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대림절-그리스도 안에 있는 선물 (로마서5장1절-4절)

남수연 2019. 12. 19. 02:31

성탄을 기다리는 대림절 절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지난 주엔 대림절에 다시 듣는 복음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복음은 인간에게 가장 복된 소식이고 그 소식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에 관한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오늘은 이 복음을 믿는 우리에게 일어난 놀라운 결과를 살펴보며 예수님의 선물에 놀라고 감격하는 시간이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1. 먼저 예수그리스도로 인해 우리는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우리 말 성경은 번역을 부드럽게 다듬어서 원래의 뜻이 제대로 드러나지 않는 경우가 좀 있습니다.

이 부분도 원문의 뜻은 화평을 누리자이런 청유형의 의도가 아닙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뒤 하나님의 평화를 이미 소유해 왔다라는 뜻입니다.

이미 평화를 누리고 있다는 뜻이죠.

, 이 화평은 먼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뒤 온다는 것입니다.

1) 그렇다면 하나님의 화평을 소유하기 위해서는 먼저 복음을 믿음으로 의롭게 되어야 하는 것이죠.

복음이 무엇인지 확실히 알고 있어야 하고 믿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지난 주 복음의 요지가 무엇인지 간단하게 요약했습니다.

예수님은 선지자들이 예언한대로 다윗의 혈통으로 완전한 인간으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께 갚아야 할 모든 죄값을 대신 십자가에서 갚으셨고 그 속죄의 완전함을 뒷받침하는 것이 부활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복음의 핵심이고 이 사실을 믿을 때 우리는 의롭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의 행위는 복음을 믿은 뒤에도 여전히 매일 불의합니다.

혹시 내 생각에 올바르다 하는 것조차도 객관적으로 옳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나름 이 정도면 올바르게 산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열 명의 지인들을 불러다 은밀하게 물어본다면 의외의 결과에 놀랄 것이 분명합니다.

사람들은 다 각자의 기준으로 다른 사람이 옳지 않다고 판단하거든요.

예수님도 판단 받으셨잖아요?

내 양심이 때로 내가 불의하다고 지적하고, 나를 아는 주변사람들이 내 잘못을 지적한다면 하나님이 보실 때야 내가 어떤 사람이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복음을 믿기에 의로운 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너그럽고 인자하고 자비로운 분이시기에 우리를 그렇게 대우해 주셨지만 그래서 우리가 의롭게 된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정당하게 그 몸으로 우리가 당할 모든 죄값을 완벽하게 치러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법정은 인간 법정과 다릅니다.

인간의 양심에 기록한 하나님의 법과 공의에 따라 모든 죄는 반드시 심판을 받고 죄값을 치러야 합니다.

지난 주 기사를 보니 미국의 한 주지사가 임기 막판에 아동성폭행범, 살인범들을 포함해 428면이나 사면해 주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분통이 터지게 하는 판결이 자주 나오죠.

하나님의 법정에선 어림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이렇게 죄에 대한 심판을 말할 때 사람들이 왜 끄떡도 하지 않습니까?

자기 죄의 심각성을 몰라서 그렇습니다.

내가 무슨 죄를 그렇게 심하게 지었기에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저렇게 고난을 받고 대속해야 하는지 이해가 안되는 것이죠.

우리가 매일 저지르는 자잘한 죄가 십자가에 달릴 만큼 크다고 생각되지 않는 게 당연할지 모릅니다.

죄 인식에 대한 도덕적 기준이 낮은데도 문제가 있지만 더 근본적인 죄 문제는 그게 아닙니다.

죄의 본질, 죄의 정체를 잘 모르는 것입니다.

사람의 죄의 본질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자체를 싫어하는 것이고 나대로 살겠다는 것입니다.

그 뿌리를 이 땅에서 해결하지 않으면 죽어서 하나님 앞이라고 달라지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죄인은 지금만이 아니라 영원히 평행선을 긋는 관계입니다.

예수님이 언급하신 심판의 장면을 눈여겨보면 사람이 하나님 면전에서도 죄를 합리화 하고 하나님을 흘겨보며 원망하는 걸 알 수 있잖아요?

우리도 그랬을 사람들인 데 예수님을 믿음으로 본성이 바뀌고 의로운 사람들이 된 것입니다.

이 믿음조차도 우리가 스스로 믿음 게 아니라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모두 다 복음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은 이미 너는 의롭다인정해 주신 것입니다.

 

2) 이렇게 의롭다 인정을 받았기에 우리는 현재 하나님과 더불어 평화를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베들레헴 구유에 예수님이 탄생하신 밤, 하늘에서 천군과 천사의 장엄한 찬송이 울려 퍼지는 걸 목격한 목자들의 증언을 마태는 기록하죠.

