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youtube.com/watch?v=pSmMTQw_QV0
지난주도 사시는 게 다 만만치 않으셨죠?
고생 많으셨습니다.
코로나의 영향도 있지만 세상이 갈수록 살기가 두려워지는 것 같습니다.
뉴스를 보기가 겁날 정도로 흉악범들은 왜 그렇게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는지요.
저게 사람인가 악마인가, 혼란스럽습니다.
전자발찌 살인범 강윤성은 자기를 그렇게 만든 건 다 뭣 같은 세상 때문이라고 댑서 악에 받쳐 호통을 쳤다고 합니다.
지난주에 하나님을 거역한 사람들이 21가지 죄악에 빠져 사는 세상의 큰 그림을 보았잖아요?
그 죄인들이 살아가는 세상이 이만한 것만 해도 기적이죠.
사람이 점점 악마 같아지는 건 인간의 죄성이 하나님보다 사탄의 제안에 더 내통하기가 쉽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강윤성이 청주교도소에서 기독교신앙을 가졌다죠.
그리스도의 향기를 뿜으며 살겠다고 했답니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어쩌면 이 악마 같은 자기를 끊기 위해서는 이 세상 아무 것으로 안되는구나. 혹시 하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생각이 한 자락 지나갔을 수도 있었겠습니다.
참된 회개에 이르지 못하고 결국 살인마가 되어 버린 강씨에 대한 기사를 읽으며 마음이 착찹했습니다.
만일 하나님을 몰랐다면, 예수님이 나를 속죄하셔서 이만큼 살려놓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어떤 사람이 되었을지 모릅니다.
아직은 본 적이 없는, 내 안에 더 웅크리고 있을 죄의 사특함을 생각하면 하나님이 붙들고 계시는 게 감사할 뿐입니다.
바울사도는 이 소망 없는 인간들에게 가장 복된 소식, 복음은 바로 우리 죄를 속죄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라고 선언했습니다.
우리를 목줄로 메어 끌고 다니는 죄의 본성과 하나님의 심판으로부터 구원해 줄 이 복음에 대해 분명히 알고 믿도록 로마서를 기록한 것입니다.
바울사도는 지난 설교 본문에서 모든 사람이 죄를 범했고 하나님의 진노아래 있다고 죄인들을 향해 포문을 열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 포구가 방향을 돌려 특정한 누군가를 향합니다.
이런 죄가 낱낱이 고발되는 데도 나하고는 전혀 상관없다는 태도로 수수방관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문제가 무엇인지 오늘 설교의 제목이 알려주죠.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성령께서 오늘 말씀이 다른 누구가 아닌 바로 나에게 향하게 해 주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1. 먼저 당시의 상황에서 바울사도가 경고한 이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전체 문맥으로 보아서 이들은 유대인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의 후손입니다.
시내산에서 하나님을 섬기겠다고 언약하고, 하나님의 통치를 따르겠다고 율법을 받았죠.
또 언약백성의 증표로 몸에 할례를 행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께서 구원의 역사를 펼쳐나가실 동반자로 선택하신 성경의 민족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아주 피상적인 신앙을 갖고 있으면서도 그 언약적 구원에 대한 과도한 확신에 차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죄를 회개해야 한다는 필요성이 절실하지 않았습니다.
이방인들은 야만인이고 우리만 구원받은 백성이라는 우월감이 1300여년간 유대인들에게 각인된 신념이었습니다.
사실 구약성경을 읽어서 알지만 이스라엘이 보통 죄인들입니까?
하나님이 저들을 택하셔서 구원역사에 함께 하시는 것은 저 정도의 죄인들을 품으시고 구원하신다는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보여주는 것 아닌가요?
그들이 자랑하던 율법이 사실 죄가 무엇인지를 가리켜 놓으신거예요.
그게 얼마나 무서운 법인데 그걸로 남의 죄를 판단하고 자기들은 지킨 걸로 친 것입니다.
13절에 보면 율법을 듣는 자가 아니라 행하는 자라야 의로운 것인데 왜 행하지 않냐고 추궁하죠.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우리도 그렇잖아요?
말씀을 얼마나 많이 알지만 다 지킵니까?
