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앞 가로변에 벌써 연보랏빛 라일락꽃이 피기 시작했습니다.
온 세상이 이렇게 경이롭게 피어나는 모습 속에서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을 느끼게 됩니다.
오늘 우리 마음과 영혼도 곱게 단장해주시고 모든 환경에도 생기를 불어넣어 주시길 소망합니다.
살다보면 봄날 같은 화창한 때도 있고 매서운 찬바람이 부는 삭막한 겨울 도 만납니다.
잠깐 지나가는 하루만도 얼마나 변화무쌍합니까?
요즘 날씨가 그렇잖습니까?
아침엔 모든 것들이 선명하고 찬란하게 시작했지만 얼마 못가서 미세먼지로 뒤덮여 앞길이 안개 속 같이 뿌옇게 보이는 것이죠.
오늘 출애굽의 기적과 환희의 절정을 체험한 이스라엘백성들도 광야라는 두렵고 메마른 곳을 통과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난생 처음으로 조상들에게 들어왔던 하나님을 경험했죠.
하나님이 출애굽을 위해 애굽에 내리신 열가지 재앙과 홍해를 가르신 일은 전설적인 이야기로 들릴지 모르겠지만 엄연한 역사적 사실입니다.
아무리 노예생활이 괴롭다 해도 한 민족이 단지 모세의 말을 듣고 4백년 거처를 떠나 미지의 땅으로 대거 이주 할 수는 없습니다.
성경에 보면 그들은 전혀 출애굽을 원치 않았습니다.
출애굽 때의 기적들이 실제로 그들 앞에 일어나지 않았다면 2백만명이 그렇게 쉽게 생활의 터전을 떠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투여할 수 있는 가장 강한 진통제는 마약성분의 몰핀입니다.
우리 몸에는 이 몰핀보다 2백배가 강한 성분의 진통제가 생산된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영국의 코스터리츠 박사가 이 호르몬을 발견하고 그 이름을 체내의 몰핀이라는 뜻으로 엔돌핀이라고 지었습니다.
그중 베타 엔돌핀은 마음이 기쁘고 즐거울 때 생성되는데 노화를 막아주고 암세포를 파괴하고 기억력을 강화시켜주는 작용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의 명령대로 항상 기뻐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엔돌핀의 4천배가 더 강한 다이돌핀이라는 호르몬이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이 호르몬은 영적인 강력한 체험을 할 때 순간적으로 우리 몸에 분비되는 강력한 호르몬입니다.
다이돌핀이 순식간에 분비되면 한 순간 암이 낫기도 하고 불치병이 치료되기도 합니다.
이런 극적인 기적의 체험이 강력한 동기가 되어 출애굽의 보따리를 쌌던 것이죠.
출애굽의 기적은 이스라엘을 억류하고 있는 애굽에 대한 징벌이기도 하지만 이스라엘백성들이 하나님을 따라나서게 하기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그들에게만 그렇겠습니까?
태어난 곳이 이 세상이고 눈 떠보니 자연세계만 보이는 사람들에게 천국을 향해 가자, 예수님을 믿고 이 땅의 가치관을 벗어나자는 것도 똑같은 상황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많은 기적을 보이시고 나서야 그들이 짐을 꾸렸듯이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우리를 죄악 속에서 끄집어 내시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초자연적인 영역에서 지금도 그만큼 일하시고 계십니다.
그렇기에 이미 우리는 부정할 수 없는 하나님의 어떤 실존을 느끼고 믿음의 여정을 시작한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있는 것이 출애굽의 기적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영광의 탈출을 한 이스라엘의 가나안 행은 순탄하지가 않았습니다.
가나안땅을 가는 노정에 지나쳐야 할 광활한 사막지대와 불편한 막사 생활에 따른 불평과 원망이 계속되었던 것입니다.
기적만 가지고 가나안까지 갈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기적을 베푸시는 그 하나님을 알고 신뢰하는 사람만이 광활한 광야를 건너 가나안 복지까지 들어가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믿어볼까 다가왔다 광야 앞에서 포기하고 애굽으로 돌아갑니다.
