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로마서5장12절-21절 (아담과 예수그리스도)

남수연 2021. 9. 21. 14:56

https://www.youtube.com/watch?v=Sqz22c3HZ_o&t=2856s 

저는 요즘 로마서 말씀을 나누는 게 우리 믿음의 터를 견고하게 하는 데 아주 도움을 준다고 확신합니다.

집터가 굳건하지 않으면 그 위에 세운 믿음의 집은 늘 위태롭습니다.

우리의 삶의 정황은 변화무쌍하지만 믿음의 터전이 견고하면 그 인생 집은 절대 무너지지 않습니다.

우리의 믿음의 반석은 당연히 예수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께서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복음, 그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는 것이 믿음의 기촛돌입니다.

그 믿음이 더 단단해지게, 더 깊고 풍성하게 하는 것이 로마서입니다.

오늘도 로마서 말씀을 통해 구원의 중요한 기초를 확보하고 굳건해진 믿음으로 모든 인생사를 다룰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되시길 축원드립니다.

 

1. 오늘 말씀은 좀 어렵게 느껴지기 때문에 전체를 간단히 먼저 설명해 드리고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로마서의 대전제는 ‘복음은 믿는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다’입니다.

거기에 관련해 ‘하나님의 진노아래에 있는 죄인, 율법이 아니라 복음으로 구원받는 것, 그리고 복음을 믿음으로 의롭게 된 성도들이 누리는 유익’에 대해서 순차적으로 공부해 왔습니다.

본문에서 바울사도가 갑자기 아담과 예수그리스도를 비교해서 논설하는 게 앞부분과 잘 맞지 않아 보입니다.

그런데 이유가 있는 것이죠.

바울사도가 여기까지 쓰던 중 로마성도들의 마음에 떠올랐을 의문을 캐치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죄인으로 태어났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떻게 한 분 예수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게 되냐’는 것입니다.

그게 ‘실제로 일어나는지 어떻게 알 수 있냐’는 것이죠.

복음에 던지는 인간의 원천적인 질문을 오늘 드디어 다루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도 그렇고, 성도님들이 간단히라도 알아두시면 좋은 것이 성경을 해석하는 방법입니다.

성경이 내게 뭐라고 말씀하는가를 연구하고 찾아내는 것이 해석입니다.

물론 성경을 해석할 때 기본은 성경은 성경으로, 그리고 성령의 조명으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성경해석 방법은 시대에 따라 변천해 오면서 아주 방대해졌습니다.

그런데 간단히 세 가지 정도만 알면 성경읽기와 묵상에 도움이 됩니다.

성경을 문자 그대로 이해하는 방법과 그 안에서 도덕적 교훈을 찾는 방법과 그 안에 숨겨진 영적인 의미를 찾는 방법입니다.

그 중 세 번째 영적인 해석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풍유적 혹은 알레고리적 해석 방법입니다.

해석자의 주관으로 말씀에 영적인 의미를 부여해서 해석하는 방법인데 자의적 해석으로 성경을 왜곡할 위험이 있어 현대에는 권장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영적해석 방법은 성경의 굵직한 사건들이 예수님을 예표하는 것이라고 해석하는 모형론적 해석방법입니다.

광야에서 하나님을 원망하다 불뱀에 물려 죽은 사람들을 위해 모세에게 놋뱀을 만들어 매달은 사건 아시죠?

예수님께서 그 사건을 자신이 죽으심으로 죄인들이 구원받을 것에 대한 모형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놋뱀을 바라 본 사람들이 실제로 살았듯이 예수님의 대속을 믿는 사람들이 생명을 얻는다는 것이죠.

또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만에 다시 세우리라고 하시면서 구약의 성전이 자신의 모형임을 말씀하셨습니다.

히브리서에서는 구약의 속죄제사와 제물이 예수님의 모형이었다는 모형론을 통해 예수님의 속죄의 실제성을 논증합니다.

당시 속죄제사가 실제로 죄를 사하는 효력이 있었듯이 예수님의 대속도 실제로 죄를 사할 수 있다는 것이죠.

