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모데전후서는 바울사도가 믿음의 아들이자 복음의 동역자인 디모데에게 보낸 두 편의 서신입니다.
1. 디모데전서를 쓰게 된 배경을 알면 앞으로 내용을 이해하기가 쉽겠죠.
바울사도는 세 차례에 걸쳐 소아시아와 유럽으로 선교여행을 다녔습니다.
3차 선교여행을 마치고 가난한 예루살렘교회를 위한 구제헌금을 모아 예루살렘에 돌아옵니다.
그때 유대인들에게 고발을 당해 재판을 받기 위해 로마로 가죠.
로마에서 약 2년간 가택연금 상태로 방문하러 온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합니다.
여기까지가 사도행전에 나온 바울사도의 선교여행 공식 기록입니다.
감옥에서 석방 된 이후의 선교여행에 대해선, 바울사도 사역 말기에 쓴 디모데전후서와 디도서에서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그때 동역자인 디모데를 에베소 교회에 남겨 두고 마게도니아로 가게 됩니다.
1장3절에 나옵니다.
그렇게 해서 에베소교회를 맡게 된 디모데에게 보낸 서신이 바로 디모데전후서입니다.
내용을 읽어보면 에베소교회에 분열과 이단의 문제가 있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또 디모데가 당시 나이가 젊었고, 성품이 온순했다고 알려져 있죠.
디모데는 바울사도가 임명한 목회자입니다.
아무리 바울이 세운 에베소교회지만 디모데를 리더로 인정하는 건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동안 에베소교회의 중추적 역할을 했던 나이 든 지도자들이 있었을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 상황들을 생각한다면 디모데의 목회 사역이 험준했을 것입니다.
바울사도는 에베소로 돌아가지 못하는 상황에서, 혼자 고전하는 디모데에게 사역을 잘 감당하도록 격려하기 위해 이 편지를 쓰게 된 것이죠.
편지는 디모데에게 썼지만 완전히 개인적인 편지는 아닙니다.
당시 사도들이 쓴 편지는 교회에서 읽혀졌고, 여러 교회로 회람되었습니다.디모데에게 에베소교회를 이렇게 지도하라는 것은, 듣는 성도들에게는 너희들은 이대로 디모데의 지도를 따르라는 암묵적인 지시인 것이죠.
당시 디모데가 처한 상황을 생각해 보면 사면초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것은 우리의 신앙을 둘러싸고 있는 여러 가지 힘든 상황들과 다르지 않습니다.
디모데 뿐아니라 우리에게도 이 말씀을 주시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라고 하시는지를 본문에서 살펴봅니다.
2. 우리가 힘든 상황 속에서 믿음을 지키고 사명을 잘 감당하기 위해서는 구원의 은혜가 얼마나 큰 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15절,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교회 문제를 다루다 갑작스럽게 바울사도의 신앙고백이 터져 나오죠.
바울사도의 감격이 묻어납니다.
하나님이 죄인을 구하시고 세상에 내려오셨다는 이 복음은 감격 없이는 언급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교회의 문제에서나, 우리 삶에서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 이 모든 힘은 우리가 예수님 은혜로 구원받았다는 것에서 나옵니다.
이땅의 짧은 생애가 지나고 장차 누릴 영광을 성도들은 늘 생각해야 합니다.
정말 영생의 복을 믿는다면 사실 좀 가난해도, 건강하지 않아도, 어려움이 많아도, 절망하고 불행하게 살 이유는 없는 것이죠.
교회는 끊임없이 예수님의 대속의 은혜와 구원의 감격이 증거되어야 합니다.
성도들 개인의 신앙에서는 이것을 계속 생각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을 섬기는 동력은 곧 바닥을 드러냅니다.
여기서 바울사도는 좀 뜬금없는 자기 신앙 간증을 하는 것 같죠.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사실 문제가 많은 에베소교회에 바울이 사도로서의 권위를 내세워도 부족할 판이잖아요?
