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성탄을 기다리는 대림절 절기가 되었습니다.
연말이 가까워지면 늘 하는 말이지만 한해가 정말 빨리 지나가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을 감사하며 준비하는 대림절이니 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는지를 다시 생각해 보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그래서 설교제목이 대림절에 다시 듣는 복음입니다.
가끔 연예인들이 나오는 예능 프로그램을 볼 때가 있습니다.
어떤 가수가 단 몇 초의 전주만 듣고 누가 부른 어떤 곡인지를 척척 맞추는 걸 보고 놀란 적이 있습니다.
직업이 가수라면 그 정도로 알고 있다는 게 전문가답다, 노력하는구나, 좋게 보이더군요.
예수님을 믿는 것은 우리가 가진 전공이나 직업보다 중요합니다.
혹 직업은 버려야 할 순간이 와도 예수님을 버릴 수는 없잖아요?
직업보다 더 중요한 예수님에 대해 신자들은 얼마나 알고 있을까요?예수님에 대한 지식과 경험이 너무 부족한 게 우리의 고민입니다.
오늘 로마서는 바울사도가 한번도 가 본적이 없는 로마교회의 성도들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로마교회는 성경에도 교회사에도 세운 사람에 대한 정보가 없습니다.
세계의 한 복판, 화려하고 세속적이고 우상숭배가 만연한 로마에 어쩌다 생긴 진귀한 교회죠.
그렇기에 바울사도의 관심도 각별했을 것입니다.
잘 알려진 교회 지도자도 없으니 이들이 바른 복음을 잘 믿고 있는지도 염려스러웠을 것입니다.
그런 마음에 오늘 편지의 서두에 다정한 인사말도 없이 예수님의 복음부터 꺼내고 있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우리가 사는 사회도 당시 로마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믿지 않는 세속사회입니다.
그 사회 속에서 다 감각적으로 살다 왔잖아요?
그러나 신자들은 감각적인 것들에 치우치지 않도록 자꾸 진리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진리가 삶의 길을 제대로 인도해 주기 때문입니다.
지난 주도 그러셨겠지만 늘 사는 게 고달프잖아요?
세상에서 힘들 때 힘내라는 말은 고맙지만 그렇다고 힘이 나지 않습니다.
성도들은 하나님이 믿어지고 확신이 될 때 힘이 납니다.
우리는 이미 문제의 해답이 하나님께 있다는 걸 다 압니다.
지난주도 예수님의 말씀대로 따르지 못하는 부족함을 느끼며 살았다면 그것은 육신의 소욕이 남아있는 성도들에게 당연한 갈등입니다.
그러나 믿음 자체에 뭔가 부족함을 느끼는 것은 다릅니다.
믿음의 갈등이라면 빨리 해결되어야 합니다.
성경은 믿음이 예수그리스도에 대해 들을 때 생긴다고 말씀합니다.
오늘 바울사도가 정리해 주는 예수님에 대해서 들을 때 성령께서 믿음을 주시고 더욱 돈독해지는 은혜를 부어주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1. 먼저 바울사도가 전하고, 교회가 믿는 복음이 무엇인가입니다.
복음은 말 그대로 좋은 소식, 복된 소식을 말합니다.
사람들에겐 각각 기다리는 소식, 반갑고 좋은 소식이 있을 것입니다.
지난주도 우리 성도님 중에 마음 졸이며 기다렸던 일들이 잘 되었다는 기쁜 뉴스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경험해 왔듯이 세상의 기쁜 소식들은 일시적이고 지나면 과거의 일이 됩니다.
오늘 1,2절을 잘 읽어보면 성경이 말씀하는 복음, 복된 뉴스는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것이라고 하는 걸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오셔서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소식이 바로 복음입니다.
복음서에서 예수님의 탄생을 알리러 온 가브리엘천사가 이렇게 말하죠.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예수님에 대한 소식이 가장 기쁜 소식이고 매순간 우리에게 복이 되는 소식인 것입니다.
