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리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라
올해도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부족함이 없다는 것을 감사드립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감사하는 추수감사주일인데, 며칠 전 파리에서 일어난 테러로 인해 마음이 한편 착찹합니다.
먼 데 일이지만 어려움 당한 분들이 잘 이겨낼 수 있길 소망합니다.
갈수록 늘어가는 테러와 환경문제, 경제위기들에서 우리 모두를 지켜주시고 인도해주시길 간절히 원합니다.
추수감사절을 지키는 의미는 구약성경에 근거합니다.
땅의 소산을 수확 한 후에는 반드시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라는 말씀을 따른 것입니다.
우리가 지키고 있는 추수감사절은 미국의 감사절기를 따릅니다.
우리나라에 맞게 추석을 감사절로 지키자는 의견들도 있지만 미국식 추수감사절에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4백여년전 영국에서는 개신교인들에게 카톨릭적 신앙을 강요했습니다.
박해가 심해지자 성경적인 신앙을 지키기 위해 백여명의 개신교인들이 아메리카신대륙으로 이주를 감행합니다.
항해의 위험과 혹독한 겨울추위로 인해 많은 사람이 죽고 27명만이 미국 땅에 내렸습니다.
그들의 불안과 두려움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대륙의 원주민인 인디언들을 대항하기에 20명은 너무 적은 숫자였습니다.
게다가 지식계층인 이들은 생존을 위해 필수적인 농사법을 몰랐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예비해 놓으신 도움의 손길은 놀랍게도 그들이 두려워하던 인디언들이었습니다.
바로 그 인디언들의 도움을 받아 밀과 옥수수를 파종하고 농사법을 배우고 그 땅에서 살아남은 것입니다.
그해 첫 수확을 거두었을 때 성도들의 감사와 감격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그 기쁨으로 하나님께 감사예배를 드린 것이 바로 추수감사절의 유래입니다.
우리의 일년을 돌아보니 우리의 추수감사주일도 이들과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새해를 맞을 때 우리도 그들과 같은 심정이었습니다.
어떤 일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지, 가진 것도 없이 어떻게 한 해를 헤쳐나가야 할지, 가정에 산적한 문제들을 어떻게 뚫고 나가야 할지 막막한 마음으로 출발했습니다.
돌아보니 하나님께서는 두텁게 막혀있던 환경들을 터주셨고, 예기치 않게 문제들을 해결하게 해주셨고, 먹고 살만큼 수입도 채워주셨습니다.
변함없이 이렇게 예배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는 것도 우리의 신상과 건강들을 지켜주셨다는 뜻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 모두의 믿음이 더 성장하였고, 조금은 더 좋은 사람들이 되었음을 감사드립니다.
모든 것이 다 원하던 대로 완벽하게 된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도우시지 않았다면 우리의 형편은 지금보다 훨씬 나빴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께 가장 크게 감사해야 할 것은 매일 우리를 도와주시는 것만이 다가 아닙니다.
우리의 어떤 감사로도 갚을 수 없는 계산이 안되는 축복을 우리가 받았다는 것을 다 아시죠?
오늘 본문에서 바울사도는 그것을 감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우리는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망에서 완전 승리를 얻었고 영생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이런 위대하고 근본적인 신앙의 진리들을 단단히 붙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땅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관심은 어쩔 수 없이 세상 쪽에 기울게 되어 있습니다.
신앙도 당장 필요한 축복과 성공을 구하는 게 우선일 수 밖에 없는 것이죠.그런데 세상이 그렇게 우리가 원하는 대로 살아지지는 않잖아요?
인생이 어디 그렇게 간단합니까?
오늘 이 편지를 고린도교회에 보내는 바울도 상황이 녹록치 않습니다.
자신이 개척했던 고린도교회가 신앙적 혼란과 성적인 범죄와 성도간의 법정 다툼 등으로 어디부터 손을 대야할지 모르는 지경에 빠져 있었습니다.
게다가 바울사도가 양육했던 성도들이 그를 의심하며 사도의 자격이 없다며 수군거리고 있다는 소식까지 들려옵니다.
