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로마서16장 (선한 데 지혜롭고 악한 데 미련하기를)

남수연 2019. 9. 11. 01:54

https://www.youtube.com/watch?v=kt7967TedXs

<2019년9월8일 설교 영상>

오늘 나눌 말씀은 로마서의 마지막 장입니다.

그동안 로마서 말씀을 많이 들으셨습니다.

로마서가 어떤 내용인지 전체를 정리해 보면 오늘 말씀을 이해하기가 쉬울 것입니다.

바울사도는 예수님의 명령대로 복음을 전하기 위해 목숨을 건 세 차례의 험난한 선교여행을 다닙니다.

지금은 유럽의 관문인 마게도냐 지방을 공략한 2차 전도여행을 막 마친 때입니다.

바울의 손에는 전도여행 중 각 교회에서 모금한 거액의 구제헌금이 들려 있습니다.

이 헌금을 가난한 예루살렘교회에 전달하려고 돌아가는 중에 고린도 지방에 잠시 머물며 이 편지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누구에게 쓰는 편지입니까?

로마제국의 수도인 로마에 이미 세워져 있는 교회들에게 보내는 편지입니다.

편지를 쓰는 목적이 있겠죠.

아무래도 이방인들이 중심인 교회다보니 복음의 뿌리가 약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이들에게 구약성경으로부터 원리를 따져서 오직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사실을 견고하게 다져주려는 것입니다.

또 신자들의 삶이 어떻게 달라야 하는지도 가르칩니다.

그리고 바울은 앞으로의 자신의 계획을 밝힙니다.

내가 예루살렘교회에 헌금을 전하고 로마로 와서 너희를 방문한 뒤, 다음 전도 예정지인 스페인으로 가려고 하니 이 일에 너희 로마 교회가 나를 후원해 달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로마서의 전체적인 내용입니다.

잘 이해가 되시죠?

로마서가 없었다면 우리도 구원의 원리들을 이렇게 명확하고도 깊이 있게 깨닫지 못했을 것입니다.

우리 신자들의 믿음을 더욱 견고히 세워주는 소중한 편지가 이 로마서입니다.

 

이런 배경을 알고 본문의 말씀을 상고하도록 하겠습니다.

1. 먼저 주님의 교회를 위해 바울과 동역했던 성도들의 이름입니다.

오늘 16장을 보면 많은 성도들의 이름이 나옵니다.

이들은 당시 로마에 살고 있는 26명의 바울의 끈끈한 동역자들과 다섯 개 가정교회입니다.

그 중에 여성은 9명입니다.

이 편지를 로마교회에 배달할 사람이 첫 줄에 나오는데 뵈뵈라는 여성입니다.

당시 여성의 신분이 미천했음을 고려할 때 파격적인 일이죠.

복음 안에서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것이 자연스럽게 증명되는 것입니다.

로마교회들은 뵈뵈로부터, 소문으로만 들었던 대사도 바울의 편지를 받아 설렘 속에서 읽게 될 것입니다.

오늘 바울이 호명한 많은 이름을 보면, 아직 로마에 가보지 못한 바울이 로마에 아는 사람이 이렇게 많다는 것이 놀랍죠.

로마에 거주하는 이 바울의 동역자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요?

그동안 여러 곳에서 바울과 동역했던 사람들이 로마로 이주해 간 것이죠.

왜 이들이 대도시 로마로 이주해 간 것일까요?

그들이 화려한 도시를 동경해서나 사업 성공을 위해서만은 아닐 것입니다.

물론 글라우디오 황제 때 유대인 로마 추방령이 끝나고 돌아간 사람도 있고 생계 목적으로 이주한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의 이주 목적 안에는 세계의 중심인 로마를 거점으로 복음을 전파할 목적이 가장 컸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같이 평범한 성도들도 직장을 선택하고 이사하고 진로를 정하는 데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는데 이들이 무작정 로마로 갔겠습니까?

예수님이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라고 하셨잖아요?

거점지로 로마가 적격인 것이죠.

신자들의 삶은 목적이 다르다는 걸 성경의 인물들은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결국 로마에 정착한 이 성도들이 믿음의 씨앗이 되어 로마를 복음화 시키고 복음이 세계에 전해 진 것입니다.