지금도 우리는 예수님의 복음 안에서 영생과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는 것이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이 복음에 대해 미리 약속하셨다는 것입니다.
이 복음이 우리에게 좋은 것이라는 확신은 어디에서 출발합니까?
하나님이 성경을 통해 계속 이 복음을 약속해 오셨다는 것에 있습니다.
좋은 것을 약속하는 것이지 나쁜 것은 약속한다고 하지 않죠.
약속을 철썩 같이 할수록 가치 있고 좋은 것이잖아요?
하나님은 죄로 인해 파멸이 정해진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한 계획을 세우시고 반드시 그러겠다고 약속해 주신 것입니다.
사람들이 짓는 죄는 하나님을 거역하고 남에게 나쁜 짓을 하는 것으로 그치는 게 아닙니다.
죄는 자기 자신에게도 나쁜 짓을 합니다.
죄는 결국 자기 인격을 망치고 사람이 가진 희미한 하나님의 형상인 존엄과 존귀를 파괴시킵니다.
그래서 나쁜 짓 하면 사람이 천박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신사적인 사람일지라도 하나님을 부인할 때 보면 그 부드럽던 얼굴이 한순간 하나님께 대한 교만과 괴팍함을 드러냅니다.
인간의 죄는 하나님과 자신과 타인을 다 불행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 절망적인 운명에서 우리를 건져주시기 위해 하나님은 구원의 계획을 세우신 것입니다.
그것을 밝히시고, 성취하신 과정을 구약성경의 역사 속에 다 기록해 놓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잘 모르면 구원의 깊은 내막을 잘 모릅니다.
예수님이 성탄절 유대땅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셨잖아요?
왜 하필 거기서 태어나셔야 했습니까?
그곳은 다윗의 고향입니다.
이스라엘 역사 중에 목동 출신의 다윗을 불러내서 왕으로 세우셨잖아요?
그리고 장차 그의 자손 중에 인류를 구원할 메시야를 보내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의 구원자는 왕이시지만 다윗과 같은 온유한 목자의 마음을 가질 것을 예고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은 다윗이 태어났던 베들레헴에서 태어나는 게 좋은 것이죠.
이미 미가선지자를 통해 약속해 놓으셨잖아요?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성경역사를 통해 예수님을 이해하고 믿도록 수많은 예언을 하시고 그대로 이루신 것이죠.
예수님은 갑자기 나타나서 인류를 구원하시겠다고 한 게 아닙니다.
하나님과 나만을 생각한다면 나를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은 창세기 때부터 일해 오셨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을 잘 알수록 더 확신 있게 믿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2. 본문에서 바울사도는 이 복음의 핵심을 두 가지로 요약합니다.
1) 하나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육신으로 다윗의 혈통에서 태어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다윗의 가문에서 사람의 아들로 태어나셨습니다.
사람의 몸에서 태어나는 생명체는 완전한 사람입니다.
인간 역사상 사람이 사람 아닌 기이한 생명체를 낳은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다윗의 혈통인 요셉의 가문, 모친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셨다는 것은 완벽한 사람으로 태어나셨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베들레헴 말구유에 누워계신 예수님은 우영이처럼 연약하고 순수한 아기였습니다.
예수님은 키가 자람에 따라 거기에 맞게 지혜도 차츰 자라셨습니다.
예수님이 구약성경에 능통하셨잖아요?신적 능력으로 성경을 아신 게 아니라 경건한 부모 요셉과 마리아로부터 성경을 배우며 성장하신 것입니다.
물론 성령께서 함께 하신 역할이 있으시죠.
구약시대 하나님은 선지자들의 입을 통해 이스라엘과 모든 민족에 복이 될 구원자를 보내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그 메시야는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다고 했을 때 사람들은 당연히 다윗 가문의 한 왕자라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생각했던 대로 다윗의 가문에서 태어나셨죠.
물론 이미 몰락한 다윗왕조이기에 예수님은 왕자가 아닌 직업상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셨습니다.
