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수기

민수기13장25절-33절 (다시 광야로)

남수연 2020. 10. 3. 01:03

www.youtube.com/watch?v=Mby3Ou7ilwc&t=2748s

 

오늘로서 그동안 살펴 왔던 광야시리즈를 마치게 되었습니다.

가나안땅에 당당히 입성한 것으로 끝났으면 좋았겠지만 안타깝게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땅의 길목에서 다시 광야로 유턴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아는 대로 40년을 광야에서 살다 생을 마감합니다.

이 뼈아픈 역사는 오늘날 성도들의 구원 여정에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신약성경 히브리서는 이 사건에 빗대어 성도들에게 엄중하게 말씀하시죠.

4장1절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 혹 미치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

오늘 말씀을 통해 어려운 시기에, 믿음을 더 새롭게 하고 그 믿음으로 당면한 문제들을 잘 이겨낼 수 있는 은혜를 주시리라 믿습니다.

 

< 배경 >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언약을 체결하고 성소를 짓는 동안 일 년이 지났습니다.

신명기를 보면 하나님께서 광야생활이 너무 오래되었으니 이제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라고 말씀하십니다.

들어가라고 하시지만 해외 관광객 입국하듯이 쑥 들어가는 게 아닙니다.

들어가면 젖과 꿀이 흐르는 임자 없는 가나안땅이 기다리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땅을 차지하는 것은 당시 가나안땅 원주민들의 죄악이 관영해 이들을 심판하시는 것과 맞물려 있는 것입니다.

그 심판의 전쟁을 이스라엘이 들어가서 해야 하는 것이죠.

왜 믿고 들어가기만 하면 되는 데 그걸 못했냐고 함부로 말할게 아닙니다.

시내산을 떠나 가나안땅을 향해 이동한 이스라엘은 가나안 남쪽 입구라고 할 수 있는 가데스바네아라는 큰 오아시스 지역에 도착합니다.

바로 출애굽1세대의 운명이 결정된 곳입니다.

13장 1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열두지파 중에서 대표를 한명씩 뽑아서 먼저 가나안 땅을 살펴보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신명기1장은 좀 다릅니다.

거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먼저 모세에게 땅을 정탐하게 해달라고 요청을 했다고 합니다.

어쨌든 두 내용을 합쳐 보면 백성들도 땅 정탐을 원했고, 하나님도 원하셨다는 것이죠.

백성들은 지금 남의 집 안방에 쳐들어가는 입장입니다.

당연히 그곳 형편을 살피고 싶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떠셨을까요?

그들에게 주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어떤지 얼른 보여 주고 싶으셨을 것입니다.

그렇게 열 두 지파에서 대표가 선발되어 가나안 땅을 정탐하게 됩니다.

그리고 40일간 북쪽 끝까지 올라가 탐지한 뒤 백성들 앞에서 정탐 보고를 하는 것입니다.

 

1. 그런데 가나안땅을 정탐한 뒤 엇갈린 보고가 나옵니다.

가나안땅에 가 봤더니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풍요의 땅이 분명했습니다.

거기서 딴 포도송이를 두 사람이 어깨에 메고 왔다고 하잖아요?

보내드린 이스라엘 포도송이 그림을 보셨다면 이해가 되실 것입니다.

이전 이스라엘 관광청 엠블렘이 바로 정탐꾼 두 사람이 막대기에 포도송이를 꿰어 메고 가는 모습을 도안화한 것입니다.

지금의 중동지역 환경은 달라졌지만 출애굽 당시엔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젖과 꿀이 흐르는 풍요로운 땅이 분명했습니다.

그런데 28절에서 ‘그러나’가 나오죠.

그러나 이 가나안땅의 도시들을 차지하고 있는 부족들이 보통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산간 지역부터 해안에 이르기 까지 쟁쟁한 민족들이 다 터를 잡고 살고 있다는 것이죠.

32절,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거기서 네피림 후손인 아낙 자손의 거인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이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

그렇기에 가나안땅 정복은 완전히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메뚜기가 어떻게 거인과 싸웁니까?

정탐자들의 보고는 현실적으로 정확한 것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의 존재감이 가나안국가들에 비해 그랬습니다.

현실을 직시하는 것은 필요합니다.

다만 현실이 전부면 불신자이고 현실에 하나님을 고려하면 신자인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고려하기 때문에 불신자들과 다르게 사는 것이잖아요?

