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하나님의 진노 (로마서1장18절-32절)

남수연 2021. 8. 24. 21:03

https://www.youtube.com/watch?v=m46TdIFeVZo 

성경 중에 성경이라고 불리우는 로마서 말씀을 나누게 되어 참 좋습니다.

우리 믿음이 바로 서고 불순물은 제거되어 더 영롱하게 되길 기대합니다.

바울사도가 로마교회에 전하고자 하는 것은 예수그리스도 복음입니다.

지난 주 이 복음은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했죠.

복음이신 주 예수그리스도가 아니라면 하나님도 죄인들을 구원 할 다른 능력이 없으셨다고 저는 믿습니다.

그렇다면 왜 이 복음만이 구원의 길이냐, 예수님만 구원의 길이냐라고 사람들은 물을 것입니다.

오늘은 이에 대한 답변으로 하나님과 죄인의 심판문제를 제일 먼저 다룹니다.

 

1. 하나님은 존재하시고 죄에 대해 진노하시기 때문에 복음을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18절, (왜냐하면)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내 죄를 속죄하기 위해서 돌아가셨다는 납득하기 어려운, 남들이 부끄럽게 생각하는 복음을 이해하고 믿기 위해서는 먼저 인정해야 할 게 있습니다.

그것은 만물의 창조주이고 주관자이신 하나님이 하늘에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을 불의로 거역하는 사람들에 대해 진노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럼 사람들이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 나는 하나님을 본 적도 없는데?’

바울사도는 이렇게 반론하는 것입니다.

‘너 이미 하나님이 계시다는 걸 알잖아’

19절,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하나님이 자신을 그들 속에 공공연하게 드러내셨다는 뜻입니다.

전에 미국 무신론자들이 시카고를 운행하는 버스광고판에 이런 문구로 하나님을 도발했던 일이 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창조했다’

하나님은 없다는 것입니다.

통계상 우리나라 사람 열 명 중에 일곱명은 하나님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인정하기 싫고 복종하지 않는 핑계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20절,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1) 핑계라는 증거는, 세상을 잘 보면 이것이 저절로 생긴 게 아니라 창조자가 있다는 걸 누구나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일반계시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자연, 양심, 역사 같은 걸 통해 하나님의 존재를 계시하셨다는 것이죠.

비록 죄인으로 태어났다 할지라도 이를 통해 하나님을 경외하여 악을 억제하며 살게 하시려는 것이죠.

‘하늘이 두렵지 않느냐’ 이런 말이 그걸 반영하는 것이죠.

과학이 발달할수록 온 우주가 지혜로운 전능자에 의해 설계되고 만들어졌다는 것이 점점 드러나고 있습니다.

우주과학 영화를 보면 과학자들이 엄청난 많은 공식들을 계산하고 분석해서 우주선을 쏘아 올리잖아요?

그것은 이 세상과 우주가 아주 정교한 법칙들에 의해 운행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처음부터 그런 정교한 법칙으로 설계되었다는 뜻이죠.

그걸 겨우 일부 찾아내는 것이 과학의 법칙들이잖아요?

하나님은 만유의 주인이시고 주님의 뜻대로 세상을 통치하고 계십니다.

인간역사에 악을 방치하셨다면 지구는 벌써 자폭했을 게 분명합니다.

하나님이 악의 역사도 조정하시며 종말까지 지속해 가시는 것이죠.

우주 어디를 보아도 이 세상이 주인 없는 땅이라고 여겨질 수가 없습니다.

산간 외딴 곳에 떨어져 있는 집을 찾아다니는 오지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몇 시간을 걸려 산을 오르다 집을 발견하면 진행자가 반색을 하지만 많은 집이 빈 집이더군요.

그런데 같은 빈 집이라 해도 주인이 떠난 집과 주인이 도시에 다니러 간 집은 다릅니다.

집 주인이 있으면 집을 관리하기 때문에 금방 알아 볼 수 있습니다.

주인이 없는 집은 귀신 나올 것 같이 괴괴하죠.

이 질서의 우주세계는 하나님의 손길이 닿고 있다는 게 보이잖아요?

오늘 교독문이나 요즘 묵상하는 시편이 창조와 섭리의 하나님을 계속 증거하잖아요?

저희 집이 검단산 아래에 있거든요.

