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로마서8장26절-28절 (성령의 도우심)

남수연 2021. 10. 6. 16:46

 

https://www.youtube.com/watch?v=2mSOrq1it-E 

저는 지난 주 예수님 안에서 흠없이 완전한 새사람 된 저를 수시로 생각하며 하나님 안에서 평안을 많이 누렸습니다.

성경의 내용들은 이론에 그치는 게 아니라 말씀 그대로 실현되고 경험되어지는 것이 당연합니다.

물론 현실로 눈을 돌리면 여전히 고민과 걱정거리와 쉽게 들끓는 죄문제는 산적해 있었습니다.

우리가 이 싸움을 잘 해 나가자고도 지난 주 살폈습니다.

신자들이 계속 죄을 얼버무리며 사는 것은 율법 아래서 죄짓는 것보다 더 나쁜 것입니다.

법에 대한 배신이 아니라 사랑에 대한 배신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로마서8장의 대주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도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은 확고부동하다는 것입니다.

특히 바울사도는 8장에 이르러 그동안 억제해 왔던 비밀을 터트립니다.

우리의 구원을 보장하고, 현재의 삶에서도 승리할 수 있게 도와주시는 진정한 승부사, 바로 성령께서 너희와 함께 계시다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도우시려 등판하셨습니다.

오늘은 이 말씀으로 큰 은혜를 주시리라 믿습니다.

 

먼저 8장을 저는 위대한 승리의 장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우리는 이미 영생을 받았지만 이전에 살던 세상 체제 속에서 삽니다.

거듭난 새사람이지만 육신에는 여전히 죄성이 남아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긴장과 갈등, 그리고 누가 이기냐의 싸움은 계속됩니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없는 싸움이죠.

안 믿는 분들이 그런 면에선 우리보다 훨씬 속 편하게 삽니다.

물론 싸움을 인식하지 못하고 살 뿐이지 그 전쟁의 패배로 그들의 삶에도 큰 환난과 곤고가 있는 것이죠.

거기에 하나님의 진노가 쌓이고 있다고 2장에서 배웠습니다.

우리는 지난주도 알게 모르게 이 영적 싸움에 엮여져 살았습니다.

바울사도는 속사람과 겉사람과의 싸움에서 우리 육신이 번번이 죄에 끌려가는 것을 보며 7장 마지막에서 이렇게 통탄합니다.

24절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그리고 오늘 8장으로 이어지는 위대한 선언은 성경의 대권리장전입니다.

1절,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2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우리가 단지 육신으로 짓는 죄로 인해 이제는 결코 사망과 심판의 정죄를 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미 예수님 안에 있는 새생명을 주시는 법 안에서 우리는 변화되었고 구원은 확고하다는 것이죠.

바로 성령께서 이 십자가구원의 원리를 우리에게 적용시키셔서 구원을 얻게 하시고, 아직 육체 가운데 싸워야 하는 우리를 도와주신다는 것이 오늘 나눌 말씀입니다.

 

1. 그런데 바울은 조심스럽게, 더 말씀이 진행되기 전에, 너희가 과연 성령의 사람인지 아닌지를 생각하라고 합니다.

9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죠.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로마교회의 성도들에게 하는 말씀입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시지 않으면 지금까지의 이 복음의 구원이 너와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없다면 이 복된 진리는 아직은 나와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시금석은 세례 받았느냐, 믿겠다고 지적인 동의를 했느냐가 아닙니다.

그 사람의 행위가 도덕적이냐 교회를 위한 공력이 있냐도 아닙니다.

그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모든 신자들은 마지막 날 하나님 앞에서 이것을 확인할 게 아니라 오늘 살아있는 동안에 이것을 확인하고 감사하며 성령께 순종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있는 내적 외적 증거들을 오늘 8장에서 제시합니다.

1) 그리스도인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습니다.

14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성령께서는 무엇보다 신자들에게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도록 인도하십니다.

요한복음17장3절에서 말씀합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하나님과 예수그리스도를 알게 하는 이것이 바로 성령이 하시는 일입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들에게 하나님과 예수님은 절대로 추상적인 존재가 아닙니다.

분명히 존재하시고 나와 실제로 관계를 맺고 있는 분이시죠.