지난 주 오금구역 모임에서 김연자권사님이 그러시더군요.

전에 교인들이 예배를 안 드리면 왜 마음이 편치 않다고 하는지를 아시겠다는거예요.

하나님을 안 믿던 때는 그럴 이유가 없잖아요?

이스라엘은 현실은 바르게 파악했지만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던 것이 문제였습니다.

이게 이스라엘 사람들만 비난 받을 문제겠습니까?

넘어야 할 산 앞에서 우리도 믿음에서 떠나 두려워하고 망설이잖아요?미루는 습관 때문에 고민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저도 잘 미루는 데, 특히 병원에 가는 게 제일 그렇습니다.

그게 게을러서 그런 게 아니라는 거예요.

해야 할 일에 대한 스트레스를 회피하려는 마음에서 미루게 된다는 것이죠.

그래서 자꾸 뒤로 미루다 보니 그게 습관이 된다는 것입니다.

좋아하는 일은 절대 뒤로 미루지 않잖아요?

공부든, 일이든, 사람이든, 우리도 그런 스트레스와 두려움이 있습니다.

심리학자들도 내게 있는 그런 요인들을 파악하고 그걸 인정하는 게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현실의 문제가 산더미 같은데 무조건 잘 될 거라고 근거 없이 낙관하는 게 믿음이 아닙니다.

우리는 내 능력과 내 앞에 있는 현실을 정확히 알되 우리의 능력이 되시는 하나님을 계산에 넣는 것입니다.

이제까지 그렇게 내 편이 되어 주셨던 하나님을 의지해서 또 현실을 돌파하는 것이죠.

내가 뭘 두려워하는지 정확히 분석하고, 하나님께 솔직히 도움을 구하면 하나님이 그 문제를 핸들링 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왜 가나안 부족들에게 간담이 녹고 정신줄을 놓아버린 백성들에게 진노하셨겠어요?무서운 현실에서 덜덜 떨 수밖에 없는 우리 연약함을 꾸짖으시는 게 아니잖아요?

하나님은 전능하신 신이시고, 우리는 작은 돌부리에도 넘어지는 연약한 인간임을 모르시겠습니까?

그동안 이스라엘은 열가지 재앙과 홍해의 기적과 광야에서 만나와 생수를 먹이시는 하나님의 큰 권능을 직접 경험했습니다.

구름 기둥과 불기둥이 일 년 동안 한번도 이들을 떠난 적이 없었잖아요?

그렇다면 지금 현실이 아무리 불가능한 계산이 나온다 해도 하나님을 떠올려 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기에 하나님이 14장 22절에서 이렇게 엄히 말씀합니다.

내 영광과 애굽과 광야에서 행한 내 이적을 보고서도 이같이 열 번이나 나를 시험하고 내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한 그 사람들은 결단코 그 땅을 보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은 무조건 믿으라고 하시는 게 아닙니다.

무조건 믿는 게 어떻게 가능합니까?

믿음의 근거가 될 사실들을 보여주고 믿으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에겐 무엇을 보고 믿으라고 하십니까?

하나님의 본체이신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보고 믿으라는 것이죠.

그동안 이스라엘은 틈만 나면 의심하고 하나님은 계속 그들에게 ‘내가 함께 하고 있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다’를 입증해 보이셔야 했습니다.

그게 그동안 살펴보았던 광야 시리즈잖아요?

그런데도 정탐자들의 부정적인 보고에 또 백성들이 요동하는 것입니다.

그 중 두 사람 여호수아와 갈렙은 웅성대는 사람들을 안돈시키고 말합니다.

30절, 갈렙이 모세 앞에서 백성을 조용하게 하고 이르되 우리가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 능히 이기리라

그동안 하나님을 보아왔으니 그 땅을 주실 것도 믿자는 것이죠.

그러나 결국 온 이스라엘은 가나안 정복이 불가능하다는 말을 받아들이고 스스로 무너집니다.

하나님을 배제하면 무너지는 건 한순간입니다.

14장 1절을 보면 밤새 또 장막에서 통곡하며 울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급기야 가나안땅을 거부하고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합니다.

하나님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이런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결국 이들의 끊임없는 불신과 거역에 하나님은 진노하시고 백성들을 가나안땅이 아닌 광야로 돌리신 것입니다.

