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수감사절설교모음

추수감사주일설교 : 요셉의 감사인생 (창세기50장14절-21절)

남수연 2017. 11. 9. 11:00

오늘 추수감사 주일 예배를 통해 올 해도 변함없이 우리를 인도하시고 축복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영광을 올려 드립니다.

최근에 나온 경제 지표들을 보면 지난 일 년 성도님들의 가정들도 다들 힘들었을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며칠 전 통계청과 금감원에서 내놓은 가계금융 현황을 보면 우리 국민들의 살림살이가 점점 더 팍팍해져가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 국민 1가구 당 빚이 평균 5994만원이라고 하더군요.

버는 돈의 20~30%를 원금과 이자를 갚는 데 사용하다보니 쓸 게 부족할 수 밖에 없는 것이죠.

특히 가구주가 은퇴한 가정에서는 생활비에 여유가 있다고 대답한 비율이 고작 6.7%였다고 합니다.

이런 지표들이 우리 가정의 재정 압박이 심해졌다는 걸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 일 년을 꾸려 오느라 우리 모두 참 수고가 많았다고 스스로에게 격려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런 힘든 상황들을 이겨내며 소망을 갖고 잘 견디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가족들의 질병 중에 위로해 주시고, 직장생활을 지켜주시고, 매일의 문제 속에 도와주시고 인도해 주신 하나님이 계셔서 오늘 우리가 평안 가운데 예배드리는 줄 믿습니다.

오늘은 요셉의 생애를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말씀을 나눌 때, 미처 깨닫지 못했던 하나님의 일하심을 더 깊이 알게 되길 원합니다.

또 아직 어렴풋한 길을 더듬어 가고 있는 우리의 현실을 믿음으로 해석해 주시고 하나님을 더욱 신뢰하게 되는 은혜를 주시길 원합니다.

본문을 잘 이해하기 위해 먼저 요셉의 생애를 잠깐 살펴보겠습니다.

요셉의 일대기는 아버지 야곱의 네 아내와 그 밑에 열 두명의 이복 형제들이 함께 살아가는 파란만장한 가정사 속에 전개됩니다.

우리 나이 때만 해도 이런 복잡한 가정사가 없는 집이 거의 없었습니다.

요셉은 어린 나이에 친어머니 라헬이 죽는 아픔을 겪었습니다.

그리고 세 명의 계모와 열 명의 이복형들 밑에서 자랐습니다.

어린 요셉의 삶이 시작부터 만만치가 않죠?

게다가 아버지 야곱은 사랑했던 라헬의 분신인 요셉을 병적으로 위했습니다.

요셉에게만 대놓고 채색 옷을 지어 입히며 편애를 했을 정도입니다.

눈치가 빵점인 아버지입니다.

요셉의 채색 옷에 얼마나 온 가족의 증오의 시선이 꽂혔겠습니까?계모들의 눈엔 여전히 망령처럼 나타나는 죽은 라헬을 느끼며 꺼지지 않는 질투의 불을 활활 타오르게 했을 것입니다.

열 명의 형제들에겐 채색옷을 볼 때 마다 아버지의 편애로 인한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아픔이 되살아났을 것입니다.

아버지 외에는 모든 가족들에게 미움을 받아야 했던 요셉의 유년시절이 이해가 되시죠?

아버지가 나가고 나면 온 종일 가족들의 시기와 분노의 눈총을 받으며 보냈던게 요셉의 삶이었습니다.

요셉이 꾼 꿈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어느 날 요셉이 꿈을 꾸었죠.

형들과 밭에서 추수를 하는 데 형들이 묶어 놓은 곡식단이 자기가 묶어 놓은 곡식단을 둘러싸고 절을 하는 꿈이었습니다.

오죽하면 형들의 곡식단이 다 자기에게 머리를 숙이는 꿈을 꾸었겠습니까?

물론 하나님께서 장차 요셉을 통해 이루실 일을 보여주신 꿈이지만 요셉이 그 꿈에 강렬하게 사로잡힌 것은 이런 억압된 배경이 있기 때문입니다.

어느 집이나 안심하고 편하게 쉬어야 할 보금자리에 가시방석이 깔려있는 것이 서글픈 현실입니다.

세명의 계모나 나머지 열명의 형제들이나 아버지 야곱이나 그 사람 입장에서 풀어보면 다 그들도 상처받고 억울한 생애를 살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현대라고 해서 뭐가 달라진 게 있습니까?

