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다 돈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라고 말씀드리면 기분 나쁘실 분이 있으십니까?
돈이 살아가는 데 얼마만큼 큰 힘과 기쁨이 되는지 잘 아는 데 어떻게 돈을 사랑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돈에 혈안이 되어 살아가는 것은 혐오할지라도 쓸 돈은 좀 넉넉한 것이 좋죠.
지난 한 주도 돈을 벌기 위해 뛰었고, 돈으로 인해 웃기도 하고 돈으로 인해 낙심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돈 때문에 양심에 꺼리는 짓도 했을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돈 문제는 너희가 알아서 하고 내게 대한 믿음만 지키라고 하시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설교 중에 돈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등장하고 바울사도의 편지에서도 돈 문제를 많이 언급합니다.
우리가 믿음에 성경적인 물질관을 잘 장착해 두지 않으면 돈이 우리 믿음을 위협합니다.
오늘 본문 10절을 보면 돈을 사랑한 사람이 믿음에서 떠났다고 바울은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오늘도 돈 백 만원 벌 일이 있었다면 교회 올지 말지 꽤 망설여지지 않았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이 하나님과 재물을 동시에 섬길 수는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을 통해 성도들의 물질관을 잘 배우고 생각을 바로잡는 것은 대단히 필요한 것입니다.
돈을 사랑하고 많이 벌기 원하는 우리 본성에 오늘 본문 말씀 설교가 그렇게 은혜로울 것 같지는 않죠?
‘하나님이 재물을 쌓을 곳이 없이 많이 주었더라’ 이런 말씀에 힘이 나죠.
그러나 오늘 말씀은 의외로 큰 은혜와 물질에 대한 담대함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믿습니다.
본문은 바울사도가 영적인 아들 목사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디모데는 에베소교회를 목회하며 여러 어려움들에 직면하고 있었습니다.
그 중 본문에서 바울이 조언하는 것은 에베소교회 내의 잘못된 경건과 돈에 대한 부분입니다.
하나님을 경건하게 잘 섬긴다고 자부하는 사람들 속에 문제가 있었고 거기에 돈 문제가 결부되었다는 뜻이겠죠.
바울이 파헤치는 물질에 대한 인간의 탐욕과 돈의 정체를 잘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말씀에 잘 집중하시기 바랍니다.
예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 마음을 하나님께 향해 경배하는 것과 말씀을 듣고 받아들이는 태도입니다.
이것 또한 훈련하지 않으면 예배를 통해서 얻을 큰 유익을 놓치게 됩니다.
3절부터 5절까지는 에베소교회 중에 있던 신앙과 경건으로 인한 문제입니다.
경건은 여러 의미로 쓰이지만 대체로 하나님을 알고, 경외하며, 세속에 물들지 않은 거룩함을 말합니다.
세속과 반대되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당연히 세속적이 아닌 경건을 추구해야 하는 것이죠.
경건에는 큰 이익이 있습니다.
경건을 이루는 성도들이 받을 수 있는 유익은 성경에 여러 가지로 제시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경건한 자의 기도를 들으십니다.(요9:31),
범사에 유익이 있습니다.(딤전4:8),
시험에서 구원을 받습니다.(벧후2:9),
금생과 내세의 약속이 있습니다.(딤전4:8)
베드로후서는 하나님이 경건치 않은 자를 심판하신다고 엄중히 말씀합니다.
경건은 지속적인 말씀 훈련과 기도훈련과 순종훈련을 통해 더해집니다.
경건은 물을 주지 않으면 자라지 않는 나무와 같습니다.
계속해서 배우고 행하고 변화시켜 나가는 노력이 없이는 경건은 자라지 않습니다.
단지 교회에 다니는 것만으로는 너무 부족합니다.
우리가 볼 때 어떤 성도들은 하나님을 진실 되게 섬기고 날이 갈수록 경건해 지고 영생을 맛보며 사는 것 같이 느껴집니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척 봐도 경건하지 않습니다.