 

2. 이 사건은 구원을 상징하기에 우리 구원의 관점에서도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에겐 가나안땅을 주시겠다는 약속을 주셨다면 우리에겐 무슨 약속을 주셨습니까?

그 가나안땅이 영원히 살 천국이고, 예수님을 믿음으로 들어간다는 약속입니다.

이 사실을 알고, 이해하고,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정말 오래 말씀을 들었고, 그 삶을 보면 하나님이 기가 막히게 도우시는게 보이는 데도 하나님을 믿기로 결심하지 못하는 분들을 보면 안타깝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나와 이스라엘처럼 거의 가나안땅에 다가왔다가 다시 되돌아갑니다.

하나님은 끝없이 의심하고 거역하는 이스라엘을 향해 자신을 증명하기에 지치셨습니다.

예레미야 15장6절에서 이들의 판박이 후손들에게도 이렇게 말씀하죠.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가 나를 버렸고 내게서 물러갔으므로.. 내 손을 펴서 너를 멸하였노니 이는 내가 뜻을 돌이키기에 염증이 났음이로다

달래고, 용서하고, 또 구원하시고, 그래도 달아나는 사람들에 염증이 났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끝까지 마음을 강팍하게 하는 사람들에게서 돌아서실 것입니다.

구원의 문턱에 서 계시다면 나를 구원하시려고 십자가의 그 고난을 감수하신 예수님을 의심 없이 믿으시고 천국에 들어가셔야 합니다.

그동안 수없이 도와주셨는데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현실의 문제로 불평하고 원망하는 소리도 좋아하실 리가 없습니다.

내 앞에 놓인 막막한 미래나 장애물 앞에서 근심하지 마십시오.

저도 성도님들께 기도제목이 생기면 처음에 근심이 되지만 결국 우리가 경험했듯이 하나님이 문제들을 다 잘 인도해 주시잖아요?

지난 주 오금구역 모임에 가봤더니 그동안 건강을 염려해서 기도했던 분들이 다 나와 앉아 계신거예요.

이안순권사님은 갈비뼈가 부러져서 기도했었는데 중곡동에서 지하철을 타시고 오셨습니다.

성순례권찰님 허리 때문에 기도했었는데, 즐겁게 두 시간을 아무 문제없이 함께 하셨습니다.

걱정거리가 생긴다고 염려하고 두려워 할 필요가 없는거예요.믿음으로 기도하며 힘을 내서 지금 바라보는 그 땅을 얻으시길 축복합니다.

 

3. 결국 출애굽 성인 세대 중에서 오직 여호수아와 갈렙만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됩니다.

똑같은 현실을 눈으로 보고 왔는데 어떻게 여호수아와 갈렙은 그 땅을 주실 것을 믿었을까요?

갈렙과 여호수아만 노련한 장수가 아닙니다.

나머지 열명의 정탐자들도 각 지파에서 뽑힐만한 용맹한 장수들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갈렙과 여호수아는 두려움 없이 그 땅을 차지하자고 합니까?또 왜 갈렙과 여호수아 두 사람이었냐는 것도 궁금하지 않습니까?

왜 한 명도 아니고 세 명도 아니고 두 명이 가나안땅에 들어가게 되었냐는 것이죠.

성경에서 둘이 나란히 나온 것은 특별한 의미를 가진 경우가 많습니다.

야곱과 에서, 다윗왕과 사울왕, 아담과 예수그리스도, 유다와 에브라임 같이 중요한 의미를 설명하시기 위해 둘을 등장시키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선 여호수아는 어떤 사람인지 보겠습니다.

성경에서 이 여호수아를 언급할 때 특이한 부분이 보입니다.

민수기 27장 18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눈의 아들 여호수아는 신에 감동된 자니 너는 데려다가 그에게 안수하고

신명기 34장 9 모세가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안수하였으므로 그에게 지 혜의 신이 충만하니

여호수아가 하나님의 신, 성령에 감동 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오늘 정신을 잃고 무너진 이유가 무엇입니까?

기가 막힌 이 현실을 해결해 줄 보호자를 확신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알겠는데, 과연 이 전쟁터에서 우리를 위해 싸워주실지 어떻게 알겠냐는 것입니다.

한 수 더 떠서 하나님이 일부러 죽이려고 데리고 나오셨다고 말하잖아요?

믿음은 상대에 대한 신뢰의 관계에서 옵니다.

