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부자들의 추태가 사회문제시 되며 유한양행의 창업주이고 독실한 신자였던 유일한 박사의 유언이 다시 주목을 받고 있다고 합니다.
TV의 한 프로그램에 다시 조명된 유일한박사의 유언을 다섯가지로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당시 7살이던 손녀에게는 대학졸업까지 학자금으로 만불을 준다.
딸에게는 유한공고 안의 묘소와 주변 땅 5천평을 주니 유한 동산으로 꾸며 학생들이 드나들게 해라.
내 주식은 전부 한국사회와 교육기금에 기증한다.
아내는 딸이 잘 돌보아주기 바란다.
아들에게는 대학까지 졸업시켰으니 앞으로는 자립하여 살아가거라.
너무 충격적이지 않습니까?
이런 유언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의 세상에 대한 관점이 보통사람들과 분명히 다르다는 것입니다.
고인이 된 황수관박사님이 아버지가 위험한 수술을 앞두고 수술실 앞에서 자기 손에 쥐어주었던 유언장에 대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아버지가 수술실에 들어간 다음 유언장을 펼쳐보니 거기엔 ‘봉사’라는 딱 한 단어가 써있었다고 합니다.
성도님들은 자녀들에게, 가족들에게 어떤 유언을 남기실지 생각해 보셨나요?
사랑하는 이들이 이 땅에서 어떻게 살기를 바라고 생을 마감하실지요.
한 복지단체의 유언장쓰기 행사에 참여한 내용들을 보니 일반적인 사람들이 자녀를 위해 남기는 유언장은 대개 같다고 하더군요.
'다른 집처럼 잘 먹이지 못 하고, 잘 입히지 못 하고, 공부 많이 못 시켜서 미안하다. 그러나 너희들이 있어서 참 행복했다.'
이 단체에서 몇 만명의 유언장을 받아봤지만 '공부 잘해서 1등 해라, 무슨 대학에 꼭 들어가라, 유학 가서 박사 되라' 그런 말은 없었다고 합니다.
죽음을 생각하면 지금 사는 데 무엇이 중요한지 명료해지는 것이죠.
이번에 사우디아라비아의 압둘라국왕이 죽으며 18조4천억의 재산을 한푼도 못 가져갔습니다.
바나바리서치가 조사한 기독교인들의 유언1위는 '천국에서 만나자'였습니다..
최근 어머니의 병석을 지켜보다 보니 사람들이 살 생각만 하고 죽을 생각들은 참 안하고 사는구나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매일 예고도 없이 죽는 사람들을 주변에서 수없이 보는데도 그 일이 나와 상관없을 것 같이 사람들은 삽니다.
죽음이란 분명한 현실이 내게도 일어난다는 것 자체를 전혀 실감 못하는 것 같습니다.
그게 맞는 것일겁니다.
사실상 인간은 영원히 사는 존재이기에 죽음을 두려워하면서도 한편 자기가 죽어서 사라질 것 같지가 않은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우리는 이 땅에서의 생을 마감하고 영원한 다음 세상을 살게됩니다.
오늘 본문인 디모데후서는 바울사도가 죽음을 예감하며 로마 옥중에서 쓴 마지막 편지로 알려져 있습니다.
사랑하는 영적 아들인 디모데에게 보낸 유언과 같은 편지입니다.
믿음의 대사도인 바울의 유언을 살펴보며 우리 믿음의 길에 중요한 단서를 발견하고 기준을 잘 세울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먼저 이 편지가 왜 씌여졌는지를 알아야 본문의 내용을 바르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당시 로마의 상황은 로마시가지가 전소된 대화재 이후입니다.
그런데 이 화재가 낡고 복잡한 로마를 신시가지로 만들고 싶어 하던 네로에 의한 고의적 방화라는 소문이 떠돌았습니다.
네로황제가 불타는 로마를 보며 흥이 나서 ‘로마는 불타고 있는가’라는 시를 지었다는 뒷이야기가 있지 않습니까?
아내와 자식을 죽일 정도로 정신질환이 심각했던 네로황제를 생각할 때 타당성이 있는 이야기입니다.
로마의 화재로 인해 폭동이 나고 국민들의 분노가 점점 자신을 향하자 급박해진 네로 황제는 기독교인들에게 방화의 누명을 뒤집어 씌웠습니다.
색출 된 기독교인들은 화형과 처참한 고문을 통해 죽어갔습니다.