사람 사는 게 형식만 좀 바뀔 뿐이지 내면의 삶은 언제고 똑같은 것이죠.

요셉의 기구한 생애는 여기서 끝이 아니었습니다.

결국 시기한 형들의 손에 죽을 뻔한 어처구니 없는 아픔을 경험합니다.

이 위기에서 간신히 죽음은 모면했지만 요셉은 멀리 타국인 애굽에 보디발의 집에 종으로 팔려가게 되었습니다.

거기서 겨우 주인에게 인정받고 살만하다 싶을 때 난데없는 추문에 휘말리게 되죠.

보디발의 아내가 끈질기게 요셉을 유혹하다 뜻을 이루지 못하자 원한을 품고 요셉을 성추행범으로 내 몰았던 것입니다.

종도 모자라 이젠 죄수의 몸으로 감옥에 갇히는 신세까지 되고 말았습니다.

이런 상황이라면 이미 그 인생은 처참히 짓밟히고, 자취도 없이 사그러 들어야 마땅했을 것입니다.

누가 이런 상황에서 다시 일어설 소망을 가질 수가 있겠습니까?

조금만 낙심될 상황이 되도 다 포기하고 싶고 도망치고 싶은 게 우리 마음일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 정도 되면 이젠 포기하고 망가지고 싶다는 생각도 들만하지 않겠습니까?

젊은 요셉이 어떻게 이런 지독한 처지를 이겨낼 수가 있었을까요?

요셉이 이런 바닥까지 추락한 삶에서 애굽의 총리가 되기까지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알고 싶지 않으십니까?

한 사람의 생애가 요셉처럼 하나님과 사람 앞에 완전하게 세워지려면 그냥 운명이 이끄는 대로 살아서 얻어지는 게 절대로 아닙니다.

우리가 삶의 위기와 어려운 상황들을 운명으로 받아들이며 끌려가거나, 아니면 내 힘으로 운명에 맞선다면 요셉과 같이 아름답게 완성된 인생을 이뤄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거창하게 국무총리를 꿈꾸고 재벌의 성공신화를 좇자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요셉의 삶의 방식을 살펴보며 우리도 하나님께 부여받은 우리 인생의 본분을 따라 충실하게 살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경영하심에 일치되는 삶을 살 때만이 우리가 이 땅에서 크던 작던 아름답고 성공적인 열매를 거둘 수 있기 때문입니다.

먼저 요셉의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반응이 어땠을지를 본문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인생의 결과는 우리 앞에 있는 문제와 현실에 대한 우리 반응의 결과이지 않습니까?

본문은 아버지 야곱이 죽은 뒤 요셉을 죽이려하고 팔아먹은 형들이 보복을 당할까 두려워 요셉을 찾아온 내용입니다.

아버지 야곱이 유언한 것처럼 빙자해 자기들의 죄를 용서해주라고 했다며 요셉에게 애걸복걸 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19절에 보면 이런 형들에게 요셉이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이 말 속에는 내 감정이 어떻고 내 생각이 어떻든 간 나의 주권자는 하나님이시란 강한 신념이 담겨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삶이 하나님의 소관이시라는 것입니다.

눈물골짜기를 지나며 굴곡의 삶을 살며 여기까지 온 것이 남의 탓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와 뜻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일어난 이 모든 일들, 이 현재의 상황들이 다 하나님의 뜻 안에 있는 줄 믿습니다.

형들이 과거를 사죄하며 비굴하게 머리를 조아리고 들어올 때, 자기의 아량을 과시하며 용서할 수도 있었겠죠.

그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신 분이 하나님이시게 너무나 분명한 데 하나님이 받으실 영광을 절대로 내가 취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을 내가 한 것처럼 도취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보디발의 아내가 유혹할 때도 요셉이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

아무리 사태가 위급하고 내게 불이익이 닥쳐올 게 뻔하다 해도 사람이 아닌 하나님의 판단하심이 요셉의 행동과 반응에 기준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때로 작은 득실을 놓고도 우리에게 교묘하게도 내 입장에 유리하게 말하고 거짓되게 행동합니다.

요셉의 삶의 방식에서 꼭 배워야 할 것은 크고 작은 모든 상황에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묻고 따랐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오늘 점심은 뭘 먹을까요, 짜장면 먹을까요, 짬뽕 먹을까요

이것을 물어야 합니다.