그냥 지킨 것으로 치고 살잖아요.
오늘 유대인들을 볼 때 그게 참 심각한건데요.
성경은 인간의 죄와 예수님의 속죄의 구원과 그 기회를 거부한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서 죄문제에 대해서 잘 말하지 않습니다.
최근 미국교회에 들어오는 최신의 가르침이 무엇인지 크리스천포스트에 게재된 칼럼을 보면 그것은 ‘죄’를 빼버린 기독교라고 합니다.
전에 어떤 성도님이 우리교회는 왜 죄인이라는 설교를 그렇게 많이 하냐고 하신 적이 있습니다.
우리가 죄인이라는 걸 한시라도 망각하면 그 순간 하나님과의 관계선상에서 이탈합니다.
우리가 죄인이 아니라면 왜 지금 하나님께 이렇게 감사하며 영광을 돌리는 예배를 드리겠어요?
죄인이 없다면 복음이 어디에 필요합니까?
십자가는 죄와 짝인 것입니다.
복음이 죄인을 구원하려할 때 가장 큰 적은 죄를 인정하지 않고 회개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죄를 지었으니 죄인이라는 게 아닙니다.
본래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짓는다는 걸 바로 알아야 합니다.
그 본죄를 인정해야만 내 죄를 대신 담당하신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얻는다는 관계가 성립이 되는 것이잖아요?
살인마 강윤0 은 우리 안에 있는 죄가 그렇게 남을 죽일 수도 있다는 걸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아주 분명하게 이 사실을 꿰뚫어 주셨잖아요?
남을 미워하고 분노할 때 우리 안에 그 살의가 올라왔다고 하셨죠.
저 사람 없어졌으면 좋겠다.
하나님을 믿겠다고 하는 데 나는 죄인은 아니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제일 곤혹스럽습니다.
그런 분들을 위한 기도가 저에겐 늘 절박합니다.
모두가 하나님 앞에 죽을 죄인임을 깨닫는 복된 성도님들 되시길 간절히 원합니다.
2. 바울사도는 이 유대인들의 죄와 심판을 경고하면서 특히 남을 판단하는 것에 주목합니다.
1절,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3절, 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판단하고도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
왜 여러 가지 죄 중에 특히 남을 판단하는 문제를 꼬집어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했을까요?
남을 판단하면 안됩니까?
우리가 사리를 분별하고 판단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제대로 살 수 있겠어요?
1) 그러나 바울사도는 선민의 우월감에 빠져 이방인들을 야만인으로 판단하는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겨누는 이유를 간파합니다.
본문 1절에서 3절까지에서 그들이 ‘판단’한다는 말이 네 번이나 나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심판’하신다는 말이 본문에서 세 번이 나옵니다.
우리 번역에는 그들이 남을 ‘판단’하는 것과 하나님이 ‘심판’하는 것으로 다르게 번역했지만 원어 상으로는 그 어원이 같습니다.
영어성경도 판단이나 심판이나 똑같은 단어 judgment 를 쓰고 있습니다.
왜 바울사도가 유대인들이 남을 판단하는 걸 가장 큰 문제로 지목했는지 알 수 있죠.
심판 받아야 할 신분을 망각하면 심판자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게 그 원형이 선악을 스스로 판단하려 했던 선악과 생각이 나지 않습니까?
사람을 판단해서 선악간 심판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시편 122장5절을 보십시오.
거기 판단의 보좌를 두셨으니 곧 다윗 집의 보좌로다
이것은 다윗의 왕조를 통해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보좌를 말합니다.
판단의 보좌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남을 판단하는 것은 하나님의 판단의 보좌를 탈취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남을 판단하는 게 이렇게 두려운 일입니다.
그러니까 복음의 또 하나의 적은 스스로를 판단의 보좌에 앉히는 교만인 것입니다.
남을 지나치게 판단하고 정죄하다 보면 자기는 죄인이 아니라 의로운 사람이란 왜곡 된 확신을 갖게 되죠.
결국 자신이 모든 사람, 모든 일의 심판자, 결정권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진지하게 자기의 죄악을 회개하는 것을 보기 힘듭니다.