심지어 나무에 매달려 인간횃불이 되어 네로의 궁정을 밝히기도 했다고 역사가 유세비우스는 전합니다.
바울사도는 그 즈음 로마감옥에 갇혔다 풀려났었지만 이 소식을 듣고 다시 로마로 들어간 듯 합니다.
당연히 기독교의 주동자로 체포되어 다시 감옥에 갇혔던 것이죠.
그리고 본서에서 자신의 죽음이 임박했다는 것을 예견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음 장 6절을 보면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예견한대로 이번 투옥에서 바울사도는 사형언도를 받고 즉각 참수형에 처해집니다.
이런 말씀을 들으면 우리 마음이 좀 어두워지게 되죠.
바울사도 같이 예수님을 위해, 복음을 위해 모든 것을 다 바쳤는데 결과가 참수형이라니.
우리는 요셉처럼 노예로, 감옥으로 끌려 다녔지만 결국 애굽의 총리가 되어 세상의 부귀와 영화를 누렸더라. 이런 결말을 듣고 싶잖습니까?
정말 저도 그런 결말을 좋아합니다.
지난 일년 열심히 하나님을 잘 믿었더니, 사업도 번창하고 자식은 대학에 잘 들어가고, 좋은 직장에서 오라고 하고. 원하던 대로 일이 잘 풀렸다.
이런 결과를 주셔야 우리가 힘든 현실도 이기고 신체의 피곤함도 견디며 끝까지 주님을 섬길 것 아닙니까?
그런데 그게 아니라 성도들이 시험에 들고 낙망하게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오늘 이 편지를 보내게 된 이유도 어쩌면 우리와 같은 이유로 낙망해 있는 디모데를 위한 바울의 위로이고 실상에 대한 믿음을 확신시키기 위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에베소에 있던 디모데에게도 바울의 수감소식이 들렸습니다.
디모데가 바울이 당하고 있는 이 고난을 받아들이기가 힘들었을 것입니다.
이번 투옥에서 바울이 무사히 풀려나기 힘들거라는 걸 예상했을 것입니다.
칠십이 다 되 지하 감옥에 갇힌 백발의 노인 바울사도를 생각할 때 디모데가 울었다고 합니다.
1장4절의 바울이 네 눈물을 생각해서 너를 다시 보기를 원한다고 편지를 써내려갑니다.
모두가 떠나고 어두운 지하 감옥에 갇혀 고독하게 죽음을 맞을 바울사도를 생각하니 이 상황을 편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바울은 이 편지에서 그의 곁에서 모두가 떠났다고 씁니다.
1장15절을 보면 아시아에 있는 모든 사람이 나를 버린 이 일을 네가 아나니 4장10절에서는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16절에서 또 이야기합니다.
내가 처음 변명할 때에 나와 함께 한 자가 하나도 없고 다 나를 버렸으나 그들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기를 원하노라
평생 주님을 위해 고난을 받으며 살았으면 바울사도의 노년이 편안하게 복을 누리며 장수하게 해주셔야 맞는 것 아니겠습니까?
모두가 떠난 뒤 초라하게 지하 감옥에 갇힌 늙은 바울사도를 생각할 때, 디모데가 측은하고, 화도 나고, 창피하기도 하고, 두렵기도 하고, 그랬다는 것입니다.
그걸 알고 있는 바울사도가 1장8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는 내가 우리 주를 증언함과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우리가 다 그렇지 않습니까?
열심히 믿음으로 살아가는 데 상황이 좀처럼 나아지지 않고 오히려 점점 쇠퇴해가는 것 같을 때 안으로는 실망하고 밖으로는 남보기 창피합니다.
그래서 믿음이 흔들리고 의심이 들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은 이 상황을 알고 계신건가?
왜 돕지 않으시는가?
내가 제대로 가고 있는 것인가?
이런 위기가 평신도도 아니고 에베소교회를 목회하고 있는 디모데목사에게 일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믿음이란 것이 얼마나 믿을게 못되는지 아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붙잡지 않으셨다면 우리가 지금 어디에 가 있을지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칼빈은 우리의 믿음에는 의심도 포함된다고 말한바 있습니다.
이렇게 낙심한 디모데를 보고 바울사도는 오히려 상황을 직시하라고 합니다.
신자들의 박해와 고난이 왜 나쁘냐는 것입니다.
12절에 보면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 고 말씀합니다.
박해는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바울사도는 자신의 신앙의 여정을 10절에서 이렇게 회고합니다.