그 때 이렇게 천사들이 하나님을 찬양했다고 합니다.

하늘에는 영광, 땅에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신약성경에서의 평화, 화평은 구약성경의 샬롬을 말합니다.

성경에서 샬롬은 우리가 생각하는 사람 사회의 평화가 아닙니다.

샬롬은 원천적으로 하나님의 평화이고, 하나님과의 관계의 평화입니다.

그것은 진짜 평화이고 영원합니다.

인간 사이에서, 사람 사이에서 변하지 않는 영원한 평화는 없습니다.

가장 친밀한 가족 간의 평화라고 변하지 않던가요?

말 한마디에 평화가 깨지잖아요?

그래서 사람 간에는 설령 가족이고 부부라 해도 평화를 유지하려면 말도 조심하고, 경우도 따져서 행동해야 합니다.

우리가 남이가그러며 함부로 했다간 가족 관계도 영영 금이 갑니다.

남북 간, 북미 간에도 곧 평화가 오는 듯 하더니 지금 그렇지 않잖아요?

성탄절 선물로 한 방 쏘겠다고 으름장을 놓잖아요?

오직 하나님께만 있는 이 화평은 오직 복음을 믿는 자에게 임합니다.

하나님께 사람들은 두 종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과 화평하게 된 자, 그리고 나머지는 아직 원수 된 자입니다.

하나님은 성품 상 죄에 대해 진노하십니다.

하나님은 죄인에 대해 화평한 마음이실 수가 없습니다.

우리 같이 불의한 사람들도 뉴스에 나오는 온갖 죄를 보면 마음이 불편한데 하나님이 어떠시겠습니까?

우리의 죄값은 십자가에서 이미 완불되었기에 하나님 편에서도 우리를 보실 때 스스로도 화평하실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화평하게 된 자들만이 세상과도 화평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우리를 화평케 하는 자라고 하신 것입니다.

신자들은 마음만 먹고 행하면 누구와도 화평할 수가 있습니다.

사랑해버리면 되거든요.

사랑해 버리면 어떤 사람하고도 화평이 가능해집니다.

상대가 거부한다 해도 적어도 내 마음엔 거리낌이 없고 화평이 있습니다.

관계가 지옥인 사람이 있습니까?예수님의 계명대로 사랑해 버리면 화평이 옵니다.

그냥 지옥인 채로 살려면 안 사랑하면 되는 것이구요.

오늘 이 화평을 하나님과 그리고 이웃과 누리고 계십니까?내가 화평하게 되어야지 생각해서 마음이 평화로워 지는 게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서 이 화평은 예수님으로 말미암는다고 하잖아요?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고, 예수님께 가까이 할수록 이 평화가 저절로 우리 안에 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육신하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이 선물을 다 받으시고 매일 하나님과 사람과 화평을 누리며 사는 모두가 되시길 축원드립니다.

 

2. 그 다음 2절에서 복음을 믿는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 계속 됩니다.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 하느니라.

여기에서 원문의 뜻을 살려서 보면 예수님을 믿음으로 또 세 가지 선물이 주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세 가지는 믿음으로 서있다, 은혜 속에 있다, 즐겁게 되었다입니다.

1) 우리의 믿음은 이미 견고히 서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을 갖기까지 교회에 와서 복음과 하나님에 대해 배우고 성령께서 깨닫게 하시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어느 과정에서 어떤 순간에 믿음이 생겼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자기가 거듭난 때를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어느날 남다른 은혜를 깨달은 날은 있을 수 있지만 대개 이미 구원받은 상태에서 그런 은혜를 강하게 느낀 것입니다.

다만 믿음을 갖게 된 어느 순간부터 성도들의 그 믿음의 지위는 다시는 흔들리지 않고 취소되지 않습니다.

아니, 우리 장로교에서 발견한 성경의 중요한 교리는 이 믿음과 구원이 우리가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하나님께로부터 결정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부름을 받고 하나님 앞에 나와 믿는 성도들의 믿음은 견고히 서있고 취소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선물은 줬다가 뺏는 것이 아닙니다.

2) 성도들은 이미 매 순간 하나님의 모든 은혜 안에 살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우리는 누군가의 은혜를 입을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고마운 일이지만 어떤 면에선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래도 은혜를 받으면서 불편하지 않은 관계가 있다면 부모에게 받을 때죠.

자식들은 우리 돈으로 살아가면서도 당당하잖아요?

지난 주 기사에서 소득의 생애 주기라는 것을 보니까 25세까지는 적자 시기더군요.

