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수감사절설교모음

추수감사절 - 하나님의 은택 (시편103편1절-5절)

남수연 2017. 11. 9. 10:47

오늘은 추수감사절 예배로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립니다.

한 해 동안 우리에게 소득을 주셔서 가정을 꾸려오게 하신 것을 감사하며 정성껏 드리는 헌물과 예배를 아버지께서 기쁘게 받으시고 우리를 축복하실 줄 믿습니다.

본문 시편103편은 다윗이 기록한 감사와 찬양의 시입니다.

일개 목동에서 이스라엘2대 왕에 올라 부귀와 영화를 누렸던 다윗 왕은 정말 특출 난 믿음으로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누렸던 부러운 사람이죠.

무엇보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탁월한 그의 감사는 우리가 본받아야 할 줄 믿습니다.

오늘 시편을 읽기만 해도 우리 마음에 그의 감사의 신앙과 기쁨이 전해지는 것 같지 않습니까?

우리 마음도 어느새 덩달아 하나님께 대한 감사로 가득 차는 것 같습니다.

이런 아름다운 찬양과 감사의 시를 지은 다윗은 평생 평탄하고 안전한 삶을 살았던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선택을 받아 차기 왕권에 내정 되었지만 그를 죽이려는 사울왕의 집요한 추적으로 사망의 골짜기를 유리했던 사람입니다.

그가 다른 시편에서 이렇게 고백하지 않습니까?

나의 유리함을 주께서 계수하셨으니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

올해도 우리 삶에는 힘든 일도 많았고 마음 아픈 일도 많았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 돌아보니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가 있었음을 고백하게 됩니다.

받은 것이 많아야 더 잘 감사하겠지 생각할지 모르지만 꼭 그렇지도 않습니다.

오늘 다윗처럼 오히려 고난을 통해 은혜를 깨달은 사람이 더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입니다.

감사가 사라지는 것이 말세의 징조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디모데후서 32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마땅히 감사할 만한 혜택을 받았는데도 감사하지 않는다는 것이죠.

제가 지난 주에 두 사람의 심각한 고민거리를 좀 도와드렸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해결 된 것은 너무 기뻐하면서 도움을 준 저에게 고맙다는 인삿말을 건너 뛰는 것입니다.

그 분들께 고마운 마음이 있다는 것은 알겠지만 이 두 분의 일을 보며 마음이 있어도 정말 사람들이 감사의 표현을 너무 못하고 산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비단 그 분들만의 이야기는 아닐거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다 서로에게 도움과 관심을 받고 살아가지만 여유롭게 대할 시간들이 없으니 감사의 말을 전할 타이밍을 놓치고 사는 것이죠.

서로의 마음을 따뜻하게 하고 작은 수고에도 보람을 느끼도록 고맙다는 말을 자주 하는 모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고마워하는 마음을 당연히 알겠지 생각할지 모르지만 상대방은 독심술사가 아닙니다.

우리 가족들에게도 작은 일에 고맙다고 표현하다보면 좀 더 따스한 가정이 될 줄 믿습니다.

사람에게도 이렇게 고마움의 표현이 무심하니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께 대해 우리가 얼마나 감사의 표현이 부족하겠습니까?

하나님께도 고마움을 막연한 생각이 아니라 오늘 다윗이 말하듯 입으로 고백하고 기쁘게 송축해야 합니다.

하나님아버지 정말 감사합니다.

매번 용돈을 받아가는 우리 아이들이 기쁜 얼굴로 엄마, 아빠, 감사합니다.라고 말할 때 우리 마음이 얼마나 흐믓하고 보람이 있습니까?

그 말 안한다고 물론 우리가 용돈 끊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녀들이 부모를 공경하고 고맙게 생각하는 것을 표현할 때 부모와 자식 간 애정도 돈독해 지듯이 우리가 영의 아버지께 받은 모든 것을 감사할 때 하늘아버지께서도 마음에 기쁘시지 않겠습니까?

긴박하고 간절했던 기도가 응답되었을 때조차도 정말 하나님아버지를 향해 뜨거운 감사를 드리기가 의외로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뚝딱 우리의 기도를 응답해주시는 게 아닙니다.

응답을 위해 많은 사람들을 동원하시고 환경을 만들어 가시며 응답하시기 위한 절차가 복잡합니다.

