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요즘 성경 중의 성경, 다이아몬드반지라는 로마서를 통해 정말 보석과 같은 믿음의 지식들을 다시 배우고 있습니다.
지난 주는 엄청난 신분의 변화를 말씀 안에서 확인했죠.
아담의 사망의 대열에서 태어났지만 예수님을 믿음으로 생명의 대열에 서게 된 우리라는 것입니다.
포도나무 비유와 같이 예수님께 붙어있는 우리는 현재 주님께로부터 모든 걸 공급받는 복을 누리며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편 여전히 이전의 죄를 끊지 못하고 또 죄를 짓고 후회하는 나를 보게 됩니다.
물론 세상 사람들에겐 크게 탓하지 않을 정도의 행동이나 생각일테지만 우리 마음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 좀 진실 되게 살아보려고 할수록 죄와 싸우다 거의 자포자기한 마음에 빠지기도 합니다.
죄를 이겼다는 승전보는 좀처럼 들려오지 않습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것은 성도의 삶은 죄와의 극렬한 전투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매일 치러야하고 승리해야 하는 것이죠.
우리는 대부분 어떻게 행복하게 살 것인지, 어떻게 사회에서 인정받을 수 있을지, 노후를 어떻게 대비할 것인지, 자녀들을 어떻게 키워야 하는지 등이 관심입니다.
그러나 결국 이 모든 영역에 죄가 파고들기 때문에 죄와 잘 싸워야 생활도도 안전한 것입니다.
아마도 지난 주 마음이 힘들고 괴로웠다면 많은 부분이 죄로 인한 것임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죄와 어떻게 싸울지를 잘 알고 잘 이겨야 합니다.
로이드존스 목사님의 말씀을 인용하자면 오늘날 교회는 지나치게 진료소나 병원과 같다는 것입니다.
모두 자기의 고통을 안고 찾아와 위로하고 치료해 달라고 합니다.
그래서 교회는 패잔병 환자로 넘쳐납니다.
교회는 먼저 훈련소가 되어 세상의 전투장에서 싸울 수 있는 기술을 연마시켜야 합니다.
오늘 우리교회 임직식이 있는 기쁜 날인데, 모든 분들게 죄와 싸워 승리할 수 있는 비법을 성령께서 선물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우리는 지난 주 말씀에서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을 믿음으로 옛아담의 상태보다 더 나은 구원을 얻게 되었다고 살폈습니다.
이렇게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복음에 대해 6장1절에서 새로운 화두가 떠오른 것입니다.
그러면 이젠 죄를 지어도 상관없냐는 것입니다.
바울사도의 답변이 무엇입니까?
2절,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여기서 분명히 바울사도는 우리가 죄에 대해서 죽었다고 말씀합니다.
지난주도 죄를 지었는데, 이런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냐가 진지한 성도들의 고민입니다.
또 오늘 본문 말씀을 봐도 죄가 남아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죠.
상반 된 두 말씀이 어떻게 둘 다 진리일 수가 있습니까?
이것은 말장난이 아닙니다.
오늘은 우리의 죄가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함께 죽었다는 사실과 죄가 여전히 존재하는 문제를 성경대로 잘 정리해 보겠습니다.
우리가 알던 것과 좀 다르게 들릴지 모르지만 이것이 바울사도가 전해주는 복음 안에 있는 엄청난 기밀입니다.
1. 먼저 바울사도의 말대로 죄에 대해 완전히 죽었다는 것을 알아봅니다.
우리가 죄에 대해서 ‘죽었다’에서 사용된 동사의 용법은 과거에 한번 일어나서 확고부동하게 정해진 상태를 말합니다.
예수님의 속죄의 복음을 믿을 때 그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내 모든 죄가 주님의 십자가에 함께 못 박혀 죽었고 주님과 함께 다시 살아난 우리의 새사람은 완전히 죄가 없는 상태라는 것입니다.
죄가 없으니 의롭게 된 것이죠.
성령으로 거듭났다,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 새사람이 되었다와 같은 말입니다.
우리는 새사람이 되었지만 그 속에 옛죄성이 그대로 남아있다 생각합니다.
지금 내 상태가 그렇게 보이니까요.
그런데 바울의 진술도 그렇고 다른 성경에서도 그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죄는 더 이상 새사람으로 바뀐 내게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미 이렇게 완전한 새사람이 되었고, 이 상태로 천국의 영생을 누린다는 것이죠.
그러니까 우리는 이미 천국에 맞는 시민으로 변화된 것이지 천국에 가서 변화 되는 게 아니라고 놀랍게 선언합니다.