여기 기록된 한 사람 한 사람은 그냥 읽고 지나쳐 갈 사람들이 아닙니다.

이들을 잘 살펴보면 구원을 이루시는 예수님의 섭리와 전략들이 얼마나 오묘한지가 보입니다.

13절을 보면 루포와 그의 어머니에게 문안하라고 합니다.

루포는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가다 넘어지셨을 때 강제로 붙들려 십자가를 함께 지고 갔던 구레네 시몬의 아들입니다.

바울이 지금 구레네 시몬의 아내인 루포의 어머니를 내 어머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만큼 바울의 사역을 가족처럼 도왔다는 것이죠.

그런데 복음서에 보면 루포의 아버지 구레네 시몬이 당시 시골에서 왔다고 적혀 있습니다.

어떻게 시골사람들이 성공해서 바울의 든든한 지원자가 되고 대도시 로마에 안착해 교회에 큰 영향을 끼치며 살게 되었겠어요?

예수님이 시몬의 가족들에게 믿음을 주셨고 이들을 대도시로 불러내서 교회의 큰 일군을 삼으시는 축복을 주셨다는 것이죠.

우리 성도들에게 주신 명령은 세상을 정복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현재의 상황에 자족하고 최선을 다하지만 하나님은 더 큰 비전을 주셔서 세상의 한 가운데로 보내 사용하시기도 합니다.

우리가 매일 약하기만 하면 이 중차대한 하나님의 일을 누가 해 내겠어요?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인도하시고, 어떻게 주의 일에 사용하실지는 아무도 모르는 것입니다.

3절을 보면 우리가 잘 아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있습니다.

고린도교회에서 바울과 천막 만드는 일을 하며 동역했던 성도들이죠.

이들이 로마로 이주해서 가정교회를 인도하고 있다고 합니다.

아마도 바울이 로마로 왔을 때 원활히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먼저 와서 기반을 닦은 것 같습니다.

오늘 성경은 바울과 함께 복음을 전하고 주님의 교회를 세우는데 충성했던 일군들을 명예롭게 기념해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작은 수고도 기억하시고 기념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2. 바울사도는 이들의 이름을 일일이 호명하고 로마교회가 이들과 하나가 되어야 함을 강조합니다.

16, 너희가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그리스도의 모든 교회가 다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세계에 흩어져 있는 주님의 교회는 궁극적으로 한 몸이라는 것입니다.

또 여기서 우리는 교회, 성도간의 관계의 특별함을 발견합니다.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는 것은 성도들의 관계를 한 줄로 요약해 주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거룩은 인간의 본성과 자연성에 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본성입니다.

성도들 간의 관계는 하나님의 속성 안에서 이뤄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도들의 친밀감은 세상에서 사람들이 친하게 지내는 것과는 다릅니다.

교회에서 세상에서 부르는 호칭을 그대로 쓰지 않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성도의 관계가 세속적 관계와 다르다는 걸 의미합니다.

거룩한 관계에는 상대에 대한 존경과 예의가 있습니다.

세상에서 친한 관계들을 보면 너무 친하다 선을 넘는 바람에 찢어집니다.

교회도 그럴 수 있습니다.

오래 같은 교회를 다니다 보면 처음엔 물 위의 기름처럼 겉돌던 성도들이 서로 친해지게 됩니다.

점점 허물없이 대하다 보면 말을 막 하고 예의를 차리지 않게 됩니다.

교회에서 문제는 너무 예의를 차려서 생기는 게 아닙니다.

서로 알만큼 알아서 지나친 무례를 범하고 상처를 받아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간의 예의는 서로에 대한 관심이 멀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성도들 간에는 따뜻한 입맞춤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진실 된 마음으로 서로를 살피고 사랑하는 관계라는 것이죠.

그것을 오늘 본문에서도 보여줍니다.

1절에 보면 뵈뵈라는 성도는 바울과 많은 사람들의 보호자였다고 합니다.

보호자라는 것은 성도들의 필요를 다 돌봐주었다는 것입니다.