그것이 실제이기에 창조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고 싶은 마음이 있고 예수님을 나의 주인으로써 기꺼이 나의 모든 것을 복종시키는 것입니다.

성령의 인도를 잘 받고 있는 것은 특히 성령의 열매로 나타납니다.

성경을 잘 알고 기도를 밥 먹듯이 해도 성령의 열매가 없으면 성령의 사람이라고 증명할 수가 없는 것이죠.

사랑, 희락, 화평, 인내,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 이런 열매들이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사는 사람에게 나타납니다.

물론 이 단어들은 세상에서 사용하는 걸 그대로 쓰지만 그 내용은 완전히 다릅니다.

그냥 잘 참는 것이 인내고, 착한 것이 양선이고, 신앙에 성실한 게 충성이 아닙니다.

그것은 성령의 열매가 아니라 참선하는 육체도 맺을 수 있습니다.

예를들어, 우리가 생각하는 사랑과 성령의 열매인 사랑이 얼마나 다르게요.

주님이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셨잖아요?

이 말씀 안에는 사람들에 대한 사랑에 우열이나 우선순위가 없어야 한다는 의미가 들어있습니다.

그러니까 내 자식이나 교회 어떤 청년이나 똑같이 사랑하는 게 하나님의 사상이고 성령의 열매인 사랑입니다.

사람은 애정에 다 순위가 정해져 있잖아요?

하나님은 ‘그건 성령의 사랑이 아니다’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베드로나 십자가 우편의 강도나 똑같이 사랑하셨습니다.

우리는 몇 몇 사람에게 ‘당신은 내게 특별해’ 라고 말하지만 예수님께는 모두가 다 특별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을 차별해서 사랑하고 거기에 따라 시간과 공을 들이고 선물을 다르게 주지만 예수님은 그러지 않으셔요.

우리 모두에게 예수님이라는 똑같은 선물을 주셨잖아요?

수많은 사람에게 헤프게 던져 주신 게 아니라 한사람 한사람에게 똑같이 완전한 희생과 사랑을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누구를 더 사랑하고 더 아끼고 사람을 차별하신다는 게 상상이 안되잖아요?

누가 천국 가서도 차별당하고 싶겠어요?

그러니까 성령의 열매는 크기가 작다해도 육체의 열매와 본질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성령님의 인도가 없다면 육체의 열매를 잔뜩 맺고 성령의 열매인 줄 압니다.

내 마음 속에 가장 사랑하는 사람과 가장 적게 사랑하는 사람을 떠올려 보고 그 둘을 똑같이 사랑하는 것을 상상하면 성령의 열매인 사랑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내가 정말 예수님을 하나님과 나의 주인으로 믿는지, 그래서 성령의 사람이 되었고, 또 성령의 열매들이 있는지 이런 증거들을 통해서 늘 확인하고 확신하는 게 필요합니다.

확신이 부족하다면 로마서 설교를 다시 듣고 왜 예수님을 믿어야 하는지 이해하고 속히 예수님을 구주로 받아들이시기 강권합니다.

 

2) 또 성령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양자됨을 인식시켜 주십니다.

15절,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우리 안에 오신 성령께서 양자의 영을 주셔서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되는 놀라운 변화가 일어납니다.

전능자이신 신을 아버지라고 부른다는 것은 하나님의 가족에 속하게 된 우리의 신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죠.

요한복음 14장 2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 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

하나님과 예수님이 오셔서 우리와 거처를 함께 하시겠다고 합니다.

거처를 함께 한다는 것은 가정을 이룬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아버지가 되시는 것이죠.

그 증거로 성령께서 양자의 영을 주셔서 우리가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지식이기도 하지만 경험적으로도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때 말할 수 없는 공경심과 친근감을 느끼기도 합니다.

육신의 아버지 외에 다른 사람에게 아버지라고 부를 수도 없고 불러지지도 않듯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이 그런 것입니다.

부처상 앞에서 아버지라고 한번이라도 불러보려면 입이 안 떨어질 것입니다.

하나님은 양자의 영을 받은 우리에게 단지 초월적인 절대자가 아니라 나와 한 가족이 되시고 함께 거처하시는 아버지심을 믿고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3) 그리고 성령께서는 우리의 소망을 천국에 두게 하시고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게 하십니다.