나의 교훈과 행실과 의향과 믿음과 오래 참음과 사랑과 인내와 박해 받음과 고난을 생각해보라.
바울은 자신의 인생을 당당하게 평가합니다.
복음을 위해 모든 것을 쏟아부었고 흠잡을 데 없이 처신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박해와 고난을 함께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안디옥과 이고니온과 루스드라에서 바울이 당했던 박해의 사건을 꼭 집어서 디모데에게 상기시킵니다.
이 이야기는 사도행전 14장에 누가가 자세히 기록해 놓은 사건입니다.
바울이 1차전도 여행 중 이고니온에서 있었던 일을 말합니다.
그때 과격한 유대인들이 몰려와 바울을 돌로 쳐서 거의 죽었다 생각하고 시외로 내다 버린 일이 있었습니다.
제자들이 죽은 바울을 둘러서서 망연히 바라보고 있을 때 바울이 다시 깨어나서 다시 성으로 들어가 전도했다고 누가는 기록합니다.
네가 그 때 이것을 직접 보지 않았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결과는 너도 알다시피 주께서 이 모든 것 가운데서 나를 건지셨느니라. 라고 말합니다.
그 주님께서 어떤 위기에서든 원하시면, 지금도 건져내실 거라는 것입니다.
또 당시 고난 중에 이루어진 구원의 큰 일을 기억하게 하라는 뜻입니다.
사도행전에서 누가는 당시에 유대와 헬라의 허다한 무리가 예수님을 믿었고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았다고 기록합니다.
그리고 그 도시에서 그때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은 사람이 바로 디모데입니다.
사선을 넘어갔던 그 고난 중에도 예수님은 신실하게 바울을 지켜주셨고 바울을 통해 영혼을 구원하는 큰 일을 이루셨다는 것입니다.
지금 이 상황도 예수님이 여전히 나를 지키고 계시고, 이 고난에는 이유가 있다고 4장17절에서 이렇게 다시 말합니다.
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에게 힘을 주심은 나로 말미암아 선포된 말씀이 온전히 전파되어 모든 이방인이 듣게 하려 하심이니
이 로마의 법정에서 신자들의 무죄를 변호하며 이방인 로마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할 기회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신자들에게 고난이 있다면 하나님께서 그것을 통해 반드시 선한 일을 이루실 목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
그 고난과 박해는 무익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하신 목적과 섭리라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산다는 것은 세속을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고 그 가르침을 따라 사는 것을 말합니다.
그냥 착하고 도덕적으로 산다면 사람들은 절대 박해하지 않습니다.
법 없이도 살 사람이라고 오히려 칭찬받습니다.
우리에게 박해가 없다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 있지 않다는 뜻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박해를 받는다는 것은 신자들의 성숙을 위한 내적인 고난과 외부의 박해를 말합니다.
특히 외부의 박해는 복음의 증인이 되는 경건한 삶에서 옵니다.
임박한 심판과 십자가의 구원의 길을 말과 행실로 전파하는 것이 곧 세상을 향한 경건한 삶입니다.
이때 사생결단으로 막으려는 악의 세력의 공세가 있습니다.
우리 삶이 영혼의 구원과 관련되어 보십시오.
주위에 회오리가 불기 시작하고 환경이 널을 뜁니다.
우리 영혼이 좀 성장하고 잘되려고 하면 절대로 세상과 사탄이 우릴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분명히 밝히시길 세상이 너희를 미워할거라고 말씀했습니다.
복음을 맡은 것은 이렇게 우리 삶을 불편하게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경건하게 믿는 것을 드러내고 죄와 심판과 십자가의 구원을 말하는 순간부터 사람들은 꺼려합니다.
저들 스스로가 우리를 다른 세상 사람 취급을 합니다.
어찌보면 세상이 우리가 자기들에게 속하지 않았다는 것을 더 잘 알아보는 셈입니다.
오히려 신자들은 자기의 소속을 확신하지 못하고 세상을 기웃거리고 세상에 기대려고 하는 것이죠.
예수님을 믿는 것으로 인해 박해가 오고, 믿음이 없이 세상과 섞여 사는 것이 더 쉬워 보이고, 더 잘되는 것 같아 보여 흔들린다면 성경은 이렇게 밝히 말씀합니다.
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자들은 더욱 악하여져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나니
세상이 그럴듯하게 꾸며 우리를 속이려드는 것이라는 겁니다.
구원받지 못한 세속인의 특징은 악하고 속이는 자들이라고 합니다.
