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이야기는 이스라엘의 광야생활 40년 중에 38년째 되는 해에 있었던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집트의 총리로 등극한 팔려갔던 아들 요셉의 초청으로 야곱과 그의 아들들과 식솔들이 극심한 7년 흉년을 피해 이집트로 이민을 갔었습니다.
그러나 그 곳에서 이스라엘은 400여년 만에 노예신세로 전락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의 약속을 기억하셔서 그 자손 이스라엘을 이집트의 압제에서 구원하고자 모세를 보내십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출애굽이 시작된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출애굽에 대하여는 성경 뿐만 아니라 고고학과 고문서를 통해서도 많은 증거가 있습니다.
피라미드가 있던 이집트의 고대시가지 카훈이란 마을을 발굴하던 고고학자는 그 도시가 피라미드를 건설하기 위한 노예들을 수용하기 위해 미로로 설계되어 탈출이 불가능하게 설계되었다는 것을 밝혔습니다.
그리고 이 카훈 주민들이 연장과 가재도구를 일터나 집에 내버려둔 채 갑자기 그 도시를 떠났다는 것도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가옥들 안에 내버려진 일상용품들의 수량을 보아 거주민들의 이탈이 돌발적이고 사전에 계획된 바 없는 것임을 암시한다고 말합니다.
출애굽기12장33절에 보면 장자가 죽는 10번째 재앙을 당한 후 이집트인들이 우리가 다 죽겠다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재촉하여 그 지경에서 속히 보내려 하므로 백성이 발교되지 못한 반죽 담은 그릇을 옷에 싸서 어깨에 메니라 라는 부분과 일치하는 내용입니다.
그들의 출애굽은 하나님에 의해 계획되어 어느날 갑자기 닥쳐온 것임을 말해주는 것이죠.
모세를 통해 출애굽한 이스라엘 민족은 지금 38년째 광야에서 난민이나 다름없는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주변 나라들의 눈에 비친 모습은 이집트의 노예에서 탈출했지만 정착할 땅이 없어서 헤매고 다니는 것처럼 보였을지도 모릅니다.
대 왕국 이집트의 파라오를 상대로 하나님의 10가지 재앙을 내리고 당당하게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입니다.
그렇게 출애굽한 그들이 약속의 땅 가나안에 안착하지 못하고 40년간을 광야에 천막을 쳤다 거뒀다하며 뺑뺑이를 돌고 있습니다.
왜 하나님은 이집트의 노예생활을 잘(?)하고 있는 유대민족을 이끌어 내어 가나안 드림을 주시더니 자그마치 40년간의 광야 난민 생활을 하게 하신 것일까요?
그 이유는 민수기14장에 아주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출애굽하여 광야에 들어선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과 선택 된 백성으로 살아보겠다는 언약을 맺고 하나님이 주시겠다고 한 약속의 땅 가나안을 정탐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미 그곳에 거주하는 기골이 장대한 가나안부족에 기가 죽어 스스로를 하찮게 비하하며 그 곳에 들어가면 그들 손에 다 죽을 것이라는 부정적인 보고를 합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이스라엘 민족은 대성통곡을 하며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합니다.
민수기14 장1 온 회중이 소리를 높여 부르짖으며 백성이 밤새도록 통곡하였더라 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불신하며 원망하는 그들의 말과 행동에 하나님은 진노하셨고 그들이 걱정했던 말대로 그 당시 20세 이상 된 출애굽1세대는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모두 다 광야에서 죽게 내버려 두십니다.
그리고 33절에 너희의 자녀들은 너희 반역한 죄를 지고 너희의 시체가 광야에서 소멸되기까지 사십 년을 광야에서 방황하는 자가 되리라고 하십니다.
그 결과 오늘 본문의 이스라엘 자손들이 지금까지 광야에 있게 된 배경입니다.
본문은 2년만 있으면 40년 만기를 채우고 가나안에 입성을 앞 둔 때였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서 광야 같은 여정 가운데 있는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고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 시간이 되기를 원합니다.
이스라엘을 이끌고 가나안 행군을 계속하시는 하나님의 인도에서 우리는 불순종한 자식을 구원하시려는 아버지의 강력한 의지와 억척스런 손길을 느끼게 됩니다.
본문 4절에 보면 백성들이 가나안 땅을 앞두고 진군하는 가운데 길에 대해 또 불만을 갖기 시작합니다.
그들은 신광야를 지나 가데스란 곳에 이르러 가나안을 향해 직통으로 뚫려 있는 왕의 대로란 길을 통과하길 원했습니다.