23절,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우리는 이 세상에서 사랑하는 사람들과 누리는 삶을 아끼고 행복을 느낍니다.

그러나 우리 안의 성령님과 거듭난 영은 장차 천국과 예수님을 누리는 삶이 더 영화롭고 복됨을 압니다.

우리 거듭난 영혼은 죄를 벗어나 자유롭지만 여전히 죄의 육신에 갇혀 있기에 탄식하잖아요?

죄에 찌든 이 육신의 몸으로 사는 것이 얼마나 무거운 짐입니까?

우리 영혼은 우리 몸도 죄가 사라지는 영화로운 부활을 고대합니다.

그렇기에 땅의 삶을 탐닉하고 땅의 일에 내 지체를 몰입하게 되지를 않습니다.

세상일에 발은 묻고 살지만 머리까지 묻지 않습니다.

주님이 오시면 언제든 발을 쑥 빼고 영광의 나라로 옮겨 가기 위해 대기하는 그런 모습으로 살게 됩니다.

예수님의 재림과 완전히 영화롭게 될 소망이 있는 신자들과 땅에 소망을 둔 신자들과는 확연히 다릅니다.

 

4) 그리고 오늘 본문 말씀대로 성령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도와주십니다.

 

2. 성령께서 우리의 기도를 도우시는 말씀은 좀 자세히 살피겠습니다.

26절,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성령께서는 우리의 연약함을 여러 측면에서 도와주시는 보혜사이십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의 연약함은 그 중 기도에 대한 것입니다.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1) 이 말씀은 먼저 성도가 사는 방식이 기도라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성도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하나님께 기도하고 교통합니다.

성령 안에서 산다는 것은 하나님과 기도로 소통이 되고 있냐로도 알 수 있습니다.

기도하지 않는 신앙은 뭔가 단단히 잘못된 것입니다.

믿음의 본질이 하나님과의 교제의 회복인 것을 모르는 것입니다.

아담은 하나님과의 교제를 끊으려고 오지게 마음먹고 불순종했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그 단절을 다시 이어주시는 것인데 여전히 관계를 끊고 산다는 것은 어느 모로 봐도 이상한 것이죠.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에서 ‘돕다’라는 의미는 기도를 대신 해 주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돕다’는 무거운 짐을 양쪽에서 맞잡는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스스로가 기도를 해야 성령께서 그 기도를 도와주실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도들이 기도를 하되 무엇을 어떻게 구해야 할지를 잘 모른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기도하는 내용이 합당하지 않다는 의미입니다.

그 기도가 그대로 응답되면 그 다음 그로 인해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될지 우리는 전혀 모르는 연약한 자들입니다.

그래서 성령께서 우리 기도를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2) 저는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말할 수 없는 탄식이란 말이 너무 좋습니다.

성령께서는 전능하신데 그냥 도와주시면 되지 왜 탄식을 하시겠습니까?

이것은 성령께서 우리의 탄식에 함께 하신다는 의미입니다.

기도하는 신자들은 매일 탄식합니다.

때로는 기도가 잘 안 되는 날이 있는데 그런 날은 더 말할 것 없이 탄식이 나옵니다.

때로는 너무 어렵고 힘든 문제, 답답한 현실에 눈물과 탄식만 나옵니다.

성령께서 말없이 탄식하신다는 말은 이런 우리의 탄식에 공감하시고 동조하신다는 뜻입니다.

사람은 남의 불행에 진심으로는 잘 공감하지 못합니다.

부부사이도 서로의 불행한 마음의 깊이에 닿지 못합니다.

부모가 자식의 탄식하는 마음 다 안다고 생각하면 오산입니다.

사람들은 간신히 그런 처지에 있었던 나를 떠올리며 공감을 표하는 정도입니다.

그래서 그나마 어려움을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공감력이 떨어지는 것이죠.

그런데 성령께서 우리 마음의 상태에 완전히 한 마음이 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도할 때 우리 혼자서 탄식하다 아무 답을 얻지 못하고 일어나는 게 아닙니다.

성령께서 우리 탄식에 함께 하시니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옛날엔 교회학교 여름수련회를 삼박사일씩 하곤 했습니다.

