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수감사절설교모음

추수감사주일 설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누가복음17장11절-19절)

남수연 2017. 11. 9. 10:42

오늘 말씀은 주님의 고향 갈릴리에서 사마리아를 지나 예루살렘으로 입성하는 도중에 일어난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사마리아는 이스라엘 포로생활 중 강제 이주해 온 외국인들로 인해 순수 유대 혈통을 지키지 못한 곳입니다.

혈통을 중요시 여기던 유대인들에겐 경멸의 대상이었다는 것을 알고 계실 것입니다.

예수님이 자라셨고 주 활동무대였던 갈릴리 역시 형편이 사마리아와 별로 다를 바 없는 곳입니다.

이곳도 이주해 온 외국인들이 유대인보다 더 많아 이방의 갈릴리라고 불리우며 유대인들에겐 멸시의 대상이 되었던 곳이죠.

예수님이 갈릴리 지방에 속한 나사렛 마을에서 자라셨습니다.

나다나엘이 빌립에게 예수님이 여기 출신이란 말을 듣고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말한 걸 보면 사람들의 인식이 어땠는지 잘 알 수 있죠.

오늘 사건이 일어난 장소가 바로 이렇게 소외되고 보잘 것 없는 마을입니다.

게다가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끔찍한 나병에 걸려 거기서 조차 살지 못하고 쫒겨난 비참한 환자들입니다.

별 볼일 없는 초라한 시골 마을에 그나마 소박한 일상의 기쁨마저 다 빼앗기고 마을 밖을 서성이는 나병환자들이라니 생각만 해도 가슴이 답답해집니다.

그러나 인생이 힘겨울 때 우리 삶도 이에 못지 않단 생각이듭니다.

때론 헤어나기 힘든 깊은 수렁 속에 빠져 남들 누리는 평범한 행복조차 내게는 멀게만 느껴집니다.

오늘은 추수감사주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올해 우리에게 주신 축복을 헤아리며 마음 깊은 곳에서 감사의 예배를 드리기 위해 나오신 줄 믿습니다.

그러나 어쩌면 지금도 우리를 무겁게 짓누르는 근심과 염려에 눌려 감사의 마음이 깊은 바닥에 가라앉아 있는지도 모릅니다.

어쩌다 보니 사방이 막힌 벽에 갇혀 뛰어넘을 힘도 능력도 없이 털썩 주저앉아 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오늘 추수감사주일을 맞아 우리의 힘든 인생일지라도 애써 감사라는 마중물 한바가지를 하나님께 바치길 원합니다.

그것으로 하나님은 메마른 우리 심령과 긁어 낼 행복이 말라버린 것 같은 우리 삶에 만족과 기쁨의 생수를 터져나게 해 주실 줄 믿습니다.

그리고 시편 1829절 다윗의 고백과 같이 내가 주를 의뢰하고 적군을 향해 달리며 내 하나님을 의지하고 담을 뛰어넘나이다 라는 담대한 믿음을 회복하시길 간절히 축복드립니다.

하루 하루 죽음의 공포와 죽음보다 더 나쁜 절망을 견디며 살아야 했던 사람들의 꿈같은 회복의 이야기를 주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들려주길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말씀을 통해 격려해 주시고 용기를 주실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지난 한 주간도 우리가 힘들고 지치게 살아온 것을 하나님아버지께서 잘 아십니다.

성령께서 말씀을 통해 걱정으로 지친 우리의 마음과 시름을 위로해주시고 새 힘을 주시길 간절히 소원합니다. 아멘.

오늘 본문에서 절망적인 인생에도 해답이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가도 가도 끝이 없을 것 같은 가시밭 인생길을 걷게 되었을 때 우리는 그 이유를 쉽게 이해할 수 없죠.

그들이 천형의 질병에 걸렸다는 것을 알았을 때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절망으로 주저앉아 소리 쳤을 것입니다.

왜 하필 저입니까?

감당하기 버거운 문제 앞에 좌절할 때 우리 입에서 터져 나오는 탄식과 원망도 그것입니다.

제가 남들보다 더 크게 잘못한 게 뭐가 있다고 저 한테만 이런 고생을 하게 하시는 겁니까?

우리는 그냥 평범하고 소박한 작은 행복을 누리며 살길 원하는 데 큰 욕심을 부리는 것도 아니 데 왜 유독 내게만 인생이 이렇습니까?

