시키시겠다는 하나님의 강력한 의지이자 모든 사람들을 향한 구원의 계획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예언의 메시지는 과연 이스라엘역사 속에서 다 이뤄졌을까요?
최초 포로가 잡혀간지 칠십년 만에 고레스왕은 포로를 놓아보내는 칙령을 내립니다.
말씀대로 이들은 무덤에서 다시 살아나와 본국 이스라엘로 돌아간 것입니다.
이사야서나 에스겔서에서 예언한 이 이스라엘의 회복을 보면 그 영광은 정말 대단하고 완벽합니다.
사자가 어린 양과 같이 살고, 사람들은 더 이상 서로 무기를 만들어 싸우지 않고, 영원히 다윗왕이 다스리는 낙원을 제시하시잖아요?
그런데 사실 바벨론 포로귀환에서 돌아온 이스라엘의 역사는 그 약속에 비하면 너무 시시한 정도입니다.
돌아오긴 했지만 여전히 페르시아의 통치를 받는 속국이었고, 그 이후도 거듭되는 열강의 침략으로 또 나라를 뺏기거든요.
현재의 이스라엘 땅에 어디 평화가 있습니까?
여성들도 군대에 갈만큼 아랍인들과의 긴장관계는 일촉즉발입니다.
이번에 이스라엘방문을 마치고 돌아오는 데 공항에서 얼마나 오래 탐문을 하는지 다른 나라하곤 비교가 안됩니다.
이건 에스겔을 통해 약속했던 그 평화의 나라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 정도의 회복을 하나님이 이렇게 과장되게, 부풀려서 말씀하신 건가요?
그럴리는 없잖아요?
실은 선지자들의 예언이 바벨론에서의 귀환만을 의미하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바벨론 귀환으로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예언이 완전히 이루어진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로부터 오백여년 뒤,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살리실 때 의미심장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그러니까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너희를 무덤에서 나오게 하시겠다는 이 때는 바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불러내실 그 때라는 것입니다.
에스겔의 예언은 하나님이 반드시 이룰 것에 대한 모형적인 의미로 일부 이뤄졌지만 본래 이 환상의 중점은 예수님께, 그리고 속죄의 결과로 오실 성령님의 구원사역에 맞춰져 있는 것입니다.
이 예언은 신약시대 예수님의 구원의 완성으로 이뤄졌고 종말적으로는 천국에서 완벽하게 이뤄질 예언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환상은 이 시대, 우리에게 어떤 영적인 의미를 깨닫게 하시는 것일까요?골짜기에 가득한 마른 뼈들은 죽어서 무덤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 살아서 활보하지만 영적으로 죽어 있는 사람들을 뜻합니다.
사람의 구성은 동물하고 다릅니다.
동물은 몸과 정신세계의 총체인 혼으로 창조되었습니다.
그러나 사람에게는 영이라는 실체가 하나 더 있습니다.
사람이 진화되었다고 하는 것은 동물과 똑같이 몸과 정신세계인 혼만으로 구성되었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에게는 혼이라는 총체적인 인격 안에 하나님을 인지하는 영적인 영역이 있습니다.
아담의 범죄 이후 모든 사람들은 이 영이 죽은 상태로 태어납니다.
영이신 하나님을 감지할 수 있는 영이 죽어있으니 그런 사람에게 백날 영을 언급하고 영이신 하나님을 말해봤자 이해할 수가 없는 영역입니다.
영이 살면 하나님이 계신 것과 내가 하나님과 연결된 것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거듭나기 전에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이젠 알게 되었고, 믿고 신뢰감이 생겼습니다.
이전에 하나님을 알지 못했던 때와 비교해보면 차이를 쉽게 알 수 있어요.
이런 면에서 환상에서 보여주신 사람의 세 형상은 모든 사람들이 이 세 가지 중 하나의 상태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른 뼈, 생기 없는 육신, 생기가 들어가 일어선 군대입니다.
마른 뼈는 영이 죽어 있는 자연인의 상태를 말합니다.
마른 뼈는 하나님을 지각할 수 있는 영이 없기에 하나님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영적인 일을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입니다.
물론 이런 사람들도 좋은 성품을 갖거나 똑똑하거나, 능력이 많고 도덕적이기도 합니다.
다만 오직 한가지 하나님에 대해만 모릅니다.
영생에 대해서, 죽음 뒤의 삶에 대해서, 지금 역사를 주관하고 계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예수님의 십자가가 무엇인지, 성령께서 지금 일하고 계신 것에 대해 아무 것도 모릅니다.
그런걸 잘 모르면 그게 없는 것이 아니라 영이 죽어서 모르는 것입니다.
이들은 반드시 영이 살아나야 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살아나기 위해서는 먼저 말씀이 전해져야 합니다.
에스겔에게 하나님의 구원에 대해 마른 뼈들에게 그대로 대언하라고 하잖아요?
처음 교회에 나오신 분들이나 불신자들은 성경과 복음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십니다.
그런 분들에게 제일 먼저 필요한 것은 성경을 통해 하나님에 대해, 예수님의 구원의 진리에 대해 계속 가르쳐야 합니다.
처음엔 알아 듣지 못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영원한 세계에 대한 이해와 지식이 생깁니다.