사실 우리가 죄만 없어지면 되지, 천국 가서 전혀 딴 사람 되면 뭐 좋겠습니까?
내가 천국에서 어떻게 될 것인지 궁금하시다면, 지금 내 안에 있습니다.
이게 잘 이해가 안되죠?
그래서 바울도 이렇게 6장 전체에 걸쳐 길게 설명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믿음으로 받아들일 영역이지만 경험적으로도 조금은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난 뒤 내가 분명히 달라졌잖아요?
하나님을 공경하는 마음이 생겼고, 소망의 사람이 되었고, 선을 택하게 되고, 사랑과 봉사가 즐겁고.
그게 바로 새로 지음 받은 거듭난 나의 일면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다만 지금은 거듭난 내 자아의 아름다움을 완전하게 보지 못합니다.
거듭난 자아는 영생하도록 지어진 완전한 상태입니다.
그렇기에 치매에 걸려 하나님을 부인한다고 해도, 심지어 막 죄를 짓고 있는 상태에서 숨을 거둔다 해도, 한번 거듭났다면 그 새사람이 그대로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제가 저희 어머니가 췌장암에 걸리시고 마지막 일년을 집에서 모셨습니다.
돌아가시기 전 한 한 달 정도는 섬망증세가 오고 마지막 열흘은 혼수상태로 아무 의식이 없이 누워계시다 돌아가셨습니다.
거기서 전혀 믿음을 찾아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분명한 알겠더군요.
의식도 없고 믿음도 없는 그 몸 안에 오래 전부터 주님께 지음받은 거룩한 새사람이 완전한 상태로 보존되어 있다는 게 눈에 보이는 것 같았습니다.
우리 어머니는 그렇게 죄의 육신은 이 땅에 두고 새사람의 영혼이 예수님 품에 안기셨습니다.
물론 그 몸도 예수님이 재림의 때 완전한 몸으로 부활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이미 완전히 영생을 누릴 새자아를 갖고 있다는 것을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은 평생 남은 죄와 싸울 때 엄청난 차이를 만듭니다.
2. 그렇다면 우리 안에 분명히 살아있는 이 죄는 무엇이란 말인가요?
오늘 12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
앞에서는 죄가 죽었다고 하고 여기는 죄가 다시 나오죠.
이 뜻은, 옛 죄의 본성이 죽을 몸에 남아서 몸을 지배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죄가 지배하는 것은 몸이지 속사람이 아닙니다.
여기서 몸은 단지 육체만이 아닙니다.
마음, 힘, 지력, 생각, 재능, 상상력, 기억력, 습관 등 땅에서 사회적 생명을 이어가게 하는 모든 것을 말합니다.
겉사람이라고도 우리가 주로 인식하는 내 모습입니다.
이 몸은 아담 안에서 출생할 때 오염된 상태고 죄에 취약하게 태어났습니다.
죄는 이 몸에 남아서 내 몸을 지배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방문하신 분이 많으신데, 우리는 이렇게 어려운 거 배웁니다.
12절에서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라’고 하는 것에 주의하셔야 합니다.
죄는 결코 속사람을 건드리지도 못하고 지배하지 못합니다.
속사람은 죄에 대해 죽어서 죄를 몰라요.
다만 장차 죽을 몸에만 남아 있고 죽을 몸을 장악하려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나중에 죽음을 통해 벗어버리면 완전히 끝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땅에서 가지각색의 약점과 죄성을 가졌던 사람들인데, 천국에서는 다 완전한 인격체인 것이죠.
다만 우리가 아직 이 육신의 지체들을 이끌고 살고 있기에 죄와의 싸움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 싸움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바울사도는 이렇게 전술을 지시합니다.
1)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
우리 몸의 본능들은 본래 죄가 아닙니다.
배고픈 것, 사랑하는 것, 성취하려는 열정, 미래에 대한 준비, 이런 것들이 본래 죄가 아닙니다.
그런데 죄가 이 본능에 개입해 도가 넘는 사욕으로 바꾼다는 것이죠.
식탐이 되고, 간음이 되고, 성취욕이 되어 불법도 행하고, 과도하게 부를 차지하려는 물욕이 되고.
이런 사욕에 너희 지체를 바치지 말라는 것입니다.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라‘고 하죠.
여기서 특히 불의의 무기라고 한 것은 죄는 필연적으로 나와 남을 파괴하는 도구가 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우리 몸의 지체에 남아있는 죄와의 싸움에서 이겨야 하는 것입니다.
이 싸움엔 마귀도 개입하기에 그렇게 만만한 것이 아닙니다.
이 남아있는 죄와 잘 싸워 새생명에 조화된 몸을 갖는 것이 성화입니다.
