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수기

광야와 만나 (민수기11장1절-11절)

남수연 2011. 8. 21. 21:21

 

본문을 읽어보니 오늘은 하나님이나 모세나 백성들이나 행복한 사람이 아무도 없어 보입니다.

이스라엘은 원망과 자기 연민에 빠져 서글피 울고 있습니다.

어떻게든 그들을 가나안 땅에 데려가시려는 하나님과 그의 종 모세도 화가 나고 말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동정표를 던지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젖과 꿀이 흐른 땅에 당장 들어갈 줄 알고 모세를 따라 나왔던 이스라엘 민족이 일 년이 넘도록 아직 광야 가운데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내려주신 만나가 아무리 천국양식이라 해도 일 년 내내 그것만  먹다보니 염증이 날만 하죠.

당연히 애굽에서 먹고 살던 세상 음식이 그리워질 수 있습니다.

자유고 뭐고 다 필요 없고 옛날 음식이나 얻어먹으며 노예로 살고 싶답니다.

인간이 가장 견디지 못하는 중 하나가 같은 일을 계속 반복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학생들을 가르칠 때도 같은 내용을 열 반에 들어가서 똑같이 말하다보면 뒷 반 쪽으로 가면 정말 말하는 게 신물이 납니다.

똑 같은 음식을 매일 먹으라면 그것처럼 고역이 어디 있겠습니까?

며칠 짜장면 시켰으면 한번은 짬뽕 시키고 싶은 마음 들죠.

어제 물냉 먹었으면 오늘 비냉 한번 시켜보고 싶은 거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오늘 이스라엘의 원망과 불평의 내면을 우리가 잘 살펴보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단지 결핍이나 권태의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건 하나님의 구원을 하찮게 여기는 무지함이고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 불신앙인 것입니다.

그들의 보호자가 되 주시는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매일 형편없는 음식이나 먹이는 인색한 신으로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정말 동상이몽이라고 할까요?

장차 하나님의 아들을 나눠 주고 자녀를 삼으려는 아버지의 마음을 그렇게 몰라주고 노예근성 뗏 국물 좀 벗겨내려는 훈련만 원망하고 있네요.

결국 그들은 끊지 못한 불평과 원망을 입에 지닌 채 가나안 땅에 발도 들여놓지 못하고 모두 광야에서 생을 마감했습니다.

말씀을 통해 우리의 문제도 발견하고 또 성령님의 은혜로 하나님을 더욱 신뢰하고 우리 믿음이 견고히 서는 시간 되기를 간절히 축복드립니다. 아멘.

 

오늘 본문이 속한 성경이 민수기입니다.

민수기의 뜻은 백성의 수를 세었단 말입니다.

말하자면 인구조사를 하고 기록했다는 것이죠.

하나님은 이 행군 중에서 꼼꼼하게 주의 백성들을 세어 보며 보살피고 계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머리 수만 세시는 게 아닙니다.

우리 머리카락 수까지 세고 계시다고 예수님은 말씀합니다.

광야에서 유랑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은 단 한사람 놓치지 않고 세시고 관리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모두 하나님이 세어서 생명책 안에 이름을 기록한 자녀 됨을 확신하고 감사드립니다. 아멘.

 

먼저 오늘 본문을 통해 모두에게 비극이 된 이스라엘의 불신앙을 생각해 보려 합니다.

이스라엘만 비극적 운명을 맞은 게 아닙니다.

그들의 거듭 되는 집단 원망에 지도자 모세까지 시험에 들어 그도 역시 가나안 땅을 밟지 못하고 죽습니다.

하나님은 택한 백성의 죄와 불신앙을 공의로 다스릴 수 밖에 없는 아픔을 겪으셨습니다.

시편97장에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내가 사십 년 동안 그 세대로 말미암아 근심하여 이르기를 그들은 마음이 미혹된 백성이라 내 길을 알지 못한다 하였도다

창조주의 근심을 우리가 이해나 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도 하나님의 사랑을 거부하고 악하게 행동하는 이 세대를 향해 아버지의 마음이 여전히 근심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오늘 본문을 통해 말씀을 듣고 우리의 행위가 그들과 같지 않길 원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근심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이스라엘의 죄는 현실에 대한 원망과 불평입니다.