차를 타고 집이 가까워지면 언덕이 하나 있는데 그 언덕을 넘는 순간 검단산이 눈앞에 쫙 펼쳐집니다.

제가 볼 때 마다 꼭 정원사가 전지가위로 깔끔하게 다듬어 놓은 것 같이 산이 어쩜 저렇게 매끄럽고 정갈할까 감탄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세상을 관리하시는 지를 제게 보여주시는 것 같더군요.

핑계할 수 없는 이런 증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갖은 핑계를 대며 ‘그래도, 그래도’, 믿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 진노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소유가 되는 사람을 끝까지 돌보십니다.

지금도 팽창하고 있다는 상상 불가의 광대한 우주와 지구를 가득 메운 정교하고 아름다운 생명체들이 무얼 말합니까?

나는 78억명의 인간을 전부 다 알고 통치하는 전능자라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의 관심은 저 광활한 우주보다 우리 한사람입니다.

저 하늘에 만물을 만드신 창조주가 계시다 한들 나와 무슨 상관이랴, 내 사정을 어떻게 아시랴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소유 된 백성이기에 주님께 속한 것을 반드시 관리하십니다.

나 혼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에 우리 삶이 가난하든 부하든, 병들었던 건강하든, 성공했든 실패했든 하나님께 속해 내 인생집의 경영권을 드렸다면 걱정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주인이 가꾸는 집은 고치고 다듬어 아름답게 세워 가실 것입니다.

 

2) 또 하나 핑계할 수 없는 증거는, 하나님을 믿지 않던 사람들이 우상과 종교를 만들어 믿는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인간이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빼도 박도 못할 증거라는 것입니다.

너희들 하나님이 없다면서 왜 그런 종교행위를 하냐는 것이죠.

21절부터 23절의 말씀을 보면 분명히 하나님을 알면서도 하나님을 부인한 사람들이 결국 무언가를 섬기지 않냐는 것입니다.

인간 역사와 종교의 역사는 처음부터 공존합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도록 신인식의 지각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모시고 예배하며 살기를 거절했지만 비어있는 그 자리의

공허감이 너무 커서 어떤 신적인 존재로든 채우려 한다는 것이죠.

결국 사람보다도 열등한 무언가를 헛되게 섬기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종교심마저 인간의 이기적 욕망으로 타락했기에 그들의 예배는 우상을 위한 것이 아니라 결국 자기 자신을 위해서입니다.

누가 우상을 사랑하고 경외하며 영화롭게 하기 위해 섬깁니까?

우상숭배를 하는 목적도 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출애굽기에서 십계명을 주실 때 제2계명,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라’하셨죠.

그러나 이슬람, 힌두교, 불교가 국교가 된 나라들을 보면 그런 인간의 머리꼭대기 앉은 사탄이 종교를 통해 인간을 억압하고 악하게 다스린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프카니스탄을 장악한 극단주의 텔레반정권을 보면 인간이 종교를 이용하려다 제 꾀에 제가 넘어가게 된 역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어떻습니까?

내 믿음이 다만 잘되는 나를 위해 하나님을 섬긴다면 그건 우상숭배입니다.

구약의 북이스라엘이 하나님을 금송아지 형상으로 만들어 놓고 복이나 달라며 우상처럼 섬겼잖아요?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되 우상숭배의 차원의 본성을 뛰어넘으려면 예수님의 복음을 통해서만 그것이 가능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대로죠.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그러므로 예수님을 통해서만 우상으로가 아닌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을 온전히 영화롭게 섬길 수가 있는 것입니다.

나의 예배의 목적은 하나님의 영화로우심을 위해 섬기는 것입니다.

현대교회 안에는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섬겨주셔야 한다는 신학이 팽배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존재하시는 듯 가르치는 교회에 앉아 있는 사람들 얼굴을 보면 하나님께 고분고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알아서 잘되게 해 주시지 않는다는 것에 항상 예민해 있고 뭔가 부족하다고 속으로 잔뜩 화가 나 있는 신자들로 가득합니다.

21절,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는 이들, 하나님을 우상으로 대체한 이들에게 하나님은 진노하십니다.