3절에 보면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동역자인 바울을 위해 목까지도 내놓았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피흘려 구원하신 각 성도들이 주님의 사랑으로 이렇게 서로 사랑하는 것을 기대하지 않으시겠습니까?저는 지난 주 슈돌에서 윌리엄 때문에 많이 놀랐습니다.

윌리엄과 벤틀리가 장난감 경매장을 찾아가죠.

아빠 샘이 윌리엄에게 만원 한도 내에서 사고 싶은 장난감을 사라고 합니다.

마침 윌리엄이 너무 갖고 싶어 하던 장난감이 경매로 나왔습니다.

치열한 눈치작전 속에 아이들 끼리 경매가 진행되고 드디어 윌리엄이 만원을 외치면 그 장난감은 윌리엄 손에 들어오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윌리엄 눈에 공룡 인형을 들고 있는 동생 벤틀리가 보였습니다.

윌리엄 눈동자가 흔들리며 아빠에게 이렇게 말하더군요.

아빠, 저 이 장난감 못 사요

아빠가 놀라서 왜 못 사냐고 묻습니다.

꼬마 윌리엄이 이렇게 말하는 데 깜짝 놀랐습니다.

내가 이거 사면 돈 다 써서 벤틀 리가 공룡 못 사잖아요?’

결국 윌리엄은 자기 장난감을 포기하고 벤틀리 공룡을 사 주더라니까요.

어떻게 다섯 살짜리 아이가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는지 이해가 안가더군요.

아빠 샘이 이런 윌리엄 볼 때 얼마나 마음이 기쁘고 행복했겠어요?

하나님이 자녀 된 우리에게서 이런 모습을 본다면 기쁘시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이 보고 싶은 것은 성도들이 연합해서 주님을 따르는 이 모습 아니겠습니까?또 하나님이 세상에 만드신 특별한 제도인 가정, 가족이 다 성도로 구성되어 행복하고 화목하게 하나님을 섬기는 모습이 아니겠습니까?바울사도가 로마서의 결론이자 편지를 마무리를 짓는 마지막 장에 이렇게 교회 성도들에 대해 길게 기록한 이유가 무엇입니까?거기에 하나님의 관심이 있으시다는 걸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도간의 연합인 교회의 소중함을 더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어제 태풍 굉장했죠.

몰아치는 광풍에 건물 벽의 외장재들이 맥없이 떨어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몸인 교회에 접착제로 붙여 놓은 외장재가 아니라 콩크리트처럼 견고한 몸체가 되어 복되게 지어져 가시길 축복드립니다.

바울사도는 사도행전에서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라고 합니다.

그렇기에 주님의 눈이 교회를 향하는 것입니다.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했을 때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성전이 상징하는 게 예수님이고, 주님의 교회잖아요?

역대하715, 이제 이 곳에서 하는 기도에 내가 눈을 들고 귀를 기울이리니 이는 내가 이미 이 성전을 택하고 거룩하게 하여 내 이름을 여기에 영원히 있게 하였음이라 내 눈과 내 마음이 항상 여기에 있으리라

성도의 모임인 교회를 통해 복음을 받고, 영의 양식을 먹으며 성장하고 예수님의 모든 부요와 충만을 공급받아 사시길 축원드립니다.

교회를 사랑하고 세우는 모든 성도들을 예수님께서도 아름답게 세워주실 것입니다.

다윗이 하나님이 머무실 성전을 세우겠다고 했을 때 하나님이 그러시잖아요?

네가 내 집을 세우겠느냐, 아니다 내가 네 집을 세워주겠다.

또 우리가 점점 신앙이 성숙해짐으로 예수님을 닮아 거룩한 입맞춤으로 서로를 문안하는 아름다운 모습이 되어지길 축복드립니다.

 

3. 그러나 교회가 경계하고 분리시켜야 할 경고가 있습니다.

17절에서 화기애애하고 따뜻했던 분위기는 급반전 됩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배운 교훈을 거슬러 분쟁을 일으키거나 거치게 하는 자들을 살피고 그들에게서 떠나라

한 몸의 연합을 강조하던 바울사도가 누군가와는 결별하라고 합니다.