그러나 그곳을 통치하고 있는 에돔이란 나라가 통과를 완강히 거부함으로 에돔국경을 우측으로 돌아 다시 광야 길을 지나 돌아서 가나안 땅을 들어가는 경로를 선택할 수 밖에 없게 된 것입니다.
그러자 그들의 입에서 5절의 불평이 터져나옵니다. 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가 이 곳에는 먹을 것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하찮은 음식을 싫어하노라 하매
여지없이 하나님을 대하여 원망과 불만을 퍼부어 댑니다.
때마다 계속되는 그들의 모습을 통해 인간의 뿌리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불신과 불순종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광야에서 태어난 세대와 출애굽 때 미성년이었던 자들이었습니다.
세상과 구별 된 광야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훈련 받아 왔지만 그동안 뭔 훈련을 받았는지 부모의 죄성이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인간의 죄성은 훈련과 수련으로 없어지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그들이 하나님께 불평한 말은 어쩜 그렇게 그 아비 세대하고 똑같은지 모르겠습니다.
출애굽기 17장 3 거기서 백성이 물에 갈하매 그들이 모세를 대하여 원망하 여 가로되 당신이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어서 우리와 우리 자녀와 우리 생축으로 목말라 죽게 하느냐 고 불평했던 것이 그들의 아비들입니다.
38년을 광야 생활을 해오며 그들은 틈만 있고 환경만 조성되면 바로 하나님을 원망하고 화를 내고 그 댓가로 하나님의 진노와 징계를 받아왔음에도 불구하고 불과 2년을 앞 두고 있는 시점에서 또 하나님을 원망하는 죄를 짓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이 우회로를 선택하게 했다면 왜 이유가 없으시겠습니까
그들이 우회로로 진군하며 몇 건의 전쟁을 치르게 되는 데 그 때 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대승을 거두게 됩니다.
가나안 입성 후 전쟁에 대한 자신감을 갖게 될 뿐 아니라 가나안 원주민들이 그들의 용맹함을 듣고 마음이 다 녹아 이미 정신적으로 이긴 전쟁을 하게 되었다는 것을 여호수아의 기록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정말 죽어도 고쳐지지 않는 하나님에 대한 반항과 원망으로 시종 일관하는 이스라엘도 대단하고 그걸 악착같이 달래고 구슬리고 윽박지르며 가나안 땅으로 이끌고 들어 가시는 하나님도 참 대단하신 것 같습니다.
결국 하나님을 대항한 그들에게 또 처절한 응징이 내려집니다.
6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불뱀들을 백성 중에 보내어 백성을 물게 하시므로 이스라엘 백성 중에 죽은 자가 많은지라
그때서야 이스라엘은 7절에 나온 대로 하나님을 원망한 죄를 회개하고 모세에게 중재해 줄 것을 요구합니다.
모세의 기도에 하나님이 응답하신 방법은 8절에 보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불 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달아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바라본 사람들은 뱀에 물려 죽게 된 상황에서 다 살았다는 것이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통해 그들의 역사 속에서 오직 한 가지 사건을 지속적으로 암시하고 계십니다.
그것은 우리가 아는 대로 예수그리스도를 통한 인류 구원에 대한 약속입니다.
창세기에 나타난 아담에게 지어 입히신 가죽 옷도 그리스도의 예표입니다.
선택 된 민족 이스라엘에게 죄를 지었을 때 가축을 잡아 대신 속죄하라고 주신 제사법도 그리스도에 대한 예표입니다.
광야 생활 중에 내려주신 만나도, 반석을 쳐서 물을 내서 마시게 한 것도 그리스도의 예표입니다.
수없는 사건들이 모두 한결 같이 인류를 구원할 메시야가 오실 것에 대한 상징으로 사용되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모세가 만든 놋 뱀 사건도 역시 예수그리스도의 구원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오늘 본문의 사건이 십자가의 구원 사건과 연관이 되어 있음을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3장 14절에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요한복음 12장 32절에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믿음으로 장대에 달린 놋뱀을 바라 봄으로 죽을 자가 살게 된 것 처럼 십자가의 예수님을 바라보는 사람은 구원을 받게 된다는 상징을 내포한 사건이란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도 성경의 난제가 있고 사람들이 의문을 갖는 것이 있습니다.
그럼 놋 뱀이 예수님을 상징하느냐는 것입니다.
뱀은 사탄을 상징하는 것 아니냐고 뭔가 석연찮은 의문을 남기는 것이 오늘의 본문 말씀입니다.
