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복음에 빚진 자 (로마서1장8절-15절)

남수연 2021. 8. 13. 01:56

https://www.youtube.com/watch?v=BlzdDnLMdMU 

계속되는 코로나로 인한 피해가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지난 주 코로나 뉴스를 보면서 생각했습니다.

그동안 사람들이 정말 하고 싶은 대로 자유롭게 잘 살았구나

이젠 마음대로 어디를 갈 수도 없고, 마음대로 장사도 못하고, 행사도 못하고, 예배도 못 드리는 시대로 접어든 것인가?

앞으로는 점점 더 포기해야 할 자유들이 늘어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특히 해외 방문이 막혀 가족도 못 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오늘 바울사도 역시 외국의 로마교회를 방문할 길이 오래 막혔다고 합니다.

그래서 로마방문의 길이 열리기를 기다리며 대신 이 로마서라는 서신을 먼저 보낸 것입니다.

전에 로마서 뒷부분의 말씀들을 나누었는데, 오늘부터 로마서 앞부분의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서신서는 개인적인 편지보다 공적인 서신이기 때문에 편지 받을 교회와 그 사회의 정황이나 문제들을 알아야 이해하기가 쉽습니다.

로마서의 개론적인 부분을 미리 한꺼번에 공부하고 들어가면 좋겠지만 그렇게 하지는 않겠습니다.

우리가 나눌 본문에 해당되는 배경만 그때그때 설명 드리며 바울사도가 강조하려는 주제를 중점적으로 나누는 게 더 좋을 것 같습니다.

 

1. 먼저 로마교회는 어떤 교회인지, 바울사도와는 어떤 관계인지를 보겠습니다.

로마교회는 당시 세계의 중심지였던 로마에 세워진 교회입니다.

바울이 세우지는 않았고, 누가 세웠는지 성경이나 교회사에 정확히 나오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추측이 가능한 부분이 성경에 있습니다.

사도행전2장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 때의 기록입니다.

그때 오순절 절기를 맞아 외국에 살던 경건한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 집결했습니다.

거기서 마침 성령강림과 함께 성령충만을 받은 제자들이 순례객들을 상대로 각 나라말로 복음전하는 것을 듣게 되죠.

그들이 15개국어로 유창하게 설교하는 제자들을 보며 놀라서 이렇게 말합니다.

8절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이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찌 됨이냐

9우리는 바대인과 메대인과 엘람인과 또 메소보다미아, 유대와 갑바도기아, 본도와 아시아,

10브루기아와 밤빌리아, 애굽과 및 구레네에 가까운 리비야 여러 지방에 사는 사람들과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 곧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온 사람들

11그레데인과 아라비아인들이라 우리가 다 우리의 각 언어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하고

여기에 보면 로마에서 온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온 로마인들이 있습니다.

이날 베드로가 전하는 복음설교를 듣고 이들이 믿고 세례를 받았다고 하죠.

그 말을 받은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신도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그들이 로마에 돌아가서 당연히 교회를 세웠겠죠.

복음을 믿은 단 한 사람이 있으면 결국 그 지역에 교회가 세워집니다.

지방에 있는 한 교회는 우체부 아저씨가 그 교회를 세웠다고 합니다.

신자였던 우체부아저씨가 우편물을 전하려고 마을을 드나들었는데 그 마을에는 믿는 사람도 없고 교회도 없었던 거예요.

이 분이 우편물을 전하면서 한명씩 전도해서 그 교회가 세워졌다는 것입니다.

이름도 모르는 한 우편배달부 아저씨가 설립자인 것이죠.

놀랍지 않습니까?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도 로마에 살다 유대인 추방령 때문에 고린도에 와 바울을 만났었죠.

그때 이미 믿음을 가진 제자였던 걸 보면 로마에 있던 교회 성도였다는 걸 알 수 있죠.

이 로마교회는 초대교회 당시에 일찍이 세워져 명성이 날 정도로 성장했던 것입니다.

8절 너희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 됨이로다

바울이 이방인의 사도잖아요?

그렇다면 세계의 중심지였던 로마교회를 바울이 전도해서 세우시게 할 만 하신데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사람이 구원의 시나리오를 짰다면 그랬겠지만 하나님은 다르신 것이죠.

주님의 일을 하는 데 너무 사람의 이름을 내세우지 않는 게 좋습니다.

이렇게 로마교회가 세워졌고 바울은 이 로마교회에 가서 성도들을 만나길 간절히 원했습니다.

이 문제로 끊임없이 기도했다고 하죠.