성화에 대한 오해 중에 이런 사상이 많이 들어와 있습니다.
‘이 죄와는 우리 힘으로 싸울 수 없다, 다만 내 죄가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었다는 것을 믿어라’
이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립니다.
남은 죄와의 싸움은 우리 혼자 힘으로 안되기에 성령님의 도우심을 받는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것은 새사람이 될 때만 적용되는 것이고 성화에 대한 것은 아닙니다.
몸에 남은 죄와는 새 사람 된 내가 싸워야 하는 것입니다.
칭의는 하늘에서 온 것입니다.
그러나 성화는 하나님께 받는 것이 아니라 내가 힘써서 이루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차이를 잘 이해하지 못하면 죄와 싸울 생각을 안 하고 뭔가 이 죄를 쉽게 이길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있나를 찾게 됩니다.
미움이 불같이 일어날 때 나는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백번을 외운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닙니다.
정욕이 일어날 때 나는 죽었다고 아무리 생각해도 정욕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생활의 염려가 급습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괜찮다고 세뇌하는 게 아니라 맞붙어 싸우는 것입니다.
우리 몸이 이런 죄에 끌려가지 않도록 내 안에 계신 성령님의 도움을 구하며 새사람이 죄와 대결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화는 죄와 겨루고 싸우는 것 외에 왕도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죄와 피흘리기까지 싸우라고 하는 것이죠.
다만 이 싸움에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아까 말씀드린 것입니다.
나는 죄나 짓고 죄를 이기지 못하는 찌질한 인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 새로운 자아는 하나님 보시기에도 완벽하게 정결하고 아름답고 의로운 귀중한 존재입니다.
이게 은혜 아래 있는 자의 위상입니다.
이 지위를 주시기 위해 예수님이 대신 죽으셨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렇게 얻은 고귀한 새사람이 거하는 육신도 명예롭게 지키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입니다.
추석이 되니까 돌아가신 어머니 생각이 많이 나더군요.
가난하던 시절에도 명절이 되면 그나마 넉넉히 음식장만을 하셨습니다.
아궁이에 올려놓은 솥에서 닭볶음탕이 보글보글 끓고 있으면 우리 다섯형제가 들떠서 부엌을 들락달락 했습니다.
그때는 내장 째로 끓여서 그런지 알집 안에 노란 닭알들이 들어있었죠.
그 노란 닭알을 입에 하나씩 넣어주시면 왜 그렇게 맛이 있었는지.
그 노란 닭알을 왜 엄마 자신의 입에는 넣고 싶지 않으셨겠어요?
제 어릴 때 기억에 어머니가 맛있는 걸 드시던 기억이 없습니다.
어려울 때 어머니가 어떻게든 음식하나라도 더 해 먹이시려던 게 어릴 때도 참 자랑스럽고 고마웠습니다.
그러니 우리 오남매가 어머니 말을 생전 거역하지 않고 순종했던 것 같습니다.
14절이 우리가 이제 죄를 이기고 순종할 수 있는 힘이 있음을 말씀하죠.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
우리가 죄와 싸우는 것은 과거와 다릅니다.
하나님과 연합 된 한 가족의 사랑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명예를 위해 죄를 거절하는 것입니다.
지난 주 뉴스를 보니 형제들이 함께 음란사이트를 운영하다 구속되었는데 그 중 필리핀에 도주했던 마지막 한 형제가 붙잡혔다고 하더군요.
억대의 도박에 초호화 생활을 했다네요.
먼저 구속된 형제의 해명이 걸작이었습니다.
우리 형제들이 서로 신뢰와 믿음이 있어서 가문을 좀 일으켜 보려고 작당해서 그 짓을 했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가문의 영광을 위해서 죄와 싸우는 것입니다.
새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다는 뚜렷한 특징이 있습니다.
삼위 하나님께서 자녀인 우리의 싸움을 지원해 주실 것입니다.
2) 두 번째 전술은 더 적극적으로는 우리의 죽을 이 지체로 죄를 짓지 말고 하나님의 의의 병기로 내 드리라는 것입니다.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 중생할 때 뭔가 새로운 기능을 받지는 않습니다.
아담 안에 있을 때 원래 가졌던 것들을 이제는 하나님을 위해 선하게 사용하라는 것입니다.
어떤 기능이나 능력도 죄가 애용하지 않게 해야 합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사용할 수 있는 모든 것, 시간, 돈, 건강, 지력, 신앙, 미래, 이런 것들을 다 하나님께 의의 병기로 드리라고 바울은 명령합니다.