그런데 1절에 보면  하나님이 그걸 다 듣고 계셨습니다.

우리가 팍팍한 현실을 원망하고 화를 내고 불편한 심기를 드러낼 때

그 원망이 하나님을 향한 거라고 민수기14장27절에서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나를 향하여 원망하는 바 그 원망하는 말을 내가 들었노라

오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인도와 사랑에 대한 믿음이 없었습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이 우리의 모든 길을 함께 하신다는 확신이 없다면 우리 또한 어려운 순간마다 마음으로 원망하고 불평을 뱉을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출애굽과정 중에 이스라엘의 원망은 가지각색이었습니다.

그 중 대표적인 게 걷기 힘들고 험란한 광야 길과 음식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광야 길로 돌아가게 하신 이유가 있으시죠.

그런데 그들이 광야 길이 나쁘다고 원망한 기록이 출애굽기에 계속됩니다.

이집트에서 가나안으로 올라 갈 때 광야로 가지 않고 왕의 대로 라고 불리던 해안 쪽 도로를 이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왕의 대로엔 애굽의 변경 수비대가 곳곳에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1970년경에 이스라엘의 도단이란 고고학자가 이 가좌지구를 발굴하며 수비대의 망대 흔적을 곳곳에서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전쟁을 좋아하는 블레셋 사람의 땅을 지나야 합니다.

출애굽기13장17절에 이유를 명확하게 이야기 합니다.

바로가 백성을 보낸 후에 블레셋 사람의 땅의 길은 가까울지라도 하나님이 그들을 그 길로 인도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이 백성이 전쟁을 보면 뉘우쳐 애굽으로 돌아갈까 하셨음이라

짐만 나르고 땅만 파던 이스라엘은 전쟁할 줄을 몰랐다는 것입니다.

누가 노예들에게 전술을 가르쳐 주겠습니까?

그들이 전쟁을 겪으면 혼비백산해 애굽 쪽으로 줄행랑을 칠까봐 하나님이 돌더라도 광야 길로 인도하셨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불평했던 광야 길, 우리가 곤고하게 걷고 있는 광야 길은 우리가 깨닫지 못하는 위험을 피해가게 하는 하나님의 은혜의 길입니다.

때로 많은 사람들이 이 광야를 걸으며 또 하나님의 구원의 길을 발견하게 됩니다.

뉴스에 살인죄 누명을 쓰고 온두라스 감옥에 갇혔다는 23살 0지수양 얘기가 나온 적이 있습니다.

스킨스쿠버 국제자격증을 따기 위해 온두라스에 간 지수씨가 사건에 얽히게 된 것은 그가 세들어 살던 집에서 생긴 사망 사건 때문입니다.

집을 같이 쓰던 호주 강사의 여자친구가 놀러왔다 화장실에서 쓰러져 사망한 것입니다.

처음엔 참고인 자격으로 출두 해 무혐의로 판명되어 한국에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일자리가 생겨 다시 출국했다 이집트 공항에서 체포된 것입니다.

아무도 모르게 온두라스로 호송되어 감옥에 갇혔는 데 영사 면회도 안 되고 가족에게 연락할 수도 없었습니다.

가족들은 실종 신고를 내고 영사관에서 수수문을 했지만 찾지 못했습니다.

같은 감옥에 수감 된 여자가 출소 할 때 집에 연락을 부탁해 겨우 소식이 알려졌습니다.

지수씨 언니가 인터넷에 이 사실을 올리며 도움을 호소했고 아버지는 생업을 포기하고 온두라스로 달려갔습니다.

폭동이 일어난 온두라스 감옥에선 그 사이 끔찍한 살인사건도 일어났습니다.

우리 정부의 개입과 한인교회 목사님의 보증으로 간신히 감옥에서 나왔는 데 가택연금 장소가 바로 한인교회 안이었습니다.

믿음도 없던 지수씨가 재판이 진행 된 일 년을 교회에 갇혀 인생의 황량한 광야 길을 원망과 후회로 헤매게 된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날 성경을 읽다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를 읽게 되었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을 하루 앞두고 체포되시기 전 땀에 핏방울이 섞이도록 간절히 기도하신 예수님의 모습이었습니다.