성경은 예수님에 대한 모형론으로 해석하는 게 안전합니다.

그래야 기복주의나 신비주의나 자의적 이단교리에 빠지지 않습니다.

요즘 성경묵상을 함께 하는 데, 어떻게 본문을 읽어야 하는지 어려워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 세 가지 방법으로 누구나 성경을 해석할 수 있습니다.

지난 주 만나를 먹게 된 사건을 문자적 해석으로 볼 때 하나님이 이스라엘백성들을 광야에서 살리시기 위해 먹을 것을 내려주신 것입니다.

문자 그대로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돌보심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도덕적 해석으로 볼 때, 만나를 먹게 된 것은 신명기에서 이스라엘을 낮추시기 위한 것이라고 하셨으니 겸손의 훈련으로 해석이 되는 것이죠.

영적인 해석으로는, 신약에서 예수님이 자신을 가리켜 하늘에서 내려온 산 떡이라고 하시면서 만나가 자신의 대속의 몸을 가리킨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만나를 먹고 생존했듯이 예수님의 몸을 먹어야 산다, 즉 예수님을 믿어야 구원을 얻는다고 해석 적용하는 것입니다.

 

바울사도는 오늘 본문에서 아담을 예로 들어 예수님의 대속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모형론으로 설명하는 것입니다.

바울사도의 논지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모든 사람이 다 구원을 받는다는 게 실제로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같은 성격의 사건이 이미 구약에 있었고 지금 이 세상에서 현실로 벌어지고 있기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아담의 범죄로 모든 사람이 죄에 빠졌고 사망에 이르게 된 현재 인간의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매일 보는 바와 같이 죄인 아닌 사람이 없고, 죽지 않는 사람이 없잖아요?

그것이 바로 한 사람 아담에게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한 사람으로 인해 죄와 사망이 왔다면 다른 한 사람으로 인해 속죄와 생명이 오는 것도 당연히 가능하다는 것이죠.

그래서 14절에 보면 아담은 오실 자의 모형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물론 역할은 정 반대죠.

아담과 예수님은 각각 한 사람은 사망의 대표자, 한 사람은 생명의 대표자가 됩니다.

그러나 아담과 예수님의 영향력은 비교할 정도가 아니기에 그 결과의 차이도 엄청나다는 것을 본문 15절 이후에서는 다양하게 설명하는 것입니다.

이것만 이해해도 오늘 설교는 반은 들으신 것입니다.

 

2. 바울은 납득시켜야 할 성도들의 의문점을 전제로 복음을 변론해 가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바울사도의 논증을 통해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과 내가 죄인이라는 것은 알겠습니다.

그런데 죄는 아담이 지었는데 왜 나까지 죄인이 되었냐는 것이죠.

더 근원부터 따지자면 왜 아담이 범죄할 것을 아시면서 선악과를 두셨냐는 것입니다.

성경을 가르쳐 보면 어린 아이들도 똑같이 이런 질문을 합니다.

그동안 다양한 예화들을 이용한 설명을 들어 오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완벽한 설명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복음은 간단히 한 문장으로 정리할 수 있지만 그 안에 담겨있는 영적 실상, 절차, 근거, 논리, 하나님의 경륜은 간단치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죠.

요한복음3장12절,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

그래서 이 선악과 문제, 죄의 전가 문제를 나름대로 열심히 설명하지만 인간의 지각의 한계로 완전한 설명과 이해는 불가능합니다.

그래도 성경에서 알려주신 만큼은 우리가 알아야 믿음에 대해 확신을 가질 수가 있습니다.

이게 사실 우리 믿음의 시원이고 뿌리잖아요?

그냥 무조건 믿자는 것보다 얼추라도 듣고 이해하는 편이 훨씬 낫습니다.

예수님의 속죄를 이해할 때 아담을 통해 모든 인간이 죄인이 된 사실을 어떻게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반드시 넘어야 할 산입니다.

 

1) 사람들이 갖는 의문은 하나님이 왜 인간을 지으실 때 죄를 지을 가능성이 있게 만드셨냐는 것입니다.