누가 봐도 젊은 목수, 완벽한 인간이셨습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사역 때 인간의 힘으로 할 수 없는 수많은 기적을 보이셨지만 모든 기적은 성령님의 능력을 힘입어 행하신 것입니다.
예수님 스스로가 물 위를 걷는 그런 신체적 능력을 가지신 게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똑같은 사람의 몸으로 사셨기에 우리의 모든 생활고를 아시고 깨지기 쉬운 우리 마음과 육체에 얽힌 연약함을 아신다는 게 우리의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
구속에 있어서 왜 하나님의 아들, 제2위의 성자하나님께서 성령님을 의존해야 하는 완전한 한 인간으로 오셨는지는 너무나 중요합니다.
이 사실을 신약성경 히브서2장14절 부터 이렇게 해석해 줍니다.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백성의 죄를 속량하려 하심이라
무슨 말씀인지 뚜렷이 이해하지 못해도 요지가 무엇인지는 아시겠죠?
우리가 혈육을 가진 존재이기에 우리 죄를 대신 감당하시기 위해 우리와 똑같은 혈육을 가진 존재로 태어나셨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생명은 똑같은 인간의 생명으로만 대속할 수 있습니다.
천사는 우리를 대속하지 못합니다.
하나님 스스로도 우리를 대속하시지 못합니다.
우리를 대속하기 위해 똑같은 인간의 자격이 필요하셨기에 예수님은 다윗의 혈통으로 베들레헴에 태어나신 것입니다.
2) 또 한 가지 복음의 중요한 측면은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은 부활하심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심이 선포되었다고 하죠.
요셉과 마리아의 아들로 태어나신 예수님에 대해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갖겠습니까?예수님을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이다, 하나님의 피조물이다 생각할 수 있는 것이죠.
교회 역사 중 예수님을 하나님의 피조물로 보는 이단들이 있었습니다.
여호와의 증인도 예수님을 하나님이 아닌 피조물로 여깁니다.
예수님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도 예수님을 모세와 같은 성령과 능력이 충만한 지도자라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삼위일체의 2위 성자하나님으로 정확히 알았던 사람은 없었습니다.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라고 고백할 때 예수님이 그것은 스스로 깨달은 게 아니라 하나님이 계시하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라 다니던 삼년의 거의 모든 시간 예수님을 랍비여 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놀라운 일을 행하실 때마다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하고 수군거리잖아요?저 분의 정체가 도대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완전한 사람이시지만 하나님이시란 것을 선포한 사건이 바로 부활입니다.
이 세상에서 죽은 뒤에 다시 부활해서 살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것은 성경의 진리를 뒷받침 해 주는 것입니다.
뒤에 로마서 5장12절에서도 말씀합니다.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모든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는 증거인 것이죠.
유일하게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신 사람은 예수님 한 분이십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죄가 없다는 분명한 증거입니다.
예수님이 죄가 없으시기에 십자가에서 죽으시되 자신의 죄로 인해 죽으신 게 아니라 바로 남의 죄를 대신해서 죽으신 대속이 되는 것입니다.
대속하시고 부활하신 것은 나에 대한 속죄가 완벽하게 성취되었다는 것과 동시에 예수님은 육체를 지닌 인간만이 아니고 하나님이셨다는 것을 만천하에 명백히 드러내신 것이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 그리고 내 모든 죄를 완벽하게 속죄하셨다는 기쁜 소식이 복음입니다.
3. 이렇게 역사적인 예수그리스도을 알아야 우리 믿음이 신화적, 종교적인 믿음이 아니라 현재 진행되는 역사적인 믿음이 됩니다.
성경을 통해 하나님을 이렇게 확신해 가지 않으면 어느 순간 의혹에 휩싸입니다.
내가 믿는 것이 신화인지, 과거에 발생했던 한 종교인지, 지금 믿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과거의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나타나셔서 이렇게 말씀하셨죠.
나는 너희 조상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다.