재판 결과가 두려워 떨고 있는 자기마음을 예수님이 아실 거란 생각이 들며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이 모든 상황을 원망만 하고 있는 자기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주님을 받아들였을 때 두려움이 사라지고 평안이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재판결과 무죄판결을 받았습니다.

23살이란 어린 나이에 혹독한 시련을 만난 지수씨는 인생을 원망하며 죽고 싶었던 광야에서 구원의 길을 발견했습니다.

당시 상황을 이야기하는 지수씨의 얼굴에 아직도 그때의 두려움이 비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는 단호하게 말하더군요.

마음의 중심에 하나님을 모시게 되었다. 그렇기에 그것은 겪을 만한 사건이었다.

어쩌다 원치 않는 광야에 들어선 것 같을 때가 있습니다.

길이 안 보이고 사막의 모래 바람이 세차게 불어오고 태양에 목이 갈해 죽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광야를 원망하지 말고 우리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끝까지 신뢰하길 원합니다.

우리가 모르는 하나님의 깊은 뜻이 있기에 겪을 만한 상황이라 고백하고 믿음으로 이기시길 간절히 축복 드립니다. 아멘.

이스라엘의 광야생활이 40년으로 늘어난 것은 본래 하나님의 뜻이 아니셨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집트에서 가나안 까지는 직선 거리로 320킬로 정도입니다.

걸어서 한 달 정도 소요된다고 봅니다.

때마다 터져 나오는 그들의 원망으로 결국 광야생활은 40년이 된 것이죠.

그들의 뿌리 깊은 죄성을 고치는 데 40년 계산이 나온 것입니다.

우리의 광야생활이 얼마인지 하나님은 계산해 두고 계십니다.

우리 기도가 응답되고 우리 환경과 인생에 드디어 젖과 꿀이 흘러내리는 때는 우리 입에서 원망이 그치고 좋으신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할 때가 될 것입니다.

1절에 하나님은 그들의 원망에 대해 진노하셨어도 진영 끝만 불로 태우셨다고 기록합니다.

우리 아이들이 잘못했을 때 회초리로 방바닥을 두드리며 야단치는 것이 생각납니다.

그러나 아이들의 행동이 고쳐지지 않으면 그 다음 회초리가 아이의 종아리를 때릴 수 밖에 없는 것이죠.

그럼에도 여전히 원망만 하는 이스라엘은 결국 그 탐욕으로 인해 큰 재앙을 맞게 되었다고 본문 뒤에 기록되었습니다.

하나님의 회초리를 맞아 본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에는 징계도 포함되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렇다면 또 하나의 불만의 요인이 된 만나가 무엇인지 보겠습니다.

만나는 광야생활의 유일한 양식입니다.

파종도 못하고 농작도 못하고 거둘 것도 없는 광야의 유일한 음식은 하늘에서 하나님이 내려주신 만나였습니다.

만나가 처음 등장한 것은 출애굽기16장 입니다.

애굽에서 나온지 한 달이 넘어 양식이 떨어지자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원망하는 기사가 나옵니다.

3절에 보면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있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해 내어 이 온 회중이 주려 죽게 하는도다

곤란이 오면 즉시 원망으로 대응 하는 백성들입니다.

5절에도 보면 참 우습죠.

무슨 그들이 애굽 노예생활에서 그렇게 공짜로 기름진 음식을 부족함 없이 먹었다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그런 그들을 위해 하나님이 내려주신 것이 만나입니다.

9절에 보면 밤에 이슬이 진영에 내릴 때 만나도 같이 내려 야영지 주변에 쌓였다고 하죠.

분문7절에 보면 만나는 깟씨와 같고 모양은 진주와 같은 것이라 라고 합니다.

생전 처음 보는 식물을 보고 이게 뭐야? 라고 말한 그대로 만나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매일 아침 만나를 거두러 나갔는 데 아무리 모아도 달아보면 꼭 하루 먹을 분량이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어쨌든 껍질까지 완전히 벗겨져 즉시 조리하기만 하면 되는 만나를 가루로 빻아서 반죽해 빵을 만들어 먹었습니다.

40년 간 광야에서 이것만 먹고 아이들이 건장한 청년으로 성장한 것을 보면 완전식품이죠.

