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수기

민수기13장25절-33절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

남수연 2015. 4. 15. 17:15

  

요즘 보면 봄이 정말 축복의 계절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꽃보다 더 아름다우신 하나님께서 예배하는 우리 모두의 심령도 꽃처럼 활짝 피어나게 해주시길 소망합니다.

오늘 본문은 애굽의 속박을 벗어나 자유의 몸이 된 이스라엘백성들이 들어가서 차지할 가나안 땅의 코 앞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설레기도 하고 두렵기도 했던 이들은 가나안 땅 정복을 앞두고 열두명의 정탐꾼을 보내서 가나안땅을 살피자고 합니다.

본문은 40일이 지나 돌아온 정탐꾼들이 백성들의 총회 앞에서 결과를 보고 하고 있는 장면입니다.

그중 열명의 정탐꾼들은 그 땅의 정복에 대해 부정적인 브리핑을 하고 여호수아와 갈렙만이 긍정적인 보고를 합니다.

10명이라는 다수의 부정적인 발언으로 인해 백성들은 밤새도록 통곡하며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할 정도로 패닉상태에 빠집니다.

결국 이 일로 인해 출애굽 1세대는 하나님의 진노로 가나안 땅에 발을 딛지 못하고 광야에서 다 죽게 된 것입니다.

젊었을 때는 하나님의 약속을 못 믿고 원망하는 이스라엘의 모습이 밉살스럽기도 하고 이해가 잘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다시 말씀을 보며 그럴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도 한편 듭니다.

이미 출애굽한지 일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곧 들어가리라 생각했던 기름진 영토가 아닌 모래먼지가 입에서 지분지분 씹히는 삭막한 광야에서 장막생활을 한지 벌써 일년이 지난 것입니다.

유대광야 성지순례 코스에 기념품을 파는 가판들이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모래바람이 한번 불고 지나가면 늘어놓은 기념품들이 다 모래에 덮여 버려서 그냥 대충 모래와 범벅이 된 채 장사를 한다고 합니다.

광야의 장막 생활이 얼마나 힘든지 상상이 가실 것입니다.

일년이나 광야에서 불안한 시간을 보냈다면 이제는 과연 들어가서 차지할 땅이 있기나 한지 의심이 들만도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이든 모세든 약속한대로 이 많은 백성을 끌어다 안전한 땅에 심을 수 있을 지 회의가 들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사람이 자기 결정으로 무얼하다 안되면 운이 없었다, 재수가 없다, 실력이 나빴다 이렇게 생각하고 털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의지했고 하나님께 바랬던 것이 지체되면 현재 당하는 어려움 뿐 아니라 신앙에도 회의가 생기는 것입니다.

사실 이 가데스바네아의 총회에서 있었던 일을 잘 생각해 보면 참 이상한 사건입니다.

단지 가나안땅에 대해 부정적인 보고를 듣고 두려움에 빠져 전쟁을 거부했다는 이유만으로 하나님께서 40년 광야 감옥형을 내리셨다는 것입니다.

이런 보고를 받았다면 우린들 싸우러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징계대로 이들은 40년을 광야에서 돌다 하나씩 다 죽어 나갔습니다.

마지막 한 명이 숨을 거두자 하나님께서 그들의 자녀세대를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게 하셨던 것입니다.

오늘 가데스바네아의 사건은 단지 유대민족의 한 역사로 이해할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장차 죄인들을 구원하셔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실 것을 실제 있었던 한 역사적인 사실을 통해 상징적으로 보여주시는 가장 특이하고 유일한 사건입니다.

이 과정에 하나님을 대적하는 불의와 악에 대한 심판이 필연적으로 따르는 것입니다.

본문은 이 과정이 얼마나 철두철미한지를 보여주는 것이죠.

이 계획을 이루기 위해 십자가에 예수님을 못박아 죽이신 성부하나님을 보십시오.