하이라이트는 역시 저녁집회였죠.

낮에 물놀이에 힘을 다 빼고 권사님들이 맛있게 지어주신 저녁밥으로 배를 채운 아이들은 전도사님 설교가 길어지면 방석 위에서 졸기가 일쑤였습니다.

설교가 끝나고 기도시간이 돌아오면 교사들은 정말 정신없이 아이들 사이를 누비고 다녀야했습니다.

기도를 한마디도 못하고 앉아있는 아이들을 찾아가서 기도의 입이 떨어지도록 붙들고 진짜 야곱이 얍복강에서 했던 것처럼 씨름했습니다.

정말 이 아이가 하나님 앞에 혼자 기도할 수 있는 성령님의 은혜를 구하며 참 간절히도 기도했습니다.

자식의 문제를 품고 탄식하며 울어 본 우리 부모들은 성령님이 우리와 함께 탄식하신다는 게 더 잘 이해가 되실 것입니다.

우리가 ‘이걸 어쩌나’ 한숨과 탄식만 나올 때 성령께서 이렇게 우리를 품고 친히 간구해 주십니다.

 

3) 저는 또 성령께서 친히 간구하신다는 것이 이번에 설교를 준비하며 새삼스럽게 은혜가 되었습니다.

성령하나님이 누구에게 간구를 하시겠어요?

우리 기도를 응답해 주실 하나님의 입장이시잖아요?

그런데 우리가 뭘 기도해야 할지도 모르니 응답하시기 위해 먼저 우리가 올바로 기도하게 스스로가 간구하신다는 것입니다.

성령님도 예수님처럼 마땅히 기도를 받으실 하나님의 지위에서 내려오셔서 우리와 동일시되셔서 기도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지금 우리를 위해서 중보하고 계시다고 34절에 나오죠.

또 27절을 보십시오.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이게 무슨 말씀이냐면 성령님이 우리를 위해 간구하시는 데 그것이 성부하나님의 뜻과 똑같더라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삼위일체 하나님들이 우리를 위한 생각이 일치되어 스스로에게 기도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신비를 우리가 어떻게 다 깨달을 수가 있겠어요?

그러니 성령님의 탄식은 단순히 동정하고 공감하시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답이 들어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하게 이끄셔서 안전하게 응답하시기 때문이죠.

전능자께서 피조물의 간곡한 청을 자비롭게 들어주시는 것만도 은혜입니다.

그러나 뭘 구해야 할지도 모르는 연약한 자녀들을 위한 이런 하나님의 대우를 생각하면 정말 황송하고 놀라울 뿐입니다.

 

4) 다음은 기도의 실제적으로 적용해 보겠습니다.

‘큰일났다, 이 문제는 하나님께 간구해야겠다’ 생각하고 주님 앞에 나가면 반드시 성령님의 인도를 받을 수가 있습니다.

저도 지난 주 묵직한 중보기도의 제목을 안고 기도하기 위해 앉았습니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를 몰라 문제 주위를 뱅뱅 도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애가 타서 기도말을 이어가다 보니 어느 순간 성령님의 인도가 느껴졌습니다.

먼저 이 문제를 철저히 하나님께 맡겨야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절대로 내 능력과 머리를 써서 풀어갈 문제가 아니라는 게 알아졌습니다.

그리고 문제가 전체적으로 눈에 들어왔습니다.

이 문제가 왜 생겼고, 어떤 마음으로 대처해야겠고, 잘못하면 일이 얽혀 큰 사단이 나겠다는 것이 깨달아졌습니다.

그러니까 기도하고 나서 막연한 불안과 근심이 없어지고 계속 하나님께 맡기며 기도하면 해결되겠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날 응답은 그 날 분량의 지혜를 주신 것이고 계속 기도하는 중에 문제 해결까지 인도해 주시는 것이죠.

그러니까 기도는 마음으로만 소원하지 말고 정식으로 하나님과 회의테이블에 앉아야 합니다.

그리고 내 상황을 브리핑하듯이 하나님께 말씀드리십시오.

성경에 나오는 기도들을 보면 대부분 자기 형편과 마음을 솔직하고 분명하고 아주 세세하게 말씀드린다는 것입니다.