여호수아는 하나님이 정복전쟁에서 싸워 주시고 승리를 주실 것이 믿어졌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잘 알기에 그렇게 믿어지는 걸 어떡하겠습니까?

안 믿어지는 건 아무리 믿으려고 애를 써도 안 믿어집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어떻게 신뢰관계가 생기냐가 믿음의 신비입니다.

하나님과 그 관계를 묶어 주는 것은 성령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이스라엘이 그렇게 많은 기적을 보고도 안 믿어져서 못 믿은 것은 죄의 본성의 한계이고, 대속의 필연성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대속하셔야 성령이 오실 수 있으니까요.

여호수아에게 또 한 가지 특별한 점이 있습니다.

출애굽기에 보면 성막을 짓기 전에 하나님을 모시던 회막이 나옵니다.

모세가 그 회막 안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백성들을 지도할 말씀을 받죠.

그리고 자신의 장막으로 돌아갑니다.

그런데 출애굽기33장은 이런 기록을 남깁니다.

모세는 진으로 돌아오나 그 수종자 눈의 아들 청년 여호수아는 회막을 떠나지 아니하니라

여호수아가 회막을 떠나지 않았다면 그 안에서 무엇을 했겠습니까?

청년 여호수아가 하나님의 임재가 가득한 회막 안에서 하나님께 이런 저런 말씀을 드리며 신뢰의 관계가 깊어간 것입니다.

사람관계가 그렇듯이 하나님 앞에도 머물러야 관계가 깊어집니다.

내 앞을 가로막은 저 철벽을 하나님이 무너뜨려 주실까?관계가 없으면 절대로 믿어지지 않습니다.

기도하지 않는 이유는 거의 아직 관계가 안 만들어져 그런 것입니다.제가 삼십오년 예수님을 따라왔는데, 요즘 생각하기를 예수님께 좀 중독이 될 수 없나 싶은 거예요.

왜 신앙이 중독이 되지 않는지 이상하더군요.

늘 예수님께만 관심이 가고, 저절로 기도가 하고 싶어 죽겠고, 성경을 펴면 놓기가 싫고, 사람을 만나면 예수님 얘기가 하고 싶어 죽겠고, 그렇지 않잖아요?

사람이 뭐에 얼마나 잘 중독이 됩니까?

요즘은 나이 든 사람들도 아이돌 가수들 팬덤이 되는 게 유행이라잖아요?

팬덤이 사람에게 중독 된 사람들입니다.

사람은 자기를 즐겁게 하는 것, 끌리는 사람, 돈이나 명예나 인기 이런 것에 중독이 잘 됩니다.

자식에게도 중독됩니다.

좋아하는 것만 아니라 미워하는 것도 중독되죠.

중독은 우리 안에 병든 요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각자의 죄의 본성에 끌리는 걸 반복하다 보면 중독이 되는 것입니다.

중독은 정상적인 이성의 작동을 멈추게 하고 객관적 시각을 흐리게 하죠.

하나님은 이성을 잃고 중독 된 신앙은 싫어하시는 것 같습니다.

이 정도 믿었으면 신앙도 좀 중독이 되었으면 좋겠는데 아니잖아요?물론 이단 같은 데는 백 프로 중독성이 있죠.

성도님들이 교회를 올까 말까, 큐티를 할까 말까, 여전히 중독되지 않는 것은 지극히 정상인 것입니다.

그렇기에 매번 마음을 다잡아 하나님 앞으로 나가 관계를 유지하려는 노력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래서 저도 중독은 포기하고 하나님 앞에 머무는 시간을 더 가지려고 노력하기로 했습니다.

함께 오랜 시간을 보내지 않으면 사람은 신뢰감이 잘 생기지 않습니다.

신뢰로 맺어진 믿음이 없으면 오늘 친하게 지내도 내일 만나려면 또 어색하고 부담이 되죠.

여호수아는 매일 성소로 나가 하나님과의 신뢰의 관계를 다져갔기에 결정적 순간에 의심 없이 하나님이 믿어졌던 것입니다.

우리도 생활 하나하나에서 하나님이 믿어질 수 있도록 하나님께 대한 신뢰를 점점 더 가지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다음 갈렙에 대해서입니다.

갈렙은 아무리 찾아 봐도 영에 감동되었다는 말씀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갈렙에 대해서 항상 내 종 갈렙, 갈렙은 내게 충성했다, 내게 순종했다 이런 말씀을 붙이십니다.