창세기1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신 기사가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형상대로 인간을 만드셨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부여하셨으니 아담이 얼마나 대단한 존재였겠습니까?

그러나 아담은 신이신 하나님처럼 완벽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피조물을 만드셨지 신을 만드신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성품과 능력을 다량 받아서 탄생했지만 아담은 완벽하게 선을 행할 수 있는 하나님 같은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통치 아래서 부여받은 영광의 선물들을 자제하며 누려야 하는 피조물인 것이죠.

거기서 아담의 불순종의 가능성이 불가불 열려있게 되는 것입니다.

 

2) 아담이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탁월한 피조물인데, 너무 잘나서 과연 하나님께 순종할지 아닐지의 여부를 판별하는 시금석이 선악과입니다.

모든 것이 허용된 에덴에서 단 하나의 나무를 하나님은 금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이 열매를 금지함으로 창조주께 순종해야 할 피조물의 마땅한 지위를 지키게 하신 것이죠.

하나님의 명령대로 선악과를 먹지 않을 때는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 하는 복을, 불순종 해 먹는 날에는 영원히 하나님께로부터 떨어지는 사망의 벌을 받기로 언약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이 왜 죄를 지을 수 있도록 자유의지를 주셨냐고 억지를 부립니다.

자유의지가 없이 우리를 창조하셨다면 좋으시겠습니까?

사랑한다면 자유롭게 선택하며 살 수 있는 의지를 주셔야 맞는 것이지 복종 기계를 만들겠습니까?

다만 그 자유의지는 하나님께 순종하는 쪽으로 사용할 때 선한 것입니다.

그 금단의 선을 넘었을 때, 들어온 것이 죄입니다.

이전까지 ‘죄’는 실체가 없었지만 불순종한 즉시 ‘죄’라는 엄청난 위력이 있는 실체가 나타난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언약을 어기고 불순종한 아담은 죽음의 형벌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결별인 영원한 영적 사망과 그것을 암시하는 전조증상인 육체적 죽음입니다.

12절,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3) 이렇게 아담이 불순종해서 죄를 짓고 언약한 대로 사망에 이르게 된 것은 이제 이해되지만 왜 그 죄가 후손들에게도 그대로 물려지게 되었냐는 의문이 또 생기죠.

아담이 순종하면 우리가 다 순종하는 것이고 아담이 범죄하면 왜 우리가 다 범죄자가 되냐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한 답변으로 우선 대표의 원리를 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담과 언약을 맺었지만 사실은 아담 한 사람이 아니라 모든 사람과 언약한 것이라는 게 대표원리입니다.

이런 대표원리는 세상에서 일반적으로 통용되죠.

을사조약에 이완용을 위시한 다섯명의 을사오적이 협약문서에 사인함으로 우리나라 국민 전체가 일본 식민이 되는 것 같은 것이죠.

이것이 대표원리지만 그래도 그런 중요한 것을 왜 대표자 아담과 언약을 맺냐고 불만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언약에 대표성이 없고 만일 아담 한 개인과만 계약을 맺으셨다면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나머지 태어나는 모든 사람들은 그럼 뭡니까?

그렇다면 세상에 태어날 나머지 모든 사람들하고도 태어나는 대로 일대 일로 다 언약을 맺으셔야 하는 것이잖아요?

그러니까 하나님은 아담 한 사람과 계약하신 게 아니라 아담을 총수로 해서 그의 허리에서 나올 전 인류와 계약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는 이미 모든 영혼이 창조되었던 상태죠.

아담이 하나님께 순종하면 후손들과 더불어 하나님의 복락을 누리게 되는 것이고 아담이 불순종하면 후손들도 아담과 더불어 사망의 형벌을 받게 된다는 계약을 한 것입니다.

아담도 그 사실을 당연히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억울한 느낌이라면 달리 해석할 열쇠가 12절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여기서 바울사도가 아담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왔다고 하지 않고 ‘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물론 아담을 염두에 둔 것이고, 대표자로서의 한 사람이란 의미지만, 그 ‘한 사람’은 꼭 아담만이 아니라는 의도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담이 아니라 나하고 언약했어도 나도 불순종했을 것이라는 예리한 통찰입니다.

