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수기

민수기9장15절-23절 (불과 구름기둥으로)

남수연 2018. 7. 13. 14:57

출애굽기에서 애굽을 탈출한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조상 아브라함에게 주겠다고 약속하셨던 가나안 땅을 얻기 위해 출발합니다.

그런데 애굽과 가나안땅은 바로 이웃나라가 아닙니다.

이집트의 카이로에서 예루살렘까지는 600킬로가 넘습니다.

그 사이에는 사람이 살 수 없는 드넓은 광야지대가 있습니다.

그 중 하나인 네게브광야만 해도 강원도 크기의 광대한 면적입니다.

저는 비교적 좁은 이스라엘 쪽 유대광야만 가보았는데 삭막한 암석산이 끝이 안보이게 굽이굽이 펼쳐져 있습니다.

사막엔 간간이 쉬어 갈만한 오아시스지역이 있지만 집을 짓고 살 곳은 못됩니다.

이런 곳에서 음식도 없이 2백만명이 40년을 거주했다는 것은 기적입니다.

세계7대 불가사의에 이런 게 들어가야 맞는 것이죠.

오늘 본문성경의 제목 민수기는 백성들의 수를 세었다는 뜻으로 붙인 이름입니다.

민수기 서두에 애굽을 탈출한 인구수를 조사한 이야기가 나오기 때문이죠.

그런데 히브리 성경의 원제목은 민수기가 아니라 광야에서입니다.

민수기 내용들이 어디서 일어났는지 짐작할 수 있겠죠?

광야생활 40년을 기록한 것이 민수기입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땅에 들어가기 위해 지날 수밖에 없었던 광야는 천국을 향해 가는 성도들의 믿음의 여정을 상징합니다.

삶이 정말 광야같이 힘들지 않은가요?

겨우 나무 밑에서 숨을 돌리고 있으면 어느 순간 체온보다 더 뜨거운 모래바람이 훅 불어오죠.

눈에 들어가면 눈물이 나옵니다.

그래서 때로 우리 삶에 눈물흘리며 다니는 때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 광야생활을 안전하게 인도하셨던 하나님의 기적, 구름기둥과 불기둥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고린도전서10장에서 바울사도는 이스라엘의 이 광야여정을 들어 이렇게 권면합니다.

그들에게 일어난 이런 일은 본보기가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기록되었느니라

오늘 말씀에서 깨우쳐 주실 말씀을 찾아야 하는 것이죠.

또 지난 한 주 여러 가지 시험으로 피곤하고, 먹고 사는 일에 고단했던 모든 성도님들께 큰 위로와 힘이 되는 말씀을 주시리라 믿습니다.

 

첫 번째 교훈은 구름과 불기둥은 이스라엘의 광야생활에 항상 함께 있었다는 것입니다.

본문은 시간적으로 애굽에서 나온 지 1년이 지났고, 장소는 시내산입니다.

그 사이 하나님께 율법을 받아 국가의 법을 제정했고 성막을 지었습니다.

구름 기둥은 이미 일 년 전 애굽을 탈출해 광야 길로 들어선 순간부터 나타나 백성들의 위에서 인도해 왔습니다.

구름과 불기둥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그 가운데 하나님께서 임재하셨다는 것입니다.

구름은 단순히 보호 기능만을 위한 기적현상이 아닙니다.

출애굽기 1424절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새벽에 여호와께서 불 구름 기둥 가운데서 애굽 군대를 보시고 그 군대를 어지럽게 하시며

하나님이 불 구름 기둥 가운데서 보셨다고 하죠.

민수기125절에도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구름 기둥 가운데로부터 강림하사 장막 문에 서시고

하나님이 구름 기둥 속에서 사람들과 대화도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 구름과 불기둥 가운데서 이스라엘을 다스리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15절에 보면 성막을 세운 날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성막을 덮었다고 합니다.

백성들 가운데로 더 가까이 내려오신 것입니다.

여기서 가장 은혜로운 깨달음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더 가까이 오길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까이 계신 것만큼 좋은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시편73편에서 그 깨달음을 전하잖아요?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그런데 사실 성도들은 하나님과 더 가까이, 더 친밀하게 함께 하는 것을 그다지 원치 않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보다 오히려 더 가까이 함께 하고 싶은 게 많잖아요?
청소년부는 하나님보다는 친구하고 같이 있는 게 더 좋겠죠.

스마트폰은 너무 좋아서 아예 손에서 내려놓고 싶지도 않죠?

청년들은 사랑하는 연인과 더 함께 하고 싶겠고 부모라면 대개는 자식을 곁에 두길 원합니다.

사람은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과 같이 있고 싶어 할까요,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과 같이 있고 싶어 할까요?