이렇게 사소한 것에 하나님의 뜻이 있는 지 없는 지를 묻고 하나님을 인정해가는 것이 결국 크고 중대한 일에 하나님의 뜻을 알고 따르는 훈련이 되는 것입니다.

요셉이 범사에 하나님께 묻고 하나님을 그의 삶의 최고의 자리에 모셨을 때 하나님도 누가 봐도 알 수 있게 요셉과 함께 하셨습니다.

보디발이 이스라엘에서 잡혀 온 노예 소년을 보니 뭔가 다르더라는 거예요.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의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

그래서 자기 집의 모든 재정을 다 요셉에게 맡겼다고 하지 않습니까?

또 성추행범으로 감옥에 갇힌 중에서도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십니까?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고 그에게 인자를 더하사 간수장에게 은혜를 받게 하시매 간수장이 옥중 죄수를 다 요셉의 손에 맡기더라

하나님께서 종살이 중에도 함께 하셔서 범사에 형통하게 인도해 주셨고 감옥살이 중에도 함께 하셔서 범사에 형통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이 때로 남에게 비굴할 정도로 낮아질 수도 있고, 억울한 모함을 받고 감옥 같은 환경에 갇힐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평범한 일상에서 부터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행하고 예수님과 꾸준히 동행할 때 주님도 어느 상황이건 함께 하시고 도와주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어떤 악조건 속에서도 형통하게 되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방이 다 침통한 환경 속에 갇히셨습니까?

하나님을 바라보시고 요셉처럼 내 삶의 주권을 주님께 드리시기 바랍니다.

감옥 안에서 요셉과 함께 하시고 형통하게 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답답한 환경에 돌파구를 여시고 반드시 우리를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또 하나님께 대한 요셉의 신앙관은 20절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하나님은 악을 선으로 바꾸실 수 있는 분이라고 요셉은 분명하게 고백합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누가 나를 악하게 대해도, 어떤 악조건이 와도 선으로 바꾸실 수 있습니다.

그러니 뭐가 두렵겠습니까?

이건 정말 최악이다, 더 이상 소망이 없다라고 생각했는데 더 좋은 것을 하나님이 예비해 놓으셨던 놀라운 경험이 정말 저에게는 너무나 많습니다.

그러니 현실에 당장 실망하고 낙담할 이유가 없는 것이죠.

악을 선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을 믿으시면 하나님은 반드시 그렇게 행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자식들의 앞길에 장애물을 치워주고 좋은 삶을 살아가도록 도와주고 싶듯이 하나님께서는 그보다 더 우리를 복된 삶으로 인도해 주길 원하십니다.

이 사실을 아는 요셉은 겨우 안정된 삶에 폭풍이 몰아닥치고 수렁으로 미끄러 떨어졌을 때도 하나님을 의심 없이 의지했을 것입니다.

요셉의 일대기를 읽어보면 어떤 순간에든 원망하고 불평하고 좌절했다는 단어나 그런 낌새를 한개도 찾아 낼 수가 없습니다.

요셉이야말로 감사의 사람이었을거라고 생각합니다.

번번이 위기에서 건져주시고, 악을 선으로 바꿔주신 하나님이 지금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도 그렇게 하실테니 감사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죠.

어려운 시기에도 낙심하거나 불만하지 않고 하나님께 감사하고 평안한 요셉을 볼 때 사람들이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심을 느낀 것입니다.

어려운 중에도 감사하고 평안한 성도를 볼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고 계시다는 것을 분명히 느끼게 됩니다.

억울하고, 슬퍼하며, 분노해야 마땅한 순간에 믿음으로 이기고 그런 상황을 감사하는 사람을 볼 때, 그때야 말로 하나님이 그 사람과 가까이 계시고 도와주신다는 게 제일 잘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모든 어려운 상황을 감사할 상황으로 바꾸어 주시는 것입니다.

과연 요셉이 노예로 팔려간 것이, 감옥에 간 것이 그를 애굽의 총리로 세우는 가장 빠른 코스였다는 것이 나중에 증명이 되지 않습니까?

그래서 추수감사절인 오늘 우리가 요셉에게서 배울 것은 고난을 감사로 해석하는 요셉의 능력입니다.

악을 선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을 믿고 감사하며 현재의 모든 어려움을 잘 인내할 때 하나님은 지금의 모든 악도 선으로 바꾸어주시고 형통하게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다음은 요셉이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자기의 주권자로 삼은 사람은 사람을 대하는 태도와 방식도 달라져야 맞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올바른 데 사람 앞에 비난을 받을 수는 없습니다.