그들도 비록 천대받는 척박한 시골에 태어났지만 하루 하루 고기를 잡고 포도나무를 심으며 소박한 삶을 꾸려가고 싶었을 것입니다.

어느 날 그들의 삶에 파고들어 온 무서운 질병은 그 작은 소망 마저 한 순간 앗아갔을테지요.

썩어가는 피부, 잘려 나가는 손가락, 자기의 얼굴이 어딘가에 비취면 소스라쳐 놀라는 무서운 천형의 질병.

죽을 병에 걸렸다해도 살을 비비며 살 던 가족들의 간병과 위로가 마지막 까지 위안과 따스함을 주는 것이죠.

그러나 나병은 발병하는 즉시 가족들과 격리되어 뼈저린 외로움 속에서 서서히 죽어갈 수 밖에 없는 병입니다.

나병에는 단절이란 고통이 따릅니다.

우리나라에 이 한센인 수용시설이 소록도에 있습니다.

한센인 시인으로 알려진 한하운 시인은 가혹한 운명에 몸부림 치며 한센인의 고통을 시로 표현했습니다.

그의 유명한 시 전라도 길을 아시는지 모르겠네요.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숨막히는 더위 뿐이더라 가도 가도 천릿 길 전라도 길 이런 내용입니다.

사랑했던 연인을 한 번이라도 더 보고 싶어 먼 발치에 숨어서 보고 소록도를 향하는 길에 지은 시라고 하죠.

그의 보리피리란 시를 보면 보리피리 불며 삘리리, 인환의 거리, 인간사 그리워 삐리릿 라고 노래합니다.

아무 것도 아닌 그저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평범한 삶을 애타게 그리워 한 한센인의 애환이 묻어납니다.

한 때 소록도 수용시설에서는 한센인 부모들과 자녀들을 격리시키려고 강제로 자녀들을 수용소 밖으로 떼어내기도 했습니다.

환자가 아닌 한센인 자녀들은 강제로 부모 곁을 떠나 미감아보호소에서 생활하다 한 달에 한번 만나게 했다고 합니다.

그것도 길을 사이에 두고 길 양편으로 나눠 서서 눈으로만 부모자식 상봉을 하게 했다니 얼마나 애간장이 탔겠습니까?

지금도 소록도에 살고 있는 한 할머니는 6살 때 부모와 격리되지 않으려고 한센병에 걸렸는 지 확인하려고 바늘로 찌를 때 이를 악물고 고통을 참았다고 합니다.

한센인으로 판정 되 부모와 함께 격리구역 안에서 살려는 것이었죠.

나병은 단절이라는 고통으로 더 견디기 힘든 질병이었습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에게 나병은 또 하나님께서 직접 징계하신 부정한 병으로 간주되었습니다.

민수기 52절에 보면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하여 모든 문둥병 환자와 유출병이있는 자와 주검으로 부정케 된 자를 다 진 밖으로 내어 보내라고 명했습니다.

전염병의 확산을 막는 조치이기도 했지만 하나님께 저주받은 표로 생각했죠.

모세의 누나 미리암이 모세에게 주신 권위에 대항했다 문둥병에 걸렸습니다.

그 때 하나님은 이 일을 아버지가 자식의 얼굴의 침을 뱉은 것에 비유해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나병이 얼마나 치욕적인 병으로 취급되었겠습니까?

비록 왕이라고 할지라도 나병이 발견되면 즉시 격리시켰습니다.

역대하2620절에 보면 주제넘게 성전에 나가 분향을 하려던 웃시야에게 문둥병이 발하고 제사장들이 즉시 그를 쫒아내는 것을 봅니다.

그리고 그는 죽는 날까지 별궁에 살았고 죽은 다음에도 왕실 묘가 아닌 옆에 따로 장사지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나병에 걸렸다는 것은 대놓고 죄인이란 딱지를 붙이고 사는 것입니다.

내가 겪는 육체의 고통도 힘겨운 데 주위사람들 시선은 또 얼마나 큰 고통입니까?

실패 앞에서 좌절한 밤 남들이 날 보는 시선을 생각하면 정말 아침이 오는 게 두렵습니다.

그러나 오늘 그들은 칠흙 같은 무덤 속에 갇힌 그들의 곁을 지나는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누가복음5장에서 이미 주님이 앞 서 나병환자를 고쳐주신 소문이 갈릴리 지역에 파다하게 퍼졌다고 기록합니다.