우리의 죄의 값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이만큼 철저하게 계산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구원계획에 미리 선택되었지만 거부하고 원치 않았기에 약속의 땅의 주인이 될 수 없었습니다.

오늘 이스라엘이 두려움에 휩쓸려 한 번 불신의 태도를 보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 과정에 그들이 열번이나 거역하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열번이나 하나님이 그들을 참아내셨다는 것이죠.

죄인이 하나님 앞에 나오는 데는 이런 실갱이가 옥신각신 오가는 것입니다.

우리도 수없이 이런 실갱이를 하며 하나님 앞에 오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결국 구원은 하나님의 초청에 자신이 자발적으로 선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인한 언약백성이 될 것을 거절할 때, 그들은 자신들이 치러야할 죄의 댓가를 스스로 짊어지고 죽을 수 밖에 없습니다.

후에 여호수아와 출애굽2세대에 의해 정벌당한 가나안 부족들 역시 괜히 잘사는 사람들을 뽑아내고 이스라엘을 심으신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거역한 가나안 부족들의 비인간적인 잔인함과 악독한 죄악 때문에 심판을 받은 것입니다.

각 개인마다 그 죄악이 심판이 쏟아질 만큼 다 채워졌다는 것입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당할 때, 아브라함이 거기 있는 의인을 죄인과 함께 멸하셔야 되겠냐며 중재를 시도하자 하나님이 뭐라고 하십니까?

의인을 좀 데려와 보라는 것 아닙니까?

멸망당한 가나안부족들의 패륜과 죄악이 어느 정도냐 하면 우상신에게 복을 빌기 위해 자기 자식을 불살라서 바쳤을 정도입니다.

나중에 이스라엘백성들이 그런 짓을 따라할 뿐 아니라 더 출중한(?) 죄를 짓다가 결국 그들도 바벨론에 의해 심판을 받지 않습니까?

그때 예레미야선지자를 통해 하나님이 예루살렘을 다니며 의인이 한명이라도 있나 찾아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그 성을 용서하시겠다고.

하나님의 심판에는 부당함이 없습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은 하나님의 구원의 웅대한 역사에 선택되고 먼저 죄사함을 받은 기적 같은 축복을 가볍게 생각하고 다시 죄악의 노예를 상징하는 애굽으로 돌아가길 원했습니다.

결국 그들이 들어가기 싫어했던 약속의 땅에 그들이 선택한대로 발도 못 붙이고 광야에서 다 죽었다는 것이 오늘 본문의 메시지입니다.

그들은 스스로가 거절해서 못 들어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잘 살펴보면 구원의 중요한 원리가 사건 속에 담겨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스라엘은 그 의미를 잘 해석하지 못해서 불가능해 보이는 현실 앞에서 실패를 경험한 것입니다.

우선 정탐은 제대로 이루어 졌습니다.

정탐을 마치고 돌아온 사람들의 손에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가져온 탐스런 과일들이 들려있었습니다.

심지어 포도송이가 얼마나 큰지 막대에 꿰어 두 사람이 메고 왔다고 23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시겠다는 땅은 말씀하신대로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기름지고 풍요롭다는 것을 제대로 정탐한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땅에 거주하는 거주민들입니다.

28절을 보면 그 땅 거주민은 강하고 성읍은 견고하고 심히 클 뿐아니라 거인족인 아낙 자손이 살고 있다고 합니다.

게다가 29절을 보면 남방 땅에도, 산지에도, 해변과 강가에도 이들이 터전을 잡고 있어 한 뼘도 빈 곳이 없다는 것입니다.

가나안 땅은 도저히 뚫고 들어가 민족이 둥지를 틀수가 없다는 것이죠.

이것이 바로 정탐꾼들의 눈으로 확인한 가나안 지역의 분명한 현실입니다.

우리가 현실을 무시하고 무조건 믿음으로 밀고나가는 것은 좀 신중해야 합니다.