 

2. 이 하나님의 진노는 종말적인 심판으로 집행될 것이지만 지금 이미 나타나고 있기에 복음을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에 대해 가장 심각하게 말씀하신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마10:28)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를 두려워하라(눅12:5)

본문 18절에서 하나님을 거역한 죄인들에게 진노가 나타나는 데 그 시제를 보면 현재 나타나고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이미 불경하고 불의한 자들에 대해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죠.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사람들은 강력하게 거부하고 반기를 듭니다.

몇 년 전 우리나라 버스에도 반기련이란 단체에서 시내버스 8대에 이런 광고를 달고 다닌 적이 있습니다.

‘나는 자신의 창조물을 심판한다는 신을 상상할 수가 없다’

아인슈타인이 했던 말이죠.

설득과 교화와 사랑만으로 저 수많은 범죄자들을 바꿀 수가 있다면 하나님도 인간을 심판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자연의 인과응보 법칙으로 심판하십니다.

나쁜 걸 심으면 나쁜 걸 거두게 하신 것이죠.

노아의 때나 소돔과 같이 자연에 섭리하셔서 심판하십니다.

구약성경 역사 속에 보여주신 대로 전쟁을 통해서도 심판하십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더 두려운 진노가 하나님을 거절하는 사람들에게 이미 나타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내버려두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바르게 잘 따르지 않는데도 별 일이 없네, 신앙이 별거 아니네’, 그런 것이 아니라 내버려두고 계시다는 것이 더 무서운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잘 보면 ‘내버려 두셨다’는 말이 세 번 나옵니다.

1) 24절,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게 하셨으니

하나님이 주님을 거부하고 정욕대로 살겠다는 인간을 내버려 두셨더니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나님이 선의의 간섭과 책망을 중단하시는 순간 인간은 자신의 정욕대로 행합니다.

그 결과의 치명성은 인간들이 서로를 욕되게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사도가 하나님이 내버려두신 인간들의 치명성을 가장 먼저 서로를 욕되게 한다는 것을 꼽은 것에 주목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결과로 나타난 사람간의 관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본래 사람은 영광스런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습니다.

서로를 존중하고 사랑하며 하나님의 아들의 대우를 받게 창조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거역한 인생들이 서로 욕되게 하며 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게 인간사의 가장 큰 폐악이고 고통 아니겠습니까?

내가 하나님처럼 남들에게도 높아지고 싶었는데 결과는 처음 창조 받았던 그 영광만큼도 아니게 오히려 모욕적인 대우를 받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많은 관계에서 심지어 가정에서도 사랑과 존중보다 서로에게 욕을 보이며 상처와 분노 속에서 살고 있다는 것은 하나님이 내버려두신 증거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내 중심에, 내 가정에, 일터에, 교회에 정녕 모셨다면 서로를 욕되게 하기를 그쳐야 합니다.

 

2) 26절,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셨으니

내버려두신 결과 자행하는 동성애와 비정상적인 성적 관계를 언급합니다.

당시 로마세계엔 공공연하게 동성애가 행해지고 있었습니다.

바울사도가 특히 동성애의 문제를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연결하는 것은 하나님의 간섭에서 벗어난 인간의 죄가 몸에도 새겨졌음을 논하는 것입니다.

마음과 의지 뿐 아니라 육체도 죄에 오염되고 타락해서 창조의 섭리가 아닌 비정상적인 욕망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죠.

런던에서는 또 이런 광고를 붙인 버스가 운행된 적이 있습니다.

무신론자인 리처드도킨스란 사람이 주축이 되어 한 일입니다.

‘아마도 신은 없을 것입니다. 이제 걱정하지 말고 인생을 즐기십시오‘

이런 행태에서 대체 그들이 어디까지 인륜과 법을 넘어선 쾌락을 따라 질주하려는지 다 드러나지 않습니까?

 

3) 28절,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하나님이 내버려두신 결과 인간이 자기 원하는 대로 강한 본성에 이끌려 악을 행하며 산다는 것입니다.

29절부터 31절까지에는 21가지의 죄악의 목록이 나옵니다.

이것이 우리 안에 타고난 본성적인 죄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지금도 그대로 남아있고 그 파워도 여전합니다.

이것을 잘 읽어보시면 그 중 하나라도 내게는 해당되지 않는다는 것이 아마 없을 것입니다.

