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youtube.com/watch?v=gsoulj3I6Ps&feature=youtu.be
2020년1월5일 설교 영상
2020년 새해가 되었습니다. 새해 초에 복많이 받으시라는 덕담 많이 들으시고 많이 나누셨죠?새해에도 우리에겐 하나님의 복이 필요합니다. 올해는 꼭 이뤄야 할 소원도 있고 가족모두 건강하고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바램으로 새해를 시작하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믿기 힘들겠지만 지난 송구영신예배에서 나눴듯이 성경에서 그것은 이미 보장되어 있는 복입니다. 네가 내 명령을 지켜 준행하면 그것이 다 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신약성경에서 가르치시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너희는 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러니 단지 돈을 좀 더 벌고, 건강하고, 행복한 게 인생 최우선의 목적으로 삼을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천국에서는 개도 누립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무엇을 원하고 무엇이 필요한지 다 아십니다. 부모가 자식의 필요를 살피는 눈하고 자식이 부모의 필요를 살피는 눈은 다르죠. 새해 이미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준비해 놓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다만 성도들이 믿음의 전투를 하지 않으면 보장 된 의식주를 놓고 전쟁터 같은 세월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오늘 한 해를 새롭게 시작하려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귀히 쓰임 받는 그릇이 되거라 이것이 가장 귀한 복이고 그렇게 살아갈 때 약속하신 모든 것들은 어느새 우리 삶을 가득 채울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한 해를 어떻게 사는 것이 진짜 복이 되는지를 잘 깨닫고 그렇게 살아가는 모두가 되시길 바랍니다. 우선 이 말씀은 바울사도가 믿음의 아들인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당시 디모데는 에베소교회의 목사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로마감옥에 갇혀 판결을 기다리고 있었고 이 편지는 바울사도의 마지막 편지가 됩니다. 이 편지를 쓰고 약 1년쯤 지나 바울사도는 순교합니다. 사람에게 죽음이 임박했을 때 어떤 생각이 들까요? 충0교회 목사님께서 이런 이야기 하는 걸 들었습니다. 목사님에게 누님이 있었는데 일찍이 믿음이 좋아서 자기와 함께 미국에서 신학공부를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목사인 매형을 만나서 사모가 된 거예요. 몇 년전 그 누나가 암으로 투병하다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그런데 병석에서 누나가 이런 말을 하는 데 깜짝 놀랐다고 합니다. 평생 예수님을 믿고 정말 신실하게 살았던 누나인데 죽음을 앞둔 상태에서 두 가지 마음이 든다고 털어 놓더라는 것입니다. ‘동생, 내가 하나님을 더 가까이 해야지 하는 마음도 있지만 이젠 그만하고 내 마음대로 좀 살고 싶다는 생각도 드네’ 죽기 전에 자신이 평생 확신했던 것이 흔들릴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이 목사님이 처음 해봤다고 합니다. 바울사도가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고 쓰는 디모데후서는 바울의 쓸쓸한 마음이 그대로 느껴집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아시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감옥에 갇힌 자기를 부끄러워하고 버렸다고 말합니다. 처음부터 한 팀이 되어 험난한 선교여정을 같이 했던 사람들도 각자의 길을 갔다고 합니다. 그리고 바울은 어둠 속 감옥에서 사형선고를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한 평생 예수님을 위해 모든 것을 헌신하고 따랐지만 이런 결말을 맞게 된 인간바울은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요? 그가 가장 사랑했던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너도 나같이 살라는 말이 선뜻 나왔을까요?그래도 우리는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주님과 교회를 위해 이런저런 헌신을 하는데 감사하게도 우리가 남들 보기에 망하진 않았잖아요? 진짜 바울처럼 노년의 삶이 망해 보인다면 자식들에게 너도 내 뒤를 따라야 한다고 어떻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그런데 바울은 이 편지에서 디모데에게 이렇게 당부합니다. 너도 나와 같이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을 받으라 그리고 항상 하나님께 쓰임 받는 그릇이 되라고 당부합니다. 