9절, 항상 내 기도에 쉬지 않고 너희를 말하며 어떻게 하든지 이제 하나님의 뜻 안에서 너희에게로 나아갈 좋은 길 얻기를 구하노라

13절, (그러나) 지금까지 길이 막혔도다

바울이 로마교회를 방문하고자 하는 이유는 당연히 하나님의 뜻에 부합되는 일이지 않았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길이 막히자 억지로 추진하지 않고 기도하면서 하나님이 길을 열어주길 기다렸다는 것이죠.

언제든지 새로운 일을 할 때는 충분히 기도하며 실패하지 않을 길로 인도해 주실 것을 구해야 합니다.

기도를 충분히 하면 좀 더뎌도 하나님께 맞는 길을 골라서 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구하기 위해서는 한 템포 느려도 늦지 않습니다.

결국 이 편지가 먼저 로마교회에 도착했고 그 후 한 삼년 뒤에 드디어 바울이 로마를 방문하게 되죠.

사도행전이 28장에서 바울이 로마를 방문한 이야기로 끝이 납니다.

그때 바울은 유대인들에게 고소당해서 하필 죄수의 신분으로 로마황제에게 재판을 받기 위해 로마로 옵니다.

이런 거 보면 오히려 마음이 씁쓸해 지는 분들이 있죠.

‘죄수라니, 평생을 헌신한 노사도에게 하나님은 꼭 이 방법이어야 하냐’

그런 마음 안에는 나를 그런 식으로 대우하신다는 생각이 섞인 것이죠.

우리의 죄성 안에는 하나님이 골탕 먹이신다는 왜곡이 있다는 걸 알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 속에서 일차적으로 떠오르는 생각은 모두 죄성에서 나온다고 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이기적인 자기사랑이 발로입니다.

세상사람들이 다 그렇게 살고 있잖아요?

우리도 별다르지 않습니다.

그런 생각이 먼저 나지만 그걸 구체화시켜 내 의견이 되고 인격으로 표출되는 것은 차단해야 합니다.

미운 사람을 보면 미운생각이 먼저 드는 게 당연하지만 성령님의 렌즈와 말씀의 필터를 거쳐 용납하게 되는 것이죠.

그 두 생각의 시간차가 얼마나 빠르냐가 바로 성숙인 것 같습니다.

이게 평생 해야하는 훈련이고 허리띠를 푸는 순간 바로 넘어집니다.

바울은 죄수가 되어 로마로 가게 됩니다.

복음은 늘 죄수처럼 전해지지 개선문을 통해 전해지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어떤 것인지를 보면서도 우리는 세상에 실력을 행사하는 그리스도인이 되길 원하죠.

고생하고 자란 사람들이 내 자식 멸시당하지 않게 한다고 악착같이 돈 벌어 떵떵거릴 만큼 물려주려 하지만 그걸로 자식이 존대 받지는 못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렇게 기르지 않으십니다.

비록 가진 게 초라해도 내 아버지가 하나님이신걸 사람들이 느끼면 우리를 다르게 대한다는 것을 좀 경험하셨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은 좋은 여건에서만 좋은 결과를 만들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죄수의 신분이 아니었다면 일개 시민 바울이 어떻게 황제와 귀족들 앞에서 재판절차에 따라 공식적으로 복음을 증언할 수 있었겠습니까?

또 그때 바로 로마행의 문이 열렸다면 바울의 이 로마서가 존재했을까요?

하나님의 계획은 우리의 생각과 다르다는 것을 늘 염두에 두어야 내 뜻대로 안된다고 성내지 않게 될 것입니다.

사도행전28장을 보면 그때 바울과 동행했던 주치의 누가가 이렇게 기록합니다.

14절 그래서 우리는 이와 같이 로마로 가니라

죄수로 압송되어 로마로 가는 길이 왜 이렇게 흥분되게 느껴집니까?

그것이 하나님의 계획안에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죠.

좀 더디고 남들 보기에 대단하게 일이 진행되지 않아도 하나님을 의지하고 가고 있다면 오히려 앞날이 더 흥미진진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이런 이야기를 기록했습니다.

15절 그 곳 형제들이 우리 소식을 듣고 압비오 광장과 트레이스 타베르네까지 맞으러 오니 바울이 그들을 보고 하나님께 감사하고 담대한 마음을 얻으니라

로마에 있던 형제들, 누구겠습니까?

오늘 이 로마서를 받았던 바로 그 로마의 성도들이 바울이 로마로 호송되어 온다는 소식을 듣고 마치 개선장군을 맞이하듯 나온 것입니다.