우리가 소망하는 것을 철저히 탐색했더니 이 정도의 어려움이 있다면 하나님의 뜻에 대한 확신이 올 때까지 기도하며 인도를 기다리는 것이 맞습니다.

다만 오늘 이스라엘백성들에겐 이미 가나안의 축복이 분명히 약속되었다는 것이 다릅니다.

그런데 약속받은 땅도 그냥 들어가서 차지할 것이 아닙니다.

싸워서 취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강한 나라들과 싸워서 그 땅을 차지하라고 하는 것은 사실 당치않은 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전투를 배운 적도 없는 노예 출신의 노동자들입니다.

이들이 가나안을 정탐하고 느낀 절망감이 무엇입니까?

이건 절대 불가능이다, 우리 힘으로 싸워서 가나안 땅을 차지한다는 것은 지나가던 개도 웃을 일이다.’

이것 아닙니까?

자기가 봐도 메뚜기 같아서 대적들의 한 주먹감 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바로 이 점이 가나안 땅을 차지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포인트라는 것을 이들이 놓치고 있는 것입니다.

아무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실력을 모르고 거기에 밀어 넣으셨겠습니까?

죽었다 깨나도 우리 힘으로는 가나안 땅을 정복하고 차지할 수 없다.

그러니 가나안의 정복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다.‘ 이런 결론을 내야 되었다던 것이죠.

이것을 깨달아야 하는 것이 가나안 정탐의 핵심이었던 것입니다.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는 것은 신약시대에 구원을 받는 것, 천국을 유업으로 받는 것을 상징합니다.

죄에 대한 심판과 현세의 괴로움으로 부터 구원을 받는 것을 말합니다.

구원이야말로 절대로 우리 인간의 힘으로 할 수 없는 난공불락의 요새라는 것이 바로 가나안정탐이 가르쳐주는 확실한 메시지인 것입니다.

사람들은 다 행복하길 원합니다.

그런데 그럴 수 없는 어떤 문제가 내 안에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고 있습니다.

이 근본적인 문제로 부터 벗어나 스스로 구원해 보려고 다들 무언가 찾고 시도하며 사는 것입니다.

때로는 인간의 힘으로 신을 찾으려는 다양한 종교를 통해 구원을 찾고자 합니다.

어떤 이는 사랑하는 사람과 인생을 함께 하면 행복해지리라 기대하고 결혼을 하고 가정을 만듭니다.

그 결과가 과연 기대했던 만큼의 행복인지 아닌지는 기혼자 분들은 다 아십니다.

성공과 권력이 인생의 구원이라고 생각하며 쫒기도 합니다.

그러나 권력의 끝은 왜 그렇게 한결같이 비참한지 모르겠습니다.

지난 주도 권력의 비애를 우리가 눈으로 보지 않았습니까?

국민학교 졸업장도 없이 피땀을 쏟아 부어 기업을 일구어 부를 거머쥔 사람이 경0기업 0회장입니다.

정치인들 등쌀에 시달리다 자기도 정치 권력을 잡아보려고도 했다지만 결국 비참한 끝을 맞이했습니다.

인기를 추구하다 추락하고, 잠시라도 행복감을 맛보려고 마약에 손을 대고,

그러나 인간은 자기의 힘과 방법으로는 고통스러운 인생에서 절대로 스스로를 구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를 칭칭 옭아매고 있는 불행과 저주와 고통을 다 끊어 내고 훨훨 날 수 있는 구원은 오직 하나님께서 마련해 주셔야만 합니다.

이스라엘이 그 날 절대 불가능을 정탐했다면 그 다음, 그래서 하나님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며 자기를 사지로 몰아넣는다고 하나님을 원망하며 아예 등을 보이고 돌아서 버렸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해석을 잘 해야 하는 거예요.

하나님이 왜 가나안의 강한 부족들을 그들 앞에 두셨습니까?