바울사도가 죽음 앞에서 떳떳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이라면 그것이 어떤 환난과 죽음에도 포기할 수 없는 값어치라는 걸 믿어도 좋을 것입니다. 하나님께 쓰임 받는 게 진짜 복입니다. 저는 실직, 구직, 실업자 이런 말이 참 처량한 말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일이 없는 게 얼마나 힘듭니까?저도 잠깐 도시락점을 해봐서 알지만 점심시간에 주문이 별로 없으면 배달직원 볼 때 왠지 좀 창피하더군요. 하나님나라에서 실직하는 것, 그것은 성도에게 가장 초라한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부르실 때 이미 주님 나라를 위해 어느 부분을 맡기실지 계획해 놓으셨습니다. 그 사명을 조금씩 찾아 감당하는 것이 믿음의 성장이고 보람되고 신나는 일이며 하늘에 복이 쌓이는 것입니다. 1. 본문에서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은 주님의 나라를 위해 사람들을 다양한 그릇으로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저 사람은 큰 그릇이다, 그릇이 간장종지만하다, 저 사람은 통이 크다’ 그런 말을 하죠. 20절에서도 그렇게 말씀합니다. 큰 집에는 금 그릇과 은 그릇 뿐 아니라 나무 그릇과 질그릇도 있어 귀하게 쓰는 것도 있고 천하게 쓰는 것도 있나니 여기서 우리가 먼저 알아야 할 것은 모든 그릇은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목적에 따라 빚으시고 불러 모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도들이 살아가는 목적은 내 힘으로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살고 성공하고 행복을 누리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온 인격을 다해 섬기며 나를 지으신 아버지의 목적이 무엇인지에 중점을 두고 살아가는 게 성도입니다. 먼저 이 관계가 잘 정리되고 이것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아니면 왜 하나님께 귀히 쓰임 받는 그릇이 되어야 하는지 마음에 와 닿지가 않는 것이죠. 나 쓰임 안 받고 싶다면 끝이잖아요? 우리를 그릇이라고 표현하신 것은 주인이 그 안에 무언가를 담아서 사용할 목적이 있다는 뜻입니다. 아무도 그냥 쓰임받기 싫다고 빈 그릇으로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 그릇은 종류와 목적이 다 다르다는 것입니다. 금, 은처럼 귀하게 쓰기 위해 부르신 그릇도 있고 나무, 질그릇처럼 천하게 쓰기 위해 부르신 그릇도 있습니다. 이 네 가지 그릇의 차이가 무엇인지는 해석에 따라 다를 것입니다. 성도 각자에게 주신 능력과 은사가 다르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도 있겠죠. 그런데 여기서 ‘천히 쓰이는 그릇’에서 ‘천하다’는 단어는 ‘불명예, 천함, 치욕’이란 부정적인 의미로 쓰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그런 그릇으로 쓰실 리는 없습니다. 이것은 당시 디모데가 처한 에베소교회의 문제와 관련 있습니다. 에베소교회에는 분쟁을 일으키고 구원의 진리를 휘젓는 이단자들이 있어 디모데에게 큰 근심거리였습니다. 이에 대해 세상에는 그렇게 하나님을 불신하고 적극적으로 대적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로마서에서 바울사도는 이것을 구원을 얻을 긍휼의 그릇과 멸망당할 진노의 그릇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복음을 믿고 구원을 받게 될 긍휼의 그릇이 있는가하면 복음을 안 믿고 악역을 하는 진노의 그릇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사람이란 모든 그릇들은 설령 불신자이고 악인이라 해도 다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관할하십니다. 이 땅에선 아무리 하나님의 간섭을 싫어하고 인정하지 않고 대적했던 사람이라 해도 결국 호흡이 끊기는 날부터 하나님의 통치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이 땅의 아름다운 모습과 소박한 우리네 삶이 참 정겹고 귀하게 여겨집니다. 그러나 천국에서 이 세상을 추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천국의 아름다움과 하나님의 영광을 누리며 사는 영생은 이 땅의 삶과 비교가 안 되기 때문입니다. 요즘 오래 된 맛집이라고 방송에 나오는 걸 보면 노포라서 그런지 주방에 위생상태가 엉망으로 보이는 곳이 많습니다. 우리나라는 이제 생활환경이 다 청결해졌잖아요? 그런데 가서는 먹고 싶지가 않더라구요. 우리가 간혹 어린 시절을 추억하는 건 그 가난한 환경이 그리운 게 아닙니다. 지금 정신적으로 그만큼 만족하지 않기에 그때가 행복하게 느껴지는 것이죠.좋은 것을 누리며 더 나빴던 걸 선망할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을 싫어하고 결국 하나님의 영광으로부터 영원히 분리 된 영벌의 삶은 어떨까요?저들은 영원히 이 땅의 삶을 그리워하고 애처롭게 추억하며 살 것입니다. 지옥에 비할 때 하나님의 영광의 그림자인 이 땅은 천국인 것이죠. 우리 어머니가 여행도 좋아하시고, 자연을 참 좋아하셨습니다. 