이들이 맞으러 온 이 압비오 광장은 로마로부터 무려 70여킬로 떨어진 곳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로마를 향해 한 20킬로 더 가면 트레이스 타베르네가 나옵니다.

이 곳도 로마로 부터는 한 50킬로 떨어진 도시예요.

거기를 지나치는 데 또 많은 로마의 성도들이 바울을 맞으러 나온 것입니다.

이 광경을 생각해 보십시오.

삼년 째 죄수생활을 하고 있던 바울이 얼마나 큰 위로를 받았겠습니까?이게 교회입니다.

 

2. 그렇다면 바울사도가 왜 그렇게 멀리 떨어진 로마교회 방문을 간절히 원했을까요?

그것이 이 로마서를 쓰게 된 이유이겠죠.

또 주님께서 로마서를 우리에게 주신 이유인 것입니다.

1) 신령한 은사를 나누어주기 위해서입니다.

11절, 내가 너희 보기를 간절히 원하는 것은 어떤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누어 주어 너희를 견고하게 하려 함이니

이 로마서를 통해서 우리도 바울의 신령한 은사를 나누어 받게 되는 것입니다.

로마교회는 일반 성도들이 세운 교회였고 사도들이나 이름난 사역자가 목회했던 교회도 아닙니다.

로마의 다신교 문화 속에서 자생적으로 성장한 로마교회에는 분명히 믿음의 틈새가 있었을 것입니다.

바울이 이들에게 신령한 은사를 나누어 준다는 것은 고린도전서12장에 나온 성령의 은사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성령의 은사라면 바울이 나눠줄 수 있는 게 아니죠.

성령께서 자신의 뜻에 따라 나눠주시는 게 성령의 은사잖아요?

바울이 신령한 은사라고 한 것은 바울이 받은 은사, 바울이 깊이 알게 된 복음의 지식을 로마교회에 가르쳐 주어 견고한 믿음으로 세우고 싶다는 것입니다.

바울사도는 복음의 완전한 지식과 복음의 신비와 능력을 알았고 그 복음에 사로잡히고 복음으로 가득 채워졌던 사람입니다.

로마서 1장 서두에서부터 바울은 계속 복음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 놓습니다.

무언가에 관심이 집중되고 거기에 빠져 있는 것이 입을 열면 나오잖아요?사람들을 만날 때 우리는 그 사람이 무슨 말을 할지 대충 짐작하고 나갑니다.

그 사람 속에 가득 차있는 말을 할 거니까요?

바울사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복음이었고, 그것을 나눠주고 성도들이 복음에 바로 서도록 도와주는 것이 사명이자 기쁨이었던 것입니다.

뒷부분으로 가면서 바울은 신령한 은사인 복음에 대해 계속 증거 해 나갈 것입니다.

우리도 앞으로 바울사도의 신령한 복음 지식을 듣고 배움으로 믿음이 더 견고하게 되리라고 믿습니다.

2) 또 바울이 로마교회에 가고자 하는 이유는 12절입니다.

이는 곧 내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와 나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피차 안위함을 얻으려 함이라

여기서 우리에게 알려주시는 귀중한 교훈은 성도들은 서로의 믿음을 통해 위로를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전에 개그맨 정형돈씨가 공황장애를 극복하는 데 배우차태현씨가 했던 말이 큰 도움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공황장애는 저도 살짝 경험했는데, 저 같은 경우는 물속을 싫어하고 폐소공포증이 있다 보니 그 두 개가 딱 겹쳐진 느낌으로 오더군요.

물속에 갇힌 느낌, 생각만 해도 갑갑해 죽을 지경인데 공황장애는 딱 그 느낌이 실제처럼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공황장애 증세가 오면 마치 죽을 것 같은 두려움이 오다가 견디지 못해서 쓰러지게 되는 것이죠.

차태현배우가 형돈씨랑 무슨 프로그램을 하다가 형돈씨가 공황장애 증상이 덮쳐 방송 중에 쓰러졌다는 거예요.

같은 공황장애가 있던 차배우가 형돈씨 걱정을 많이 하며 위로해 주었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차배우가 이런 말을 해 주는 데 형돈씨가 힘을 냈다고 합니다.

‘너 그거 너무 죽을 것 같지? 근데 그거 안 죽는다. 이상하게 안 죽어’

같은 병을 갖고 같은 경험을 한 사람들이 서로를 위로하고 힘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잖아요?

성도들이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는 믿음 안에서 그렇게 서로에게 말해 줄 수 있잖아요?