교회 생활은 익숙할지 모르지만 교회의 주인이신 예수님에 대해서 맛 본적이 없고 믿음의 참된 기쁨을 모른다는 게 우리 눈에도 보입니다.
경건의 훈련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칼빈은 교회에 일부만이 엘리트 신앙인이 되는 것을 반대했습니다.
모든 성도들이 다 신앙의 풍성한 기쁨을 맛보며 영적인 성숙을 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일부 성도들만 영적 부요를 누리고 나머지 성도들은 교회생활이나 즐기고 예배드렸다는 것 하나로 위안을 받으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신앙의 성장을 위한 경건훈련에 관심이 없고 교회생활에만 관심을 두면 말만 많아지고 성도들 간의 갈등만 발생합니다.
성경은 경건의 훈련을 통해 더 깊고 성숙한 신앙에 이르기를 강권합니다.
그런데 에베소교회에는 경건을 추구하다 문제가 생겼습니다.
어떤 이들이 예수님이 주신 말씀대로 경건을 추구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경건을 훈련하되 성경대로 해야 합니다.
이들은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바른 교훈을 따르지 않고 점점 엉뚱한 방향으로 경건을 훈련했습니다.
당시 여러 종교들의 잡다한 방식들을 경건훈련에 들여 온 것입니다.
육체적으로 경건하게 보이기 위한 금욕주의, 특별한 진리를 깨달았다는 영지주의, 굉장한 영적 체험을 추구하는 신비주의, 이런 것들을 열심히 닦고 남들에게도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요즘 한국교회에도 종교적 명상, 비성경적인 성령운동 같은 게 들어와 있습니다.
에베소교회의 변질된 경건주의자들은 교만해져서 교회의 바른 성도들과 언쟁하고 분란을 일으키고 있었습니다.
바울사도는 그리스도의 바른 교훈이 아닌 이런 혼합주의적인 경건의 훈련은 결국 마음이 부패되고 진리를 잃어버린다고 경고합니다.
그리고 결국 그런 악한 경건의 힘을 내세워 성도들로부터 물질적인 이득을 챙기더라는 것입니다.
경건을 이익의 방도로 생각하는 자들의 다툼이 일어나느니라
얼마 전 뉴스에서 좀 희한한 사건을 다룬 적이 있습니다.
노부모님들이 가출해서 행방불명이 되었다고 딸이 신고를 합니다.
그런데 사건을 조사하다 보니 딸이 부모님을 차에 태워 어디론가 데려갔다는 것이 밝혀집니다.
딸은 부모들이 바람을 쐬고 싶다고 하셔서 강변 어디다 내려 드리고 돌아왔다고 주장합니다.
결국 아버지는 죽은 채로 발견되었고 어머니는 아직도 행방불명입니다.
그런데 이 부모의 집에는 어떤 사이비목사와 이 사람을 신봉하는 몇 사람들이 공동으로 살고 있었습니다.
척 봐도 전형적으로 사이비종교인에게 당한 사건입니다.
그런데 이 죽은 아버지가 사실은 미국 한인교회 사회에서 알려진 목사였습니다.
어쩌다 미국에서 알게 된 사이비 목사의 예언에 점점 빠져 든 것입니다.
급기야 미국에서 삼차 세계대전이 곧 일어나니 한국에 돌아가야 한다는 사이비목사의 말을 듣고 황급히 교회를 팔고 귀국했던 것이죠.
결국 한국에 있는 재산마저 갈취하려는 사이비목사에 의해 노부부가 쫒겨나 죽음에 이른 사건인 것입니다.
나쁘게 갈고 닦은 영적인 힘은 추종자를 모으고 물질을 갈취합니다.
이단종교, 사이비교주에게 왜 그렇게 돈이 많이 모이겠습니까?
교회가 경매로 나오면 다 이단들이 사갑니다.
어느 교회든 요즘은 기도 중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 중보기도를 통해 그 사람의 미래를 예언해준다, 그런 사람들이 많습니다.
결국 사람들을 조종하고, 억압하고, 물질적인 이득을 얻어 갑니다.