물론 해석에 따라 사망의 권세, 사단의 권세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승리하셨다고 보아도 좋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 말씀에서 뱀을 사단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적당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성경에서 뱀은 많은 경우 사단을 상징합니다.
그러나 모든 뱀을 다 사단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죠.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처럼 순결하라고 말씀하셨지 않습니까?
아무려면 사단의 지혜를 닮으라고 하셨겠어요?
성경에서 누룩은 대부분 죄를 상징하지만 예수님이 하나님의 나라를 설명할 때 누가복음 13장 21에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하셨더라 고 말씀하신 것을 통해 누룩을 모두다 죄로 보면 안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에서도 이스라엘의 죄로 인해 그들을 심판하는 뱀을 사단으로 보면 바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사단을 보내 사람을 심판하지 않으십니다.
사단은 하나님께 심판 받아야할 존재이지 인간을 심판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닙니다.
가끔 지옥에 대한 환상을 보았다는 사람이 사탄이 지옥에서 인간을 괴롭게 하는 것을 보았다고 하는 데 잘 분별해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요한계시록에 20장 10절에 또 그들을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져지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 라고 그들의 심판에 대해 분명히 기록되었습니다.
사탄은 인간을 미혹케하고 위협하지만 인간을 심판할 권한이 있는 존재가 절대로 아닙니다.
여기서 뱀은 오히려 죄를 징계하기 위해 보내진 하나님의 심판자를 의미한다고 생각합니다.
예레미야 8장 17절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내가 술법으로도 제어할 수 없는 뱀과 독사를 너희 중에 보내리니 그것들이 너희를 물리라 하시도다
아모스 9장 3 갈멜 산 꼭대기에 숨을지라도 내가 거기서 찾아낼 것이요 내 눈을 피하여 바다 밑에 숨을지라도 내가 거기서 뱀을 명하여 물게 할 것이요 라고 말한 부분에서도 하나님은 뱀을 범죄 한 사람들을 심판하기 위해 보내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 시각으로 본다면 뱀도, 놋 뱀도 사단이 아니라 심판자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즉 저주의 막대기 위에 달린 것은 죄를 지은 인간이 아니라 심판 해야 할 자가 대신 나무에 매달려 있음을 의미합니다.
얼마나 아이러니한 광경입니까?
정말 진저리 나게 거듭 반복되는 이스라엘의 반역하고 원망하는 모습을 통해 우리는 철저히 타락한 인간의 모습을 똑똑히 볼 수 있습니다.
어떤 방법을 써도 죄인을 하나님 백성 되게 할 수 없음을 통감할 수 있는 게 바로 선민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동거하는 역사를 통해 알 수 있는 교훈입니다.
인간으로는 도저히 구원에 이를 수 없기에 하나님이 준비한 방법은 바로 인간의 죄를 심판해야 할 하나님 스스로가 심판을 당하는 입장이 되어 나무에 대신 매달리겠다는 것입니다.
장대에 높이 매달린 놋 뱀은 바로 우리를 대신해 죽으신 십자가의 예수님임을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이죠.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를 완성시킬 수 있는 것이 바로 이 십자가의 대속인 것입니다.
영적인 이치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신데 뭐 그렇게 어렵게 구원을 이루시냐
그냥 용서하고 구원하면 되지.
그런데 그 하나님이시라는게 바로 아킬레스건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부패한 인간들이야 이 말했다 수틀리면 저 말로 바꾸고 매 순간 나한테 유리한 데로 잣대를 들이대지만 하나님은 그러실 수 없으십니다.
가장 곤란한 지도자는 올바른 원칙이 없이 이랬다 저랬다 하는 사람임을 사회 생활 하는 분들은 다 아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담과 언약을 했을 때 네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 하신 말씀은 법과 같고 그 즉시 효력을 발생하게 됩니다.
아담은 먹는 순간 하나님과 영원히 살 수 없는 영적 죽음과 더불어 육체의 죽음을 맛 볼 수 밖에 없는 심각한 처지에 빠지게 됩니다.
아직 태어나지 않고 아담의 허리에서 언약에 동참했던 전 인류도 함께 똑 같은 처지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에게는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 반드시 속죄물이 필요했습니다.
저는 25년전 처음 신앙생활을 시작했을 때 목사님이 들어주신 한 예화를 통해 하나님의 이 공의와 사랑을 다 만족시키기 위해 선택하신 십자가의 대속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어느 나라에 왕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백성들이 짓는 극악한 죄로 인해 고민이 많았습니다.
어느날 국왕의 칙령을 내립니다.