소문을 들은 그들의 귀가 번쩍 띄고 가슴이 희망으로 두 방망이질 치지 않았겠습니까?

그 분이 자신들을 꿈에도 그리던 간절한 옛날로 돌이켜 줄 수 있으리란 실낫 같은 희망을 품고 예수님이 지나실 마을 어귀를 멀리서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지나는 순간을 놓치지 않고 소리쳐 부르짖으며 긍휼이 여겨달라고 간구합니다.

그 때 정말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던 절망 속 인생이 다시 회복되는 놀라운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우리 역시 영적인 나병에 걸려 하나님과 단절되어 저주받은 인생에서 긍휼히 여기신 주님의 사랑을 만난 줄 믿습니다. 아멘.

그리고 우리 환경이 소망이 끊긴 무덤 속 같을 때라도 주님을 향해 부르짖을 때 주님이 우리를 건져내 주시는 줄 믿습니다.

그들의 결말을 보고나니 비로서 고난의 의미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우리의 고난의 의미도 결말을 보고나서야 볼 수 있습니다.

만일 건강했다면 과연 그들이 예수님을 찾아 나섰을까요?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온 이유도 이런 저런 번뇌와 낙담과 우리 능력의 한계를 인정했기 때문일지 모릅니다.

많은 사람들이 지금도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께 나오고 하나님을 만납니다.

우리의 인생 길에 하나님께 부르짖고 간구할 문제가 생겼다면 하나님께 나와 주님을 만나는 길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모든 문제들을 풀어주시고 우리 입술을 통해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게 하실 줄 믿습니다.

시편 201절은 노래합니다.

환난 날에 여호와께서 네게 응답하시고 야곱의 하나님의 이름이 너를 높이 드시며 성소에서 너를 도와 주시고 시온에서 너를 붙드시리라.

주님 앞에 나아가 곤란한 모든 문제들을 기도하고 응답받는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드립니다. 아멘.

그러나 하나님은 사실 우리의 성공과 실패에 그렇게 비중을 두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반드시 성공하고 잘 되는 것만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는 않습니다.

치유받고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사람은 열명 중 오직 한명 뿐이었습니다.

우리의 고민이 아직 해결되지 않았을 때, 우리의 간절한 소원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감사하는 게 진정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고 영광 돌리는 것인 줄 믿습니다.

소록도에 가면 오동0 국립소록도병원 의사가 있습니다.

그는 조선대 치대를 졸업하고 공중보건의로 소록도에 들어왔다 거기서 간호사를 만나 결혼하고 아이 둘을 낳았습니다.

그리고 소록도에서 16년간 주민들과 별반 다르지 않게 살고 있습니다.

어떻게 이 긴 시간을 소록도에 머물 수 있냐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1580으로 싸우면 누가 이기겠습니까. 저는 여기 떠나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데 이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제가 떠나지 못하도록 기도하네요. 백전백패지요.”

소록도 주민들의 기도 앞에 패배했다며 웃는 오동0의사의 증언대로 소록도 주민들의 뜨거운 예배에 봉사활동 갔던 사람들이 오히려 은혜를 입고 돌아오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조막손으로 박수를 치며 하나님을 뜨겁게 예배하는 그들에게 천형의 질병도 문제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기도하고 노력하며 최선을 다 했는 데 지금 실패했습니까?

그렇다면 그건 하나님 보시기에 실패가 아니고 우리의 수치가 아닌 줄 믿습니다.

그것은 우리를 다루시고 고치시고 인도해 가시는 우리 하나님아버지의 선하신 섭리가 있는 줄로 믿습니다.

잘 됐을 때 감사하는 믿음이 귀하지만 실패와 고난 가운데 감사하는 믿음이야 말로 진짜 믿음인지 모릅니다.

실패와 고난을 너무 두려워하면 인생이 더 어렵습니다.

저도 때로 앞 날에 대한 걱정과 염려가 엄습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주인이 아닌 일이고 내가 주인이 아닌 인생 아닙니까?

하나님 마음대로 하시고 나는 오직 감사하며 기쁘게 가겠다고 마음먹을 때 마다 두려움과 걱정이 사라지는 줄 믿습니다. 아멘.

그런데 좀 자주 기억해야 합니다.