올바른 말씀과 성경의 핵심 교리들을 잘 알지 못하면 신기한 영적 체험을 내세우는 거짓 경건에 미혹되기가 너무 쉽습니다.
우리 교회가 청소년부터 교리교육을 시키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성경 위에 올바로 세워진 경건한 믿음은 깨끗하고, 실생활과 아름답게 조화되고, 흔들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쌓여진 경건은 금생과 내세에 큰 유익이 있습니다.
칼빈이 영국의 한 백작에게 보낸 편지에 쓴 글귀를 우리는 신중히 들어야 합니다.
‘시모어경, 제 말을 믿으십시오. 주님의 교회는 요리문답 없이는 결코 보존될 수 없습니다.’
성도 개인도 올바른 성경 교리 없이는 결코 보존될 수 없습니다.
성경을 잘만 배워도 성경말씀 자체의 능력이 우리를 경건하고 거룩하게 합니다.
그렇기에 모든 성도들은 경건한 신앙을 위해 더 열심히 성경과 구원의 원리를 배우며 순종을 훈련합시다.
그런 중에 세속의 때가 점점 벗겨지고 예수님의 거룩함을 닮아가는 경건한 성도들이 되어가게 되리라 믿습니다.
그런데 이런 경건은 자족하는 마음과 함께 할 때 온전합니다.
신앙을 열심히 갈고 닦아도 자족하는 마음이 없다면 경건이 이뤄지지 않습니다.
탐욕은 하나님께 관한 경건이 아니라 세속이고 죄입니다.
특히 바울사도가 주목하는 것은 돈에 대한 탐욕입니다.
인간의 탐욕과 돈의 위력이 만들어 내는 악에 대한 강력한 경고입니다.
신앙도 변질시키는 것이 인간의 탐욕이요 돈의 위력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성도들은 돈에 대해서 세상의 관점이 아닌 성경이 가르치는 올바른 관점을 가져야 합니다.
1) 그것은 먼저 돈에 대해서 자족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다 아는 이야기죠.
죽을 때 가져갈 수 있는 게 뭐가 있습니까?
그러니 다 못써서 남겨 두고 갈만큼 소유하는 게 무슨 소용이냐는 뜻입니다.
하지만 사람의 본성은 돈에 대해 족함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누가 돈에 있어서 그만 좀 주라고 하겠습니까?
1세기 철학자 세네카는 ‘돈은 아직까지 누구도 부자로 만들어주지 못했다’라는 예리한 명언을 남겼습니다.
돈을 많이 가진 부자들도 자기의 부에 만족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요즘 뉴스에 매일 나오는 분들 보면 가난한 사람들은 아무도 없습니다.
특활비 수수 의혹을 받고 있는 분의 부인되시는 분이 인터뷰에서 ‘우리도 먹고 사는 데 지장 없이 충분히 가졌다. 그런데 뭐 하러 그런 돈을 더 받겠냐.’이렇게 말했더군요.
그러게 왜 그러셨습니까?
말은 그렇게 해도 사람이 가진 재물이 충분하다고 생각하기가 불가능한 것이죠.
과거에 비하면 훨씬 넓고 좋은 집에 살아도 사람들은 어떻게든 더 좋은 집에 살고 싶어 합니다.
더 넓은 아파트, 고급차, 강남 입성, 자녀들에게 물려 줄 재산, 써도 줄어들지 않을만한 노후자금.
이런 것을 가지려고 좇아가다 어느 시점에서 이젠 됐다고 만족하겠습니까?
절대로 만족할 수가 없는 것이죠.
그렇게 더 가지려고 애쓰다 사람들이 결국 큰 불행에 빠진다는 것입니다.
9절,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이게 돈을 쫒아가던 사람들이 맞게 되는 파국입니다.
물론 좀 더 나은 생활을 위해 정당하게 열심히 일하고 노력하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부지런히 일하고 안정된 생활을 해야 합니다.
본문은 부자가 되려는 일념으로 불법과 부정직과 악행을 동원하는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현재 형편으로는 가능하지도 않은 부를 잡으려고 집념을 갖다 보면 이런 악에 빠질 수 밖에 없습니다.