일벌 백계를 위해서 이제 부터는 죄를 범하는 자의 두 눈을 뽑는 형벌을 책정한 것입니다.
그 법이 발표되고 다음 날 제일 먼저 죄를 범한 한 사람이 왕 앞으로 끌려나왔습니다.
그런데 그게 바로 왕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 왕자였습니다.
국왕은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으나 자신이 내린 법을 번복할 수 없었기에 할 수 없이 형을 집행하도록 명령합니다.
왕자의 비명과 함께 한쪽 눈을 뽑고 나머지 눈을 뽑으려 할 때 왕이 급하게 형을 정지시키고 왕좌에서 내려갑니다.
그리고 명령합니다.
왕자의 나머지 눈 대신의 아버지인 자기의 눈을 뽑으라고 명령합니다.
왕은 그렇게 함으로써 국왕으로의 공의와 아버지로서의 사랑을 다 이룰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범죄한 인간을 반드시 심판해야만 하십니다.
그러나 이제 죄값을 대신 치루고 심판을 당하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그를 믿는 사람들을 구원을 하실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뱀을 만든 놋이라는 재료가 그렇습니다.
놋은 붉은 빛을 띄는 황금색 금속인 것을 아실 것입니다.
놋으로 된 뱀을 높이 장대에 매달았을 때 광야의 이글거리는 태양 빛을 반사하며 놋 뱀은 마치 피에 젖은 것 처럼 붉게 보였을 것입니다.
이것은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실 예수님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올가미형 같은 형벌을 통해 죽으실 수 없으셨습니다.
히브리서9장22절에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고 말씀하신대로 예수님은 피흘려서 돌아가셔야만 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창세기9장5절에 내가 반드시 너희 피 곧 너희 생명의 피를 찾으리니 짐승이면 그 짐승에게서, 사람이나 사람의 형제면 그에게서 그의 생명을 찾으리라
레위기 17장 11절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 모든 생물은 그 피가 생명과 일체라
피 흘려 죽지 않은 사람은 결코 인류의 속죄자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하나님이 심판하도록 보내신 동물은 뱀이었습니다.
그것은 전갈이어도 좋고 독충이어도 좋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뱀을 보내심은 장대에 구불거리게 매달린 뱀의 모습을 통해 너의 죄로 인해 십자가에서 고통을 당하시는 너의 구주 예수님의 모습을 보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본문의 메시지는 38년간을 광야에서 방황을 하면서도 끊을 수 없는 죄의 속성으로부터 구원받을 길은 오직 구속자 예수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 뿐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의 죄로 인해 죽으셨다는 것을 믿음으로 바라보아야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오늘 놋 뱀을 바라보고 치유 받은 사람들 역시 믿음으로 그 놋 뱀을 바라본 것입니다.
놋 뱀을 바라보고 치유를 받으라고 했을 때 모든 사람이 그 말을 믿고 바라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이 놋 뱀을 바라본 것이 그리 쉬운 일 만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진영은 20세 이상 남성이 60만으로 여성과 어린이를 계산하면 많게는 거의 200만의 사람들로 거대한 텐트 집단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실감이 잘 나지 않는 인구입니다.
우리 교회가 있는 송파구의 인구가 68만명입니다.
여기에 서초구, 강남구, 강동구 인구를 다 합치면 200만명 가까이 될 것입니다.
어마 어마한 인구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때는 방송시설도 없으니 모세로부터 지파의 장로들에게 또 족장들에게 그리고 각 가족들에게 이 말이 전해졌을 것입니다.
대형 집회 같은 데 가면 앞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 지도 잘 모르지 않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누군가에게 전해들은 이 치유책이 신빙성이 없어서 진위를 의심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병을 치유할 놋 뱀은 단 하나였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즐비한 텐트와 사람들 틈으로 저 멀리 있는 놋 뱀을 바라보는 것도 수월치 않았을 것 같습니다.
죽어가는 사람들이 밖으로 기어나가 놋 뱀을 바라보는 것은 그래서 그들의 믿음이 동반되어야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놋 뱀을 바라보라 했을 때 사람들은 아연실색했을 것입니다.
뱀에 물려 죽어가는 데 또 뱀을 바라보라니요. 텐트 안에서 죽어가는 사람 중에는 당치않은 소리라 묵살하고 온갖 민간요법을 사용하는 사람도 있었을 지 모릅니다.
십자가도 마찬가지입니다.
사형집행의 도구가 어떻게 사람을 구원한다는 것입니까?
사형당한 사람이 어떻게 인류를 구원한다는 말입니까?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의 도를 믿지 못합니다.