나이가 먹어가서 그런지 금방 잊어버리더군요.

시편5023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 행위 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신실하신 하나님, 온전히 나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고난 가운데 끝까지 신뢰하며 날마다 감사로 예배하는 우리들에게 반드시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이 임하실 줄 믿습니다. 아멘.

두 번째는 주님은 은혜를 주시고 감사하는 사람을 찾으십니다.

지금 기도하는 문제들을 해결 받으시면 제일 먼저 감사를 드리는 것이 응답받은 사람들이 할 일입니다.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렇지 않은 게 인간이라고 본문은 지적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을 때 감사할 확률이 본문에 보니 10분의 1입니다.

좀 박하게 잡은 것 같습니까?

감사하는 인간의 마음이 그만큼 박한 것입니다.

찰스 브라운이란 사람이 나머지 아홉 명이 왜 예수님께 감사하러 오지 않았는지를 이렇게 풀어 놓았습니다.

첫 번째 사람은 진짜 나은건지 정밀검사를 받으러 갔다.

두 번째 사람은 재발할지 모르니 좀 더 두고 봐야 겠다고 일단 집으로 갔다.

세 번째 사람은 이건 겉에 있는 부스럼만 떨어진 거고 속에는 아직 균이 남아있을지 모른다고 의심하며 돌아갔다.

네 번째 사람은 우선 좀 씻고 옷 좀 갈아입으로 돌아갔다

다섯 번째 사람은 자유인이 된 기쁨으로 흥분해서 하루 종일 마을을 활보하고 다녔다.

여섯 번째 사람은 예수님이 말 한마디 하신 것 외에는 별로 수고하신 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일곱 번째 사람은 다른 랍비들도 이 정도는 고쳐주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여덟 번째 사람은 내 병이 나을 때가 돼서 나았던 것 같다고 돌아갔다.

아홉 번째 사람은 이제 생각해보니 나병이 아니었던 것 같다.

우리가 고통스런 문제로 울며 기도하고 걱정 근심에 쌓여 살다가 돌아보면 어느새 문제가 해결 되었을 때가 많이 있습니다.

오늘 문둥병자들이 주님의 말씀 대로 믿고 그냥 걸어가는 도중에 홀연히 병이 치료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 때 우리는 과연 몇 번 째 사람이 되었었나 생각해보게 됩니다.

환란 중에 감사할 수 있는 사람만이 응답 뒤에도 감사할 수 있는 줄 믿습니다.

0성선교사는 인공동맥을 차고 20년째 파푸아뉴기니 선교를 하고 있습니다.

그가 섬기는 선교지 코라 부족은 식인을 할 정도로 원시적이라고 합니다.

목숨을 내건 영적 전쟁이 치열하던 어느 날 건강하던 아들에게 갑자기 이상이 생겼습니다.

팔과 손에 힘이 빠져 흔들거리고 걸음도 이상해지고 얼굴은 창백하게 변하는 것입니다.

그의 담대하던 믿음은 한 순간 사라지고 두려움이 엄습했습니다.

마음이 무너지며 아들을 끌어안고 하염없이 울었습니다.

일곱 명의 전문의가 일주일 동안 검사를 했지만 이유를 알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심장마비가 올 수 있으니 성인이 될 때 까지 매일 페니실린을 먹이라며 큰 약 봉투에 약을 가득 담아주었습니다.

집으로 돌아와 언제 심장마비가 올지 모른다는 말에 아이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습니다.

아버지! 왜 우리 아들입니까? 아이를 정상으로 돌려주십시오. 우리를 부르셨으면 아이들을 돌봐 주셔야 하지 않습니까? 고쳐주시옵소서.”

기도해도 응답이 없어 하나님을 원망하며 울었습니다.

다른 선교사들은 아이가 저렇게 되는 것을 보니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 같다고 한국으로 돌아가라고 말했습니다.

한국의 가족들은 선교사가 된다고 가더니 아이들을 다 병들어 죽게 했다고 당장 돌아오라며 난리였습니다.

아이의 병은 차도가 없고 사방 어디에도 피할 길이 없었습니다.

금식하며 애걸하기도 하고 기도한 지도 한 달이 지난 어느 날,

무심코 기도제목을 적어 놓은 한 장의 종이에 시선이 머물렀습니다.

기도제목을 다시 읽었습니다.