세상은 속고 속이며 점점 더 악을 행하고 심판 아래 놓여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인간성이 괜찮던데 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저들이 우리에게 점잖게 대하는지 모르지만 그 내면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악해져간다는 게 성경이 가르쳐주는 분명한 진실입니다.
자신의 타락한 속성과 그를 지배하는 사탄의 영향을 받아 점점 악해져갈 수밖에 없습니다.
속일 수밖에 없는 게 죄인들의 본성적 한계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저들이 거짓의 아비인 사탄에 속해있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서로 속이고 속고 악해져 가는 것이 세상입니다.
얼마 전 뉴스에 보니 사고로 영구장애인 판정을 받은 사람에게 보험금을 지급하지 않고 죽을 때 까지 미루고 있는 보험회사가 있더군요.
장애가 되었을 때보다 사망했을 때 보험지급액이 더 적기 때문에 일급장애인으로 누워있는 사람에게 당장 보험금을 주지 않고 죽기를 기다리며 차일피일 미룬다는 겁니다.
삼성이든, 현대든, 대기업은 물론이고 구멍가게 자영업자들도 다 속여서 이익을 더 내려고 양심은 내다 버린 지 오래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얼마나 얄팍하게 머리를 쓰는지 모릅니다.
신자들은 내 이익을 위해서 남을 이용하면 안됩니다.
사실 세상의 번영과 물질적인 풍요와 성공은 우리가 쉽게 포기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닙니다.
그런 것에 초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지금 그게 내 앞에서 멀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감히 예수님께도 세상나라의 화려함을 보여주며 유혹했을 정도입니다.
당장 돈이 되고, 더 나은 환경이 되고, 더 안전하게 보이면 사람들은 영혼과 믿음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선 좋은 것을 갖고 나서 믿어도 되지 않겠냐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오늘 바울사도를 통해 분명하게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뜻은 예수님 안에서 세속과 다르게 경건하게 살며 세상의 박해를 견디며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담대하게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삶의 원칙을 분명하게 정해야 합니다.
이 땅에서 80년을 모두 두고 가야 할 육체를 위해 살 것이냐 내생의 영원한 사라지지 않는 영광을 위해 살 것이냐.
디모데가 슬퍼하는 바울의 죽음이 단지 억울한 죽음입니까?
바울이 부와 편안을 누리다 점점 늙어 헛소리나 하다 죽어가는 것이 과연 더 나은 결말입니까?
평생 예수님을 위해 살아온 바울답게 예수님에 대한 사랑과 믿음을 마지막 죽음으로 증명해 보이고 행복하게 죽는 것이 그렇게 비극이냐는 것입니다.
그걸 분명하게 정립하지 않으면 원칙 없이 이 소리 저 소리에 현혹되고 무가치한 것을 쫒다 진정 내게 생명이 되는 영원한 가치를 잃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며 경건하게 사는 것은 불편하고 따가운 눈총을 받고 고난을 받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 때문에 성질대로 못하고 손해를 본다는 생각이 들 때, 하나님만 아니면 좀 쉽게 살 수 있을텐 데 하는 마음이 불쑥 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잊어버리면 안됩니다.
예수님도 나만 아니면 그런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실 필요가 없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아니면 이 고생할 필요가 없는 일을 지금 견디고 계시다면 그것이야말로 장차 주님 앞에 섰을 때 유일한 기쁨과 영광이 될 것입니다.
이태리의 밀라노 성당 출입문에 라틴어로 이런 글귀가 새겨져 있다고 합니다.
십자가 오른쪽 밑에는 '우리를 즐겁게 하는 것은 모두 순간적인 것이다'
그 왼쪽 밑에는 '우리를 괴롭게 하는 것도 모두 순간적인 것이다'
그리고 그 십자가 위에는, '영원한 것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
우리가 영원한 가치를 알고 내 인생을 살아갈 때 유한양행의 유일한박사님처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그리고 이 땅의 사람들을 위해 정말 가치있는 삶을 멋지게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삶이 힘들고 고난이 오면 누구나 흔들리게 됩니다.
디모데도 흔들리고 있습니다.
아버지 같이 의지했던 바울이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혼자 사역을 감당해야한다는 부담 속에 떨고 있는 디모데를 향해 바울사도는 단호하게 말씀합니다.
14절에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우리가 가지고 있는 보배, 우리 힘으로 결코 가질 수 없었던 하나님의 보배로운 선물인 구원을 뺏으려고 마구 흔드는 사탄의 세력들을 물리치고 끝까지 견디기 위해서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는 방법 밖에 없습니다.