시편의 기도를 보시면 알 수 있죠.

또 이사야37장 히스기야왕을 보면 산헤립이 쳐들어와 멸망시키겠다고 보낸 협박 편지를 하나님 앞에 펼쳐 놓고 조목조목 기도하잖아요?

고지서가 쌓이면 하나님 앞에 펼쳐 놓고 기도해도 됩니다.

하나님 제 마음 아시죠? 그러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이미 우리 마음도 알고 문제의 전모를 당연히 아십니다.

그러나 기도로 말씀드리는 중에 나 자신도 비로서 문제의 핵심이 무엇인지, 내 자신의 문제가 무엇인지를 알게 됩니다.

큰 문제만 기도할 게 아닙니다.

평범하고 일상적인 일인데도 기도하다보면 거기 큰 위험요소가 있음을 미리 감지하게도 하십니다.

그런 것은 무슨 신비적인 사인을 주신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하루의 업무를 위해 기도하면 이미 성경에 주신 말씀대로 그동안 너무 허물없이 대했던 직장 동료가 생각하며 오늘은 좀 예의 있게 대해야겠다 생각하게 되는 것이죠.

그날 그 기도를 하지 않았다면 경솔한 태도에 그 사람과 큰 갈등이 생겼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기도할 때 누구에게 전화를 걸어야겠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잖아요?

그 전화 속에서 하나님이 특별한 일을 이루시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3. 결국 기도 하는 생활은 항상 한 가지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28절 말씀을 확신하게 되는 것이죠.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바울사도는 ‘우리가 알거니와’라고 합니다.

이미 수많은 문제들을 통과하며 우리가 이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문제도 반드시 합력해서 선을 이루어 주시겠구나.

‘모든 것이 합력하여’라는 말은 우리에게 오는 것들이 다 좋은 것이 아님을 암시합니다.

이미 바울사도는 17절에서 이렇게 선언했습니다.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성도들의 삶에서 자꾸 고난을 배제하려고 하는 것은 구원의 원리에 안 맞는 것입니다.

시련과 문제는 그것만이 줄 수 있는 기능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통해서 우리 지체를 죄에게 바치지 않도록 통제하시고 성화를 이뤄가게 하십니다.

기도하며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고 해결해 나가면 고통과 비교할 수 없는 더 나은 결과를 반드시 얻게 되어 있습니다.

다만 여기엔 마귀가 개입하는 경우가 많기에 더욱 기도로 대처하며 풀어가야 하는 것이죠.

이런 영적인 부분은 기도 중에 성령께서 역사하셔야 풀어집니다.

마귀가 보인다면 거기 대고 뭐라고 하겠지만 눈에 보이지도 않는 마귀를 향해 뭐라고 하겠습니까?

마귀를 대적하는 것은 마귀가 꾀는 일을 안 하는 것이고, 보이지 않게 놓은 덫과 모함은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피하는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고 시련과 문제들을 육체의 방식으로 해결하려 하면 할수록 마귀는 점점 더 일을 꼬아 놓을 것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여전히 죄와의 싸움에서 나 자신에게 실망할 수밖에 없어도, 이미 우리는 예수님의 안전한 구원 안에 있습니다.

이 사망의 몸까지 완벽하게 구원해서 영화롭게 하시는 것이 장차 하나님의 계획이십니다.

그날까지 죄에 끌려 다니지 않도록 성령께서 우리를 도우십니다.

바울은 조심스럽게 그리스도의 영이 없다면 너희는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진언합니다.

로마서8장과 오늘 설교를 반복해서 읽고, 들으시며 내가 성령의 사람인지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성령께서는 우리의 연약함을 도와주시는 데 거의 기도할 때 도와주십니다.

기도하라는 것은 구약성경부터 신약성경의 예수님께서 명령하신 계명입니다.

우리는 계명과 겨루면 안됩니다.

하나님은 구원이라는 목적지를 정하셨고, 거기에 이르는 수단도 정하셨습니다.

다른 방법, 쉬운 길로는 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기도의 명령을 힘써 지키는 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선한 일을 행하시도록 협조하는 것입니다.

이 소중한 기도의 권리를 다시 마귀로부터 되찾아 오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