당연히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과 더 같이 있고 싶어 합니다.
그렇기에 부모들은 자식과 늘 함께 하고 싶지만 자식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식들이 나이가 먹고 철이 들수록 노부모께 전화하는 횟수가 많아지고 찾아뵙는 횟수가 늘어납니다.

왜 우리가 예수님과 더 친밀하게 매일 동행하고 싶어 하지 않는지 정답이 나왔죠?
자식이 부모를 덜 사랑하듯 우리가 하나님을 덜 사랑해서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은 왜 성막을 지으라고 하고 더 가까이 내려오셨습니까?

더 사랑하셔서죠.

신앙의 철이 들어가고 하나님아버지의 마음과 예수님의 사랑을 알아갈수록 조금씩 하나님께 다가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점점 하나님이 좋아서 따르는 지경에 이르게 되는 것이죠.

하나님을 알아갈수록 하나님을 좋아하고 사랑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따랐던 제자들은 일단 주님이 좋았기 때문에 따른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좋지 않았다면 삼년동안이나 그렇게 같이 살 수는 없습니다.

구약의 하나님을 깊이 만났던 사람들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모세만큼 하나님을 직접 대면했던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출애굽한 이스라엘의 불신앙으로 진노하시다 모세에게 모든 걸 일임하고 빠지시겠다고 한 때가 있습니다.

그때 모세는 강력하게 하나님이 함께 가시지 않으면 자기도 안 가겠다고 합니다.

다윗도 늘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 하나님과 함께 하는 그 벅찬 기쁨이 시편에 생생히 드러나잖아요?

하나님은 우리가 알기만 안다면 인간적으로도 그렇게 좋으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씀과 기도를 통해 더 깊이 하나님을 알아가고 정말 하나님을 더 좋아하며 기쁘게 따르게 되길 간절히 원합니다.

오늘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에게 더 가까이 오고 싶어 진영 한 가운데 성막까지 오셨습니다.

그러다 결국 사람이 되셔서 우리 가운데로 내려오신 것입니다.

이사야선지자가 예수님의 탄생을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마태복음에서 임마누엘이 무슨 뜻인지 번역해 줍니다.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함이라.

성자하나님은 실제 사람 사는 가운데 내려오셨고 사람들의 죄를 대속하셨고 그로 인해 영원히 우리와 함께 살게 되신 것입니다.

지금도 우리와 함께 하시잖아요?
예수님께서 마태복음1820절에서 말씀하셨죠.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예수님의 이름을 믿는 교회 중에 주님이 계시다는 것입니다.

성도들 개인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광야시대에는 눈에 보이는 성막 위 구름 기둥 속에 계셨지만 신약시대엔 성령으로 함께 하고 계시죠.

요한복음 1416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셨죠.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많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존재를 믿지만 하나님이 정말 나와 동행한다는 사실은 잘 못 느끼겠다고 합니다.

오늘 이 성경을 우리에게 남기심은 지금도 우리와 그렇게 함께 하심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지금은 하나님도 천국도 다 청동 거울을 들여다보는 것 같이 희미하다고 바울사도가 말씀한바 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날 우리는 창조의 순간부터 항상 곁에 계시고 사랑하지 않은 적이 없으신 하나님을 두 눈으로 보고 복되게 섬기게 될 것입니다.

그때까지 오직 말씀에 의지해서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고 또 점점 더 사랑하시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두 번째 교훈은 구름과 불기둥은 실제로 이스라엘을 광야에서 보호했다는 것입니다.

요즘 오만의 아라비아사막을 횡단하는 예능프로가 방영되고 있죠.

아라비아사막에서 아라비아해까지 42킬로 거리를 걸어서 34일에 횡단하는 프로입니다.

지진희씨가 대장으로 차태현, 조세호, 배정남들이 나오더군요.

촬영 중 낮기온이 최고 51도까지 올랐었다는 이 장정을 마친 뒤 PD는 살아 돌아온 게 기쁘다고 인터뷰를 했다고 합니다.

방송을 보면 정말 사막에서 생존하려면 그늘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게 됩니다.

오전 10시만 넘어도 그 태양아래 걷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탐험대원들이 그걸 하루 만에 깨닫고 다음날은 해 뜨기 전에 많이 걸어 놓으려고 새벽4시에 일어나 행군을 시작하더군요.

일단 길을 나서면 아무리 힘들어도 그늘이 될 만한 나무를 찾기까지는 무작정 걸을 수밖에 없습니다.

멈추면 타 죽는 거죠.

그렇게 무려 13킬로를 걸어서야 간신히 나무 한그루를 발견하고 거기서 잠시 쉬는 걸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구름기둥으로 함께 하셨는지를 알 수 있죠.

시편10539에서는 당시를 이렇게 노래합니다.