예수님이 이 말씀을 인용하실 때 동사를 정확히 구분하십니다.
나는 과거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었고 과거 이삭의 하나님이었다가 아닙니다.
나는 현재 아브라함의 하나님이고 현재 이삭의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예수님께서 부활을 설명하시기 위해 말씀하셨습니다.
현재 아브라함이 살아있고 이삭도 살아있다는 뜻이죠.
한편 이 말씀은 하나님이 과거 그들의 하나님이시듯 현재 모세의 하나님시고 지금 우리의 하나님이시라는 뜻입니다
성경 역사 속에서 구원을 위해 일하셨던 하나님은 지금 쉬고 계시지 않습니다.
이 순간도 우리가 믿고 구원을 얻도록 일하고 계십니다.
그렇기에 바울이 로마교회 성도들을 위해 간구한 축복도 지금 동일하게 우리에게 임할 수 있는 것입니다.
7절, 로마에서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고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모든 자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그때 은혜와 평강을 주신 하나님은 지금도 부르심을 받고 나온 우리에게 동일한 은혜와 평강을 주시는 것이죠.
바울사도가 이제사 로마교회의 성도들에게 하나님과 예수그리스도의 축복을 빌어주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먼저 복음을 이해하고 믿은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을 잘 듣고 믿는 모두에게 이 은혜와 평강이 함께 하시리라 믿습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오늘 말씀이 성경과 구원의 원리를 중심으로 했기에 다소 딱딱하게 느껴졌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사도가 폐일언하고 서두에 던진 이 그리스도에 대한 진리는 우리의 생명과 같습니다.
이 진리를 알고 믿는 사람은 영생을 얻는 것이고 알지 못하고 믿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으로부터 영원히 분리되어 사는 고통을 겪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잃어버린 자녀들의 고통을 아시기에 하나님의 옷을 벗어 던지시고 인간의 옷을 입고 베들레헴에 내려오신 것입니다.
자녀를 잃어버린 고통을 그렇지 않은 사람이 어떻게 이해하겠습니까?
전에 김동0목사님이 막내아들을 잠깐 잃어버리신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부모들은 자식들 어릴 때 한번 정도 잃어 버려 보았을 것입니다.
저도 서원이를 파리에서 잠깐 잃어 버렸고 싱가포르에서 한번 잃어버렸습니다.
싱가포르에선 같이 버스를 타고 시내에 갔는데, 내려 보니 아이가 없는 거예요.
서원이가 저를 따라 내려야 되는데 못 내린 것이죠.
그때 가슴이 철렁 내려 앉았던 기억은 지금도 생생합니다.
김동0목사님 사모님이 아이가 없어졌는데 거의 실성한 여자처럼 되더랍니다.
다행히 금방 찾았지만 그 뒤로 사모님이 일 년 동안이나 밤마다 악몽을 꾸셨다고 합니다.
잘 때 옆 사람이 악몽 꾸는 것 알잖아요?
흔들어 깨우면 역시나 아들 잃어버리는 악몽을 꾸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막 아들을 찾아 어두운 방안을 더듬댑니다.
한 방에서 오글거리고 자던 시절 가 봤자 그 방 구석 어디에 있을텐데도 끌어다 옆에 눕히고야 사모님이 다시 잠이 들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를 잃어버리셨는데 하늘 보좌에 가만히 앉아계시겠습니까?
찾으러 내려 오셔야죠.
대속을 위한 댓가가 너무 크지만 기꺼이 그것을 감수하기 위해 베들레헴 마굿간에 오신 것입니다.
그 하나님은 과거에만 그러신게 아닙니다.
자녀 된 우리의 현재 모든 고통도 또한 느끼시고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오늘 구원의 원리와 이 사랑을 잘 이해하시고 믿을 때 이 모든 것을 희생하신 하나님께 가장 큰 기쁨을 돌려 드리는 것입니다.
그런 성도들이 되어서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을 날마다 누리며 살아가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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