구약시대나 신약시대나 약속의 땅엔 자기 힘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루신 구원을 믿음으로 들어간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또 오늘 정탐에 실패한 이스라엘백성들을 통해 이들이 점점 불신을 선택하는 과정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본문을 보면 정탐꾼들의 보고가 점점 더 부정적이 되어 가는 것을 봅니다.

부정적인 말은 일단 시작하고 나면 그 다음 말을 긍정적인 말로 돌이키기가 힘듭니다.

점점 더 상황을 나쁜 쪽으로 몰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처음 27절에서는 과연 그 땅에 젖과 꿀이 흐른다고 감탄사를 붙이며 보고했지만 그 땅 거주민들에 대한 부정적인 보고를 하다 보니 32절에 가서는 어느새 그 땅마저 악평하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그 거주민을 삼키는 땅이라며 전혀 다른 말을 합니다.

정탐꾼들이 부정적인 견해를 강조하다 보니 상황을 점점 나쁜 쪽으로 확대해석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28절에는 거인족인 아낙자손을 보았다고 하더니 33절에 가서는 근거도 없이 그들이 네피림의 후손이라고 과장되게 말합니다.

네피림은 창세기 노아의 홍수 이전에 나오는 초인적인 거인족들로 홍수 때 사라진 종족입니다.

그런데 단지 키만 큰 아낙자손을 더 굉장하게 포장해서 네피림 후손이라는 것이죠.

아낙이란 말이 목을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그러니 아낙자손이라고 해봐야 머리하나 더 크다는 뜻입니다.

그런데도 상대를 이렇게 과대평가하다 못해 그 다음은 자기를 과소평가 하고 스스로 자신을 메뚜기 같다고 비하시키게 되는 것입니다.

나 같은 것이 뭐 그런 어려움을 극복하고 큰 일을 하겠냐는 그런 부정적인 마음도 소극적인 불신앙의 일종입니다.

내면에는 그럴 힘이 되주지 않으시는 하나님께 대한 섭섭함이 도사리고 있는 것입니다.

열명의 부정적인 보고에 비해 여호수아와 갈렙의 반응은 어떻습니까?

30절에 보면 갈렙은 동요하는 백성들을 조용하게 하고 우리가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 능히 이기리라고 말합니다.

14장에 보면 그들이 백성들 앞에서 여호와께서, 여호와를, 여호와는그렇게 계속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을 강조하며 승리를 확신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열명의 정탐꾼의 보고와 여호수아와 갈렙의 보고에서 확연하게 드러나는 차이점이 무엇인지 아시겠죠?

열명의 보고에서는 하나님이라는 말이 없습니다.

현실만을 고려했지 사실 모든 현실을 관장하시는 하나님을 계산에 넣지 않은 것이 가장 큰 실패의 원인이었던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는 신자의 삶은 모든 상황에서 하나님을 제외시키기가 쉽습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이고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든 간절히 하나님을 찾고 문제를 말씀드리고 나면 분명히 염려가 옅어지고 왠지 잘 될 것 같은 긍정적인 마음이 되는 것을 경험하셨을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우리는 결과적으로 부정적인 사람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도움이 되신다는 것을 믿고 꾸준히 기도할 때, 자신감과 긍정적인 확신을 갖게 될 것입니다.

사실 어떤 상황이든지 긍정적인 해석이 가능하지 않은 것은 없습니다.

지금의 불만족한 상황을 긍정적으로 다 볼 수 있습니다.

회사일로 해서 정신적, 육체적으로 지쳐있다면 불만일 수도 있지만 회사가 문을 닫지 않으니 내 생계가 보장된다고 생각할 수 도 있는 것입니다.

대학 졸업한 청년세대의 취업률이 57%에 그치는 현실에서 직장이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감사할 수 있지 않습니까?

정신과 전문의인 다니엘 에이멘 박사는 부정적인 생각을 하면 통합적인 사고를 관장하는 소뇌 기능이 정지한다고 말합니다.