네가 이미 배웠고 확신했던 것 가운데 머물라는 것입니다.
시험을 만나고 믿음으로 인해 고난이 올 때 세상을 사랑한 데마처럼 데살로니가로 떠나지 않으려면 성경을 배우고 깨달은 확고한 신념이 있어야 합니다.
그 성경이야말로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한다고 말씀합니다.
성경은 예수그리스도 안에만 있는 구원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우리를 구원으로 이끌어줍니다.
또 16절을 보면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다고 합니다.
성경은 사람들이 사색해서 써놓은 것도 아니고 단순히 역사를 기록해 놓은 것도 아닙니다.
우리를 교훈하고 책망하고 바르게 하고 의로 교육하기 위해 하나님의 영이기록 하는 사람들을 감동하셔서 쓰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성령께서 감동하시고 해석해 주셔야 깨달아집니다.
성령께서 우리가 펼쳐 놓은 성경을 비춰주시지 않으면 그냥 평면적으로 보이지만 성령께서 말씀을 비추시면 성경이 입체적으로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 깊이가 한없고 그 안의 말씀이 나와 내게 일어나는 일들을 확실하게 보게 해주십니다.
그래서 말씀을 깨달으면 마음이 시원하게 뻥 뚫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몰라서 답답한 게 아니라 사실 하나님을 모르고, 나를 몰라서 답답한 것입니다.
성경의 교훈과 책망은 도덕교과서와 다릅니다.
성령이 역사하시는 말씀을 통해 우리를 보여주시고 잘못을 책망하시면 그 말씀이 우리를 회개의 자리로 몰아가십니다.
이것이 살아 역사하는 진리의 힘입니다.
그렇게 깨닫고 체험되어진 성경만이 우리를 온전하게 하고 이 악한세대에서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확실한 지식이 없다면 그것은 시련의 때, 박해와 유혹이 있을 때 지탱이 될 수 없습니다.
일상의 생활 속에서 잠잠히 내가 믿는 하나님과 구주 예수님을 떠올릴 때 내 머리가 성경에 나타난 진리와 하나님을 분명하게 나에게 설명해 주고 그것이 다시 사실로 분명히 믿어지는 것이 진짜 믿음입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경고합니다.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우리가 웅장한 예배와 찬양과 프로그램으로 인간의 종교의 자리를 채우는 것으로 만족하다면 그것은 이슬람사원에 가서도 얼마든지 채울 수 있습니다.
산 속에 있는 고즈넉한 암자에 가서 독경을 해도 인간의 타락한 종교심은 얼마든지 채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성령이 우리 마음을 비추어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직접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교통하시는 그런 예배가 아니면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없는 타락한 종교일 뿐입니다.
다니엘은 매일 드리는 제사를 무력화시킬 적그리스도의 출현과 종말에 대해 예언했습니다.
예수님도 재차 이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리에 세워질 가증한 것을 예언하셨습니다.
역사적으로 이 사건들이 실제 일어났고, 지금도 일어나고 있으며, 앞으로도 계속 일어날 것입니다.
요한사도는 이미 우리 사이에 그 적그리스도의 영이 활동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어떤 삶의 혼란과 사탄의 역사가 유일하게 우리에게 주신 말씀인 성경을 통한 하나님과의 진정한 예배를 가로막을지 모릅니다.
이미 많은 예배가 살아계신 하나님과 교통하지 않고 맘모니즘과 세속과 번영을 경배하고 있을지 모릅니다.
바울사도와 같은 선지자들이 목숨을 버리며 전승한 경건한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당장 신자들을 미혹하는 사술의 영의 지껄임에 열광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신명기 32장 20절은 이런 세대에 대해 말씀합니다.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내 얼굴을 숨겨 그들에게 보이지 않게 하고 그들의 종말의 어떠함을 보리니 그들은 심히 패역한 종류요 무신한 자녀임이로다
우리가 말씀을 펴고 성령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음성을 듣고 그 말씀을 통해 계시하시는 하나님을 불굴의 의지로 따르길 원합니다.
올해 표어가 하나님의 모든 뜻 가운데서 완전하고 확신 있게 서라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그 말씀이 우리를 이끄시도록 할 때 실패하지 않는 일생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올해도 영적인 기초를 한 계단 한 계단 놓는 마음으로 말씀을 배우고 지키며 말씀 안에 굳건히 성장되는 은혜가 모두에게 있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2015.1.25 주일설교 남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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