순간 그는 하나님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하나님 뜻이 무언지도 모르며 그냥 내 뜻대로 응답하시라고 몇 줄 안 되는 기도제목 속에 하나님을 제한하고 있었다는 걸 깨닫게 됐습니다.

자신의 생각과 지식에 경험에 맞춰 하나님이 그대로 응답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었다는 걸 깨닫게 된 것입니다.

아이를 고쳐달라던 그의 기도는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는 자신의 의지였다는 걸 느꼈습니다.

어쩌면 하나님의 뜻과 상관 없는 사역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고 통곡하며 회개했습니다.

이전에는 홍해와 같은 고난을 만나면 홍해를 피하게 하옵소서 하며 기도했지만 기도가 달라졌습니다.

홍해가 필요하다면 홍해로 인도하시고 홍해와 같은 고난 중에서도 살아계신 아버지를 만나는 기쁨을 주시옵소서.

아이를 고치시든지 불구자로 그대로 두시든지 오직 아이를 통해 하나님의 이름과 영광이 나타나기를 소망합니다.

기도를 마친 어느 날 아이가 치유 되어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의사는 믿을 수 없는 일이라며 그때 데려온 아이가 맞느냐고 물었습니다.

모든 것이 정상이니 약도 필요가 없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며칠 후 병원비가 모두 처리되었으니 서명만 해서 보내달라고 청구서가 도착했습니다.

2주간의 입원과 검사비는 선교사에겐 큰 금액이었습니다.

그의 간증을 들었던 무슬림인 수석 담당의사가 진료비를 받지 않겠다고 서명을 했고 나머지 6명의 의사도 서명했다는 것입니다.

청구서를 바라보던 병원 사무원도 의외라며 놀라워했습니다.

그는 고난을 통해 자신의 모든 삶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놀랍게 체험하고 20년을 주님과 함께 사역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프라윈프리는 스탠포드대학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모든 실패, 고난, 역경의 시기에 저는 이 시기가 나에게 무엇을 가르쳐주러 왔을까?’라고 반문해 본다고 말합니다.

우리의 고난은 반드시 이유가 있습니다.

고난이 있을 때 우리는 모든 거짓과 허영심을 버리고 본질의 문제를 바라볼 수 있기에 하나님은 우리 삶에 고난을 허용하시는 것입니다.

고난 가운데서도 감사하는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믿음으로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성도님들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세 번째로 우리가 감사하지 않을 때 하나님이 고통을 느끼신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은혜를 입은 나머지 아홉 사람은 결국 주님께 감사하며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제사장에게 몸을 보이고 완치 판정을 받고 나중에 예수님께 돌아왔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이 사실이 주님을 슬프게 하셨다는 것이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부분입니다.

그들을 고쳐주실 때 주님이 진정 원했던 것은 무엇일까요?

주님은 열사람이 다 기적을 통해 구원을 받길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주님은 17절에 나타나지 않는 그들을 기다리시며 두리번거리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내가 고쳐준 사람은 열 명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열명의 나병환자들을 일일이 할고 계셨고 그들을 구원하길 열망하셨습니다.

그들이 육신의 질병을 치유받았지만 영적인 죽음의 병을 치유받기 위해선 오직 예수님이 메시야임을 깨닫고 믿어야 합니다.

그것이 주님이 말씀하셨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입니다.

빌립보서 2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 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예수님이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신실하게 우리 문제를 맡아 주시는 것은 이 모든 일로 인해 주님에 대한 믿음을 갖게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 믿음이 더욱 견고해지고 온전한 구원을 이루기 위해서란 말씀이죠.

그러나 주님은 오늘 기대에 비해 너무 큰 낙심을 맛보신 것입니다.

주님께 돌아와 구원받은 사람은 은혜를 입은 열명 중 단 한사람이었습니다.

제가 인터넷에서 작자 미상의 그림을 본 적이 있습니다.

한 청년이 무릎을 꿇고 예수님의 가슴에 머리를 맞기고 안겨있는 모습입니다.

낡은 옷에 운동화를 신은 채 두 팔은 차마 주님을 껴안지도 못한 채 늘어뜨리고 있는 걸 보아 모든 것을 탕진하고 돌아온 탕자 아들쯤 되어 보입니다.

그런데 그 어정쩡한 아들을 안고 있는 예수님의 표정이 제 마음을 때렸습니다.