언제고 천막을 거두어야 하는 광야의 유랑생활에서 먹을 것이라곤 유일하게 하늘에서 내려주시는 만나가 전부였습니다.

처음 빵을 만들었을 땐 꿀 섞은 과자 맛 같다던 놀라운 맛이 한 달을 계속 먹다 보니 이젠 보기도 싫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광야는 가나안을 향한 진군의 과정이고 세속과 노예근성을 씻어 낼 훈련의 장소인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광야는 아직 우리가 안주하고 누릴 축복의 땅이 아닙니다.

군인들의 야전 훈련 때도 간편식이 주어지고 생활에 제한이 있는 우주선 안에서는 우주식량이 지급되지 않습니까?

만나는 광야라는 환경과 영적 훈련을 위한 최상의 음식이었습니다.

육체를 즐겁게 할 물질들을 제한하는 게 영적인 수련에 큰 도움이 되죠.

지금도 사람들이 고행과 수행을 할 땐 일부러 음식을 제한합니다.

사실 우리의 육신의 소욕을 다 채우면서는 절대로 영적 훈련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 신앙의 성장을 위해 때로 금식도 하고 잠을 줄여 새벽기도도 하고 즐기던 오락도 절제하고 그러는 것입니다.

진탕 먹고 쾌락을 즐기고 우리 육체만을 만족시키다보면 우리의 거듭난 영혼은 점점 나약하게 소멸되어 가는 것입니다.

아무리 둘러봐도 어제와 똑같은 답답한 일상입니까?

어제와 똑같은 기도를 드리고 어제와 똑같은 만나로 상을 차리셨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훈련하고 계신 것입니다.

신명기8장16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

광야 같이 건조하고 메마른 일상에 겨우 하루 먹을 만나를 허락하시는 것은 우리를 낮추시고 우리의 믿음을 테스트하기 위해서란 말씀입니다.

이제 우리가 인내하여 믿음이 인정받을 때 마침내 복을 주려고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오늘 이스라엘이 그 테스트에서 실패를 한 것입니다.

조금만 참고 감사하게 만나를 먹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여호수아 5장 12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 땅 소산을 먹은 다음 날에 만나가 그쳤으니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시는 만나를 얻지 못하였고 그 해에 가나안 땅의 열매를 먹었더라

모르긴 해도 가나안 땅에 정착했을 때 가장 대박 난 식당이 만나식당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광야에서 먹던 만나 맛을 되살린 만나 빵, 만나 볶음을 먹으려고 사방에서 몰려들어  돈을 다 긁어 모았답니다.

사람들이 가난하고 궁핍하던 시절 먹었던 그 박한 음식을 잊지 못하고 그리워하는 걸 보지 않습니까?

박한 음식과 험난한 광야가 그리운 것은 그때 오히려 우리 마음과 영혼이 기름졌기 때문이 아닐까요?

만나에는 또 영적의미가 있습니다.

신명기 8장3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육적으로 태어난 세상에선 밥으로 생존합니다.

애굽에선 밥만 먹으면 살았지만 거듭난 생명은 하나님의 말씀이 양식이 된다는 것이죠.

매일 아침 진 밖으로 나가 하나님이 밤 새 내려놓으신 만나를 거두며 하나님께 감사하고 음식을 만들어 먹을 때 그들이 생존했습니다.

만나를 통해 하나님의 실존과 오늘도 변함없이 만나를 내려 나를 돌보시는 사랑을 매일 체험해야 그들이 영적으로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광야의 만나는 오늘 날 하나님의 말씀을 상징합니다.

우리의 거듭난 영도 하나님의 말씀을 매일 먹고 생존하고 성장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QT를 통해 성경통독을 통해 설교말씀과 경건서적을 통해 우리 영을 먹이는 것입니다.

매일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시냇가의 나무 처럼 풍성하게 열매 맺는 믿음으로 성장하는 성도님들 되시길 간절히 축복드립니다. 아멘.

 

마지막으로 오늘 이스라엘의 원망의 내면엔 구원에 대한 감사가 없었다는 걸 기억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자식 대에 이르기까지 영원히 종 될 처지에서 구원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해야 했습니다.

그들이 왜 처음부터 노예생활 해방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는지 참 의아합니다.