그런데 모시고 다니다 보면 ‘야, 천국의 그림자인 이곳도 이렇게 좋은 데 천국은 얼마나 좋으려나’ 이런 소리를 자주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그림자였던 이생을 애타게 추억하며 사는 이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과 화해하지 못한다는 것이 치욕이고 불명예인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나타내고 보여주신 예수님을 통해 그 진실하심과 깊은 사랑과 온유하심과 믿음직함을 자꾸 배워서 하나님에 대해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 싶고 믿어지고 점점 그 사랑에 대한 신뢰감이 드는 것입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땀 흘려 기도하시는 주님 곁에서 잠든 제자들을 보고 주님이 뭐라고 하십니까?‘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어쩜 이렇게 우리 맘을 잘 아시잖아요?섭섭함보다 오히려 측은히 여기시는 주님이시기에 오늘도 실수하고 부족하지만 하나님 앞에 나올 수 있는 것이죠. 우리를 천히 쓰는 진노의 그릇이 아니라 긍휼히 여기시고 금그릇 은그릇처럼 귀하게 쓰신다는 게 얼마나 감사하고 영광입니까? 우리가 무슨 금 그릇, 은 그릇 같이 고귀한 자들입니까?다 투박하고 깨지기 쉬운 질그릇 같았지만 예수님을 모심으로 금 그릇 같이 귀한 존재가 된 것이죠. 그렇기에 이제는 우리를 하나님이 우리를 귀하게 사용하시도록 내어 드리는 삶이 되시기를 축복드립니다. 2. 그러면 어떻게 하면 귀히 쓰시는 그릇이 될 수 있는지를 알아보겠습니다. 21절,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임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 아무리 하나님의 귀한 그릇들이라 해도 귀히 쓰시는 그릇이 되려면 자기를 깨끗하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보면 우리 생각과 다르죠. 우리는 큰 그릇이 되어야 귀히 쓰일 것 같잖아요?더 성공하고, 확장되고, 많은 사람을 관리하고, 양적으로 커지는 사람이 큰 그릇이고 그런 사람을 하나님도 귀하게 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부모들이야 가능하면 자식들을 세상에서 큰 그릇으로 기르고 싶어 하죠. 그게 마음대로 잘 안되면 자식에게도 실망하고 상처를 주기도 합니다. 미국 LA에서 입시학원을 하는 한 권사님에게 공부 잘 하는 딸이 하나 있었습니다. 서부에선 공부 잘하는 학생들이 목표로 하는 최고의 대학이 스탠포드 대학이라고 합니다. 딸이 이 대학에 들어가면 학원을 경영하는 권사님 입장에선 학원 PR도 되고 여러 가지로 좋은 점이 많았겠죠. 그런데 얼마 전 딸이 그 대학에 지원했다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그 교회 담임목사님 말이 자기가 심방을 갔는데 일어나지도 않고 누웠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틀 뒤 권사님이 자리를 털고 일어나셨습니다. 어떻게 그러셨을까요? 딸보다 공부를 더 잘하던 아이도 떨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딸은 여전히 낙방의 아픔을 안고 달라진 게 하나도 없는 데 엄마는 그 말에 털고 일어났다는 게 무엇을 말합니까? 그러니까 사람이 자식에게 까지 이기적일 수가 있다는 것이죠. 사람들은 다 세상에서 큰 그릇 될 생각을 하고 자식이라도 큰 그릇이 되어서 내 후광이 되어주길 바랍니다. 하나님도 그런 큰 그릇을 좋아하실 것 같습니까? 본문 말씀을 보면 사이즈가 큰 그릇은 전혀 언급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쓰시기 위해 큰 그릇이 되라는 말씀은 없습니다. 잘 생각해 보십시오. 금그릇, 은그릇은 그렇게 큰 그릇들이 아닙니다. 오히려 나무그릇, 질그릇 같은 게 훨씬 크죠. 양도 크고 그 속도 좋은 질로 꽉 찰 수는 없을지 모릅니다. 기적도 큰 기적은 너무 비현실적이라 체험의 영역에 들어오기가 힘듭니다. 그냥 놀라 어안이 벙벙할 뿐이죠. 간증을 들어보면 공통적인 게 하나님이 큰 기적을 베풀어 주셨는데 얼마 안가 믿음에서 떠났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일상의 작은 기적들이야말로 잔잔하게 마음을 적시고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아가게 합니다. 사실 세상에서 큰 그릇이 되면 세상이 단물 다 빨아 먹을 때까지 놓아주지 않습니다. 자식들 공부가 제일 중요하고, 청년들은 사회의 성공을 우선으로 삼고, 세상에서 큰 그릇되기를 최종 목표로 하면 반드시 후회할 날이 옵니다. 하나님은 큰 그릇이 되라고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이 쓰시는 그릇은 크던 작던 속이 깨끗한 그릇입니다. 물론 내면이 깨끗한 사람은 하나님만 쓰시는 게 아니라 세상 사람들도 쓰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내면을 깨끗하게 해서 하나님이 쓰시는 귀한 그릇이 되면 세상일을 하면서도 하나님께 쓰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큰 인물이 되면서도 세상 일군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군이 될 수 있는 것이죠. 