당시 유대인들을 향한 바울사도의 책망은 오늘 21세기 현대교회에도 동일하지 않겠습니까?
교회를 성실하게 오래 다니고, 예배와 기도회에 빠짐없이 참석하고, 봉사와 전도와 십일조와 성경공부를 철저히 하는 분들의 눈초리가 교회에서 제일 무섭다고들 합니다.
사람이 느낌이 있잖아요?
‘아, 나를 판단하고 있구나’
유대인들이 소소한 율법조항을 지키며 교만해져서 안 지키는 세리와 창녀와 죄인들을 정죄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남의 잘못과 단점이 우리 눈에 왜 안 보이겠습니까?
그게 보이는 순간, 아 나도 똑같은 죄인이지 생각하고 심판을 멈추어야 하는 것이죠.
나만 판단할 줄 아는 게 아니라 남들도 똑같이 나의 잘못과 단점을 판단하고 있습니다.
서로를 예민하게 판단하고 심판하는 가정과 교회는 이미 하나님의 진노가 임한 곳입니다.
2) 이렇게 남을 판단하고 정죄할 때 사람들은 암묵적으로 자기를 의롭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남을 판단하는 행위 자체가 바로 자기도 똑같은 죄인이라는 증거라고 바울은 논리적으로 밝힙니다.
네가 핑계하지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예수님께서도 같은 말씀을 하셨죠.
마태복음7장1절,2절입니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비판을 한다는 것은 그게 잘못인지를 식별한다는 뜻입니다.
모르면서 비판하지는 않죠.
남의 죄가 보인다는 것은 그 죄가 어떤 것인지 경험적으로 안다는 뜻입니다.
전혀 경험해 보지 않은 죄를 어떻게 죄라고 알겠냐는 것입니다.
도둑질하고 횡령하는 사람을 비난하는 사람 속에 남의 것을 탐내고 훔치는 본성이 있잖아요?
살면서 남의 물건이나 돈에 한번도 손 댄 적이 없다는 사람 있습니까?
혹시 그렇다고 생각하신다면 절도의 기준이 관대해서 그럴 것입니다.
남을 심판할 정도로 그렇게 죄에 대해서 잘 알고, 똑같은 죄를 짓는 것은 너도 죄인이라는 핑계하지 못할 증거라는 것이죠.
저번에 난 하나님 모른다는 일반 죄인들에게 핑계대지 말라고 일축했던 것처럼 너 유대인도 명백한 증거가 있으니 핑계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래서 모든 사람,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우리들이나 다 죄인이라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3. 하나님은 죄에 대해 반드시 심판하십니다.
유대인의 두 가지 이유, 즉 교만하여 스스로 심판의 자리에 앉은 것과 남의 죄를 판단하며 자기 죄는 인정하지 않는 죄에 대해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는 경고장이 날라갑니다.
4절,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풍성함을 멸시하느냐
하나님이 얼마나 이스라엘을 구원하고 싶으셨겠습니까?
하나님의 첫 백성이고 구원 역사를 그들의 몸으로 기록하신 것이잖아요?
구약 선지서에 보면 돌아오길 촉구하시는 마음이 얼마나 절절하십니까?
예수님께서 회개하지 않는 예루살렘을 보고 우셨잖아요.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내가 너희를 모으려고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않았도다
옛언약과 율법을 내세워 복음을 믿지 않는 이스라엘은 그들의 죄에 따라 심판이 확정됩니다.
5절, 다만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하는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유대인들이 내세우는 율법과 할례이든, 자기의 도덕적 자신감이든, 그것으로 남을 판단하고 복음을 거부하며 고집스럽게 버틴 결과는 하나님의 진노를 쌓고 있는 것입니다.
6절부터 하나님의 구체적인 심판에 대해 말씀합니다.
6절,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1) 하나님의 심판에서 영생을 얻을 사람들은 누구인지 7절을 보겠습니다.
7절,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우리는 이미 앞에서 영생 얻을 유일한 방법을 들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복음, 예수님 자신을 믿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7절에서 영생을 얻는 사람들은 당연히 예수님을 믿은 사람들이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의 행위를 설명해 주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입니다.
본성의 죄악 된 욕구를 참고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또 성도들이 항상 구하는 것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하는 영구한 것입니다.