불의, 추악, 탐욕, 악의,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 수군수군하는 것, 비방, 하나님을 미워하는 것, 능욕(남을 욕되게 함으로 자신을 높이려는 것), 교만, 자랑, 악을 도모하는 것, 부모를 거역하는 것(가장 기본적인 권위보다도 자기를 내세우는 것), 우매(일부러 선에 대해 무지한 태도), 배약(약속을 배반), 무정(애정이 없음), 무자비(곤경에 처한 사람에 대해 자비가 없음).

이런 것들 중에 특히 사람마다 더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죄성들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나머지, 나는 이건 아닌 것 같다는 죄악도 조건이 만들어지면 언제든 불거져 나옵니다.

예를 들어 ‘사기’는 경제적 이득을 위해 속이는 것이죠.

보통은 우리가 사기와 관련 없이 사는 것 같지만 장사, 사업을 하다 거액의 이익이 달려 있다면 속입니다.

전에 필리핀에서 관광사업을 육성하기 위해 외국인들이 필리핀에 올 때 제일 꺼려지는 게 무엇인지를 조사했습니다.

관광객들이 제일 싫어하는 것 1위가 고온다습한 필리핀 기후에서 사는 물방개만한 바퀴벌레였습니다.

관광청에서 아이디어를 내서 백 마리를 잡아오면 일 달러를 주는 안을 내 놓았습니다.

돈을 주니 곧 바퀴벌레가 사라지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계속 바퀴벌레를 가져오더라는 것입니다.

바퀴벌레를 대량으로 키우는 시설들이 막 생겨났기 때문입니다.

이런 게 사람의 사기성입니다.

나는 남이 잘 되는 데 별로 배가 안 아프다 생각되는 분이 계십니까?

전공분야에서 나보다 더 실력이 없는 사람이 학회에서 상을 탄다면 어떻겠습니까?

내가 잘 해서 인정받던 일을 다른 사람이 더 잘해서 내 설 자리가 없어진다면요?

죄의 목록 중에서 단 한 개도 내게 해당 안 되는 것은 없습니다.

가난에 찌들어 내 자식들 굶주리면 다 도둑질 비슷한 거라도 합니다.

더 극단적인 상황에 놓이면 살인도 합니다.

오늘 죄악의 목록들은 가벼운 것들이 아닙니다.

그 뿌리에서 얼만큼 거대한 악을 키워내는지가 죄의 무서운 본색입니다.

귀신이 무섭다지만 귀신들이 인간을 보면 나는 네가 더 무섭다라고 할지 모릅니다.

사람의 죄는 술 먹고 내가 나쁜 놈이다 타령하는 그런 정도가 아닙니다.

우리 죄는 다소 나쁜 상태가 아니라 매일 뉴스에 나오는 온갖 끔찍한 범죄자들 같이 될 만큼 나쁩니다.

하나님이 고삐를 잡아주지 않는 인생은 그 인격과 삶을 이 죄가 점령하게 되는 것입니다.

교양 있게 사는 것 같은 사람도 들끓는 속은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사는 것은 종말적인 지옥의 심판과 하등 다른 게 없습니다.

야고보사도가 혀의 죄에 대해 지옥불이라고 하잖아요?

야고보서3장6절,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

말로 지옥을 경험하게 됩니다.

사울왕은 다윗에 대한 시기로 일생을 지옥불 속에서 지냈고, 다윗은 부적절한 관계로 지옥을 경험했잖아요?

이것이 영원히 지속되는 게 심판이고 지옥입니다.

왜냐하면 죽어서도 이 본성의 인격성이 바뀌지 않기 때문입니다.

종말적인 심판에 이르기 전인 지금도 이 죄성으로 살기에 이미 지옥과 다름없이 사는 것입니다.

복음으로가 아니면 이 죄악의 결과인 불행과 심판을 바꿀 수 없습니다.

인간이 영원히 해결 못할 죄의 문제를 하나님이 친히 오셔서 죄값을 치르시는 것으로 해결해 주신 것이니까요.

믿기만 하면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의롭다고 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복음을 믿는 우리에게도 본성과 인격에 뿌리박힌 죄 문제는 여전히 심각하게 다뤄야 합니다.

아직도 자기 죄를 남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괜찮다고 생각하시는 분이 있으십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시기 바랍니다.

성령께서 내 죄의 뿌리를 비춰주시면 그것은 상대적이 아니라 절대적인 것을 알게 됩니다.