우리의 구원에 있어서 성령께서 감화하시고 하나님을 선호하는 마음으로 바꿔주시는 게 가장 중요합니다.

그러나 갈렙과 같이 배우고 알게 된 하나님을 자신의 인격과 의지를 다해서 순종하는 게 똑같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구원을 상징하는 가나안 땅에 여호수아와 갈렙을 짝을 지워 들여보내신 것 같습니다.

또 13장 앞을 보면 갈렙이 유다지파의 대표로 정탐을 했다고 합니다.

여기선 갈렙이 유다지파로 위장되어 있지만 사실 갈렙은 그나스 사람, 즉 외국인, 이방인이었습니다.

아마도 애굽에서 이스라엘과 섞여 살다 귀화해서 이스라엘 유다지파에 귀속된 것이라 생각됩니다.

그러니까 여호수아와 갈렙이 나란히 가나안땅에 들어가게 된 그림이 나오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이스라엘 자손 뿐 아니라 이방인에 대한 구원을 계획하셨다는 것이죠.

갈렙의 이름은 ‘개’라는 뜻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이방인들을 ‘개’처럼 취급했다는 게 묘하게 들어 맞죠?

하나님은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온 민족들을 위한 천국의 큰 그림을 이 출애굽 역사에서 이미 보여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열 번째 원망으로 결국 가나안땅에 들어가지 못한 출애굽1세대는 불행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이들에게 너무 가혹하시다는 생각은 안 드십니까?

40년 동안 광야에서 뺑뺑이라니요.

그러나 오늘 본문 이후를 읽어보면 하나님의 마음이 읽혀집니다.

하나님은 그래도 이스라엘의 진로를 결정해 주십니다.

산간 지대에 아말렉과 가나안인이 있으니 광야로 방향을 돌리라고 하십니다.

이스라엘은 그제야 하나님께 매달리며 가서 싸우겠다고 나섭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내가 그들과 함께 하지 않으니 그 사람들을 만류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떠나셨으니 싸워보나 마나 질 것이잖아요?

이미 버린 이스라엘, 어디로 가서 헤매다 죽든, 누구랑 싸우다 죽든 무슨 상관이시겠어요?그런데 여전히 하나님은 광야 40년 동안 만나를 내려주시고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이 패역한 백성들을 돌봐주시잖아요?

그리고 그 자녀들에게 약속하신 가나안땅을 차지하는 복을 주십니다.

저는 이게 무슨 징계인가,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식들을 잘 되게 해주시는 게 축복이지 징계입니까?

자식들이 부모의 대를 이어 약속의 땅에서 뿌리를 내리고 산다는 게 무슨 의미입니까?

그들의 불순종과 불신앙으로 척박한 광야에서 생을 마감했지만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대로 사실 이들에게 가나안땅을 주신 것입니다.

14장 20절을 보면 모세가 이들을 용서해 주실 것을 간절히 구하자 하나님이 말씀하시죠.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네 말대로 사하노라

가나안 땅에 들어가진 못했지만 그것이 곧 단체로 구원을 못 받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구원은 각자의 믿음으로 받는 것입니다.

가나안 땅은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의 땅이고 구원을 상징하지만 가나안땅 자체가 곧 구원은 아닙니다.

그 땅에 내려오실 예수그리스도와 주님의 나라가 구원입니다.

매일 믿음으로 넘어야 할 일들 앞에서 이스라엘처럼 다시 광야로 돌아가고, 다시 광야로 돌아가고 하지 않나요?

물론 그런 우리도 하나님은 끝까지 돌보시고 구원을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내 모든 계획과 생활 속에 받아들인다면 우리 삶에 젖과 꿀이 흐름을 경험할 것입니다.

꼼수나 비법이나 누구누구 찬스, 그런 것 없어도 됩니다.

벌떼처럼 달려드는 악의 세력과 우환들도 예수님 말씀대로 행하면 비집고 들어올 수 없습니다.

우리 앞에 있는 미지의 적들과 철벽같은 장애물만 보면 두려움에 사로잡혀 스스로가 메뚜기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까지 온 것도 내 힘만으로 온 것이 아니잖아요?

잘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믿음의 삶은 현실과 내 능력만 계산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을 함께 계산하는 것입니다.

잠언 3장6절에서 말씀하셨죠.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