저 사람 마음을 돌이켜 달라면 하나님이 즉시 그 마음을 바꿔주시는 게 아닙니다.

그 사람이 마음을 돌릴 수 있는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해 설득하고 감동하고 깨닫도록 일하시는 것이거든요.

아버지께서 지금도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기 위해 쉬지 않으시고 일하신다는 것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우리 어린 자식들은 회사가면 그냥 돈 받아오는 줄 알지만 부모들이 자식들 먹이고 입히고 교육시킬 모든 것을 마련하기 위해 얼마나 고단하게 수고를 합니까?

아까 두 분들처럼 속으로만 감사하지 말고 직접 살아계신 하나님을 향해 내 전 인격을 다해 감사의 마음을 입으로 고백해야 할 줄 믿습니다.

말의 위력이 있습니다.

생각만 하면 금방 잊혀지지만 말로 고백하는 것은 이루어지는 능력이 있습니다.

감사를 잘 하는 사람에겐 그래서 더욱 감사할 일들이 많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탈무드에 보면 "혓바닥에게 '감사합니다'는 말을 버릇들이기 전엔 아무 말도 하지 말라"는 가르침이 있습니다.

우리 자식들 또한 주님의 교회와 사회 안에서 요긴하고 사랑스런 일원이 되도록 감사하는 법을 꼭 가르쳐줘야 할 줄 믿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다윗이 감사하는 모든 항목들은 올 한해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부어주신 은혜들입니다.

우리 삶에 부어주신 은혜들을 하나 하나 살펴보며 오늘 진실 된 마음으로 아버지께 감사의 예배를 드리는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우선 1절에서 다윗은 자기 자신에게명령하죠.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의 거룩한 이름을 송축하라.

우리도 내 자신에게 그렇게 날마다 명령하고 그렇게 하나님을 송축한다면 그것이 정말 복된 삶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제일 되는 목적을 소요리문답에 이렇게 정리하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다.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모든 물건이 제조 된 목적에 맞게 사용될 때 가장 안전하고 큰 효능을 보이듯이 인간도 창조의 목적대로 살 때 가장 행복하고 완벽한 능력을 발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이것을 깨닫지 못하고 참 어리석게도 자기만을 영화롭게 하려고 혈안이 되어 있으니 불행한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영화롭게 될 방법을 정확히 가르치고 있습니다.

잠언 48 그를 높이라 그리하면 그가 너를 높이 들리라 만일 그를 품으면 그가 너를 영화롭게 하리라

최고의 것으로 이 땅에서 한껏 자신을 영화롭게 해 본 솔로몬왕이 결론적으로 한 말이 무엇입니까?

이것이 다 허무하더라는 것입니다.

전도서 21 나는 내 마음에 이르기를 자내가 시험적으로 너를 즐겁게 하리니 너는 낙을 누리라 하였으나 본즉 이것도 헛되도다

청년들은 아직 어떨지 모르겠지만 장년이후가 되면 내 자신을 아무리 즐겁게 하려해도 과히 즐겁지가 않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우리 나이의 불행감이 단지 돈이 부족해서 그런 게 아닙니다.

미국의 경제학자 리처드 이스털린의 이론을 보면 소득이 일정 수준에 도달하고 기본 욕구가 충족되면 소득이 증가해도 행복지수가 올라가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는 그 예로 1인당 국민소득이 2만 달러가 넘었는데도 행복하지 않은 우리나라를 예로 들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선진국에서 부를 실컷 누려 본 사람들이 자선을 시작하는 것이죠.

미국의 워런 버핏은 무려 35조원이나 되는 재산을 사회에 기부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자선도 결국 사람의 영혼 중에 있는 하나님의 자리를 채워주지 못합니다.

인간의 제일 되는 목적인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삶이 빠진 인생은 가장 완벽한 행복의 상태를 잃어버리고 사는 것입니다.

이 땅을 가장 복되고 안정 되게 사는 메뉴얼은 하나님을 높이고 송축하며 즐거워하는 것인 줄 믿으시고 날마다 하나님을 높이는 모두가 되기를 축원드립니다.

다음 2절에는 하나님의 모든 은택을 잊지말라고 자신에게 명령합니다.