그것이 대개는 죄의 경험을 통해 성령께서 정확히 지적하십니다.

앞에 21가지 죄의 목록 중에 무언가에 깊숙히 걸리게 되는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계속 말씀을 통해 회개를 종용하시고 우리는 돌이키려고 애를 썼다, 끌려갔다를 반복하며 영 그 죄를 벗어나지 못하게 되죠.

바울사도 같은 탄식이 저절로 나오는 지경까지 성령께서 몰고 가십니다.

그럴 때 내가 나를 바르게 인지하게 되죠.

‘내 안에 선을 행할 능력이 없고, 내가 원하는 것은 악이구나’

거기까지 가야 예수님이 왜 저렇게 처절하고 참혹한 형벌을 대신 당하셨나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당하신 영혼과 육체의 형벌이 내 죄보다 절대로 과장 된 댓가를 치르신 게 아닙니다.

이 내 안의 죄의 뿌리에서 뱀처럼 죄가 항시 머리를 쳐든다는 것을 모르면 자신을 굉장히 나이스 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신도 그렇게 알고 남들도 멋지고 완벽한 사람이라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속는 거예요.

오히려 이 죄의 본성과 매일 싸우다 지치며 울다 웃다 기진맥진하며 결국 그래서 주님의 십자가밖에는 살 길이 없었구나를 인정하며 그 십자가를 매일 붙들고 살아가는 것이 더 정직한 성도입니다.

그러니까 성도들은 예수님 안에서 의롭게 된 안전과 평안을 누리며 살지만 누구보다 치열하게 내면의 죄와 싸우며 사는 것입니다.

죄로 인한 고통의 흔적이 있는 성도가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의 흔적을 가진 성도입니다.

내가 의롭다고 생각하는 순간 주님은 고개를 돌리십니다.

내가 죄인을 부르러 왔지 의인을 부르러 온 게 아니라고 하셨잖아요?

성도의 성화는 내면의 죄성이 점점 옅어지거나 없어지는 게 아니라 죄성을 다루는 능력이고 그로 인해 밖으로 죄를 행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더 성화를 위해 노력해서 남보다 나아졌다고 해도 자기 안의 사악한 죄성이 그대로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자랑거리가 되지 않는 것이죠.

그 괴리가 커서 절대 자랑스러울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자기가 위선자인 것 같아서 근심하는 마음이 들게 되는 것입니다.

지난 주도 어떤 두려움, 분노, 근심, 교만, 이런 죄성의 날것들이 시퍼렇게 올라오지 않았습니까?

그것을 느끼고 탄식했다면 은혜입니다.

더 깊은 죄를 깨닫는 것만이 더 깊은 예수님의 은혜를 깨닫는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하나님은 복음이신 예수님을 공개적으로 십자가에 높이 매달으셨습니다.

그 십자가를 보면서 아무도 하나님의 진노가 없다고 말하지 못하고, 아무도 내게 죄가 없다고 말하지 못하도록, 아무도 나는 몰랐다고 하지 않도록 인간의 모든 역사가 있는 한 그렇게 십자가를 걸어 두실 것입니다.

그 심판을 하나님이 스스로 당하셨고 구원하실 것이니 십자가의 복음을 믿으라고 걸어 두실 것입니다.

그러면 마귀와 죄의 본성으로부터 벗어나 하나님의 아들이 다스리는 복된 품에 안기게 되는 것입니다.

제 침대 밑에 우리 늙은 초코의 침대가 있습니다.

밤에 자러 초코와 같이 들어가는 데, 제가 옆으로 누워 초코를 바라보면 초코가 고개를 바짝 쳐들고 저를 바라봅니다.

그럼 제가 귀가 어두워 제 목소리도 잘 못 듣는 초코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합니다.

‘엄마가 죽을 때까지 보살펴 줄께’

어느 날 그 말을 하다 눈물이 왈칵 쏟아졌습니다.

이사야46장4절, 네가 백발이 되도록 내가 너를 품을 것이라

이 이사야서 말씀이 떠올라서입니다.

하나님이 계심을 부인하지 마시고, 평생 함께 삶을 가꿔주시고 죄 지을 힘도 없어져 호흡이 멈추는 그날 영원한 아버지 품으로 데려가실 복음이신 우리 주님을 믿고 영화롭게, 감사하게 섬기시길 축복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