‘너 죽을 것 같지? 그런데 안 죽어. 하나님이 더 강한 너로 만들고 있는거야’

무리에서 떨어져 나온 고독한 신앙생활은 병들기 쉽고 마귀의 공격에 취약하고 시험에 들기가 쉽다는 것을 다 아실 것입니다.

교회 열심히 나오라고 하는 괜한 소리가 아닙니다.

자존심이 강해 제일 힘든 시기에 그런 모습 보이기 싫어서 혼자가 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저는 인생에서 제일 힘든 시기에 예수님을 믿게 되었는데, 죽어라고 교회에 붙어서 이꼴저꼴 다 보여주며 교회에서 힘든 시기를 다 이겨냈습니다.

또 서로 성격이 맞지 않고 신앙의 정도도 다르고 말이 잘 통하지 않더라도 맞춰가며 함께 가야합니다.

저는 이 말씀을 자주 떠올립니다.

고전4장7절, 누가 너를 남달리 구별하였느냐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냐

자랑하는 마음에서 서로를 밀어내고 다툼이 생기는 거잖아요?

주님은 너희가 서로 사랑할 때 내 제자라는 걸 인정하시겠다고 했습니다.

우리 교회가 서로의 믿음으로 안위하는 교회 되길 간절히 원합니다.

몇 주 전 본인도 그렇게 남아도는 생활은 아닌 한 성도님이 목적헌금 얼마를 보내시며 교회에 어려움 당하는 성도를 위해 써 달라고 하시더군요.

저희가 매 학기 장학금을 지급하는 데 충분치가 않아서 늘 아쉬운 마음이 있었는데 거기에 좀 보탤 수 있었습니다.

때로 큰돈이 아니라도 작은 위로가 일어설 힘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교회 성도님들이 보이게, 보이지 않게 서로를 챙겨주고 돕는 전통이 이어지고 있음이 감사합니다.

교회는 이 그물조직이 촘촘해야 영혼이 낚입니다.

교회의 성도들이 진실한 친밀감과 유대감으로 사랑을 나누는 것을 본다면 그런 공동체에는 얼른 속하고 싶은 생각이 드는 것이죠.

여기저기 그물조직이 찢어져 구멍이 숭숭 나면 들어왔던 물고기도 다 빠져 나갑니다.

바울사도가 얼마나 많은 성도들과 광역적 네트워크를 갖고 있었는지 로마서 마지막 16장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편지 끝 인사에 로마에 살고 있는 자기의 동역자 26명 이상의 이름과 가정교회들을 일일이 적어주고 이들과 로마교회가 서로 문안하며 지낼 것을 권고합니다.

아직 한번도 가 보지 못한 로마에 이미 상당한 동역자들과 교류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죠.

그들이 서로 기도해 주며 함께 복음을 위해 동역했기에 바울사도가 그 큰 사명을 감당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교회가 많은 성도들과 넓게 교제하기는 힘들지만 다 아는 성도끼리 서로의 부족함을 위해 기도하며 예수님의 사랑을 서로 훈련받아 가는 데는 아무 지장이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과 얼굴만 부딪치며 겉모습만 꾸며가는 것보다 열두제자들처럼 합숙하며 치부를 보이며 예수님께 고침 받는 것이 더 유익이잖아요?

믿음으로 서로 도움을 줄 수 있는 교제가 나를 성장시킵니다.

물론 내 믿음도 남을 도울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 친구들도 힘든 나를 위로하고 소소한 만남의 즐거움을 줍니다.

그 분들도 사랑스런 사람들이죠.

그러나 그 친분이 내 믿음에 어떤 진보를 도와주겠습니까?

길을 선택할 때 어떤 길이 더 하나님의 뜻인지를 어찌 알고 조언해 주겠어요?

저도 사회생활 끊은 지 십년이 되다보니 이제 대인관계도 인맥도 다 끊어져 만날 사람도 별로 없습니다.

우리끼리 믿음 안에서 서로를 안위하며 믿음을 서로 끌어주며 그렇게 간다면 주님께서 참 기쁘게 여기시리라 믿습니다.

 

3) 바울이 로마교회를 방문하고자 하는 또 다른 이유는 로마교회에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13절, 이는 너희 중에서도 다른 이방인 중에서와 같이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로되

무슨 열매를 맺게 하겠다는 것일까요?이 말은 바울이 이 편지를 쓰는 또 다른 중요한 이유와 관련이 있습니다.

