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로마서 15장1절-7절 (너희도 서로 받으라)

남수연 2019. 8. 19. 01:15

https://www.youtube.com/watch?v=4d_Vrx3Q3uw

<2019년8월18일 설교영상>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해마다 회원국들 삶의 지수를 평가합니다.

그 중 우리나라가 회원국 37개 나라 중에서 37위를 차지한 게 있습니다.

무엇일 것 같습니까?위기에 처했을 때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 있냐는 이 항목에서 수년째 꼴찌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다섯 명 중 한명은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도움이 되는 가족이나 친척, 친구 가 전혀 없다고 답했습니다.

내가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자기 일처럼 도와줄 사람이 있습니까?

미국 911테러 때 현장에서 죽어간 사람들이 휴대폰에 마지막 남긴 메시지는 한결같이 가족에 대한 애틋함과 감사였다고 합니다.

마지막 순간에 생각나는 게 사람이라면 인생에서 가장 귀중한 것이 사람이라는 뜻일 것입니다.

돈이 가장 귀중하다면 죽을 때 돈 생각이 났겠죠.

죽음의 순간 자기 비밀계좌를 알려주거나 돈 얘기를 남긴 사람은 없었습니다.

사람관계의 소중함을 알면서도 시대가 점점 혼자를 권하는 쪽으로 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인간관계의 끈끈함보다는 갈등 없는 혼자가 더 낫다는 것이죠.

지금의 이런 사회 분위기 속에서 교회 성도들의 관계는 어떨까요?우리가 흔히 이런 말을 합니다.

교회는 사람보고 다니면 안 된다, 하나님만 보고 다녀야 한다

이 말 안에 어떤 의미가 들어 있는지 다 짐작하시죠?

오늘 우리가 살펴 볼 로마서 말씀은 이렇게 멀고도 힘든 인간관계의 현실과는 어쩌면 너무나 동떨어진 지침입니다.

물론 로마교회에도 성도들 간에 갈등이 꽤 많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성도의 모임에 대해서 갖고 계신 생각은 현재 교회 모습이나 우리 생각과는 엄청난 간극이 있습니다.

혼자서 하나님을 잘 믿으면 되지 않겠냐는 생각은 성경의 사상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잘 믿으면 결코 나 혼자일 수 없는 것이 기독교 신앙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 믿음의 삶을 바르게 교정해 주시고 교회와 가정생활의 모든 관계들을 더욱 복되게 해주시리라 믿습니다.

1. 오늘 말씀에서 하나님의 명령은 믿음이 강한 자가 믿음이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교회 안에서 믿음이 좋은 사람들이 더 봉사해야 한다는 단순한 의미는 아닙니다.

이어지는 말씀의 관계로 볼 때 말씀의 요지는 봉사에 있는 게 아니라 교회에 있습니다.

성도가 서로를 받아주고 강자가 약자를 더 섬기는 이 특별한 원칙은 교회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교회가 아니라고 볼 수도 있겠죠.

신자들은 교회를 다니면서도 자신이 얼마나 위대하고 신비로운 공동체에 속해있는지를 잘 모릅니다.

바울사도는 교회의 핵심을 이렇게 깨달았다고 하죠.

부부가 결혼해서 한 가정을 이루고 하나가 되는 것이 곧 예수님과 교회와의 관계를 보여주는 것이라고요.

예수님은 목숨을 주고 교회를 신부로 얻으신 것입니다.

교회를 신부로 삼아 예수님이 가진 모든 영광을 함께 누리게 하기 위해서죠.

그렇기에 성경은 예수님의 신부인 교회에 대해 어떤 인간관계보다 더 많은 진술을 합니다.

가족 관계보다 성도간의 관계에 대한 말씀이 훨씬 더 많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우선 교회는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섬기라는 것입니다.

1, 믿음이 강한 우리는 마땅히 믿음이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믿음이 강한 자가 믿음이 약한 자의 연약함을 떠맡아야 할 의무가 있다는 뜻입니다.

약점을 담당한다는 것은 신앙 뿐 아니라 전인적인 돌봄을 말합니다.

사도행전의 교회에서 보면 부자 성도가 가난한 성도의 생활을 책임졌습니다.