내가 죄인 중에 우두머리라고 하면 듣는 성도들이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요즘 정치적으로 시끄러운 사건들이 많지만, 증거가 나와도 다 나는 죄짓지 않았다고 하잖아요?
죄를 시인하는 정치인은 한번도 못 봤습니다.
디모데가 막중한 짐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이것을 항상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죄에서 구원받았냐는 것이죠.
바울의 죄인 됨의 고백은, 그만큼 에베소 교인들 사이에서 책잡힐 일 없이 행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바울사도는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은 것처럼 너희는 나를 본받으라고 했죠.
죄인 중에 괴수인 내가 어떤 모범을 보였는지 다들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게 힘드십니까?
내 주변이 다 맘에 들지 않고 성도들과 가족들의 단점만 보입니까?
그럴 때 나 자신을 들여다 보면 이런 나를 구원해 주신 감격의 탄성이 나올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내 눈에 들보가 있고, 저들은 오히려 작은 티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래야 사람으로 인해 당하는 시험들을 이길 수가 있는 것이죠.
3. 그리고 디모데에게 선한 싸움을 싸우라고 권면합니다.
그 싸움의 무기가 무엇인지를 손에 쥐어줍니다.
1) 18절, 아들 디모데야 내가 네게 이 교훈으로써 명하노니 전에 너를 지도한 예언을 따라 그것으로 선한 싸움을 싸우며
사실,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맡아서 이끄는 사역을 마냥 좋아할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주님의 은혜에 감사해서 우리가 교회를 섬기지만, 짐을 안 지고 편히 지내고 싶은 마음이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교회를 세우는 것도, 믿음으로 사는 것도, 다 전쟁입니다.
듣기에 아름답게 ‘선한 싸움’이라고 했지만 피 터지게 싸우는 것입니다.
세상이 우리에게 좀 편히 살라고 할 때, 기억하라고 합니다.
‘너를 지도한 예언을 따라 그것으로 선한 싸움을 싸워라’
디모데가 안수를 받고 사역자가 되었을 때 바울사도가 예언을 했다는 것이죠.
무슨 예언을 했을까요?
‘네가 장차 소아시아에서 가장 큰 교회를 이루게 될 것이다.’
그런 것 예언했을까요?
여기서 예언이라는 단어는 미래를 점쳤다고 할 때 쓰는 단어와 다릅니다.
무당처럼 미래를 점치는 것은 성경에서도 그냥 점친다는 단어를 씁니다.
성경에서 ‘예언’은 하나님 말씀을 들려주는 걸 말합니다.
이 구절을 잘 보면, ‘전에 너를 지도한 예언을 따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말은 ‘내가 본을 보여주며 앞서갔던 ’ 바로 그 예언을 따르라는 것입니다.
바울사도는 사도로 부름 받을 때 어떤 예언을 받았습니까?
바울에 대한 예언은 다메섹도상에서 예수님을 보고 눈이 멀었을 때 아나니아라는 제자를 통해서 말씀해 주십니다.
사도행전9장15절, 주께서 이르시되..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16절,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
이런 게 예언입니다.
하나님이 내게 무엇이라 말씀하시는지 너무 궁금해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바울을 통해 디모데에게 전해 주신 예언도 그런 말씀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얼마나 귀하고 중요한 일인지, 하나님이 얼마나 기뻐하시는 일인지, 끝까지 잘 감당하라는 그런 권면을 받았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주신 그 교훈의 말씀으로 믿음의 싸움을 싸우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의 싸움에서 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 말씀을 듣지 않고 마음에서 나오는 소리를 듣기 때문입니다.
우리 마음에서 어떤 소리가 나옵니까?
‘해 봤자 소용없어, 너는 그게 한계야’
‘일이 더 나빠지면 어떻하지’
‘기도해도 소용없는데, 언제까지 믿어야 해?’
우리가 내 속에서 나오는 말을 들으면 순식간에 낙담에 빠집니다.
내 자신에게 하나님이 하신 말씀을 들려주어야 합니다.