사도들이 전한 구원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교회에 분쟁을 일으키는 사람들과는 결별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사람들 외에는 어떤 사람과도 선을 그어서는 안된다는 뜻입니다.

나랑 성격이 다르고, 생활 환경이 다르고, 믿음이나 인격이 미성숙한 사람들이라 사귀지 않겠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위배됩니다.

오직 사도들이 가르쳐 준 성경의 교훈들을 부인하고 교회를 분열시키는 사람들을 멀리하라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는 진리를 공격하는 이단적인 사상들이 침투합니다.

바울사도가 에베소교회를 이년 간 목회하고 떠날 때 똑같이 경고하죠.

사도행전 2029 내가 떠난 후에 흉악한 이리가 너희에게 들어와서 그 양 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교회사를 공부해 보면 실제로 진리를 공격해 성도의 구원을 방해하고 교회를 분열시키는 이단 사상들이 없던 때가 한번도 없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 한국교회 안에도 세속주의, 번영주의, 기복주의, 신비주의, 이단사상 등 성경의 가르침을 벗어난 경향들이 난무하고 있습니다.

이런 왜곡 된 사상들을 분별해 내려면 당연히 우리가 바른 진리를 알고 믿음으로 바로 서야 합니다.

가장 중요한 기독교의 진리는 예수그리스도의 속죄의 유일성과 이것을 믿음으로 구원받는 이신칭의입니다.

등반할 때 산 정상에 오르는 길이 여러 갈래 인 것처럼 모든 종교는 각자의 구원이 있고 정상에서 만난다라는 것은 교회를 대적하는 비진리입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 올 자가 없다고 하셨잖아요?

여러 가지 구원의 길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말은 안 믿는 것입니다.

요즘 한국에서 폭발적인 교세를 확장하는 알만한 이단들 주장을 들어보면 얼마나 허무맹랑한지 모릅니다.

어떻게 사람이 성령이고, 하나님의 아내인 어머니고, 재림한 예수님이 됩니까?

그런데 너무나 많은 사람들, 그것도 대개 전에 교회 다녀봤던 사람들이 그런 무지한 이단에 빠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너희가 배운 교훈을 잣대로 판단할 줄 알아야 하는 데 배운 교훈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미국 여론조사 기관인 퓨리서치에서 조사한 바에 의하면 무신론자들이 성경과 기독교 교리에 대해 신자들보다 더 많은 지식을 갖고 있다는 통계가 나왔습니다.

기가 막힐 일이죠.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종교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기독교신자 중 28%만 기독교라고 정답을 맞췄다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님들은 그동안 성경을 기반으로 탄탄한 믿음을 다져오셨습니다.

이단자가 와서 달콤한 말로, 그럴듯한 말로 구원의 진리가 아닌 말을 할 때 구별해 내시리라 믿습니다.

 

4. 마지막으로 바울사도는 신자들의 삶을 다시 한번 강조합니다.

19너희가 선한 데 지혜롭고 악한 데 미련하기를 원하노라

혹시 이 말씀과 반대로 살지는 않습니까?

사람들은 선한 데는 무관심하고 악한 데는 얼마나 머리를 쓰면서 사는지 모릅니다.

세상이 악한데 선한 데 지혜롭고 악한 데 미련하면 망할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선하다는 것은 단 하나입니다.

하나님이 선하시고 하나님께서 명하시는 것이 선입니다.

그리고 선이 아니면 나머지는 모두 악입니다.

돈을 벌고, 공부를 하고, 취미생활을 하고, 사회생활을 하는 것은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닌 중립이다가 아닙니다.

하나님 안에서 돈을 벌고 공부하고 놀면 선한 것이고 하나님과 상관없이 내 뜻대로 그것을 해 나가면 그것은 악한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 성공한 사람들의 결과가 그렇잖아요?

하나님께도, 자기 구원에도, 남의 유익에도 상관 없는 성공은 선도 아니고 참된 복도 아닙니다.

신자들은 성경을 통해 명백하게 구분해 주신 선과 악을 분별해서 힘써 선을 택하며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면 선이고 미워하면 악이죠.