현대 교회가 성경의 가르침에서 한참 못 미쳐 있는 것이죠.

할 수만 있으면 연약한 성도들을 그렇게 까지 도와주는 게 교회입니다.

그러나 혈육 친척도 남의 약점을 떠맡지는 못합니다.

같은 부모 밑에서 나온 형제라도 잘 사는 사람이 있고 못 사는 사람이 있다는 게 그걸 말해 줍니다.

같이 사는 가족이라도 성품적인 약점 하나를 용납하고 받아주기가 참 힘듭니다.

매일 그 약점을 봐야 하기에 더 괴로울지 모르죠.

결국 그 약점이 늘 싸움의 원인이잖아요.

사람의 약점은 본인이나 타인에게 그렇게 쉬운 문제가 아닙니다.

약점 속에는 거의 그로 인해 생긴 상처가 숨어 있잖아요?

약점과 상처가 뒤엉키고, 그걸 철저히 방어하려는 고집과 자기 합리화로 강력하게 무장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약점 건드렸다간 사단이 나는 것입니다.

부부간에도 약점을 건드리는 싸움은 패를 잘못 쓴 것입니다.

부모 자식 간에도 약점 건드리면 피차 상처를 받습니다.

엄마 아빠가 내게 해 준 게 뭐가 있냐는 말은 제대로 해준 게 없는 게 약점인 부모에게 큰 아픔과 상처를 주는 것입니다.

아직 자기가 뭐가 될지 불투명한 자식에게 넌 대체 커서 뭐가 될래이런 말은 독입니다.

자연세상에서 약점을 가진 존재는 멸시당하고 하찮은 대우를 받게 됩니다.

그게 성격이든, 건강이든, 사회적인 지위나 수준이든, 남보다 좀 못한 것은 무시당합니다.

우리는 어떤 면에서든 약자로 무시당한 상처가 다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믿음의 약자라고 할 수 있는 성도들이 뭔가를 좀 하려다 그렇게 상처 받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교회는 이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는 세상과 달리 약자가 대접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국교회에서 꽤 유명한 목사님이 요즘 폐암으로 투병생활을 하고 계십니다.

이 분이 한국교회에서 큰일도 참 많이 하셨고 능력이 많은 만큼 매사에 자신감이 넘치던 분입니다.

세상에 대해서도 할 말 다하시고 주저함이 없는 분입니다.

요즘은 암치료를 하시며 모든 사역을 접으셨습니다.

대신 매일 새벽에 말씀을 나누는 유튜브를 시작하셨습니다.

우연찮게 그 영상을 보고 제가 깜짝 놀랐습니다.

불과 몇 달 전 그 자신만만하고 겁날게 없던 모습은 온데 간데 없었습니다.

항암치료로 부쩍 늙고 쇠약해진 모습에 가끔 말을 잇는 것조차 숨이 차 보이셨습니다.

여느 병약한 사람일 뿐이지 수많은 성도들을 진두지휘하던 그 강인함은 전혀 엿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날 영상 말미에서 이 목사님이 주와 같이 길 가는 것 즐거운 일 아닌가이 찬송을 부르며 목이 매여 우셨습니다.

그 당당하던 목사님이 우시는 걸 처음 보았습니다.

하나님이 정말 저 분을 사랑하셔서 저 시련을 주셨구나하고 느꼈습니다.

이 분의 유튜브가 두 달 만에 구독자수가 사만명이 넘고 댓글이 수 백 개씩 달려 그 목사님을 응원하고 있습니다.

동물의 세계에서도 그렇지만 사람 세상에서도 약한 모습, 약점은 동료들에게 오히려 공격 대상이 됩니다.

약하고 병든 모습은 사랑할만하지 않습니다.

잘 나가던 목사님이기에 은근히 묘한 마음을 가질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목사님의 약함을 더 큰 은혜로 받아들이고 작은 응원을 보내고 투병의 무게를 같이 담당하고 싶어 하는 수많은 성도들에게서 저는 교회를 보았습니다.

물론 우리교회에서도 교회가 보입니다.

우리교회도 죄인들이 모였으니 왜 서로 감정상할 일, 안 맞는 부분들이 없겠습니까?그래도 서로 봉사하다 크게 얼굴 붉힌 일이 없습니다.