시편 43편 기자도 그랬다고 하잖아요?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시편기자는 낙망한 자기 자신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나는 내 얼굴을 도우시는 내 하나님을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나 자신에게 이렇게 말하십시오.
왜 낙망하고 왜 염려하니,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잖니?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여 구하지 말며 근심하지도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아시느니라
다만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런 것들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내 속에서 나오는 음성을 듣지 말고, 내게 믿음의 말씀을 들려주시길 바랍니다.
나를 둘러싼 두려운 환경과 낙망을 이길 수 있을 것입니다.
2) 믿음과 착한 양심으로 싸워야 합니다.
19절,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은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
양심을 버리면, 믿는다고 하지만 이미 파선한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믿음과 착한 양심은 우리의 험난한 항해를 안전하고 확실하게 해 줍니다.
믿음은 사람이 가장 확신하고 신뢰하는 게 무엇이냐를 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계신 것과 예수님이 주시는 구원을 믿는 것입니다.
진심으로 그것을 믿는다면 어떻게 양심을 버립니까?
양심을 버린다면 그 믿음은 파선한 믿음입니다.
신자들이 양심 없다는 소리를 들으면 그 순간 우리가 믿는 믿음은 조롱당합니다.
뉴스에서 목사가 저지른 범죄, 그리스도인들이 저지른 범죄는 더 혹독한 비난과 조롱을 받잖아요?
바울사도는 디모데전서에서 양심이라는 단어를 다섯 번이나 사용합니다.
우리가 말하는 믿음은 보이지 않습니다.
믿음을 보여주는 증거는 양심적으로 사는 것입니다.
사람이 양심적인 게 얼마나 큰 위력인지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흑백요리사라는 프로가 있었죠.
거기 요리 프로에 자주 나왔던 최00셰프가 도전자로 참가했습니다.
최셰프는 CCM가수가 되려다 요리사가 된 사람입니다.
저는 흑백요리사 프로를 보진 못했습니다.
그런데 라디오스타라는 프로에 최셰프가 나온 걸 보았습니다.
경연 때 있었던 한 황당한 해프닝을 얘기하더군요.
최셰프가 세미파이널 인생 요리 대결에서 봉골레 파스타를 선보였습니다.
봉골레 파스타는 서양요리 문외한도 다 알만한 요리죠.
올리브유에 마늘을 볶아서 향을 올리는 게 기본이잖아요?
그런데 최셰프가 봉골레 파스타를 하면서 마늘을 빼먹었은 것입니다.
그때 심사위원이 맛을 보고 뭔가 느끼하다는 걸 잡아냈지만, 마늘을 빼먹었은 걸 몰랐던 최셰프는 자기 요리는 완벽했다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나중에 인터뷰를 하다 마늘을 빼 먹은 게 생각이 났습니다.
요리사로서 창피한 일이죠.
그때 그냥 넘어갈 수도 있었는데, 양심이 찔렸다고 합니다.
사실 심사위원이 파스타에서 맛이 빠진 걸 정확히 잡아냈던 것이잖아요?
그래서 ‘아, 마늘을 빼 먹었군요’, 시인했던 것입니다.
최셰프의 솔직한 모습에 오히려 시청자들이 큰 응원을 보냈다고 하죠.
그 사건이 전화위복이 돼서 최셰프의 봉골레 파스타 밀키트가 대란이 일어납니다.
보통 오천 개에서 만 개 정도 주문이 들어오는 데, 삼십만 개로 주문량이 뛰었다고 합니다.
봉골레 파스타 뿐 아니라 다른 제품들도 덩달아 품절사태를 빚었다고 합니다.
우리가 양심적이지 않다면 하나님의 도우심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양심적이지 않은데 하나님이 어떻게 도우시겠습니까?
우리가 믿음만으로 세상에서 승부하는 게 아니라 착한 양심이 함께 할 때 더 큰 힘이 된다는 것을 기억하고 행하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2024년11월6일 수요기도회 남수연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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