26세부터 흑자가 되다가 59세가 되면 다시 적자가 늘어나서 65세 이상 노령층의 국가적 적자가 924000억원이라고 합니다.

자식들은 돈 한 푼 안 벌어오는 적자인생이면서도 우리 돈을 자기 돈처럼 쓰면서 고마워하지도 않습니다.

그렇게 키웠지만 부모들은 자식 돈 쓸 때 입장이 그렇게 당당하고 편치는 않죠.

우리가 하나님께 이 모든 은혜를 받으면서도 자식이라서 그렇게 당연하고 당당하게 받는 것 같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의 은혜는 자식을 향한 우리의 사랑처럼 아낌없이 부어지는 것이죠.

이 은혜가 없었다면 우리 삶이 어땠을까요?

이 모든 은혜가 예수님으로 인해 주신 선물인 것입니다.

3) 또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며 즐거워합니다.

성도들의 기쁨은 하나님의 영광을 알고 바라는데서 온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크고 위대하심을 많이 알수록 우리의 기쁨도 커집니다.

사람들이 추구하는 즐거움의 원천은 당연히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즐거움을 얻지 못한 사람들은 세상에서 쾌락과 재미를 찾죠.

그러나 그 즐거움은 환경과 조건에 좌우됩니다.

그렇기에 좋았던 기분도 아주 작은 근심거리에 한 순간 돌변하죠.

어느 날은 하루를 살면서 즐거운 기분이 전혀 들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스러우심을 알고 그 하나님을 구하고 높일 때 얻게 되는 진짜 즐거움은 세상에서 얻어지는 즐거움과 비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사도가 그 즐거움의 파워를 이렇게 증명하잖아요?3, 다만 이 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성도들의 즐거움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기에 설령 환난 중에서도 즐거워할 수 있는 막강한 파워라는 것입니다.

현실의 괴로움은 숨이 막힐 정도로 강력합니다.

감미로운 생각이나 말로 그 막강한 위력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즐거움은 그냥 기분 좋은 단어가 아니라 실제 존재하는 힘이기에 환난을 이기고 즐거워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분명히 괴로워야 하는 데 견딜만한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위로와 기쁨이 그 힘으로 고통을 다루기 때문입니다.

그렇다 해서 환난을 원하는 성도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이 즐거움과 환난을 연이어 언급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성도들은 반드시 시련 속에 살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 사는 세상의 구조적인 악 때문에 불가피하게 겪어야 되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받은 자녀들을 이런 시련 가운데서 성장시키신다고 합니다.

왜 우리를 시련 속에서 성장시키셔야만 할까요?

사람의 죄의 본질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죠?

성도들 마음에도 그 본성의 잔재가 남아있습니다.

예배드릴 때 까지는 괜찮은 데 하나님이 집까지, 직장까지 따라오시면 별로라는 것입니다.

왠만한 일은 내가 하고 필요할 때 찾아올 테니 거기 계시라는 것입니다.

우리 속에 여전히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이 죄의 본질 때문에 하나님은 자녀들에게 환난을 허용하십니다.

환난은 사람들의 환상을 깨고 하나님의 말씀이 옳은 걸 인정하게 합니다.

좋았던 사람에게 배신당하고 실망해 보지 않으면 죄인이 아닌 사람도 세상에 살고 있는 줄 착각하게 됩니다.

삶의 잔인한 얼굴을 마주쳐 보지 않으면 세상이 살만한데 하나님이 왜 자꾸 심판하시겠다는지 잘 모릅니다.

성도들도 사는 게 가시방석이어야 세상에 붙여 놓은 엉덩이를 일으켜 하나님을 향해 겨우 몸을 일으킵니다.

사람은 자기 고집대로 자기가 좋아하고 집착하는 것을 계속 따라갑니다.

환난이 없으면 사람은 하나님 없이 질주합니다.

지난 한 주도 내 사는 방식대로 직진했을 뿐이지 하나님께 귀를 기울이고 하나님께 들은 시간은 별로 없잖아요?

세상에 이런 일이란 프로그램을 보면 사람이 뭔가에 꽂혀서 집으로 주워오기 시작하다 나중엔 온갖 넝마쪼가리로 집을 가득 채웁니다.

좀 특이한 사람만 그런 게 아니라 본성적으로 사람은 자기 관심있는 것에 점점 기울어지고 점점 그것을 놓지 못해 집착합니다.

저는 교회 이전을 준비하다 제가 인테리어에 너무 집착하고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제가 원래 미술교사 출신이라 학교 환경구성을 담당했었거든요?

인테리어 공사를 하다 보니 과거에 하던 가락이 다시 나오는거예요.