우리가 다 이런 죄인들과 어울려 살아가고, 나 역시 다를 바가 없는 데 어떻게 그림같이 아름다운 삶만 펼쳐지겠습니까?
신앙생활이 세상에서의 안전과 형통을 보장해야 한다는 생각이라면 ‘왜 이런 일이 나에게 생기지?’ 하는 일들을 만날 때 답이 없습니다.
우리의 목적이 자꾸 이 땅의 문제에만 머문다면 원하는 대로 되지 않을 때믿음 전체가 흔들리고 파선할 수 있습니다.
정작 가장 중요한 구원에 대해 무심했기에 신앙의 알맹이를 놓친거죠.
그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알곡과 가라지의 비유이고 결말은 엄청난 차이를 만들어 냅니다.
그래서 오늘 추수감사절에 한 해 동안 주신 생활 속의 은혜와 인도에도 진심으로 감사드리지만 그 보다 더 위대하고 근본적인 은혜에 대해서 생각하며 감사하려고 합니다.
구원에 대한 중요한 원리들을 들을 때, 종교적인 교리인가보다고 무심히 들으시면 안됩니다.
이런 진리들은 우리와 우리 가족들의 영원한 생애를 결정지을 가장 귀중한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영적인 진리들을 자꾸 들어서 완전히 이해가 되고 나 자신에게든, 또 누구에게든지 우리의 믿음에 대해 자신 있게 설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제가 언제 말씀드렸을 것입니다.
교회 뒤에 재원수퍼에 우유를 사러 갔더니 거기 어르신이 불경을 빽빽이 볼펜으로 기록한 공책을 놓고 열심히 외우면서 장사를 하는 것을 보고 제가 깜짝 놀랐습니다.
우리가 믿는 기독교의 진리는 정신수양 정도가 아니라 영생을 얻는 길인데 성도들이 성경에 무지하고 무관심한 것이 한탄스러운 일입니다.
우선 본문에서 우리는 몇 가지 영적인 진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즉 이 본문은 사망과의 싸움에서 우리가 승리를 얻었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매일 생존에 대한 싸움을 하고 있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그것은 사망과의 싸움이기도 합니다.
생존을 위한 것들이 없으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이죠.
사람들이 살아간다고 하지만 사실은 죽음이 이미 정해진 삶을 살아가는 것이니 생각해보면 인생이 참 안쓰럽고 서글픈 일입니다.
사실 사는 게 사는 게 아닌 것이죠.
그러나 마치 죽지 않을 것처럼 생각하며 사람들이 태연히 사는 걸 보면 그것도 참 아이러니입니다.
특히 젊었을 때는 죽음과의 싸움 따위는 생각지도 않고 살죠.
그런데 여명이 점점 적어지면 자연히 죽음을 더 자주 생각하게 됩니다.
사람에게 감춰 둔 가장 근본적인 두려움은 죽음입니다.
죽음에 초연한 듯 보이지만 죽음의 그림자가 조금이라도 느껴지면 한순간에 공포심에 사로잡힙니다.
건강검진 결과 암이라는 암시를 받는 순간, 앞이 캄캄해지죠.
가족들을 멀리 떠나보내거나, 심지어 식구들이 연락이 없이 늦게 들어오기만 해도 사람들은 죽음의 냄새를 떠올리며 안절부절 하게 됩니다.
사람의 생명이 끊어지고, 살아있던 육체가 썩어지는 모습은 인간을 경악하게 합니다.
그러나 육체가 소멸된다는 것도 두려운 일이지만 죽음 다음에 벌어질 사후 세계에 대한 근본적인 두려움이 더 큽니다.
이런 숙명적인 죽음에 대항 해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이 죽음과 싸워 이길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바울사도는 우리가 이 사망과의 싸움에서 이겼다고 합니다.
‘단지 죽음도 두렵지 않다’ 가 아닙니다.
사망을 이기는 영원한 생명을 지금 우리가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사망과의 싸움에서 승리를 확신하는 이유는 사망이 저격하는 것은 ‘죄’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죄’가 없으면 사망이 우리를 쏠 수가 없다는 것이죠.