이스라엘사람들의 광야생활이 우리에게 탐구의 대상이 되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를 위해 이 기록을 남기셨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실패는 똑같은 죄성을 가지고 있는 우리에게 늘 있는 실패입니다.
우리 역시 그들만큼이나 불평이 많은 사람들이기에 오늘 말씀을 통해 잘 깨닫는 은혜를 주시길 원합니다.
본문은 두 가지 사건을 이어서 기록하고 있는데요.
1절부터 3절까지는 이스라엘백성들이 하나님을 원망하는 말을 함으로써 하나님이 진노하셔서 진영 끝을 불사른 사건입니다.
백성들이 놀라서 부르짖자 모세가 하나님께 기도해서 가까스로 위기를 모면합니다.
그리고 4절부터는 광야의 음식인 만나에 대한 지겨움으로 하나님을 원망한 사건이 이어집니다.
이 두 가지 사건은 인간의 뿌리 깊은 죄성을 드러내며 인간이 얼마나 하나님을 오해하고 미워하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신자들에게도 죄의 본성 자체가 사라진게 아니기 때문에 이런 크고 작은 내적 갈등 속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은혜롭게 예배를 드리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더 순종해야겠다고 생각하는 마음도 우리 마음이지만 조금이라도 괴롭고 불편한 상황이 벌어지면 욱하고 올라오는 성질 내면에 하나님께도 신경질을 부리는 게 인간의 본모습입니다.
본문을 따라 이들이 하나님을 원망했던 이유를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오늘 첫 번째 사건에서도 백성들이 악한 말로 원망했다고 합니다.
무엇 때문에 원망했는지가 없는 걸 보면 특별히 원망할만한 큰 어려움이 있었던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아마도 시내산을 출발해 험악한 광야 길을 사흘 정도 걷다보니 그게 싫어서 불평이 쏟아져 나왔던 것 같습니다.
광야 길이 물론 만만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이 길은 가나안 복된 땅을 향해 들어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보장받고 가는 잠시의 노정입니다.
앞의 내용을 보면 이 길은 시내산에 머문지 이미 일년이나 지났으니 이제 일어나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출발한 길입니다.
또 신명기1장2절을 보면 시내산을 출발해서 가나안 접경인 가데스바네아까지 겨우 열하루길이라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그 정도면 조금 더 견뎌볼만한 여정입니다.
그런데도 오늘 하나님이 진노하셔서 백성들의 장막 귀퉁이를 불태우실 정도라면 그 짧은 노정에서 이들이 얼마나 악하게 불평하고 원망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들의 원망하는 입을 막으시려고 불을 질러 버리셨던 것입니다.
크게 불평할 일이 아닌 데도 괜히 습관적으로 불평을 쏟아내는 것이 우리의 입이라면 조심해야 합니다.
사소한 일에 불평하는 입을 막으시려면 기겁할 일을 주실 수도 있습니다.
우리라면 얄미워서 그러겠지만 하나님은 불평하는 입이 결코 우리에게 복이 되지 않기 때문에 그러십니다.
저는 출애굽의 과정에서 하나님이 이렇게 까지 하시는 모습을 보며 하나님이 정말 우리를 위해 최선을 다하신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창조주 절대자께서 이런 한심한 사람들과 이런 실갱이를 하실 이유가 뭐가 있겠어요?
주님은 지금도 이스라엘사람들과 다를 바 없는 우리와 이렇게 실갱이를 하시며 최선을 다하고 계십니다.
본문에서 짤막하게 이 사건을 진술한 것은 사사기에서 그랬듯이 앞으로 반복 될 이스라엘의 원망의 패턴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결국 이런 원망과 불신으로 가나안땅을 밟아보지도 못하고 광야에서 죽을 불길한 징조인 것이죠.
신약성경에서도 이들의 원망하고 불신하는 행실을 들어 강력히 우리에게 경고합니다.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그들과 같이 원망하지 말라 그들에게 일어난 이런 일은 본보기가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기록되었느니라(고전10;10)
원망과 불평은 하나님의 뜻을 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은혜에 감사하지 않을 때 생겨나는 인간의 본성적인 악입니다.