아마도 출애굽 세대가 태어나면서부터 노예라 그러지 않았나 생각이 됩니다.

죄 가운데 태어나 죄에 속박 돼 살던 사람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게 뭐가 좋은지 모르는 것과 같은 것이죠.

그러나 자유와 주권이 모든 걸 버릴 만한 가치라는 건 누려 본 사람들만 압니다.

우리나라가 일본 압제아래 있어 보았습니다.

식민통치에서 벗어나 주권과 자유를 찾으려  목숨을 버린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일제 식민기간 동안 항일 독립운동가 15만명이 학살되었습니다.

언젠가 우리 교과서에 수록 된 윤봉길 의사 체포사진의 진위공방이 있었습니다.

도시락 폭탄을 던지고 체포되는 윤의사의 사진이 실제 인물이 아니라 조작되었다는 의문입니다.

국과수는 1932년 5월 1일 아사히신문에 실린 윤 의사의 사진이 실제 윤 의사를 찍은 것이 맞는지를 판독할 수 없다고 감정했습니다.

손에 중절모를 든 좀 겁먹은 중년의 남자가 경찰에 연행되는 모습입니다.

그날 상하이의 홍커우 공원에는 일왕의 생일잔치와 상하이 점령 기념 행사가 열렸습니다.

김구선생 지휘 하에 폭탄 공격을 계획하고 협의 끝에 윤의사가 투척하게 되었습니다.

일본국가가 울려 퍼질 때 윤의사가 던진 물병 폭탄을 던졌고 상해 사령관을 위시한 군인간부들이 죽었습니다.

이 사건을 당시 상하이 타임즈는 이렇게 보도했습니다.

폭탄 투하 후 회오리바람 속에 조선인 윤봉길의사가 서 있었다.

군인들이 몰려들어 그를 주먹과 군화와 몽둥이로 구타해 그가 쓰러졌다.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그를 차 뒷자석에 짐짝처럼 던져 넣었다.

같은 날 노스 차이나헤럴드도 이렇게 보도합니다.

땅바닥에 내동댕이치고 구타당한 그의 머리에서 허리까지 피가 흐르고 있었고 그의 몸은 만신창이였다.

얼마나 윤의사의 몸이 처참했으면 일본인들은 엉뚱한 사람을 대역으로 가짜 연행 장면을 찍었겠습니까?

그의 나이 25살이었고 아직 강보에 쌓인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자유와 주권은 목숨 까지 버릴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아무 희생 없이 주권국이 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기적입니다.

우리나라의 독립에도 분명 하나님의 손이 함께 하셨음을 또한 믿습니다.

그리고 우리 또한 사망과 저주의 자리에서 탈출해 축복의 자리로 옮겨오게 하신 것을 기억합니다.

이스라엘은 자기들 힘으로 험악한 광야를 건너 가나안에 들어가라 해도 과분한 일입니다.

최근 소말리아의 기근 사진을 보고 눈물이 났습니다.

다 말라 비틀어진 나무 가지를 벗겨내느라 수 십명의 사람들이 필사적으로 매달려 있었습니다.

나무 껍질이라도 먹고 생존해야 하는 기가 막힌 기근의 현실입니다.

그런 메마른 광야에서 그냥 잠만 자고 일어나면 만나가 텐트 주변에 내려와 있는 것입니다.

또 뜨거운 광야의 태양을 막아주려고 하나님이 진 위에 항상 구름을 펴두셨다고 기록합니다.

30도의 기온차가 나는 광야의 추위를 위해 밤에는 불 기둥이 진 위에 머물렀다고 합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40년 동안 옷이 해지지 않고 발이 부릍지 않게 하셨다고 말씀합니다.

피할 수 없다면 광야생활을 즐길 수는 없을까요?

성지 순례객들이 그렇게 장관이라던 시내산의 일출을 보며 하나님의 창조에 경탄하고 찬양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매일 반복되는 우리의 평범한 삶도 사랑할 만한 가치가 있지 않습니까?

옆 집 텐트에서 아기가 태어나고 건너 편 지파에서 두 청춘 남녀가 정분이 났다는 소식도 들려왔을 것입니다.

압제하고 욕하고 일하라 채찍질하는 간역자도 없습니다.