제가 아는 분의 아들이 보이스피싱 운반책이 되어 돈을 날라다 주다가 결국 감옥에 다녀왔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석방 되서도 건전하게 일할 생각을 안 하다고 부모가 탄식을 합니다.
감옥에서 오히려 불법으로 떼돈을 버는 이야기들만 들어선지, 정상적인 노력으로 버는 푼돈에는 아예 관심도 없다는 것입니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입니다.
가상화폐 전쟁터에 뒤늦게 뛰어 들었다 재산을 날린 사람들에 대한 소문이 자자합니다.
돈을 탐하는 것이 이런 현실적인 불행을 가져다 주는 것이기에 우리는 현재의 나, 그리고 가진 것에 자족할 줄 아는 믿음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2) 더 나아가 현재 가진 것이 부족하다 해도 자족하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것은 더더욱 쉬운 일이 아닙니다.
8절에서 말씀합니다.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 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아니, 겨우 먹을 것과 입을 것이면 만족하라구요?
이 말씀은 청빈한 생활에도 만족하고 최소한의 생활에도 만족할 것을 권고합니다.
기분 좋은 말씀이 아니죠.
그러나 가만히 들여다 보면 큰 축복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먹고 입고 쓸 것은 주신다는 것이잖아요?
우리가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독생자를 보내주신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길 때 하나님은 분명히 우리의 생계를 책임지십니다.
그러므로 조금 부족하게 느껴진다 해도 현재는 내게 이정도의 부를 주신 하나님 앞에서 감사하고 만족해야 합니다.
사실 바울처럼 독신자도 아니고, 과거처럼 다 같이 못사는 시절도 아닌 지금, 남보다 못 살면서 자족하는 마음을 가진다는 건 쉬운 문제가 아닙니다.
어차피 우리는 이런 돈 문제에 초연하게 살지는 못합니다.
그렇다면 이 본문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의도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 삶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분명히 정리하라는 것입니다.
주인을 분명히 하지 않으면 돈을 초월해서 산다는 것은 완전히 불가능한 게임입니다.
우리가 돈 때문에 살고 돈 때문에 행복한지, 아니면 하나님 때문에 살고 하나님이 우리를 복되게 하는지를 정확하게 가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인이시든지 돈이 주인이든지 분명히 하라는 것이죠.
그 관계를 분명히 해야만 부족한 중에도 자족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경험해 보았지만 돈은 무자비한 주인입니다.
구하고 찾는다고 다 주지 않습니다.
10절에서 그것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돈이라는 주인의 정체가 무엇입니까?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돈을 사랑하면 만 가지 악이 싹을 틔웁니다.
가만히 보십시오. 돈 생각을 하면 여지없이 근심, 부정직, 이기심 이런 것들이 막 싹이 나서 자라기 시작합니다.
돈은 가까이 하고 탐할수록 근심으로 찌릅니다.
원하는 대로 안 줄 뿐 아니라 돈을 줘도 근심과 함께 줍니다.
하나님은 그런 주인이 아니십니다.
잠언 10장22절은 말씀합니다.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 사람으로 부하게 하시고 근심을 겸하여 주지 아니하시느니라
하나님은 세상의 모든 자본을 만드시고 경제를 허락하신 분이십니다.
부하게도 하시고 가난하게도 하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우리 형편을 꿰뚫어 보고 있다고 하십니다.
너희 쓸 것을 아시느니라.
이 말씀은 그것을 공급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이런 하나님이 우리의 주인이 되시면 스스로 미래를 대비하려고 돈을 향해 지각없이 목을 맬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과연 나의 보호자가 되셨는지가 자족할 수 있는 관건입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이미 알고 있다 할지라도 항상 저절로 충만한 믿음의 수준으로 살기는 어렵습니다.
또 물질이 부족해지거나, 믿음을 벗어나서 돈을 더 벌 수 있는 유혹이 다가올 때 흔들린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매번 이런 돈에 대한 염려와 시험을 이겨나가게 됩니까?