그들이나 우리나 괴로운 일 앞에서 원망하고 불평하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해서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광야생활과 만나 급식에 대한 이유를 신명기8장에서 이렇게 밝히고 계십니다.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광야에서 만나를 먹이신 분명한 이유가 있으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침에 일어나면 바나나와 딸기가 주렁주렁 열리게인들 왜 못하시겠습니까?
만나보다 그게 더 자연스런 기적이죠.
특별히 만나를 먹이셔서 이스라엘을 생존하게 하신 것은 하늘의 것이 아닌 땅의 어떤 것으로도 죄인을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한 기적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산 떡이라'며 만나의 의미에 대해서 분명히 해석해 주시지 않습니까?
우리가 이해하기 힘든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해도 그 일을 허용하신 하나님의 의도가 분명히 있다고 믿는다면 섣부르게 불평하고 불신하지 않는 것입니다.
또 성도들이 겪는 광야와 만나의 경우에 대해 이렇게 말씀합니다.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
광야에선 날고 기어도 농사지어 먹고 살지 못합니다.
생존을 위한 밥벌이를 제대로 못하면 누구나 낮아질 수 밖에 없습니다.
신자들에게도 이 세상은 때로 광야길과 같습니다.
내 힘으로 안되는 광야 같은 상황 속에서 하나님만 간절히 구하게 되었다면 자기에 대한 과신을 내려놓고 마음을 낮추라는 뜻이라는 것이죠.
하나님은 자신을 포함한 모두의 유익과 행복을 위해 일하십니다.
하나님만이 모두의 행복을 위해 일하십니다.
만나의 훈련이 반드시 우리를 더 복되게 하실 것을 신뢰한다면 하루 하루 하나님의 손을 바라며 사는 상황도 기쁘게 지날 수 있을 것입니다.
만나의 훈련 뒤엔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을 예비하고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다음은 이들의 원망이 어떻게 시작되고 진행되는지를 보겠습니다.
사건의 발단은 4절에 그들 중에 섞여 사는 다른 인종들이 탐욕을 품은데서 시작되었습니다.
이들은 애굽에 붙잡혀 와서 같이 노예생활을 하던 사람들입니다.
풍요로운 가나안 땅으로 이주하는 이스라엘을 따라가 잘 살아보려고 따라온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일년 이상을 신정국가를 세운다고 율법교육을 받고 성막을 짓고 있으니 불만이 터져나왔던 것이죠.
하나님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이 주실 복을 따른다면 감사보다 원망이 많을 수 밖에 없습니다.
오늘 이스라엘백성들이 다른 인종들의 탐욕에 동조해서 분란을 일으킨 사실은 여러 가지를 보여줍니다.
우리는 누구와 가까이 하냐에 따라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
탐욕을 품고 불평하는 사람과 가까이 지내는 한 그 곁에서 평안하고 만족하게 지낼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누구하고만 같이 있으면 속에서 화가 끓어오르거나, 같이 염려에 빠지거나, 쉽게 세속에 빠지거나 하는 상대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절대적으로 상대의 문제만은 아닙니다.
그런 것들이 다 우리 속에 존재하는 본성들이기에 그런 시험에 반응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유독 누군가의 행실이 못마땅하고 시험에 든다면 그런 일에 자신은 결백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자신의 약점일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런저런 사람들과 엮여 살면서 우리 안의 죄의 모습을 보게 하십니다.
즉, 우리가 어떤 어려운 상대를 만나든지 어떤 괴로운 환경을 만나든지 그것을 통해 우리의 죄성을 통감하게 하시고 주님의 십자가가 왜 필요한지 깨닫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남의 잘못이 보일 때 그것을 통해 내 죄성을 보게 되면 그것도 복입니다.
이 불신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성도들이 이런 원리들을 잘 깨닫고 분별하며 살아간다면 오늘 이스라엘백성들과 같은 불행한 오류를 저지르진 않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이스라엘사람들이 이들에게 휘말린 것은 그 자신들 속에도 같은 원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꾹 눌러 놓았던 불만과 원망이 화산처럼 폭발하고 말았습니다.
분노와 원망이 어느 정도냐 하면 각기 장막 문에 나와서 울었다고 합니다.