여호와께서 낮에는 구름을 펴사 덮개를 삼으시고 밤에는 불로 밝히셨으며

타죽지 않으려면 거대한 구름덮개 아래 모여야만 합니다.

구름을 벗어나면 실제로 생존이 불가능합니다.

그렇기에 광야에서 사람이 못사는 것이죠.

17절에 보면 이스라엘사람들이 하나님의 명령대로 구름이 떠오르면 행진을 시작했고 구름이 성막 위에 다시 머무르면 행진을 멈췄다고 합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구름을 벗어나면 타 죽으니 구름가는대로 따라갈 수밖에요.

때로 왜 하나님이 우리를 꼼짝 못할 광야에 두시고 구름만 따라다니게 하시는지 아시겠습니까?

하나님만 바라보는 게 우리가 살 길이라는 것을 가르치시려는 것입니다.

어쩌다 푸른 초지가 나온다고 해도 하나님을 바라보라는 것이죠.

살만하면 사람들이 다 뛰쳐 나가잖아요?

광야의 삶에선 초지일관 하나님의 날개아래 살아가야 합니다.

이사야선지자는 장차 오실 그리스도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예언했습니다.

이사야 322 보라 장차 한 왕이 공의로 통치할 것이요 방백들이 정의로 다스릴 것이며 또 그 사람은 광풍을 피하는 곳폭우를 가리우는 곳 같 을 것이며 마른 땅에 냇물 같을 것이며 곤비한 땅에 큰 바위 그늘 같으리니

예수님께서 우리의 완전한 보호자가 되신다는 것을 얼마나 완벽하게 예언해 놓으셨습니까?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변화무쌍한 세상을 우리는 삽니다.

지난 주 뉴스에 기가 막힌 사고 소식이 있더군요.

할아버지가 세 살 먹은 손자를 차에 태우고 어린이집을 데려다 주려다 깜빡 잊고 그냥 문을 잠그고 회사로 들어갔다고 합니다.

네 시간 만에 생각이 나서 달려갔지만 뜨겁게 달아오른 차 안에서 손자는 이미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 가족들의 남은 삶이 각자에게 얼마나 고통스러울지 생각하면 정말 할 말을 잃게 합니다.

정말 끔찍하고 고약스런 일을 만난 것이죠.

불뱀과 전갈과 모든 것을 태워버릴 듯 타오르는 태양과 목마름과 쉴 곳이 없는 게 광야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살고 세상이 좋아보지만 성경은 그게 다 사라질 광야의 신기루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부정하는 세상문명, 하나님 없는 인생 다 신기루입니다.

신기루를 좇다 사람들은 기진해서 쓰러져 가는 것이죠.

저기만 넘어가면 좀 살만할 텐데, 온 힘을 다해 가보지만 능선 너머는 여전히 광야인 것입니다.

저 너머에도 여전히 질병이 있고 사람관계의 고통이 있습니다.

어디가나 생활고가 있고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있는 것이죠.

오직 하나님의 보호 안에서만 우리의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습니다.

정확한 건 아니겠지만 제 경험으로는 실제 하나님이 우리가 당할 재앙에서 열 개 중 아홉 개는 피하게 해주시는 것 같습니다.

한 개는 피할 수 없는 우리 잘못이거나 그걸 통해 무언가 교육하실 목적이시겠죠.

이렇게 하나님의 보호를 확신하며 살기에 우리 걸음이 광야에서도 견고한 것입니다.

지난 주 김연자집사님이 이런 말을 하시더군요.

가게에서 보고 있으면 교회 다니는 분들은 걸음걸이가 똑바르다는거예요.

제가 집사님의 관찰력과 통찰력에 좀 놀랐습니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보호를 믿고 광야 너머에 있는 가나안 땅, 천국을 확신하며 걸어가기에 그 걸음이 분명할 수 밖에요.

하나님의 확실한 보호를 믿으시고 더욱 무릎을 강하게 하고 힘을 내어 살아가는 모두가 되시길 바랍니다.

 

 

마지막 교훈은, 광야에서는 구름기둥과 불기둥을 따라 움직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 중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게 무엇인지 아시겠습니까?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이 무엇이었을까요?

구름이 떠오르면 천막을 거두고 행진을 시작하라는 것입니다.

구름이 멈춰 성막 위에 다시 덮이면 그 곳에 다시 천막을 치고 머물라는 것입니다.

밤에 구름이 덮여 짐을 풀었는데 다음 날 다시 구름기둥이 떠오른다면 피곤해도 다시 짐을 꾸려 진행해야 합니다.

구름이 여전히 성막을 덮고 있으면 한 달이든 일 년이든 그곳에서 머물러야 합니다.

광야에서 장막을 칠 장소를 인도하시는 것도 구름기둥이고, 거기서 얼마나 머물지 정해주는 것도 구름기둥입니다.