마음만 바꾸면 그래도 감사하며 즐길 수 있는 게 있지 않을까요?

혹시 불평과 원망이 입 밖으로 터져 나올 광야 가운데 놓여질 때 우리가 오히려 감사의 조건을 찾을 수 있길 간절히 원합니다. 아멘.

중2때 감기인줄 알고 병원을 찾은 온유양은 물혹이 있다는 오진을 받고 수술을 했습니다.

그 뒤 세 번의 수술 실패로 갈비뼈가 다 녹아 사라지고 폐가 줄어들어 자가호흡이 불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손으로 바람을 넣어주는 앰브라는 기구로 공기를 넣어주지 않으면 살지 못합니다.

워낙 폐가 줄어들어 기계장치는 감당도 못하고 어린이용 앰브를 사용해야 합니다.

화장실도 못가고 24시간 앰브를 누르고 있는 부모님을 보고 교회 청년들이 팀을 짜서 봉사를 시작했습니다.

지금 1500명 이상의 봉사자가 다녀갔고 벌써 2년 반 동안 온유의 생명을 연장하는 사랑의 릴레이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앰브 없이는 단 한 순간도 살 수 없는 온유의 삶이 광야에 비하겠습니까? 그런데 지난 번 TV를 보니 앰브 줄을 끼운 채 옆에서는 한 자원봉사자가 열심히 앰브를 누르고 온유양은 기타를 배우고 있더군요.

기자가 이걸 배워서 뭘 하려고 하냐고 물었습니다.

온유양은 배워두면 뭔가 쓸 일이 있지 않겠어요? 하며 웃었습니다.

온유양이 이렇게 광야를 즐길 수 있다면 우리도 그럴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번 대구 육상선수권대회에 참가하는 선수 중에 오스카 피스토리우스라는 남아공 청년이 있습니다.

선천적으로 종아리 아래 없이 태어난 그가 의족을 끼우고 일반 선수들과 같이 뛰게 되었습니다.

그가 쇠로 된 두 발로 달리는 모습을 보면 인간이 못 할 일이 무엇이 있겠냐는 생각이 듭니다.

그의 부모님은 네가 마음속에 꿈꾸는 것은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가르쳐 주셨다고 합니다.

인터뷰에서 그는 어떤 고난과 역경도 나를 막을 수 없을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우리 허파로 스스로 호흡하고 우리 다리로 마음 껏 걸어다니는 것만으로도감사하며 입에서 원망과 불평을 그쳐야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아이들이 이렇게 건강하게 자라고 비와 태양을 막아 줄 지붕 달린 집이 있고 오늘도 식탁 위에 만나와 비교할 수 없는 음식들이 차려지는 게 하나님의 축복인 줄 믿습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민수기에는 두 번의 인구조사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는 민수기의 1장에 기록된 것으로 애굽을 나온 후 조사했습니다.

두 번째는 40년 광야 생활을 끝내고 가나안 땅 진입을 앞두고 조사했다고 민수기26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첫 번째 인구조사에 기록 된 이름 중 두 번째 인구조사에 기록 된 이름은 단 여호수아와 갈렙 두명 뿐입니다.

출애굽기와 민수기를 읽어보면 이스라엘을 가나안에 인도하려는 하나님의 끈질긴 사랑과 의지가 느껴집니다.

그러나 인간의 죄가 얼마나 고집스럽고 독한지 하나님 조차도 그들을 가나안에 인도하지 못하셨습니다.

결국 예수님의 희생으로 우리에게 축복의 땅을 상속할 수 밖에 없으셨죠.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상처받은 아버지의 마음을 느낍니다.

하나님은 거역하고 불순종한 그들의 악한 마음이 삼천 년 뒤 죄를 짊어질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을 것을 보고 계셨습니다.

아들을 주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아버지의 마음을 의심하는 불평과 원망이 사라지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드립니다.

성령께서 도와주실 것입니다.

불편하고 힘든 광야 같은 삶일지라도 우리에게 반드시 축복의 땅을 예비하심을 믿고 조금만 더 인내하시길 바랍니다.

불평을 날려버리고 오히려 작은 것에 감사하며 하나님이 주시는 풍성한 기쁨과 마음의 평강을 누리며 사시는 성도님들 되시길 간절히 축복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