죄가 없는 인간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니 어떤 인간도 사망과 싸워 이길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분명히 죄를 짓는 우리가 사망을 이길 수 있다는 것입니까?
바울사도는 본문에서 분명히 이기는 방법을 말씀합니다.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이 싸움에 대한 승리는 죄인인 우리가 싸워서 얻은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으로 인해 하나님께 인정받은 승리라는 것입니다.
죄인인 우리가 무죄하게 된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대신 짊어지고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 죄는 이미 예수님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순간 다 계산이 끝났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맡으셨는데, 하나님도 우리에게 또 죄의 책임을 물으실 수 없습니다.
그러니 사망이 더 이상 죄 없는 우리를 겨냥할 수 없는 것입니다.
물론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에게는 여전히 죄의 부패성이 남아있어서 끊임없이 죄를 창출해 냅니다.
우리에게는 평생 이 부패성에서 나오는 죄와의 싸움이 있습니다.
또 우리가 사망을 이겼지만 우리 육체는 죄로 인해 이미 사망선고를 받고 태어난 상태입니다.
이미 태어나면서부터 죽음이 진행되게 되는 것이기에, 우리 몸은 때가 되면 죽고 부활한 몸으로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망을 이미 이겼다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숨이 멎는 순간에도 두려움 없이 죽음이라는 문턱을 가볍게 넘어 영원한 우리의 처소인 빛나는 천국으로 발을 들여놓는 것입니다.
거두절미하고 이 원리가 다 이해되지 않는다 해도 성도들의 의연한 죽음이 이 사실을 입증해줍니다.
다들 이젠 죽음이 두렵지 않으시죠?
이 편지를 쓴 바울사도 자신도 고린도 후서에서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5장 8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
저희 가족들이 두어 시간 정도 어머니의 임종 모습을 지켜보게 된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그런데 임종하시는 모습을 지켜보며 어머니께서 사망을 이기셨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투병 중에도 죽음에 대해 담대하셨지만 돌아가시는 순간까지 죽음이 어머니를 사지로 몰고 가는 그런 두려움이 전혀 없었습니다.
육신의 의식은 혼미하고 점점 사그러들었지만 분명히 믿어지는 것은 어머니의 거듭난 새 생명과 인격은 조금도 변하지 않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서 영화를 얻으셨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오늘 진짜로 감사해야 할 것은 우리와 가족들이 이렇게 사망에서 영원한 승리를 얻었다는 사실 아니겠습니까?
이런 사실을 확신하며 우리는 더욱 견실하여 흔들리지 말아야 한다고 바울사도는 강하게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그런데 이 말씀 안에는 우리가 흔들릴 수 있다는 의미가 들어있습니다.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흔들렸듯이 우리 때로 흔들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걸어간 이 길 끝에 우리가 믿고 있는 것이 없으면 어떻게 하냐는 의혹이 덜컥 들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의혹에서 두려운 것은 내가 만일 속았다면 억울해서 어떡하냐는 게 아닙니다.
우리에게 혹시 흔들림이 있다면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런 의혹은 아닙니다.
만일 정말 죽음으로서 모든 것이 끝이라면 그 허망함이 두려운 것입니다.
그러나 절대로 그런 일은 없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이렇게 믿음에 견실하려면 믿음의 근거가 확실해야 합니다.
무엇을 믿는지 모르는 막연한 믿음은 위기가 오면 망설이다 더 확실한 현실의 세계를 선택할 수밖에 없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는 것은 성경이 아니면 누구의 설득으로도 진짜 믿음이 안 생긴다는 뜻입니다.
성경 말씀 안에는 우리가 알아야 할 가장 귀중한 진리들이 용솟음치고 있습니다.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진실한 사랑, 피가 뚝뚝 떨어지는 십자가가 성경 속에 있습니다.
성자하나님을 대신 심판하셔야 하는 성부하나님의 신체를 도려내는 것보다 더한 아픔과 그래도 독생자를 심판해야 하는 창조주의 장엄한 사랑이 성경속에 있습니다.
예수님이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을까하는 의문이 드십니까?