탐욕에 불씨를 던지 다른 인종은 저리가랄 정도의 집단 히스테리에 빠진 것입니다.
4절에 보니 그들이 이렇게 원망합니다.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하랴애굽에 있을 때는 값없이 생선과 오이와 참외와 부추와 파와 마늘을 먹었는 데 이 만나 외에는 보이는 게 없다이 원망 속에는 하나님에 대한 불신과 세속에 대한 애착과 인간의 어리석음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데리고 나오더니 겨우 만나 밖에는 못 먹이신다는 말이죠.
사람들의 모든 불평 속에는 하나님의 무능이나 불공평이나 무관심에 대한 질책이 깔려있는 것입니다.
불평이 나올 때 재빨리 사람들의 마음을 스치는 것은 '믿는 게 무슨 소용이냐, 하나도 달라지는 게 없네' 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현재 나쁜 환경이 하나님 탓으로 돌리며 원망하는 것이 우리 속에 뿌리깊이 내재 된 죄성입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이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을 따라 나섰더니 빡빡한 율법과 밍밍한 만나와 황량한 광야 밖에 없는 생활이라니 후회스럽다는 것이죠.
과거 하나님을 믿지 않던 애굽의 생활이 더 풍성하고 낫지 않았냐는 것입니다.
하지만 언제 그들이 지금 불평하는 것 처럼 애굽에서 값없이 생선과 멜론과 부추와 파와 마늘을 그렇게 먹었습니까?
어깨에 채찍이 떨어지고, 감시인의 경멸의 눈초리를 받아가며 짐승처럼 벽돌을 만들고 공사장에서 땀을 비오듯 하고 겨우 얻어낸 음식입니다.
기원전 역사가 헤로토투스에 의하면 피라미드공사를 하던 인부들에게 더 힘을 끌어내려고 지급되었던 식품이 강장제인 파와 마늘이었다고 합니다.
세상에서 시시한 것 하나인들 어디 공짜가 있습니까?
세상과 상대해서 무언가를 얻었다면 그만큼 우리 진액을 바친 것이죠.
그런 삶에도 견디고 버티도록 우리 심령에 힘을 주는 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내려주시는 매일의 만나이고 값없이 거저 주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만나는 정말 최악의 음식이었고 정말 그들에게는 맛나 외에는 없었을까요?
오늘 이스라엘백성들이 주위에 만나 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며 만나를 타박하고 있습니다.
7절에 보면 만나는 깟씨와 같고 모양은 진주와 같은 것이라 고 합니다.
생긴 모양은 깟이라는 식물의 씨앗과 같이 생겼고 진주같이 동글고 흰색 식물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맛은 기름 섞은 과자 맛 같았다고 합니다.
만나는 밤에 이들이 다 잘 때 이슬과 함께 내려와 진영 주변에 널려있었습니다.
매일 아침에 나가 그날 먹을 분량의 만나를 거두어서 맷돌에 갈고 절구에 찧고 가마에 삶아서 음식을 만들어 먹었습니다.
이 음식을 일년 넘게 먹었다면 우리가 생각해도 질릴 만도 합니다.
그러나 만나는 광야를 통과하기엔 최상의 음식이었을 것입니다.
광야에서 생존할만한 열량을 보충할만한 완전 식품이었을게 분명합니다.
이들은 오늘 만나만 먹어서 기력이 다 빠졌다지만 실은 거짓말입니다.
나중에 가나안에 들어간 광야2세대는 40년을 만나만 먹고 살았지만 병 걸려 골골했다는 말은 커녕 오히려 가나안 땅에 들어가 그 많은 정복전쟁을 너끈히 치르지 않았습니까?
또 매일 과하지 않게 정해진 량을 먹었기에 아마 배설도 적게 했을 것입니다.
2백만명이 화장실 시설도 제대로 없는 장막생활에서 마구 배설을 하면 그것도 참 골치아픈 일이죠.
그리고 만나는 광야의 여정에서 잠시 먹을 음식으로 제공되었습니다.
하나님 계획대로라면 그래봤자 일년 남짓입니다.