안 그럴 것 같죠?

아담은 인간의 대표자입니다.

인간이 할 만한 일을 한 것이지 아담만 특별한 행동을 한 게 아닙니다.

설령 아담이 아닌 나 자신이 하나님과 언약을 했다 해도 아담과 같은 죄를 지었을 것이 자명합니다.

아담이 대표로 죄를 짓고 그 후손으로 태어난 우리들이 다 죄의 결과를 이어받은 것이 전혀 어색하지도 않고 억울하지도 않은 것입니다.

 

3. 그런데 놀라운 하나님의 반전이 있습니다.

아담 한 사람으로 인해 모든 사람이 죄인이 되고 영적 사망과 육체의 죽음에 빠진 것이 오히려 더 나은 결과를 가져왔다는 것입니다.

그게 14절입니다.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까지도 사망이 왕 노릇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모형이라

이미 하나님은 아담 대표론을 통해 그리스도 대표론을 계획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사람이 죄를 범했지만 인간에게 전화위복이 된 것입니다.

아담 때 보다 더 잘 된 것이죠.

예수님의 순종의 대속을 통해 하나님의 공의가 충족되었고 그것을 믿는 모든 사람들이 이제는 사망에서 완전한 생명으로 갈아타게 된 것입니다.

그것은 단지 범죄 이전의 아담의 상태로 돌아가는 게 아닙니다.

범죄 할 가능성이 있고 언제든 심판 받을 처지였던 아담이 아닌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우리가 그 많은 불순종에도 불구하고 완전한 영생이 보장 된 것이죠.

우리가 매일 죄를 짓지만 그렇다고 구원에서 떨어지는 게 아니잖아요?

아담보다 더 영광스런 은사와 선물을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게 된 것입니다.

그 차이를 15절부터 마지막 까지 계속 격앙되어 이어가는 것입니다.

그 은사와 선물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좀 알라는 것입니다.

15절,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구원의 선물은 많은 사람에게 넘쳤느니라

16절, 이 선물은 다시는 범죄 걱정을 하지 않도록 완전히 의롭다고 판결을 내렸다는 것입니다.

17절, 이전엔 죄와 사망이 왕노릇했지만 이젠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성도들이 생명을 얻고 영원히 왕노릇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왜 내가 선악과를 먹지도 않았는데 죄인이 되었냐 억울하다 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아담의 원상태보다 더 큰 은사와 선물과 영화가 예수님 안에서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천국에선 우리의 자유의지로도 하나님께 불순종한 죄를 짓지 않을 것입니다.

불순종의 결과 죄 가운데 살아 봤잖아요.

하나님께로부터 떨어져 나가는 게 어떤 것인지 인생 살아 봤잖아요?

탕자가 다시 재산 챙겨서 아버지 집을 나가겠습니까?

죄의 비참함 속에서 살았던 것과 누리게 된 천국을 어찌 비교할 수 있겠어요?

또 끝까지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고집스럽게 살다 심판을 받고 여전히 자기 죄 가운데 고통당하는 영혼들을 눈으로 볼 것입니다.

더 이상 아담처럼 하나님의 사랑과 선의를 의심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아담이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 죄를 짓게 되는 단계를 보면 하나님의 선의를 의심하는 마음이 들었잖아요?

십자가에서 나를 위해 피흘려 죽으신 예수님을 만나볼 텐데, 그 진실한 사랑이 사실이었음을 알고 감격할 텐테, 왜 또 불순종을 하겠습니까?

예수님의 그 사랑만으로도, 그 사랑을 다시는 잃고 싶지 않아서라도 우리는 배신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영원히 천국에서 하나님과 더불어 복되게 살아가는 구원의 그림이 완성되는 것입니다.

 

4. 그렇기에 우리는 아담의 사망의 대열에서 예수님의 생명의 대열로 줄을 바꿔 서야 합니다.

아담의 대열인 자연적인 출생, 자연적인 삶은 사망의 대열입니다.