은택은 은혜로운 덕택이라는 뜻으로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제공해주신 모든 종류의 혜택을 말하는 것입니다.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잊기 쉬운 그 은택을 절대 잊지말라고 다윗은 자신에게 강하게 명령하고 있습니다.

은혜는 돌에 새기고 원수는 물에 새긴다는 속담이 있지만 거꾸로 원수는 돌에 새기고 은혜는 물에 새기는 인간의 본성을 알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올 한해 세계가 경제적인 한파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우리들 가정경제도 만만찮은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어렵다 보니 더 물질을 의존하게 되고 보이지 않는 믿음보다 눈에 보이는 방법으로 우선 문제들을 해결해 보려고 하기가 쉽죠.

우리 힘으로 그렇게 해서 올 한해를 헤쳐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은택이 우리를 인도해 주신 것입니다.

지난 주 설교에서 삭막한 광야에서 40년을 방랑하던 이스라엘이 드디어 가나안에 들어간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들은 젖과 꿀이 흐르는 농경지의 풍요한 소산물을 보고 충격을 받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가나안땅의 기름진 수확이 가나안부족이 섬기던 바알신이 주는 게 아닌 가 하는 착각을 했다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만 섬겨야 할 백성들이 바알신을 같이 섬기다 축복의 땅에서 쫒겨나는 참혹한 역사를 맞게 되는 것이죠.

광야에서 인도하신 하나님과 가나안 농경의 신을 동시에 섬기면 가나안 생활이 끄떡없으리라 믿었던 얕은 잔꾀가 화근이었습니다.

우리 인생에 필요한 모든 것을 이 세상이 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든든한 직장과 내 세상적인 실력과 부모의 유산과 은행 잔고가 우리 삶에 풍성한 물질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택을 베푸시는 것입니다.

신명기818절은 말씀합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력을 주셨음이라

공중의 나는 새와 들의 백합화를 기르시는 하나님이 올 한 해도 우리를 사랑하시며 모든 은혜로 인도해 주신 줄 믿습니다.

그 은혜로운 보살핌을 기대하고 나온 모든 자녀들을 끝까지 책임지십니다.

우리 인생의 핸들을 여전히 손에 쥐고 부들 부들 떨지 말고 하나님께 맡기고 인도하심을 편안히 따르시길 축원드립니다.

그렇게 평생 하나님만을 따랐던 다윗은 오늘 베풀어 주신 놀라운 은택을 하나 하나 헤아리며 다음과 같이 하나님을 송축하는 것입니다.

첫째는 3절에서 모든 죄악을 사해주신 은혜입니다.

사람이 죽으면 이 세상의 모든 부채도 책임도 다 벗어나게 됩니다.

그러나 죽어도 벗을 수 없는 것이 있는 데 그것은 죄에 대한 책임입니다.

죽은 다음에 우리가 창조주 앞에 서야 한다는 것을 우리 인간의 본능으로 어렴풋이 알게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죄가 해결되지 않은 사람은 죽음이 두려운 것이죠.

우리가 반드시 죽을 것 아닙니까?

그렇다고 내 인격체인 이 영혼이 육체와 같이 죽지는 않습니다.

영혼이 죽지 못한다는 것쯤은 다 알고 있지 않습니까?

죽음 뒤에 우리는 다른 세계로 이동할 것이고 성경은 모두가 선악 간에 하나님 앞에 엄중한 심판을 받는다고 선언합니다.

자유로운 삶은 우리 몫이지만 그 행위의 결과는 인간 스스로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죠.

본문에서 다윗이 언급한 죄는 우리가 살며 짓는 소소한 죄도 있지만 보다 더 근원적인 죄를 포함합니다.

끊임없이 나 자신만을 높이고 나를 위해 무슨 짓이라도 하는 타락한 나의 죄의 성향 자체를 말하는 것입니다.

경외해야 할 하나님을 경홀히 여기고 사랑해야 할 이웃을 무시하거나 시샘하는 죄의 본성이 있다는 것을 먼저 깨닫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다윗은 우리아의 아내를 범하고 충신 우리야를 죽였을 때 결국 죄의 길로 자기를 끌고 가는 것은 깊은 곳에 있는 죄의 본성인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 죄를 짓고 참회하며 지은 시편51편에서 이렇게 말하죠.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곧 그 앞에 나갈 것을 알았던 다윗은 그 해결되지 않은 죄를 생각하고 죽을 지경이었던 것입니다.