복음을 믿고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에게 영생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만 하면서 여전히 육신의 욕구대로 살아가고 썩어져 갈 이 땅의 것들을 위해 살고 있다면 말씀이 잘못되었을 리가 없으니 내 믿음이 뭔가 잘못되었거나 미숙한 것입니다.
죄의 본성에 대해서 참고 선을 행하기 위해 애쓰고 계십니까?
이 땅의 영광이 아닌 하늘의 영광과 존귀를 목적으로 살고 있으십니까?
이것이 우리가 어떤 상을 받을 것인지를 가늠해 볼 시금석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2) 복음을 거부하고 자기 죄를 해결 받지 못한 사람, 그래서 구원을 얻지 못한 사람들이 8절에 나옵니다.
8절, 당을 지어 진리를 따르지 아니하고 불의를 따르는 자에게는 진노와 분노로 심판하시리라
7절의 영생 얻을 사람들과 뚜렷하게 대비되죠.
이들은 진리를 따르지 않고 죄의 욕구를 참지 않고 선을 행하는 대신 악을 행합니다.
삶의 목적이 영원한 하나님나라가 아닌 썩어질 땅에 맞춰져 있습니다.
이 땅의 영광과 성공에 목적이 있는 것이죠.
사람이 왜 끼리끼리 모이고 당을 짓습니까?
서로 힘을 합쳐 파워를 키워 욕심을 이루려는 것입니다.
우리교회도 요즘 당을 짓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광산김씨의 세력이 커져서 나도 광산김씨 하고 싶다는 사람들이 생긴다고 합니다.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의 일을 위해, 나의 믿음의 보호와 진보를 위해 연합해야 합니다.
그런데 두 팀도 안 되고 세 팀이어도 안 되고 다 한 팀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의 교회를 깨뜨리는 가장 큰 죄는 서로 통하는 사람들끼리 당을 짓는 것입니다.
사탄이 교회를 무너뜨리는 데 제일 많이 사용하는 전술이 파당을 만드는 것이죠.
초대교회에 가장 먼저 생긴 분열의 위기도 파당의 문제였습니다.
사도행전6장을 보면 헬라파 유대인과 히브리파 유대인들 사이에 갈등이 있었습니다.
교회에서 구제할 때 외국에서 들어와 사는 헬라파 과부들이 히브리파 과부들보다 차별을 받는다고 사도들을 원망하는 문제가 발생하잖아요?
거기서 벌써 파당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교회가 하나 되는 것을 방해하고 분열시키는 어떤 죄든 하나님은 엄중히 심판하십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자기 이익을 위해 이용하려 한다면 그 안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참믿음이 과연 있기나 한 것일까요?
그 심판의 결과 받을 형벌이 9절에 나옵니다.
9절,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는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며
악을 행하는 사람에게는 환경적인 환난과 심령으로는 곤고함이 있습니다.
악을 행하면서도 형통하게 보일 수도 있지만 그의 영에는 환난과 곤고가 있을 것이라고 오늘 성경이 엄중히 경고하십니다.
대신 10절,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으리니
참고 선을 행하며 이 땅이 목적이 아니라 영원한 내세와 하나님을 목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겐 영광과 존귀와 평강으로 보상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 모든 성도님들 이 믿음으로 인내하시길 바랍니다.
4. 마지막으로 공정하신 하나님의 보응엔 차별이 없으십니다.
11절, 이는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심이라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에 대해서 꼭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은 차별이 없으시다는 것입니다.
죄에 대해서도 공정한 심판을 내리시만 은혜와 복을 주실 때도 얼굴을 봐서 더 주시는 일이 없습니다.
‘나를 위해 헌신하는 성도니 이 죄를 봐 줘야겠다’ 그러신 게 없습니다.
우리는 좀 그러셨으면 좋겠죠.
그러나 하나님이 사람의 얼굴을 보고 보상을 주지 않으신다는 것을 확실하게 알고 있어야 합니다.
사람의 죄성에는 편파적인 것과 편애가 있습니다.
한 쪽으로 쏠리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는 살아오며 차별로 인한 괴로움을 당하며 살게 됩니다.