그렇다면 요한복음을 보십시오.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날 밤까지 겁에 질린 제자들을 말씀으로 거듭거듭 위로하시고, 체포되지 않도록 보호하시는 그 주님이 베드로를 얼마나 사랑하시고 요한과 제자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 지 그냥 가슴으로 느껴집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이 제자들이 죄와 사망에 매여 죽는 것을 모른 채 하시겠습니까?
예수님은 그런 분 아니십니다.
그리고 분명히 말씀하시길 그 사랑이 제자들의 말을 듣고 믿게 될 모든 성도들에게도 동일하다고 하셨다니까요.
이 사실들을 성경을 읽고 묵상하지도 않는 데 어떻게 은혜를 알고, 감사가 나오겠습니까?
재원슈퍼 어르신이 불경을 늘 외우시듯이 성경을 끼고 사셔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진리에 굳게 서서 흔들리지 않는 견실한 믿음을 갖게 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주님은 우리에게 가장 보람있게 우리 삶을 살도록 격려하십니다.
항상 주의 일에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우리에게 십자가에서 부어주신 하나님의 사랑과 다음 세상에 대한 확신이 생기면 비로서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가 보입니다.
내 삶이 목적과 패턴이 과거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면 아직 구원에 대해 확신이 없다는 뜻입니다.
세상에서 열심히 살아내고, 남들보다 성공하고, 행복한 것은 당연히 우리에게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내세에 대한 소망이 확실하게 되면 세상에 잠시 있다 없어질 것을 위해 내 귀중한 생애를 다 쏟아 붓는 게 아까운 생각이 듭니다.
세상에 태어나 123층 건물을 세웠다 한들 그것이 뭐가 어떻다는 것입니까?
아이티 강진이 난 모습을 보니 인간이 구축한 모든 문명이 단 한 개도 쓸 수 없이 다 파괴된 것을 보았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우리에게 인간이 세운 모든 것이 불에 타 없어질 것이라고 못을 박습니다.
우리가 소유한 것들도, 우리의 수명도, 다 영원하지 않습니다.
요즘 수저론이 나와서 금수저 물고 태어났냐 흙수저냐 하는 말이 나오더니 이제 금자식이냐 흙자식이냐는 말도 나옵니다.
옛날엔 다 금쪽같은 자식들이더니 이젠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흙자식이란 말까지 나오는 것은 점점 돈이 지배하는 세상이 되어가는 것을 말해줍니다.
금수저 물었으면 뭐하고 흙수저 물었으면 뭐하겠습니까?
하나님이 우리 각자에게 주신 생애와 일터에서 최선을 다해 주님을 따르며 하나님나라를 위해 주신 작은 사명이라도 충성되게 감당하면 123층 빌딩을 세우고 여전히 노욕을 부리는 회장님보다 하나님 앞에서 더 낫습니다.
우리의 수고는 결코 헛되지 않다고 오늘 분명히 확증해 주시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어쩌면 올해 원했던 것과 너무나 다른 상황을 만나 힘든 시간들을 버텼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으십시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하시는 진실하신 아버지십니다.
혹시 우리의 실수와 잘못으로 일이 망가졌어도 그 상황에서 최상의 결과로 또 우릴 인도해 주십니다.
우리 형편이 어떻고 미래가 어떨지에 상관없이 오직 하나님을 바르게 믿고자 따랐더니 모든 것을 책임져주셨다는 것이 추수감사절의 유래입니다.
그게 다가 아닙니다.
배고픔과 추위와 두려움에 떨며 하나님을 따라 갔던 그들의 자손이 세계 최강국인 미국을 세웠습니다.
힘든 가운데도 하나님을 믿고 예배하는 삶을 살아온 우리에게도 한 해 먹고살 수 있도록 풍성한 복을 주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그렇게 주님을 따르는 우리와 가족들을 하나님께서 또한 주의 나라를 위해 날마다 복되고 아름답게 사용하여주시리라 믿습니다.
그리고 오늘 말씀대로 가장 큰 은혜인 사망과 심판을 이긴 영원한 승리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영광을 돌립니다.
2015년11월15일 주일설교 남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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