시편 384절에서도 이렇게 기록합니다.

내 죄악이 내 머리에 넘쳐서 무거운 짐 같으니 감당할 수 없나이다

육중한 죄로 머리를 똑바로 들 수 없다는 것입니다.

또 시편 4012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죄가 나의 머리털보다 많으므로 내가 낙심하였음이니이다

이 수많은 머리털보다 더 많고 시커먼 것이 우리 인간의 죄입니다.

이 자기 속에 있는 죄성을 들여다보지 못한 사람은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이 무엇인지 모르기에 다윗과 같은 감사를 할 수가 없습니다.

어거스틴은 우리 앞에 있는 우리 자신의 죄를 인식하지 못한다면 우리 앞에 하나님의 은총이란 없을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죄가 없다고 생각하는 데 용서받은 은총이 실감이 나겠냐는 말이죠.

그래서 다윗은 하나님의 놀라운 은택을 송축할 때 제일 먼저 그 사망의 죄를 용서받은 데에 감격과 감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때 죄인이라는 것과 그 죄를 십자가의 은혜로 다 용서받은 의인이 되었다는 감사가 넘친다면 그것이야말로 하나님의 가장 큰 은택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날마다 깨달을 때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진실하고 변치않는 지를 신뢰하게 되고 우리를 오히려 담대한 사람이 되게 합니다.

아직 죄사하심의 은혜가 덜 깨달아지면 날마다 하나님께 내 죄를 깨닫도록 기도하십시오.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정말 행복합니다.

이상하죠? 나를 향한 하나님의 은혜도 깨닫기 때문입니다.

그걸 깨달으셨다면 우리 영혼에게 그 은혜를 절대로 잊지 말고 시시때때로 하나님께 감사의 마음을 올려드리도록 명령하시길 바랍니다.

둘째는 모든 병을 고쳐주신 은혜입니다.

죄 용서를 받은 뒤에도 우리는 여전히 온전치 못한 몸을 이끌고 이 세상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올 한 해 동안 참 여러 가지 병들이 우리를 괴롭혔습니다.

감기몸살부터 만성적인 피로에 정신적인 우울감, 마음까지 낙심시킬 중병과 고질적인 통증들로 약봉지를 끼고 살았던 기간도 참 많았습니다.

그렇지만 지금 우리가 그 병에서 놓여나고 이렇게 감사의 예배로 걸어 나올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크신 하나님의 은택입니까?

의사가 병을 고치는 것이 아니고 약이 세균을 죽이는 것도 아니라는 것은 지겹게 치료를 받아도 병이 낫지 않을 때 비로서 우리가 알게 됩니다.

그럴 때 겁이 덜컥 나고 평생 이 병과 함께 사는 건 아닌가, 더 중증이 되는 것은 아닌가 얼마나 불안하고 두려운지 모릅니다.

의사는 상처 나면 꿰메고 나쁜 게 생기면 도려내고 치료약을 투입할 뿐입니다.

장기들이 제자리를 잡고 몸이 세균과 싸워 이기게 하고 새 살이 돋게 하는 것은 다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의사가 아무리 치료를 잘 해도 환자를 치유하시고 다시 살리시는 것은 오직 하나님께 달렸다는 것은 중병을 이긴 사람은 다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올 해도 질병이 우리를 공격하고 쓰러뜨리려 할 때 우리를 고치시고 일으켜 세워주신 줄 믿습니다.

출애굽기1526절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향해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의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

우리가 질병으로 낙담되어 병원을 오가며 약을 먹으며 하나님을 향해 치료를 간절히 기도할 때 우리 아버지께서 이렇게 우리를 소생시키신 줄 믿습니다.

다윗은 그의 평생에 전쟁을 한 용사였습니다.

그가 병중에 누워있다면 어떻게 그 모든 원수를 이기고 이스라엘을 세우고 다윗왕가를 견고히 세웠겠습니까?

돌아보니 하루가 멀다하고 치렀던 전쟁의 창상을 면하게 하시고 모든 질병으로부터 건강하게 지켜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이죠.

성경은 그가 나이 많아 늙도록 부하고 존귀를 누리다가 죽었다고 기록합니다.