믿음이 강한 성도들이, 형편이 되는 성도들이, 그렇지 못한 성도들의 약점을 담당했기 때문입니다.

언제부터인가 교회 식구들에게 좋은 일, 나쁜 일이 생기면 모두 한 마음으로 기뻐하고, 한 마음으로 걱정해 주는 걸 느낍니다.

앞으로도 오늘 말씀에서 명령하시는 대로 서로를 잘 섬기고 약점을 받아주고 짐을 나눠지는 교회가 되시길 간절히 축복드립니다.

 

2. 이 명령대로 잘 따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가 다음에 이어집니다.

2,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하라.

우리가 왜 이렇게 내 즐거움을 포기하고 이웃을 기쁘게 섬겨야 하는 지 해답이 들어있죠.

그것은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기 위해서입니다.

여기서 선을 이룬다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뜻을 이룬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무슨 선을 알고 선을 이루겠습니까?

교회 안에서의 이런 섬김의 체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입니다.

또 덕을 세운다는 말에서 이란 단어는 집을 세운다는 뜻입니다.

말하자면 교회, 주님의 나라를 세운다는 것이죠.

교회 안에서 약자를 돕고 서로를 받아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하나님의 선을 이루는 방법이고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강자가 약자를 섬기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는 세워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나라가 강하게 서려면 국가를 지지하고 굳건하게 받들려는 국민들이 많아야 합니다.

우리 국민들의 의식이 많이 달라졌죠.

내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 우리가 속한 사회에 악을 몰아내려는 의식들이 많이 진보하는 것 같습니다.

무고하게 조국을 모욕하면 SNS로 자발적 불매 운동을 벌이잖아요?

누가 약자에게 포악을 저지르면 가차 없이 국민청원으로 집결합니다.

하나님나라도 천국을 열렬히 지지하고 굳게 믿고 흔들리지 않는 성도들로 인해 강력하게 세워집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천국으로 데려가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성경 여러 곳에서 천국을 보여주지만 상징적인 정보를 주는 것입니다.

성도들에게 한번도 본 적 없는 천국은 막연할 수 밖에 없습니다.

막연한 것에 대해 강력한 믿음을 가질 수는 없습니다.

무엇을 근거로 우리가 장차 누릴 천국을 소망하겠냐는 것입니다.

하다못해 모델하우스라도 보고 앞으로 입주 할 내 집을 기대하는 것이잖아요?천국은 오직 성도의 아름다운 관계를 통해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사도는 천국에 대해 바로 앞 장에서 이렇게 알리고 있죠.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하나님의 나라는 의와 평강과 희락입니다.

예수님께서 천국이 이미 너희 가운데 임하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교회 안에 의와 평강과 희락이 있어야 맞는 것입니다.

만일 교회 안에서 성도들 간에 이런 것을 느끼지 못한다면 무엇을 근거로 천국이 좋다고 믿고 소망하겠어요?

교회 오면 구원의 길이 보이고, 평강이 있고, 서로를 기쁘게 하는 섬김에서 희락을 맛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목숨을 버리실 만큼 나를 사랑하신 것은 체험의 영역이기 보다 믿음이 영역입니다.

그것이 늘 가슴으로 절절이 느껴지는 게 아닙니다.

그 사랑이 체험되어지는 것은 오히려 같은 동류인 성도간의 배려와 사랑을 통해서입니다.

그러니까 성도들의 사랑의 관계가 깊어질수록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믿음도 깊어지는 것입니다.

사랑이 싸늘하게 식은 교회에서 어떻게 예수님의 사랑을 깊이 믿을 수가 있겠습니까?

교회는 성도들의 사랑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고, 천국의 즐거움과 희락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약점을 감싸주고 아픔을 위로 받을 때 여기가 천국이구나 느끼는 것이죠.

가족도 이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이 행복하도록 섬겨 줄 때만 하나님의 존재하심을 어렴풋이나마 인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그렇기에 약점을 비판하지 말고 서로 받아야 합니다.

결국 바울사도는 7절에서 서로 받으라고 하잖아요?