15장23절 또 여러 해 전부터 언제든지 서바나로 갈 때에 너희에게 가기를 바라고 있었으니

24이는 지나가는 길에 너희를 보고 먼저 너희와 사귐으로 얼마간 기쁨을 가진 후에 너희가 그리로 보내주기를 바람이라

바울이 로마를 넘어 서바나, 즉 스페인까지 복음을 전할 계획을 갖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리로 갈 때 로마교회에 들려서 교제를 나눈 뒤 너희가 나를 선교사로 파송해 달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너희에게도 다른 이방인들의 교회처럼 열매가 있게 하려고 한다는 뜻입니다.

바울이 전도한 유럽의 교회들은 이미 예루살렘교회에 헌금을 모아서 바울사도에게 전달했습니다.

빌립보교회 같은 경우 바울의 전도여행과 감옥에 투옥 되었을 때 필요한 경비를 모아서 보내왔습니다.

로마교회의 경우는 믿음이 장성했고 소문이 났는데, 복음사역을 위한 열매가 없었던 것입니다.

나와 동역해서 스페인을 전도하자는 것이죠.

이것이 바로 바울이 로마교회를 방문해서 그들에게도 열매를 맺게 할 계획인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예수님을 믿으면 주님을 닮아가는 성령의 열매들이 있어야 합니다.

그 뿐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복음의 열매도 있어야 합니다.

기회가 되는 대로, 또 일부러 관심을 갖고, 전도와 선교의 일에 참여하여 항상 열매가 있는 모두가 되기를 축복드립니다.

 

3. 바울은 자기가 이렇게 하려고 하는 것은 복음에 빚진 자로서 당연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14절,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긴 여행을 위해서는 목숨을 걸어야 했던 시대에 로마까지 가는 것은 대단한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일입니다.

바울사도의 나이도 당시로는 초로에 접어 들었던 때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로마교회에 다시 복음을 전해야겠다는 마음은 빚진 자의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바울만 빚진 자의 마음을 갖고 복음을 위해 일생을 바쳐야 했을까요?

복음에 빚진 자라는 마음이 있으신가요?

복음은 예수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해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셔서 이 복음을 듣게 하시고 믿음을 가지도록 은혜를 베푸셔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 사실을 깨닫게 되면,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 많은 사람 중에서 하필 나를 부르셨다는 감격, 내가 어떤 멸망당할 처지에서 구원을 받았는지에 대한 현실자각, 이런 일련의 사건들이 절대로 측량이 불가능한 하나님의 은혜라는 걸 알게 됩니다.

그 은혜를 알게 되면 이 복음에 대해 빚진 자의 마음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이 복음을 완성하시고, 지금도 일하고 계시는데 내가 그 일에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자발적으로 헌신을 하게 됩니다.

이 빚진 자의 마음은 평생 사라지지를 않습니다.

탕감 받은 것이 너무 크다는 걸 알기에 아무리 수고하며 갚아도 빚이 줄어 들 수가 없는 것이죠.

그래서 죽을 때까지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빚진 자의 마음으로 일생을 복음에 헌신하게 된 것입니다.

저도 목회가 제 능력으로는 힘들다고 느낄 때가 많지만 이 빚진 자의 마음 때문에 여기까지 온 것 같습니다.

복음을 듣고 구원을 확신하는 성도들에겐 크던 작던 이 채무감이 있습니다.

그래서 힘들고, 수고한 보람을 느끼지 못한다 해도 마땅히 해야 할 일이고 더 해야 할 일이라 생각하며 봉사하게 되는 것이죠.

그게 만달란트 빚진 자가 탕감 받은 예수님의 비유의 내용입니다.

그 큰 빚을 탕감 받은 사람이 자기에게 백데나리온 빚진 자를 무자비하게 고발해 옥에 가두잖아요?

이 비유는 우리가 태산 같은 죄의 빚을 탕감 받은 사람으로 그 빚을 주인에게 다시 갚는 게 아니라 대신 타인에게 그 빚을 갚는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용서받은 빚을 어떻게 하나님께 다시 되갚을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용서해 드릴 수 없잖아요?

그러니까 그 용서를 내게 빚진 자에게 돌려 주라시는 것이죠.

바울은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하나님이 사랑하는 성도들에게 갚았던 것입니다.

이런 빚진 자의 마음이 내게 있는지 생각해 보시겠습니까?

 

말씀을 정리합니다.

바울이 왜 로마교회에 그토록 가기를 원했는지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셨습니까?

신령한 은사를 나눠주고, 믿음으로 피차 안위를 얻고, 열매를 맺게 도와주고 싶기 때문이라고 하죠.

그것은 내가 더 우월해서가 아니라 빚진 자의 마음이라 이렇게 하는 것이니 이런 수고가 오히려 내 채무감을 덜어주는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의 신앙도 이렇게 되도록 항상 생각하고 행하는 모두가 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