예수님의 대열은 우리의 모든 죄가 그 안에서 속죄되고 의롭게 되고 더 풍성한 복을 얻는 생명의 대열입니다.

예수님은 그 결단을 좁은 문, 좁은 길을 선택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또 그것을 포도나무에 접붙여진 가지로 설명하셨습니다.

포도나무인 예수님께 접붙여졌을 때 예수님께로부터 생명과 생존에 대한 모든 것을 공급받고 예수님과 같은 열매를 맺게 된다는 것입니다.

아담의 대열에서 우리에게 주어졌던 삶이 무엇입니까?

창세기3장에 나오죠.

하나님과 원수 되었고, 대신 마귀와 동맹했고, 사람관계는 아담과 하와처럼 서로를 탓했고, 가시와 엉컹퀴로 가득한 세상에서 땀 흘려 수고했지만 소산은 없고, 환경을 다스리는 게 아니라 환경이 나를 지배하고, 사망이 왕노릇 했습니다.

예수님의 대열에 섰다면 당연히 이 모든 것이 바뀌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화평하게 되고 순종하려는 마음으로 바뀐 것입니다.

마귀의 의견에 동조하지 않고 마귀를 대적하게 됩니다.

사람들과의 관계가 탓하고 미워하던 관계에서 회복됩니다.

더 이상 저주받은 환경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풍성히 열매 맺는 환경이 됩니다.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믿고 그로 인해 이제는 그 모든 것이 되돌려진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명이 이미 우리 안에 있기에 영적사망과 영원한 심판은 완전히 물러갔고 아담의 후예로 받아야 했던 저주들도 끝난 것입니다.

잘 인식하지 못하고 계시지만 이미 많은 부분이 그렇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 붙어 주님의 생명이 들어오니 아담의 저주에서 점점 더 회복되고 있는 것이죠.

매일 우리에게 순종에 대한 선한 소원도 생겼잖아요?

그래서 다들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남아있는 사망의 흔적들을 이기며 살려고 애를 쓰시는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모든 인간들이 복음에 던지는 원초적 질문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하나님은 왜 선악과를 만들었냐, 왜 아담의 범죄가 내게도 유전되느냐, 이런 문제들에 대해 설교를 반복해서 듣고 잘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보다 훨씬 더 논리적이십니다.

우리도 본성적으로 논리적이기 때문에 잘 따져가며 믿어야 믿음의 진실과 능력을 경험하며 끝까지 믿을 수 있습니다.

아담의 범죄로 예수님을 믿기 전에 우리는 다 아담의 죽음에 대열에 줄 섰던 사람들입니다.

이제는 예수님의 생명의 대열에 줄을 서야 합니다.

모태신앙도 스스로 결단하고 예수님의 생명의 대열에 서야 합니다.

창세기44장을 보면 애굽의 총리가 된 요셉이 가뭄으로 양식을 사러 온 형들을 스파이로 몰며 막내 베냐민을 볼모로 잡아두겠다고 하죠.

그때 형 유다가 그럴 수 없다면서 이런 말을 합니다.

전 이 말이 참 좋습니다.

아버지의 생명과 아이의 생명이 서로 하나로 묶여 있거늘

이제 내가.. 우리 아버지에게 돌아갈 때에 아이가 우리와 함께 가지 아니하면 아버지가 아이의 없음을 보고 죽으리니

우리와 예수님의 생명은 하나로 묶여 있습니다.

우리를 영영 지옥에 떨어뜨려 놓으실 수가 없으시기에 예수님께서 생명을 주셔서 죄를 속하시고 우리를 주님께로 묶어 놓으신 것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주님의 생명이 충만해 져서 이미 왕노릇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런 삶을 위해 성령께서 우리 안에 오셨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사랑을 믿고 주님께 접붙여 진다면 아직 생명의 효과들이 희미하다 할지라도 시간이 지나면 점점 더 풍성한 생명의 역사들이 드러날 것입니다.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아직 남은 사망과 죄의 흔적과 사탄과 환경을 이기는 모두가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그래서 매일 새생명 안에서 약속 된 모든 것을 마치 왕처럼 당당히 누리며 사는 모두들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