우리를 모든 질병에서 건지시고 또 늙도록 강건하게 지켜주실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하는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말라기 42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같이 뛰리라

하나님은 아버지를 경외하며 기쁘게 송축하며 섬기는 우리 모두에게 살아가는 날 동안 모든 질병에서 치료의 은혜로 우리를 축복하실 줄 믿습니다. 아멘.

셋째는 내 생명을 파멸에서 속량하신 은혜입니다.

삶에서 파멸의 위기를 느껴보셨을지 모르겠습니다.

젊어서 인생의 절벽을 만날 땐 젊어서 그런지 그것이 끝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죠.

그러나 중년 이후 그런 삶의 위기를 만날 땐 상황이 다릅니다.

다시 시작하기엔 불가능하다는 걸 알기에 이젠 끝이구나 다시는 회복될 수 없겠구나 파멸을 예견하고 절망하게 됩니다.

우리가 모두 이 자리에 감사로 예배하는 것을 보니 다들 파멸에서 속량을 받으시고 위기를 이겨내신 줄 믿습니다.

하나님을 끝까지 붙드는 사람들에겐 묘하게도 이번엔 끝장이다 싶은 데도 일어나는 힘이 있습니다.

그게 바로 잠언 2416에서 말씀하신 대로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난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의 현실적인 문제들 뿐 아니라 생명의 완벽한 파멸인 하나님의 심판에서 구원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우리 영혼이 영원한 지옥의 파멸에서 속량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속량이란 단어는 그냥 댓가 없이 파멸을 면한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값을 치렀다는 단어입니다.

이 속량이란 단어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과 같은 뜻입니다.

하나님은 인류의 범죄 즉시 하나님 스스로 인간의 죄를 대신 치르시고 구원하실 계획을 세우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 무수히도 메시야의 대속에 대해 힌트를 주었건만 희한하게도 유대인들은 구약성경에 기록 된 구속에 대해 전혀 눈치를 채지 못했습니다.

유월절 어린 양의 사건이나 이사야53장이 메시야의 대속에 대한 예고라는 것을 알고 있는 우리 성도님들은 그들에 비하면 정말 대단한 것입니다.

모세나 이사야 같은 선지자들이 메시야의 고난과 대속에 대한 영감을 받고 놀라워 하며 기록한 성경이 그들 눈에 가리워져 있었던 것이죠.

욥기에서 욥도 고난 중에 그것을 깨닫고 탄성을 지르지 않습니까?

욥기 1925 내가 알기에는 나의 구속자가 살아 계시니 후일에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오늘 본문에서 다윗도 놀랍게 속량이란 단어를 쓰고 있습니다.

다윗 역시 성령에 의해 자신의 죄악을 대신 치르고 생명을 구원하실 그리스도를 발견했다는 것이죠.

자유주의 신학의 영향으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자기 죄의 속죄로 믿지 못하고 목사가 되었던 윌리엄 쿠퍼목사가 있습니다.

어느 고난 주간을 앞 둔 토요일에 그는 자신이 만든 주보를 들여다보다 구원을 받았다고 합니다.

주일 설교 제목이 누가 예수를 죽였는가였고 그 아래 윌리엄쿠퍼 목사라고 써있었습니다.

그걸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그에게 갑자기 예수님이 바로 자기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것이 섬광처럼 깨달아졌습니다.

그 밤 눈물로 통곡하며 예수님을 그의 구주로 영접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내 생명을 파멸에서 건지시기 위해 나를 속죄하신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따르게 된 것을 영원히 감사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주신 가장 놀라운 하나님의 은택인 줄 믿습니다.

넷째는 내게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신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올해도 신실하게 인자와 긍휼을 베풀어주셨습니다.

특히 관을 씌워주신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도 볼 수 있게 우리에게 주시는 복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남들이 느낄 수 있도록 풍성하게 우리와 함께 하시며 인자와 긍휼을 베푸신다는 것입니다.

혹시 지금 내 형편이 결코 남들 앞에 영광스런 관을 쓴 모습이 아니라고 생각하실지 모릅니다.

남이 보기에 낙심해서 완전 무너질 것 같은 상황이 분명한 데 아직도 우리가 이렇게 건재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처량하고 슬픈 게 아니라 하나님의 인자와 긍휼로 관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긍휼히 여기신 은혜가 없었다면 우리는 많은 사건과 고난 속에 넘어져 영영 일어나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이 모든 고난과 어려움을 이겨내고 주님을 신뢰하는 우리에게 영화로운 관을 모든 사람 앞에서 씌워주실 줄 또한 확신합니다.