성도님들은 요즘 뭐에 집착하십니까?

결국 모든 사람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대로 기울어져 집착하며 삽니다.

집착한다는 것은 그 영역에 다른 어떤 것도 용납하지 않는다는 것과 같습니다.

내가 좋아서 맹렬히 하고 있는 걸 다른 사람이 참견하면 싫어합니다.

결국은 하나님이 내가 계획한 일에 관여하는 것도 싫어한다는 뜻입니다.

어느 날 삶에 불청객이 찾아와 일상을 뒤집어 놓을 때 비로서 멈춰서 내가 하나님 없이 집착한 것들을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시련이라는 손님을 보내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끝까지 하나님보다 더 잘 해나가고 있는 나를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게 살게 내버려둔 사람들이 있습니다.

1장에서 바울사도는 마음에 하나님두기를 싫어하는 사람들을 원하는대로 살게 내버려 두셨다고 합니다.

결국은 브레이크 없이 달리다 파멸하는 것이죠.

하나님은 그래서 우리가 사랑하는 자녀임에도 불구하고 시련과 환난을 허용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은 허락하지 않으신다고 하십니다.

환난은 불청객처럼 아무 집에나 들어가지만 하나님께서는 손님을 골라서 우리에게 들여보내신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당하는 어떤 시련이든 겸손히 하나님의 뜻을 묻고 지혜를 얻어 대처하면 결국 이겨내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지금까지 살아 온 것이지 아니면 벌써 망했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은 더 수준 높은 단계로 우리를 성장시키십니다.

그러니까 바울사도는 환난을 당당하게 선물의 목록에 집어 넣는 것입니다.

환난이 우리에게 어떤 선물입니까?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라

시련이 없다면 사람은 견디고 참는 것을 배울 수 없습니다.

조급함을 다루지 못하면 매일이 시끄럽고 결국 삶의 큰 곤경을 당합니다.

잠언에선 조급한 자는 궁핍하게 된다고 경고합니다.

조급하면 가난해 진다는 말이 흥미롭죠?

또 조급한 것은 미련한 것이고 어리석은 자라고 합니다.

디모데후서는 조급함을 말세의 사람들의 특징이라고 합니다.

인내는 사람의 조급한 본성에 맞지 않기에 인내를 배우려는 사람은 없습니다.

어쩔 수 없는 환경에 처할 때 우리는 이를 악물고 그것을 견뎌낼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인내를 배우고 그 인내는 연단을 이룹니다.

연단은 인정받은 자질을 말합니다.

시련과 인내를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성도로서의 자격을 인정받게 된다는 것이죠.

인생에 어려움이 올 때 좋아할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께 선별되어서 왔다는 것을 알고, 어려움을 이겨냈을 때 얻을 유익과 하나님의 위로를 알면 환난 가운데서도 즐거워할 힘이 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과정을 통과해 가며 온전한 소망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소망은 무엇을 바라는 것이죠.

바라되 바랄만한 것을 바라는 것이 성경의 소망입니다.

우리가 바라야 할 참된 소망은 결국 하나님과 천국에 대한 것입니다.

환난이 없을 때 우리의 소망은 대부분 땅의 범위를 넘지 못합니다.

천국과 영원한 것에 소망을 두는 성도들은 환난을 통해 인내를 배우고 연단된 사람들입니다.

물론 세상일을 열심히 하면서도 천국의 소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을 천국을 이루는 방편으로 생각하면 되는 것이죠.

돈에 집착하면 망하지만 돈을 하나님나라를 위해 벌면 축복입니다.

오천명을 먹이는 사람이 되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지 오천명분을 혼자 깔고 앉아 먹으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그럴 수 있는 사람은 환난을 통해 인내를 배우고 연단이 되고 참된 소망을 깨달은 사람뿐입니다.

시련이 없다면 사람들은 목적을 오직 이 땅에 둘 수밖에 없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영원하고 보배로운 천국에 소망을 잃어버리지 않게 하시기 위해 시련을 허용하시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예수님이 행하신 복된 소식을 믿는 우리에게 얼마나 큰 선물을 주셨는지 아시겠습니까?

하나님과 화평하게 됨을 우리는 누리며 살고 있습니다.

이미 우리는 믿음 안에 서 있고 은혜 안에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즐거움이 매일 우리에게 부어집니다.

그 즐거움은 세상의 모든 시련을 넉넉히 이겨내게 할 뿐아니라 하나님은 섬세한 손길로 거기서 당하는 우리의 인내와 연단을 통해 주옥같은 우리를 빚어 가십니다.

오직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이 모든 선물을 감사하는 대림절기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