이 모든 것으로 단지 죽을 몸을 위해 살고 있다면 마지막에 몸을 훌렁 벗어버리고 떠날 텐데 얼마나 허망한 일입니까?
이 죽을 몸을 자랑해 보겠다고 무얼 그리 치장하고, 남과 비교하고, 공을 드리는지요.
바울사도는 랍비로서의 보장 된 미래와 누릴 모든 것을 다 하나님을 위한 의의 병기로 드렸습니다.
바울사도가 그런 삶을 후회했겠습니까?
주님을 위해 의의 무기로 드린 것 중 하나라도 후회되는 것이 있으십니까?
그것만큼 영광되고 만족스럽고 잘했다 생각하는 게 없잖아요?
내 지체를 사람이나 내 영광이나 세상의 성공이나에 바치면 그것의 종이 된다고 이어서 바울사도는 강변합니다.
다만 내 하나님께 나를 드리고 몸의 지체를 의의 무기로 드리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마지막으로 제가 오랫동안 알고 지내던 좋아하는 권사님 얘기를 하려고 합니다.
지금 이 영상예배를 같이 드리고 있으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오금동 교회에 있을 때부터 한달에 한번씩 일산에서 올라와 저하고 같이 동네 전도를 하러 다니신 분이십니다.
남편 집사님이 경복고등학교를 나오고 고려대를 나오셨는데 그 친구분들이 재계와 정계에 쟁쟁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 권사님네가 남편 회사일로 해서 스위스에서 좀 오래 사셨습니다.
큰 아들이 다니던 고등학교에 당시 북한의 김정은이 같이 다녔다고 하더군요.
스위스에서 삶은 정말 화려했지만 거기서 그만 남편에게 아주 심각한 조울증이 발병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한국으로 돌아와 계속 치료를 받고 직장생활도 제대로 못하게 되었습니다.
아들 둘 공부는 시켜야 하고 남편은 경제력이 없으니 방법이 없었습니다.
집을 점점 줄여가며 생활을 해나가는 거죠.
나중엔 더 이상 줄일 것도 없고 생활을 감당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남들은 왜 멀쩡한 몸으로 식당에라도 나가서 일하지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권사님은 항상 기도하고, 하나님 말씀을 공부하고 전도하는 게 내 사명이라는 믿음이 있으신 거예요.
국수집에 가서 며칠 일하고 병이 난 이후로 돈 버는 건 포기하고 매일 그렇게 하나님께만 매달리며 정기적으로 병원과 노방전도를 나갔습니다.
전도만 나가면 힘이 나고 사는 보람이 있다는 권사님을 보고 전도하고 기도만 한다고 뭐가 달라지냐는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아들 둘을 하나님께서 다 알아서 인도해 주시는 거예요.
큰 아들은 임용고시에 합격을 시켜주셨습니다.
그게 왜 하나님이 시켜주셨는지 저도 그렇게 합격했기 때문에 잘 압니다.
그리고 결혼자금이 하나도 없었는데 교사 아내를 만나서 대출로 집을 얻고 결혼해서 얼마나 잘 사는지 모릅니다.
둘째 아들이 다음 달 말에 결혼을 한다고 하더군요.
어찌어찌 해서 둘째 아들은 공기업에 들여보내 주셨습니다.
교회에서 8급공무원인 자매를 만나서 돈 한 푼 없이 또 결혼을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권사님은 이번에 그 어려운 20평짜리 새 임대아파트에 당첨이 되어 올 겨울에 입주를 한다고 합니다.
제가 전화를 받고 얼마나 기뻤는지, 하나님이 자신의 지체를 의의 무기로 온전히 드린 권사님에게 잔잔하게 복을 부어 주시는 게 보이잖아요?
그렇게 안 해주셔도 우리가 구원받은 걸 생각하면 감사밖에 없는 데 하나님은 우리가 의의 병기로 드린 이 땅의 지체를 거두시고 돌봐주십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안에서 완전히 의로운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다만 옛죄의 경향과 습관이 죽을 몸에 남아 그 몸을 지배하려고 합니다.
몸이 죄에 지배당하면 속사람의 영광은 점점 가려지고 아담 때와 똑같이 육체가 지배하는 사람처럼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우리의 이 육신도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기 위함을 잊지 않길 바랍니다.
죄에게 내 지체를 바치지 말고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는 모두가 되길 바랍니다.
오늘 하나님의 의의 병기가 되기 위한 귀한 마음으로 임직을 하시는 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도록 필요한 모든 것으로 지원해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성도님들이 집사로, 권사로, 안수집사로, 장로로 세워져 모두가 다 하나님의 의의 군사들이 되시길 간절히 축복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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