그것이 마른 뼈 위에 힘줄이 연결되고 살이 차오르고 가죽이 덮혀서 사람의 형상, 즉 신앙인의 모습을 만들어 가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아직 생기는 없습니다.
성경을 깨닫기도 하고, 이해도 하고, 신앙생활도 하고 있지만 아직 생기가 없어 하나님을 바르게 인식하는 감각은 없습니다.
다리미가 뜨겁다고 아는 것과 뜨거움을 감각으로 느끼는 것은 다릅니다.
성경의 교훈이 옳은 것 같은데, 죽어있는 몸을 이끌고 신앙생활을 하려니 힘이 듭니다.
죽은 몸을 질질 끌고 가려니 얼마나 더디고 무겁겠습니까?
이런 영적 상태는 혹시 신앙생활에 열심히 있다고 해도 하나님에 대한 자각보다 종교심이나 자기 만족이나 기복적인 목적인 경우입니다.
이런 사람도 반드시 생기가 이 육체에 들어가 살아있는 영이 되어야 합니다.
이스라엘사람들도 과거나 현재나 이런 상태로 하나님을 믿고 있는 것입니다.
몸은 만들어졌지만 생명이 없는 이 몸에게 다시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라고 하십니다.
사방에 있는 생기에게 명하라고 하십니다.
생기는 죽은 몸 안에 있는 게 아닙니다.
밖에서 들어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말씀하신 생기는 온 세상에 충만하신 하나님의 성령이라고 말씀하시죠?
14절에 내가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가 살아나게 하리라.
이것이 바로 성령으로 거듭나는 단계입니다.
여기까지 되어야만 비로서 하나님의 군대와 같은 능동적인 성도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들을 큰 군대라고 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위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기꺼이 자신을 헌신할 마음이 비로서 생기는 것은 영이 거듭나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헌신할수록 기쁩니다.
이때가 되면 아무리 봉사하고 헌신하고 경건생활을 해도 자신의 부족함을 느낍니다.
자기 노력에 비해 하나님이 베푸시고 인도하시고 돌보시는 은혜, 그리고 장차 누리도록 준비하신 영생이 얼마나 비교할 수 없이 큰지를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저 감사하게 주님을 따르게 되는 것이죠.
성도들은 이런 단계를 거쳐 영생을 얻고 하나님나라의 존귀한 상속자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단계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들은 없는 것일까요?
하나님이 이것을 반드시 이루시겠다면 인간 쪽에서 가만히 있어도 되는게 아니냐는 것이죠.
그런데 앞32장에서 하나님은 이런 청사진을 보이신 다음 이렇게 말씀합니다.
37절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그래도 이스라엘 족속이 이같이 자기들에게 이루어 주기를 내게 구하여야 할지라
우리 스스로도 늘 말씀을 듣고, 메마른 영에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교훈으로 풍성하게 덧입혀 가야 합니다.
그리고 생기가 우리에게 불어오도록, 즉 성령으로 거듭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잖아요?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아무리 천금을 얻을 비법을 듣는다 해도 비법대로 하지 않으면 한푼인들 얻겠습니까?
이런 구원과 영생의 계시를 들려주시면 우리는 이게 내게 이뤄지기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거듭나 하나님을 알게 된 성도들도 매순간 성령께서 생기를 불어넣어 주셔서 강한 군대 같이 살게 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믿음을 지키며 그 나라를 위해 살기 위해서는 우리 힘만으로 되질 않습니다.
세상살이만 하더라도 우리 힘으로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내 힘으로 험악한 일을 막아보려고 애쓰다 낙담하고 우울증에 걸리고 그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스스로 도를 닦아 모든 것을 이겨내라고 하지 않으셨어요.
성령 안에서, 성령께서 주시는 능력을 의지해서 믿음도 지켜가고, 돈도 벌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일도 하고 그러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성령께서 우리의 전 인격을 도와주시길, 성령충만을 위해 매일 쉬지않고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은 구원을 위해 반드시 필요합니다.
성령충만은 세상을 이길 힘을 얻는 데 반드시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되길 구하라고 하셨고, 우리는 기도로 구하면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약속대로 이뤄주시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은 반드시 마른 뼈같은 우리를 일으키고 살리셔서 하나님의 축복의 자녀로 만드실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할 일은 마른 뼈에 살이 차오르도록 항상 말씀을 듣고, 성령받기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성령받은 우리들은 매순간 성령충만을 기도해야 합니다.
거듭난 성도라도 성령이 소멸되면 마치 죽은 몸을 이끌고 다니 듯 신앙생활이 힘들어집니다.
내 힘만으로 이 무거운 현실을 감당하려하면 지치고 절망하고 병에 걸립니다.
살아보려고 스스로를 추스르는 것도 한계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녀들이 성공적인 이 땅을 살 수 있도록 성령님을 보내주셔서 힘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죄의 본성인 부정적이고 우울하고 무기력함 대신에 하나님의 본성인 기쁨과 활력과 능력으로 우리가 바뀝니다.
그래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 없이 살면 보잘것없는 내 능력을 넘지 못하지만 기도하면 하나님의 능력을 덧입어 삽니다.
바라기는 매일 이렇게 성령의 충만함을 덧입어 힘있게 살아가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2017년2월5일 주일설교 남수연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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