그러면 죄인 우리가 어떻게 내면이 깨끗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까? 19절에 보면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마다 불의에서 떠날지어다 라고 합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의 교훈을 따르는 것이 불의에서 떠나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깨끗하게 하신다고 이미 알려 주셨습니다. 시편 119장 9 청년이 무엇으로 그 행실을 깨끗케 하리이까 주의 말씀을 따라 삼갈 것이니이다 예수님의 교훈을 따라 삼가서 내 행실을 깨끗하게 해나가면 되는 것입니다. 또 133절, 나의 발걸음을 주의 말씀에 굳게 세우시고 아무 죄악이 나를 주장치 못하게 하소서 주의 말씀을 따라 가면 죄로 더러워져 끌려다니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큰 위력이 있습니다. 성령이 역사하시는 말씀은 죽은 양심을 일깨워 죄가 부끄러운 줄을 알게 합니다. 말씀이 생명력이 있어 마음과 생각을 바른 길로 몰고 가십니다. 히브리서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양날이 선 칼이라고 하셨잖아요? 우리 골수와 관절에 달라붙은 암적인 죄와 악한 근성을 수술할 수 있는 것은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말씀의 능력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깨끗하게 하기 위해 올해도 말씀을 가까이 하고 말씀에 제어 받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오늘 다시 한번 다짐하시길 바랍니다. 선포되는 말씀인 설교가 나를 복되게 교정한다는 것을 믿으시고 설교에 집중하고 한 주간 그 말씀을 지키기 위해 사시길 축복드립니다. 집에서, 차 안에서 유튜브 보지 마시고 성경앱을 깔고 성경을 보시면 좋습니다. 그리고 젊은 세대는 올해도 매일성경으로 말씀 한 장 한 장을 깊이 들여다 보고 내게 주시는 말씀을 붙들고 살아가길 바랍니다. 그리고 이런 생활을 계속 유지하고 실천할 수 있도록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단지 직장생활, 가정생활, 학교생활 자체로 끝내는 게 아니라 그곳에서 하나님의 목적을 따라 사용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하나님이 우리를 싸울 때 쓰는 칼이나 창으로 비유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릇으로 비유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저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귀히 사용하실 때 그 방법이 무언가를 담는다는 데 중점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누군가를 품게 하신다는 것이죠. 하나님이 우리를 귀히 쓰시려고 한다면 그것은 당연히 사람에게 쓰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무슨 건축이나 예술이나 기술에 목적이 있으시겠습니까? 앞에서 바울사도는 감옥에 까지 갇히게 된 이유를 이렇게 밝힙니다. 내가 택함 받은 자들을 위하여 모든 것을 참음은 그들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원을 영원한 영광과 함께 받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이 다른 사람들도 그리스도의 구원을 받게 하도록 우리를 쓰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 안에 누군가를 품는 것입니다. 이때는 우리가 넓은 그릇, 큰 그릇이 되어야 합니다. 너무 마음이 좁고 옹졸해서 누구 하나 온전히 품지 못하는 그런 간장종지 같은 그릇이 아니라 품이 넓어 많은 사람을 품는 그런 그릇이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 자신의 문제를 끌어 안고도 주님의 교회와 다른 사람들, 위로해야 할 성도들을 품을 수 있는 그런 그릇이 되는 올 한해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오늘 새해 첫 주일 하나님께서 우리의 행복과 보람을 위해 주신 말씀을 올해 살아가는 중점이 되게 하시길 축복드립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것이라도 하나님께 귀히 쓰임 받는 그릇이 되고 나를 보내신 주님의 교회를 위해 헌신하고 말씀과 기도로 나쁜 것들을 버리고 깨끗한 그릇이 되고 품을 넉넉히 해서, 가족을 품고, 내가 만나는 사람들을 품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는 그런 모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올해도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아시고 준비하신 하나님께서 필요한 때에 풍성하게 공급해 주시며 기쁘시게 우리를 인도해 가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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