기도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보호자와 공급자시라는 믿음을 더해 주십니다.
기도라는 경건의 훈련을 통해서 돈에 끌려 다니지 않는 자족한 믿음을 갖게 됩니다.
비단 돈에서만 자족하는 게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모든 삶에서 우리는 이미 받은 것에 대해 자족하는 마음을 갖도록 훈련해야 합니다.
사실 우리를 근심케 하는 것은 부족한 한 두 가지인 경우가 많습니다.
9대1입니다.
문제는 그 1 때문에 9가 주는 기쁨과 행복이 날라가 버리는 것입니다.
자족하려면 시선을 없는 것에서 있는 것에 돌려야 합니다.
분명히 우리는 과거보다 더 받아 누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다윗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너를 이스라엘 왕으로 기름 붓기 위하여 너를 사울의 손에서 구원하고
네 주인의 집을 네게 주고 네 주인의 아내들을 네 품에 두고 이스라엘과 유다 족속을 네게 맡겼느니라 만일 그것이 부족하였을 것 같으면 내가 네게 이것 저것을 더 주었으리라
우리에게 모든 게 부족하다는 불만이 들 때, 우리를 부르셔서 무엇 무엇을 주셨는지를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것이 부족하다면 하나님께서는 이것 저것을 더 주실 거라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자족하는 마음과 함께 하는 경건의 훈련이고 우리에게 큰 이익을 주시는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환경에 구애받지 않고 자족하는 마음을 갖고 경건한 삶을 훈련하는 것은 고행이 아닙니다.
우리 혼자 고군분투하며 힘겨운 훈련을 해나가는 것도 아닙니다.
좋으신 하나님은 우리의 작은 노력과 결심에도 기뻐하시며 작은 훈련에 큰 기쁨과 이익을 더해주십니다.
어느덧 우리는 잘 훈련 된 경건한 성도로 영적 기쁨과 육적인 행복을 맛보며 살게 될 것입니다.
쓰고도 남을 만큼 많이 받으셨습니까?
그렇다면 17절의 말씀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네가 이 세대에서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선을 행하고 선한 사업을 많이 하고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며 너그러운 자가 되게 하라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
이런 축복이 모든 성도님들께 임하시길 축원드립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오늘 바울사도가 말씀하고자 하는 것은 아주 분명합니다.
자족하는 마음은 세상 것에서 안전을 찾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안전함을 찾는 것입니다.
그것이 가장 안전하고 행복하고 편안한 삶을 누리는 비결입니다.
크리소스톰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사실인지를 알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부자들과 함께 살아보는 것이다. 그들이 얼마나 많은 슬픔과 얼마나 혹독한 불평으로 살아가는지를 알게 될 것이다.’
요즘 은퇴 후 귀농해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생활이 많이 나오죠?
일본, 남미 등지에서 직장생활을 하다 제주도로 귀농한 사람이 있습니다.
텃밭에서 거둬먹고, 체면 생각하지 않고, 좀 불편하고 천천히 살아가는 제주도 생활은 한 달에 십만원만 있어도 산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많은 것을 맡겨주셨다 해도 성도들의 삶은 좀 미니멀한 것이 좋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땅에서 하나님나라와 타인을 위해 좀 더 좋은 일을 할 수 있는 것이죠.
하나님의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성숙한 믿음의 사람이 되기 위해 말씀과 기도로 예수님을 따르는 경건을 훈련해야 합니다.
또 우리의 중심에서 주인행세를 하는 물질을 다루는 훈련도 해야 합니다.
음식을 썩게 하려면 그냥 놓아두기만 하면 됩니다.
우리의 마음을 부패하게 하려면 아무런 선한 훈련 없이 그냥 놔두면 되는 것입니다.
정현선수의 발을 보십시오.
훈련없이는 좋은 것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올해는 계속해서 말씀드리는 신앙의 훈련을 통해 하나님의 기쁨과 우리 영혼의 큰 이익이 있는 모두가 되시길 다시 한 번 권고 드립니다.
2018년1월28일 주는나의산성교회 남수연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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