마지막으로좋은 것으로 내 소원을 만족하게 하셔서 내 청춘을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신 은혜입니다.

어릴 때는 참 무모한 소원을 부끄럼 없이 잘도 말합니다.

대통령이나 판사나 외교관이 고르는 대로 다 될 줄 아는 아동기를 지나 청소년기에 접어들면 희망직업란에 자영업, 비디오가게 이렇게 쓰게 되죠.

어른이 되갈수록 내 환경과 능력에 걸맞지 않은 소원을 말하려면 오히려 창피합니다.

마음에 소원조차 부질없이 느껴지는 각박한 세상을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내일은 내게 더 좋은 날들이 올 것이라는 기대보다 지금보다 오히려 좋지 않은 상황 속에 빠지게 될 것을 두려워하게 되죠.

뉴스를 통해 갖가지 경제난이 심화 될 상황들과 세계적인 기상이변 같은 소식을 듣다보면 더 좋은 소원은 커녕 당장 내가 누리고 있는 것조차 뺏길 까봐 마음이 초조해지는 것을 경험합니다.

맥킨지연구소에 발표에 의하면 우리 자녀들 세대엔 우리보다 더 낮은 소득으로 살아가야 한다고 합니다.

기술변화로 노동수요는 감소하고 늘어난 국가와 가계 빚 부담 같은 다양한 요인들로 아무리 노력해도 부모세대보다 가난할 수 밖에 없는 여건이 된다고 합니다.

우리와 우리자식들이 점점 힘들어지는 세상을 헤쳐 나가고 복스런 삶을 살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소원을 주시며 인도하시는 하나님만이 유일한 보장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지금 악조건과 불가능한 상황 속에 있는 게 분명한 데도 주님을 앙망하면 우리 마음에 새로운 소원을 주시고 인도해 주시는 걸 느끼지 않습니까?

도와줄 사람은 없고 아직 주변은 어둠 속에 있는 데도 하나님께서는 어쩐지 잘 될 것 같은 소망을 불어넣어 주십니다.

그래서 오늘 또 자리를 털고 일어나 믿음을 붙잡고 최선을 다해 삶을 살아보는 것이죠.

올 한 해 소원을 만족하게 이루셨습니까?

모든 소원은 주안에서 지금 이뤄지고 있는 줄 믿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매일 우리 마음을 만족시켜 주시는 작은 은혜를 발견하고 감사드리길 원합니다.

그럴 때 우리 심령이 시들해지지 않고 청춘처럼 생기가 도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의 청춘이 독수리처럼 새롭게 되어 힘 빠지는 세상을 힘차게 살아가는 영육간에 놀라운 축복을 누리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아멘.

말씀을 맺습니다.

뇌성마비 시인인 송명0씨의 시 중에 나는 황제보다 하인이 부럽습니다라는 시가 있습니다.

나는 섬김을 받는 황제보다 섬기는 하인이 더 부럽습니다.’

나는 예쁜 공주가 되기 보다 구박을 받아도 말광량이가 되고 싶습니다.’

왜 송명0씨가 하인이 부럽다고 했겠습니까?

시의 후반부에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원치 않는 공주가 되어 다른 사람의 섬김과 도움을 받아야 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쇼윈도우의 마네킹 처럼 난 꼼짝 못하여 사람들이 나를 들고가야 움직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끝을 맺습니다.

그렇지만 최선을 다해 사는 것이 나의 일이기에 죽을 힘을 다해 살겠습니다.’

지금 하인이 되어 남을 섬기는 삶이 불평스럽습니까?

구박받는 사회생활이 힘들고 한없이 수고해야 하는 인생이 고되십니까?

수고 할 일터와 가족과 건강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지 않으시겠습니까?

서양속담 중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제일 가르치기 어려운 수학문제는 우리가 받은 축복을 세어보는 문제이다"

오늘 다윗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다섯가지 은택을 기억하고 축복을 세어보길 원합니다.

그리고 큰 소리로 기쁘게 주님을 송축하고 감사할 때 더 많은 은택을 날마다 우리에게 내려주실 줄 확신합니다. 아멘.

2012년 추수감사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