17절을 보면 형들이 요셉을 찾아와 자신의 안위를 애걸합니다.

아버지가 죽기 전에 네 형들이 네게 악을 행하였을지라도 이제 바라건대 그들의 허물과 죄를 용서하라 이렇게 말했으니 아버지를 봐서 살려달라는 것입니다.

이 때 요셉이 그들이 하는 말을 들을 때에 울었다고 합니다.

운다는 것은 그들의 처지를 공감하고 동정한다는 말입니다.

죽은 아버지까지 팔아가며 살려는 몸부림이 요셉에게 느껴졌다는 것입니다.동생을 팔아먹은 죄인들이 목숨을 부지하고자 뻔한 거짓말을 꾸며대는 모습이 오히려 측은해 눈물이 났다는 것입니다.

요셉은 형들을 안심시키고 간곡히 위로했다고 본문에서 말씀합니다.

우리가 다 이런 예수님의 긍휼하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우리에게도 긍휼한 마음을 원하십니다.

야고보서 213절은 더 적극적으로 말씀합니다.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몇 년 전 세계가치관 조사에 따르면 한국인의 공감 능력이 바닥수준으로 나타났다고 합니다.

관용하는 마음과 타인을 존중하는 마음을 자녀들에게 가르치고 있냐는 질문에 대해 조사국 중 최하위를 차지했다고 합니다.

애나 어른이나 관대함이나 남을 존중하는 마음, 남의 고통에 공감하는 것에 별 관심이 없는 것이 심각한 수준이라고 합니다.

다른 사람의 처지를 동정하고 공감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게다가 요셉과 같이 나를 괴롭게 하고 힘들게 한 사람의 입장을 공감하고 용서하는 것은 더욱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진정한 용서와 긍휼의 마음이 없다면 하나님께 대한 감사는 진심이 될 수가 없습니다.

나 역시 죄인이고 하나님께 용서받았다는 것을 깊이 깨달은 사람만이 다른 사람을 진심으로 용서하고 진정한 감사를 드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추수감사예배를 드리는 우리들에게 주님은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형제와 화해하고 와서 예배를 드려라.

그래야 너의 예배가 진심이 될 수 있다.

우리의 원한과 오해와 불신과 억울한 감정 안에 마귀가 처소를 삼고 있는 데 어떻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온전한 예배를 드릴 수 있겠습니까?

작은 일에도 원수를 맺으려 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억울한 마음, 풀지 않은 원한, 남의 선의를 묵살하고 잘못한 것만 확대해석하는 마음에 하나님이 축복하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또 지난 일 년 사람들과 부대끼며 살다 억울한 일도 당하고 차별과 냉대를 당한 순간도 있었을지 모르겠습니다.

나의 선의를 악으로 대한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 땅의 피붙이, 혈육인 가족들이 나를 의심하고 모함하고 따돌리는 아픔을 겪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우리는 배신하는 세상에서 이런 고통을 감수하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올해 추수감사절을 맞이하며 먼저 내게 실수하고 나에게 상처를 주었던 사람들의 문제를 깨끗이 해결하길 원합니다.

무조건 용서하시길 축원드립니다.

예수님께서 원수도 사랑하라고 하셨고, 하나님께 원수처럼 행동했던 우리의 죄악을 십자가에서 다 속죄해 주셨습니다.

또 우리도 알게 모르게 가족과 이웃에게 상처를 주고 심지어 가슴에 비수를 들이대며 살고 있는 똑같은 죄인들입니다.

그런 우리의 죄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두 팔을 벌리고 다 용서해 주셨기에 우리가 밤에 안심하고 두 발을 뻗고 잠드는 것입니다.

먼저 용서를 경험한 사람만이 다른 사람을 진정으로 용서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요셉처럼 긍휼한 마음과 동정심을 가질 때 하나님도 우리를 긍휼히 여기셔서 우리를 수렁에서 반석으로, 감옥에서 성공으로, 악이 선으로 바뀌는 은혜로 인도하시리라 믿습니다.

마지막으로, 오늘 말씀에서 이런 교훈이 전부가 아닙니다.