바울사도가 믿음이 강한 우리는이라고 한 의도가 무엇이겠습니까?

믿음이 뭐 그렇게 큰 차이가 있다는 뜻은 아닐 것입니다.우리가 다른 사람보다 더 낫다고 생각되는 게 있다면, 부족한 사람을 비판하지 말고, 내 눈에 거슬리는 남의 약점을 대신하고 또 덮어주라는 것입니다.

성도 간에 잘잘못을 따져서 바로 잡으려하면 백 프로 갈등이 생깁니다.

천국은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는 곳이지 내 의가 나타나는 곳이 아닙니다.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의는 어떤 기준도 되지 못합니다.

세상은 비판할 만 할 때 비판합니다.

그러나 교회는 원리가 다릅니다.

141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죠.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견을 비판하지 말라

우리는 성도들과 가족들과 이웃을 비판할 권리는 없고 오히려 기쁘게 해줘야 할 명령만을 받았다는 것을 오늘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천국은 이렇게 교회를 통해 체험되고 믿어지는 것이기에 교회에서 먼저 천국을 이루도록 명령하신 것입니다.

우리 교회와 가정이 서로를 받고 섬김으로 이런 천국이 이뤄지길 축복드립니다.


3. 그리고 이런 삶의 복됨을 보장하고 격려하는 증인이 등장합니다.

놀랍게도 바울사도는 예수님을 증인으로 내세웁니다.

예수님께서 먼저 그 삶의 본을 보여주셨다는 것입니다.

성도에게 가장 크고 자랑스러운 복은 예수님을 따라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증인으로 내세웠다는 것은 그만큼 이웃을 기쁘게 하고 남의 약점을 담당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걸 암시합니다.

성도들이 하나님과 교회에 헌신하는 것은 각자에게 다 최선을 다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주일예배 참석도, 헌금생활도, 시간과 재능과 몸으로 봉사하는 것도 다 만만해서 하는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교회는 죄인들이 모인 곳입니다.

서로 간에 수고와 섬김을 알아주기만 해도 좋은 데 그렇지가 않다는 것입니다.

때로 잘 섬기고, 도와주고, 뒤통수를 맞기도 합니다.

다 자기 취향에 따라 좋다 나쁘다 비판합니다.

오히려 그것이 당연하다는 걸 예수님의 경우를 통해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3, 그리스도께서도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으니 기록된 바 주를 비방하는 자들의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예수님께서 지상생활 중에 자기 자신을 기쁘게 하고 자기 만족을 위해 사셨던 순간은 한 번도 없으십니다.

여기서 바울사도가 시편69편 말씀을 인용하죠.

메시야의 고난을 예언한 다윗의 시입니다.

주를 비방하는 자들의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예수님께서 얼마나 남의 비방을 받으셨는지 복음서에서 충분히 읽었습니다.

아무리 최선을 다해 섬겨도 이 땅에서는 바른 보상이 따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놀랍게도 그것은 성부하나님도 마찬가지십니다.

주를 비방하는 자들의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여기서 주는 성부하나님을 지칭합니다.

사람들이 성부하나님도 그렇게 비방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약함을 담당하시고 칭찬을 받기는커녕 모든 비방을 감수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주의 명령을 따르다 낙담하지 않으려면 이 길을 앞서 택하고 걸어가신 예수님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비방 중에서 인내하고 섬기신 뒤 교회를 얻으시고, 하나님의 영광의 보좌에 앉으셨습니다.

우리가 인내로 예수님의 본을 따르면 우리의 결말도 예수님처럼 영광을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4,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위로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

오늘처럼 말씀을 듣는 가운데 섬김에 지친 마음을 위로를 얻고 다시 소망이 생기는 것입니다.

선포된 말씀은 하나님에 대해, 천국의 소망에 대해, 현재의 삶에 대해, 마치 조명탄을 쏘아 올려 비추는 것과 같습니다.

저는 이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우리가 나를 기쁘게 하지 않고 주님을 섬기는 마음으로 약한 자들을 섬겼더니 봐라, 요셉이 형통했고 다윗은 왕이 되었지 않느냐 이런 증인들을 세우지 않고 왜 예수님을 소망으로 세우셨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결국 비방 받고 모함 받다 결국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잖아요?이게 평범한 사람들에게 무슨 위로와 소망이 되겠습니까?그러나 신약성경은 진짜 우리가 누릴 영광과 복에 대해 현세와 타협한 적이 한번도 없습니다.