하늘을 향해 눈을 감고 있는 그림 속의 예수님은 마치 천하를 얻은 것 같은 기쁨과 감격에 겨워 있으셨습니다.

한 영혼을 천하보다 귀하게 보시는 에수님의 그 사랑이 어쩜 그리도 잘 표현되었는지 한참을 바라보며 큰 은혜가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아홉 명의 소중한 영혼을 잃어버리신 창조주의 비통한 마음을 느끼게 됩니다.

그 아홉은 어디 있는냐란 주님의 말씀에서 주님은 그들을 고쳐주신 것을 공치사하는 게 아니십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사역기간 중 병을 고쳐달라 오는 이들을 단 한명도 그냥 돌려보내지 않으셨습니다.

우리의 인생의 질병과 고통과 문제를 풀어주시는 것은 주님께 너무나 기쁜 일이고 꼭 들어주시고 싶은 일입니다.

단지 주님은 이 모든 문제들을 통해 온전한 주님을 만나고 우리가 온전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길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16절에 이방인이라 무시당하던 사마리아 사람만이 주님의 발아래 엎드려 감사를 드리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발 아래 엎드린 그의 모습에서 불치의 병을 치료하시는 만물을 관장하고 다스리시는 주님을 깨닫고 돌아온 죄인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육체의 죽음 뿐 아니라 영원한 죄의 심판에서 구원하신 주님의 은혜를 감사하며 나온 그에게 19절에 주님은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주님이 베풀어 주신 기적이 하나님이시기에 아무 댓가도 없이 나타났다고 보십니까?

아니요, 그들의 천형의 질병이 치료 된 것은 주님의 십자가를 담보로 한 것입니다.

그들의 죄와 저주로 인한 사망의 병, 절망의 병이 아무 댓가 없이 치료될 수는 없습니다.

주님께서 공생애 사역 중에 고쳐주신 많은 사람들 또한 주님의 십자가의 형벌을 담보로 한 것입니다.

주님을 믿고 구원을 받으셨습니까?

십자가를 담보로 한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가 기도하고 간구해서 크고 작은 문제들이 해결 받은 것도, 마음에 평안을 얻은 것도 모두 주님의 십자가를 담보로 한 것입니다.

그것을 깨닫고 놀란 사람들이 주님의 발 아래 나와 엎드릴 수 있는 것이고 진정한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주님의 못박히신 발 아래 엎드려 보셨습니까?

주님이 오늘 본문의 죄와 절망과 눈물이 뒤덮인 이방인의 마을을 지나신 것 처럼 이 땅에 오셔서 소생이 불가능한 나병과 같은 영혼의 불치병에서 우리를 고쳐주신 줄 믿습니다.

오늘 추수감사절을 맞아 무엇보다 나를 사랑하시고 내 이름을 아시며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주님께 감사하는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축원드립니다. 아멘.

말씀을 맺습니다.

힘든 문제와 현실 속에는 반드시 우리를 성숙하게하고 견고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가 함께 있으십니다.

문제를 들고 주님 앞으로 나갈 때 하나님 아버지의 신실한 인도와 응답을 확신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드립니다. 아멘.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는 구속자를 발견하지 못한 아홉명의 영혼 때문에 슬픔에 잠긴 주님을 보았습니다.

우리 혼자 주님 앞에 나올 때 두고 온 아홉 명의 영혼을 주님께서 찾고 계시는 간절한 시선을 느끼길 원합니다.

추수감사절에 우리 구원을 감사하고 우리의 인생 길에 끝까지 동행하시고 보호하실 하나님아버지께 예배하러 나온 우리 모두 참 잘했습니다.

어떤 감사의 열매를 하나님께 드리시겠습니까?

우리 손으로 수고하고 물질을 얻게 하신 은혜에 감사하며 하나님께 드리는 마음 주님께서 참 기쁘시게 받으실 줄 믿습니다.

우리의 마음의 진정한 사랑과 감사를 담아 드리는 예배와 찬양과 기도를 기쁘게 받으셨을 줄 믿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찾으시는 영혼을 우리가 주님 앞에 인도하는 것이 우리 주님께 가장 기쁜 감사의 선물이 될 줄 믿습니다.

육신의 열매 뿐 아니라 우리 삶에 영적인 열매, 영혼을 구원하는 열매가 가득 맺혀 주님께 온전한 영광을 드리는 삶을 사시길 간절히 축복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