요셉의 생애와 인품을 통해 장차 인류를 구원하실 그리스도의 빛나는 파편을 골라낼 수 가 있다는 것이 구약성경에서 발견할 수 있는 큰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실 메시야를 보내실 계획은 창세기부터 서서히 원대하게 이뤄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구약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을 통해 그리스도의 이미지를 이스라엘백성들에게 점진적으로 심어주셨습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이 존경하고 자랑하는 아브라함이나 모세나 다윗 같이 이스라엘을 구한 선조들을 통해 장차 인류를 구속하실 예수님을 그들 안에 이미지화시키시길 원하셨던 것이죠.

왜요? 그리스도가 오셨을 때 잘 알아보라고요.

오늘 요셉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그런 복선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20절을 보면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이 부분은 요셉의 형제들이 요셉을 죽이려 했고, 20에 요셉을 팔아넘긴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을 죽이려 했던 동족들과 은 30에 주님을 팔아먹은 유다의 사건을 예표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20절에서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속죄를 통해 수많은 백성들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신 것을 예표하는 것입니다.

21절에 보면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어떻습니까?

기른다는 단어가 절묘하지 않습니까?

그리스도께서 양의 목자가 되셔서 우리를 기르신다는 예표 아닙니까?

하나님은 신실한 성경의 역사적인 인물들을 통해 예수님의 아름답고 선하신 인품과 구속의 사역을 지속적으로 나타내시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요셉을 통해 이렇게 우리 예수님의 인격의 작은 파편을 찾아낸다면 그것이 그 무엇보다 가장 큰 은혜인 줄 믿습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지구상 인간의 다양한 삶은 이 순간 공존하고 있습니다.

아프리카의 내전국에는 맨발에 동생을 업은 다섯살짜리 여자아이가 숯더미를 머리에 이고 팔러가는 엄마를 따라 여섯시간 거리를 걸어갔다 돌아오는 눈물겨운 고단한 삶이 지금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우리나라 한 유명 방송인의 하루를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일어나야 되나 말아야 되냐로 네 시간을 고민한다는 겁니다.

겨우 일어나서는 두 시간을 멍 때리고 있다 텔레비젼을 시청한다는 말을 듣고 너무나 충격을 받았습니다.

토크쇼의 대부라고 할만한 방송인의 권태로운 인생입니다.

인생이 곤고하고 부대끼지 않으면 그자리를 즉시 권태라는 놈이 차지합니다.오죽하면 멍때리기 대회라는 것이 지난 달에 어디서 있었다고 하더군요.

며칠 전 병원에서 우연히 간호사들이 주고 받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진짜 삶의 갈증과 메마름이 잔뜩 묻어나는 간호사가 하는 토해내는 말은 , 내 인생 왜 이렇게 의미없냐, 나 정말 잠수타고 싶다.’ 라는 말이었습니다.

삶의 목적과 의미를 아직 찾지 못한 사람들의 허무와 영적인 빈곤은 공허한 블랙홀과 같은 것입니다.

무언가에 빠졌다가도 정신이 들면 몰려오는 허무감과 우울감에 또 목이 마른 것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감사합니까?

우리의 고생은 그래도 견딜만 합니다.

의식주 문제로 너무 벼랑에 내 몰리지 않았고, 전쟁의 포화를 두려워하지 않는 평화로운 삶을 누리고 있지 않습니까?

멍 때리고 살만큼 무의미한 인생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고 따르며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함께 가는 삶이 얼마나 보람 있고 흥미진진합니까?

오늘 이렇게 우리를 축복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영광을 올려드립니다.

한편 하나님께서도 그래, 너희도 잘 견디고 고생하며 수고 많았다, 참 잘 해 냈다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정말 잘 해 오셨습니다.

오늘 요셉이 극한 고난 중에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완전한 계획대로 설 수 있었던 것을 우리가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요셉의 절대적인 신뢰와 순종, 그리고 감사하는 삶이 우리에게도 있길 원합니다.

그리고 우리를 관대하게 대하시고 긍휼히 여기신 예수님의 은혜를 아는 만큼 우리도 내게 해를 끼치고 악하게 대한 사람들을 용서하고 화해하는 추수감사절이 되길 원합니다.

그러할 때 모든 악을 선으로 바꾸시는 하나님께서 사방이 막힌 감옥 같은 환경일지라도 우리를 이끌어주셔서 넓은 곳에 두시고 영광스럽게 하나님의 뜻을 세우게 하시리라 믿습니다.

2014.11.16 주일설교 남수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