염려하면 악이고 염려를 주께 맡기면 선입니다.

정직하면 선이고 부정직하면 악입니다.

우리의 감정 안에도 선악이 있습니다.

지난 주에 비가 내리는 저녁에 차를 몰고 집에 가고 있었습니다.

어둠이 내려앉는 도시에 불빛이 어른거리고 빗물은 차창으로 흘러내리고 있었죠.

마음이 점점 감상적이 되며 왠지 슬픈 기분에 사로잡힐 것 같았습니다.

이런 슬픈 감정 낭만적으로 느껴지십니까?

그 달콤함은 곧 우울과 무기력과 부정적인 감정에 빠져 허우적거리게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항상 기뻐하라고 하셨잖아요?

그래서 제가 선택한 것은 분위기 깨게 찬송가를 큰 소리로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빈들에 마른 풀 같이 시들은 나의 영혼, 지금까지 지내온 것 이렇게 계속 찬송을 부르는 데 점점 묘한 기분이 물러가고 뿌듯한 은혜가 느껴졌습니다.

차 안에서 부흥회를 했습니다.

집에 다 와서 차에서 내릴 때는 마음이 깃털처럼 가볍고 행복과 감사가 빵빵하게 충전되어 있었죠.

이렇게 집에 돌아가면 식구들도 덕을 보는 것입니다.

우울해서 들어가면 집 어질러 진 것에 화가 나고, 말 한마디도 곱게 나오지 않잖아요?우리 앞에 늘 선을 택할지 악을 택할지가 놓여 있습니다.

그것은 최초에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실 때도 그러셨습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도덕적 책임을 질 수 있는 피조물을 만드셨잖아요?무조건 복종하게 하시고, 모든 책임을 하나님께 돌리는 그런 피조물을 만드신 게 아닙니다.

아담과 하와는 스스로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키고 자기의 본분을 지키는 바른 선택을 했어야 했던 것이죠.

바울이 앞에서 강조한 대로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그런데 이 믿음은 내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은혜입니다.

영생, 구원이라는 이 값진 것은 우리 힘으로 취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성경은 가르치죠.

처음 성도들이 구원을 얻기 까지는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고 성령의 감화를 주셔서 이끌어 가십니다.

그러나 구원을 얻은 다음의 삶에는 우리의 도덕적, 믿음의 선택이 우선입니다.

선한 것을 우리가 의지적으로 선택하고 행해야 합니다.

은혜도 우리 의지로 구해야 주신다는 것입니다.

성령충만을 구해야 주시는 것이고, 문제의 해결을 구해야 주시는 것입니다.

한국교회에 하나님의 큰 구원의 역사가 임했습니다.

그러나 구원 그 이후 믿음으로 선한 삶을 택하는 것에 실패했기에 지탄받는 기독교가 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바울사도가 20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평강의 하나님께서 속히 사탄을 너희 발 아래에서 상하게 하시리라

아직 세상에는 사탄이 미혹하고 성도들을 끊임없이 공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날의 사탄을 가차 없이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우리 스스로 선한 일을 택하며 살지 않고 악을 택한다면 사탄은 우리 발꿈치를 물 것입니다.

 

말슴을 마치겠습니다.

제가 살고 있는 아파트가 신축아파트라 정원의 나무들이 아직 깊이 뿌리 내리지 않은 어린 나무들입니다.

이번 태풍에 작은 나무들이 뿌리 뽑혀 넘어질까 안쓰러워서 창밖을 자주 보게 되더군요.

그런데 강풍이 좌우로 무섭게 흔들어 대는 데도 작은 나무 한그루 넘어지지 않았습니다.

가만 보니 언제 그랬는지 긴 나무 막대기로 나무들을 서로 연결해 단단히 묶어 놓은 게 보였습니다.

혼자 강풍을 이겨내지 못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교회를 세우고 그 안에서 우리를 강하게 자라게 하시고, 우리를 안전히 보호해 주시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세상을 이길 힘과 믿음을 얻어 가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그 힘으로 대담하게 선을 행하고 악을 버리며 예수님의 은혜 안에 복되게 사시길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