그러나 고린도전서1장 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장대에 높이 달린 놋 뱀을 바라보는 것 만이 죽음을 면하는 하나님의 방법이었듯이 십자가의 예수님을 믿는 것만이 이 땅에 심판으로부터 인류를 구원하실 하나님의 방법이신 것입니다.
사도행전 4장 12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아무 생각과 의미 없이 바라보는 십자가를 우리는 자랑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십자가의 능력을 믿기 때문입니다.
골프여제로 등극한 신지애 선수는 가난한 목사 아버지 밑에서 힘들게 골프를 배웠습니다.
올해 22살의 젊은 나이지만 고난을 슬기롭게 헤쳐나가는 법을 두둑한 '신앙 배짱' 때문이라고 고백합니다.
기도와 성경묵상으로 삶을 지탱하고 대회 전의 긴장은 말씀과 찬송으로 극복합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녀는 대회 때마다 성경말씀이 적힌 쪽지를 몸에 지니고 경기에 임한다고 합니다.
4년 전만 해도 월세 방을 전전하며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만 대회에 출전 할 수 있었던 자신을 오늘의 세계 정상에 올려주신 분은 하나님이라고 당당하게 말하는 신지애 선수는 자신의 사인 옆에 항상 십자가를 그려 넣는 다고 합니다.
십자가의 예수님은 인류가 살 유일한 구원의 길입니다.
하나님을 거역하고 그 사랑을 거부하던 우리를 찾아오셔서 끊질긴 사랑으로 우리를 설득하시고 마침내 우리를 이 구원의 자리에 올려놓으신 분이 바로 우리의 주님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5장 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할 방법을 준비하시고 오늘 본문과 같이 성경을 통해 끊임없이 증거해 오신 것입니다.
우리가 가져야 할 것은 예수님의 구원을 믿고 확신을 가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어야 할 것은 우리의 감정이 아닙니다.
눈에 보이는 현상도 아닙니다.
오직 진리의 말씀만을 우리 믿음의 근거로 삼아야 하며 그것을 믿음으로 구원의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물론 신앙생활에는 수많은 기적과 감동과 은혜가 있습니다.
그러나 때로 하나님이 보이지 않고 믿음이란 것이 안개와 같이 흐릿하고 모호해질 때에도 우리는 오래 전부터 말씀해 온 그 구원자 예수님에 대해 믿음으로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의 이스라엘 민족들 처럼 범사에 하나님을 거역하고 불평을 일삼는 현대인들에게 경고하는 메시지를 또한 들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고린도전서 10장 9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주를 시험하다가 뱀에게 멸망하였나니 우리는 저희와 같이 시험하지 말자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향하신 뜻은 오직 사랑이심을 의심하지 않으시길 축원합니다.
형편이 나의 원대로 되지 않고 기도해도 답답한 환경이 바뀌지 않는다 할지라도 반드시 하나님의 뜻이 있으신 줄 믿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동안 베풀어 주신 은혜와 사랑과 기적을 그들처럼 하찮게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오직 로마서5장 32절의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말씀대로 하나님의 사랑을 온전히 신뢰하시길 축원합니다.
우리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이지만 하나님의 백성이면서도 늘 실패하고 낙심하고 주저앉아 있는 저들과 꼭 같은 모습을 볼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비록 믿음이 부족하여 낙심했을지라도 예수님의 십자가 아래로 나가야 할 줄로 믿습니다.
저도 어제 기도하려고 앉았는 데 감기 몸살로 입을 떼기 조차 힘들더라구요.
그냥 눈을 감고 앉았는 데 그래도 주님은 딸아, 내가 너를 사랑한다. 그러시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주님 죄송해요, 저는 그렇게 주님을 사랑하지도 못하는 데라고 머리를 떨구었습니다.
그러자 주님이 괜찮다, 내 사랑을 받아주는 것 만으로도 괜찮다 그러시는 것 같아서 왈칵 눈물이 났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죄인이고 약한 것을 아십니다.
그래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유일한 방법 십자가를 택하신 줄 믿습니다.
인도에서 있었던 얘기로 말씀을 맺겠습니다.
보우먼이라는 선교사가가 인도의 캘커타에 나환자 수용소를 겸한 예배당을 건립하였습니다.
그리고 82세가 넘은 한 할머니가 거기서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 앞으로 인도 되었습니다.
한 불신자가 그 노파에게 물었다고 합니다.
“당신이 믿던 힌두교의 그 많은 남신들과 여신들로도 만족 할 수 없었소?
그러자 노파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들 가운데 나를 위해 죽은 신은 아무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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