민수기에 보면 이스라엘백성들이 광야40년 생활에서 42곳의 장소에서 장막을 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평균 1년에 한번 정도 움직인 것이죠.

그런데 그 장소들을 보면 다 좋은 장소만은 아닙니다.

마라라는 곳에서는 샘물이 쓴 물이었다고 합니다.

구름이 멈춰서 장막을 치고 보니 샘의 수질이 나빠서 마실 수가 없었습니다.

식수도 없는 곳에 2백만명을 풀어 놓으면 어쩌라는 것입니까?

그 많은 입들이 다 불평을 쏟아내며 모세와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모세가 다급한 마음에 하나님께 기도하자 하나님께서 한 나무를 가르쳐 주시죠.

그 나뭇가지를 물에 던졌더니 쓴 물이 단 물로 바뀌게 됩니다.

목표를 향해 가다보면 최적지가 아니어도 머물러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당연히 대책을 생각하셨겠죠.

그것은 인도자의 문제입니다.

상황이 안 좋으면 우리는 하나님께 구하면 됩니다.

하나님 이 문제를 어떻게 해야 하죠?’

하나님은 광야의 문제에서 한번도 해결책을 내지 못하신 적이 없습니다.

양식이 떨어지자 만나를 주셨고, 고기가 먹고 싶을 때 메추라기를 주셨습니다.

마라의 쓴 물은 단 물로 바꿔주셨고, 아예 물이 없었던 므리바에선 반석을 쪼개어 암반수를 터뜨려 맑은 물로 아예 시내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문제는 이스라엘은 이런 일들이 있을 때마다 불평하고 원망하지 않은 적이 한번도 없다는 것입니다.

좀 하나님을 믿고 기다리며 기도했으면 얼마나 좋았겠어요?

우리가 사는 것도 모든 일이 다 마음먹은 대로, 마음에 쏙 들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광야의 노정 전체를 아시고, 우리는 당장 눈에 보이는 것 밖에는 모릅니다.

왜 저 푸르러 보이는 동산으로 날 데려가지 않으셨냐고 불평할지 모르지만 거기는 불뱀과 전갈이 득실거리는 곳일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지금 인도하신 이곳이 되돌아 보면 가장 안전하고 바른 길임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실제로 어떻게 하나님의 인도를 받을 수가 있을까요?
이스라엘백성들이 성막 위 구름을 봐야 했듯이 우리도 시시때때로 하나님께 집중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구름네비게이션인 말씀을 따라 가야 합니다.

, 염려하지 말고 감사하라 하셨지

이 문제는 정직하게 처리하는 게 하나님의 뜻이지

이렇게 말씀의 인도를 따르면 오늘 하루가 안전합니다.

때로 마라와 같이 마실 물이 없다면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며 해결책을 구해야 합니다.

좋은 목적지로 가기 위해선 피치 못하게 마라와 같은 장소도 거쳐야 합니다.

우리에게 위로가 되는 것은 마라와 같이 마음 상했던 장소를 떠난 뒤 만나 곳은 엘림이었습니다.

엘림에는 샘물 열둘과 종려 칠십 주가 있었다고 합니다.

광야에서 샘물이 열 둘이라니요!

광야에서 칠십그루의 나무는 굉장한 오아시스입니다.

오늘 삶의 풍요가 없는 고단한 광야를 걷고 있다면 내일은 아름답고 풍요로운 오아시스에서 쉬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과 구름기둥으로 인도해 주십니다.

그런데 그것을 확신하지 못하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정말 하나님이 나를 인도해 주실까 현실감이 들지 않는 것이죠.

그것에는 우리의 믿음이 필요합니다.

오늘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불과 구름기둥으로 인도해 주시고 가나안땅으로 데려가시는 것은 아브라함과의 약속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백성들은 그 사실을 의심하고 가나안 입국을 믿지 않았기에 광야에서 40년을 맴돌다 죽었던 것입니다.

그 자식들만 가나안땅에 들어가는 복을 누렸습니다.

우리도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이신 예수님을 통한 약속의 자손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성막을 세운 뒤 불구름이 내려와 덮이고 이스라엘을 인도하셨다고 합니다.

구약성경의 메시야 상징 중에 중요한 것이 성막입니다.

성막은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하나님이 임재하시고, 언약궤가 있고, 속죄하는 시은소가 있고, 거기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만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안전한 보호 가운데 살고 있는 유일한 이유는 예수그리스도 안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믿으시고 하루하루 예수님께서 가이드해주신 말씀과 계명을 따르고 성령님의 인도를 구하며 성실히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는 무서운 광야에서도 쉴만한 오아시스로 인도받고 이 생의 끝에서 아름다운 가나안땅, 우리의 본향 천국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2018년7월8일 남수연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