우리가 땅에서 잘되는 것에 자꾸 치중하면 더 가치있고 영원한 것에 관심도 갖지 않게 됩니다.

번영의 복음의 끝이 무엇이겠습니까?성공하고 나면 복음이 아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얼마 전 참존 화장품의 창업자가 회삿돈으로 400억을 헌금했다, 가족회사에 수백억을 대출했다, 결국 횡령혐의로 수사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 분이 역경을 이기고 성공한 케이스로 간증도 많이 하고 다녔죠.

자세한 내막이야 잘 모르겠지만 현세의 번영만을 배운 신앙이 결국 이렇게 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잘 되면 복음이 의미가 없고, 잘 안되면 복음의 가치를 모르고 떠나는 것이죠.

물론 하나님은 이렇게 섬기는 성도들을 천국에서만이 아니라 이 땅에서도 여러모로 축복해주시고 삶을 책임져 주십니다.

그러나 이 땅에서 받는 복은 장차 받을 복의 예고편에 불과합니다.

마트에 가면 볼 수 있는, 본 상품 곁에 덤으로 붙여 놓은 작은 샘플 같은 것이죠.

사는 게 넉넉한 사람들은 샘플 붙은 거에 신경 잘 안 씁니다.

우리가 살다보면 경제적으로 좀 힘들 때가 있잖아요?

여자 분들은 그럴 때 화장품 샘플 까지 탁탁 두들겨서 씁니다.

어릴 때 엄마들이 화장대 앞에서 그랬던 희미한 기억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형편이 나아지면 샘플 같은 것 잘 쓰지도 않고 버려집니다.

이 세상에서 잠시 잘 사는 것과 장차 천국에서 영원히 잘 사는 것이 이런 차이 아니겠습니까?그렇기에 주님의 말씀대로 교회를 섬기지만 누가 알아주지 않고 비방해도 크게 상관치 마시기 바랍니다.

또 당장 칭찬과 보상을 얻지 못한다 해도 괜찮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인내로 결국 큰 영광을 얻으신 것처럼 반드시 우리 또한 수고에 대한 영광을 얻게 될 것을 믿고 소망을 가지시길 축복드립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오늘 말씀이 교회의 현실 상 너무나 멀게만 느껴지지는 않습니까?

그러나 오순절에 성령께서 교회를 강타하셨을 때 성도들 중에 오늘 말씀이 그대로 이뤄졌던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재산이 있는 사람들이 팔아서 교회 내에 가난한 성도들을 도왔잖아요?

이건 인간 본성상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바울사도는 갈라디아교회 성도들에게 쓴 편지에서 이렇게 썼습니다.너희가 할 수만 있었더면 너희의 눈이라도 빼어 나를 주었으리라

이 모든 것은 성령께서 예수님의 마음을 강하게 부어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오늘 말씀에 순종하고자 할 때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그런 능력을 주실 것입니다.

또 매일 기도로 구할 때 성령께서 그렇게 행할 복된 능력을 주실 것입니다.

독일의 틸리케라는 신학자는 이렇게 단정해서 말했습니다.

사람이 철저히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 이기적으로 살 때 그 결과는 세 가지로 나타난다. 그것은 허무, 죄책감, 불안이다

인간은 남을 유익하게 할 때 만족을 느끼게 하나님이 만드셨습니다.

7,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

세상에 나와 같고 내 마음에 다 맞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내 속으로 난 자식도 나하고 안 맞잖아요?

우리 성도님들이 이젠 서로 단점이 무엇인지 약점이 무엇인지 가정의 아픔이 무엇인지 다 아시잖아요?

우리가 다 같이 예수님의 몸이기에 서로의 약점을 곧 내 약점으로 알고, 무거운 짐은 함께 지고, 서로를 기쁘게 하기 위해 마음을 쓴다면 점점 더 천국을 맛보며 행복한 믿음의 길을 갈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우리 교회에 하나님이 점점 더 큰 축복을 부어주시리라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