사고력이 약화되고 기억력이 감퇴되고 쉽게 분노하게 된다고 합니다.

반면 긍정적인 생각, 특히 감사한 생각을 가질 때 집중력이 높아져 기억력도 증대되고 몸에 에너지가 넘치고 신체기능이 원활해진다고 합니다.

이런 의학적인 연구결과도 우리의 감사와 긍정적인 믿음이 육체적 측면에서도 유리하다는 증거를 제공하는 것입니다.

과거에 우리는 매사에 꽤 부정적인 사람들이었을지 모릅니다.

긍정적으로 생각할 능력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고 가장 완전하게 우리를 인도하신다는 것을 신뢰하고 모든 일을 긍정적인 믿음의 눈으로 볼 수 있게 된 줄 믿습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오늘 말씀에서 우리가 한 가지 주목할 것은 히브리서에서 이 사건을 예로 들어 성도들을 교훈한다는 것입니다.

과거 이스라엘의 조상들만 하나님께 대한 불신으로 약속의 땅을 놓친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약속을 받은 신약시대의 사람들 중에도 믿지 않아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는 수가 있다고 간곡하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는 혹 이르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

삶의 어려운 문제이건, 혹은 우리의 나태함이건 그런 이유로 우리 믿음이 뒤로 물러나지 않도록 약속을 믿고 앞으로 나가기 원합니다.

우리에게 감당하기 힘든 상황이 있습니까?

내 능력으로 도저히 해낼 수 없을 것 같은 어려운 문제가 있습니까?

삶의 한 부분이 무너져내리는 것 같습니까?

우리의 구원이 우리 자신의 힘으로 된 것이 아니듯 매일의 삶도 우리 힘만으로는 안됩니다.

그것이 가나안 땅에 발을 들여놓은 이스라엘백성들의 모든 정복전쟁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메시지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발견하고 믿을 때 인생의 해답을 발견한 통쾌함과 희열과 만족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가는 데는 매순간 죄의 사욕을 물리쳐야 하고, 믿음의 길에 올무를 놓는 사탄의 세력과의 영적 싸움도 있습니다.

이 싸움 역시 구원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함께 하셔야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마침내 들어가 정복전쟁을 치를 때도 하나님을 의지해야 이겼던 이치가 그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중성벽의 견고한 여리고는 하나님이 주시는 작전으로 이겼지만 작은 성 아이는 자신들의 힘만으로 나섰다가 뼈저린 패배를 경험하지 않습니까?

이 땅의 영적 전투는 우리 힘만으로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우리의 연약함으로 현실 앞에 무너질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큰 적들 앞에서만 무너지는 게 아닙니다.

정말 사소한 일이 꼬투리가 되어 굳게 다잡은 마음이 우르르 무너져 내리고 자포자기한 심정이 되기가 얼마나 쉬운지 모릅니다.

우리는 잘 살아내기 위해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으면 환경에 잠식당합니다.

모든 일에 하나님을 의지해야만 하는 이유입니다.

기도로 하나님께 우리 일을 말씀드리고, 기도 중에 뛰어난 지혜와 아이디어를 얻고, 용기와 확신도 받아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기도하면 지략이 생기고 상황을 낙관적으로 보게 됩니다.

환경이 우리를 짓누르고, 심적인 갈등과 어려움이 있을 때, 오늘 가나안의 강한 부족들 앞에서 선 이스라엘백성들이 그래야 했던 것처럼, 그러니까 우리에겐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하다는 것으로 잘 해석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실제 무수히 많은 기도의 응답과 도우심으로 여기까지 오게 하신 하나님을 의지하며 오늘도 기도하고 또 능력을 받아 약속의 땅을 매일 정복하여 이 땅에서도 젖과 꿀이 흐르는 복된 삶을 사시길 축복드립니다. 아멘.

  2015년4월12일 주일설교 남수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