어릴 때 부모에게 차별과 편애를 당했다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그래서 상처를 받지만 자기도 그런 본성을 벗어나지 못하고 남을 차별하죠.
사람의 마음엔 누구나 존대 받고 싶고 최고로 인정받고 싶고 차별 없이 사랑받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사람은 편파적이라 그렇게 우리를 대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사람의 관심과 사랑은 순위가 있습니다.
우리는 동시에 사람들을 똑같이 만족스럽게 사랑할 능력이 없습니다.
하나님만이 우리를 그렇게 대해 주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만 우리 각자를 완전하게 사랑해 주실 수 있기 때문에 우리가 주님의 사랑에는 만족하고 부족함이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양떼에게 부족함이 없이 인도하시는 목자와 같으시잖아요?
그러나 신자들의 생각에 이것이 오인되어서 하나님이 무조건 우리의 요구를 들어 주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구하면 백날 구해도 받지 못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차별하지 않으시는 공정함을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시험이든 사업이든 취업이든 건강이든, 학업이든 좋은 결과를 얻고 싶다면 시작부터 과정 내내 세밀하게 기도하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선 그 일의 목적이 썩어질 세상의 영광이 아닌 영구한 하늘의 것에 맞춰집니다.
내 마음대로 목표를 정하고 내 방법으로 진행시키고 마지막에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시길 기도하는 것은 잘못 된 것입니다.
이미 만들어진 결과물에 대해 하나님은 안수하고 축복하기만 하시는 분이 아니잖아요?
경쟁자가 있다면 하나님은 누구 손을 들어주십니까?
선의의 노력을 하고 좋은 성과를 만든 사람 편을 들어주십니다.
그러니까 계획부터 기도하고 아이디어와 지혜를 얻고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서 결과물을 낸 뒤에 하나님이 좋은 결과를 주시길 기도해야 하는 것이죠.
바울사도 역시 1장을 보면 로마 방문을 원해서 쉬지 않고 계속 기도하고 있다고 하잖아요?
내 마음대로 다 해 놓고 좋은 결과를 달라고 그런 기도는 하지 말아야 합니다.
물론 사후기도에도 하나님은 최악의 상황은 모면하게 해주시기도 합니다.
처음 하나님을 알아가는 단계에서, 또 정말 급박하고 간절한 문제라서 하나님이 들어주실 때가 있지만 매번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 게 기복적인 신앙이잖아요?
그런 기도응답은 주셔봤자 나중에는 우연이었나 그렇게 생각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모든 일에 처음부터 우리가 의뢰할 때 도와주시고 옳은 방향으로 인도해 주시고 그렇게 해서 결과를 축복해 주시기를 기뻐하십니다.
잠언 3장6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저도 모든 일에 시작부터 진행되는 과정 중에 계속 기도해야 함을 항상 잊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중보기도도 그렇습니다.
그러다 보니 거의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말씀대로 되는 것이죠.
이게 생활에서 하나님의 인도와 복을 받는 아주 중요한 점인데 이 비결을 오늘 잘 획득하시길 축복드립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오늘 바울사도는 ‘나는 죄 없는데’ 라는 유대인들을 향해 이렇게 선언합니다.
‘너 죄인이야, 아브라함 자손이라도 죄 지으면 심판받아’
물론 우리가 안전한 예수님의 복음 안에 있지만 그렇다고 죄를 지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심판을 대 놓고 모욕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우월감에서 남을 심판하는 것은 하나님의 판단의 보좌를 탈취하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남을 심판하는 순간 내가 그 자리에 앉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사람의 선악간 행한 대로 진리를 따라 보응하십니다.
복음을 믿고 구원을 얻은 우리는 참고 선을 행하며 영구한 내세에 초점을 맞춰 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복음을 거부하고 악을 행하는 사람의 영에는 환난과 곤고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외모로 사람을 심판하지 않으시고 축복도 그러십니다.
생활과 일에서 하나님의 복을 받기 원하십니까?
모든 일, 범사에 일의 시작부터 모든 과정과 결과까지 전부 하나님께 기도하며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최선을 다하면 일이 잘 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예수님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주님과 함께 동행하시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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