그 뒤에는 가나안의 밀과 무화과와 포도로 풍성한 식탁이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일년 먹을 만나를 그들의 거듭되는 원망과 불신으로 인해 결국 광야에서 40년을 먹게 된 것입니다.
오늘 이들이 원망했던 대로 과연 현재 그들에겐 만나 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습니까?
하나님을 따라 나선 그들의 삶이 그렇게 불행하기만 했을까요?
현재 내 삶에 구체적으로 잘 적용시키며 듣고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은 밤새 이슬이 내려 메마른 공기가 촉촉해진 새벽에 건강하게 일어나 진 주변을 돌아다니며 그야말로 값없이 만나를 거두었습니다.
뒤에서 노려보며 채찍을 휘두르던 노역관도 없습니다.
그냥 나와 내 가족을 위한 수고일 뿐입니다.
성경을 보면 아무리 더 거두려고 애를 써봤자, 누구든 똑같이 하루 먹을 양만 거둘수 있었다고 합니다.
못난 사람도, 잘난 사람도 매일 똑같은 음식을 똑같은 양만큼 얻으니 남이 잘 먹고 산다고 비교하고 불평할 필요도 없습니다.
비록 단순한 음식이지만 매끼마다 가족들이 다 같이 단란하게 앉아 음식을 먹었습니다.
곧 들어가 누리게 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복지를 상상하며 웃음꽃을 피울 수도 있었습니다.
이게 과연 만나 외에는 없다고 불평할만한 삶입니까?
이스라엘사람들의 불평의 원인이 무엇입니까?
그들에겐 현재 없는 것만 찾아내는 데 귀신같았다는 것이죠.
현재 주어진 것에 대한 감사와 앞으로 보장받은 축복에 대한 믿음이 없었던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이스라엘백성들은 원망과 불신을 버리지 못하고 광야에서 최후를 맞게 된 것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우리가 하나님 믿고 열심히 섬기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여전히 우리에게 광야의 여정이 있습니다.
당장 모든 생활 속에 풍요가 흐르지 않습니다.
축복의 땅에서 모든 것들을 합당하게 누리기 위해서는 광야를 통과하며 배워야할 것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삶에 겨우 하루 먹거리가 주어지고, 하루 해결할 돈으로 살아가고 있다면 만나로 먹고사는 훈련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매일을 살아내는 만나의 공급은 여전히 하나님의 기적이고 하나님이 우리를 매일 돌보고 계시다는 증거입니다.
우리는 사건이 터지고 사고가 난 뒤 일이 수습되고, 위기를 면하게 될 때만 막연히 하나님이 도우셨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루를 살아가고, 이 약한 몸으로 세상을 살아갈 때 얼마나 많은 위험에 노출되어 있습니까?
정말 간신히 위기를 모면하고 가슴을 쓸어내릴 때가 있지 않습니까?
이렇게 잠깐 위기가 느껴지는 순간이 아마 하나님이 이번에도 위기를 막아주셨다는 섬광 같은 사인일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의식할 수 있는 위험에서 부르짖을 때만 우리를 보호하시는 게 아닙니다.
우리의 모든 시간에 곁에 계셔서 함께 일을 감당해주시고, 치명적인 위험으로부터 보호해주시고, 평범한 나날 속에서 잔잔한 행복을 누리며 올바르게 살아가도록 지도해 주십니다.
그리고 오늘 만나는 우리가 생존하기 위해서 먹어야 할 영적인 만나인 예수님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신약성경에서 예수님께서 만나의 깊은 영적 의미를 드러내주십니다.
요한복음6장35절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51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무엇보다 우리는 예수님으로 인해 영생을 얻었습니다.
광야를 지나 천국을 향해 가는 모든 우리들에게 매일 먹어야 할 생명의 떡은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먹고 지키며 사는 것입니다.
세속과 죄의 성향을 따르는 삶은 우리의 영과 육에 독소를 뿜어냅니다.
지나치게 자극적이고 정욕적인 삶을 피하고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법도를 따라 깨끗하고 신령한 것을 참을성 있게 즐기며 살아가는 삶으로 주님이 매일 부어주시는 만나같은 은혜 안에 살아가는 모두가 되기를 원합니다. 아멘.
2016년4월10일 설교 남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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