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youtube.com/watch?v=7gej--y3X3A
그동안 로마서 말씀을 통해 건축자재들만 수북하던 우리 믿음이 제자리를 찾아서 잘 지어져가고 있으리라 믿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끝으로 믿음의 기본이 되는 교리들이 마무리됩니다.
뒤로는 유대인들의 구원문제에 대해 논의하고 그리스도인의 삶의 문제로 넘어갑니다.
바울사도는 우리 육신이 여전히 죄에 끌려가긴 하지만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완전한 구원을 받았다고 강조했습니다.
오늘 29절과 30절 말씀에서 그 주장의 마침표를 찍을 구원의 전체 그림을 보여줍니다.
이것은 다섯 단계로 이뤄지는 구원의 전 과정이고 구원의 서정이라고 합니다.
또 각 단계들이 서로 고리처럼 견고히 연결되어 있어서 황금사슬이라고도 합니다.
‘구원하실 자들을 미리 아시고, 아신 자들을 정하시고, 정하신 자들을 부르시고, 부르신 자들을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자들을 영화롭게 하셨다’
이 다섯가지 단계를 신학용어로는 예지, 예정, 소명, 칭의, 영화라고 합니다.
이것은 장로교에서 믿고 있는 하나님의 예정과 구원의 서정에 대한 아주 중요한 내용이므로 꼭 알아야 합니다.
물론 하나님의 예정과 선택은 신학적인 의견이 나뉘고 교단이 나뉘게 된 어려운 주제입니다.
말씀을 통해 우리 하나님의 주권이 영광스럽게 나타나고 우리에겐 큰 은혜가 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1. 우리 구원의 주체는 하나님이시고 그 목적이 무엇인지가 이 황금사슬 안에 명시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구원의 서정이 ‘하나님’으로 시작됩니다.
이 구원은 하나님의 계획이시고 어떤 것도 간섭되지 못하도록 절대적 주권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정하셨는데 누가 바꾸겠습니까?
왜 구원하시는지에 대해서도 밝히고 있죠.
예수님을 구원받은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니까 구원은 우리 쪽의 필요만을 채워주시는 게 아닌 것입니다.
예수님이 맏아들이 되게 하시려고 한다면 많은 형제들을 만들어 주셔야 하는 것이죠.
우리를 구원하셔서 주님의 형제로 영광을 상속 받게 하시되, 구원받은 성도들은 예수님을 본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구원의 최종적인 목적은 예수님을 닮은 수많은 형제들이 모인 하나님의 가족을 이루는 것입니다.
우리 중에는 따뜻한 가정에서 자란 사람도 있고, 역기능 가정에서 자란 사람도 있습니다.
내가 유복한 가정에서 자라지 않았다 해도 누구나 포근하고 안전한 가정을 꿈꾸고 소망합니다.
우리가 최종 정착하고 영원히 거할 천국은 집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버지 되시고, 예수님이 맏형이 되시는 집, 생각만 해도 행복하고 마음이 푸근해지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그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내 아버지 집에는 거할 곳이 많도다..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2. 그러기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데 그 과정이 있다는 것입니다.
29절, 30절 말씀을 눈으로 잘 살펴보며 따라와 보십시오.
첫째 고리, 하나님이 구원을 주실 자들을 먼저 아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여기서 아신다는 것은 창조주로서 피조물 전부를 아시는 그 전지하신 속성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여기에 쓰인 ‘안다’라는 단어는 관심과 사랑의 관계를 맺고 속속들이 상대를 안다고 할 때 쓰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나를 관심 있게 보고 마음에 두고 계셨다는 뜻입니다.
언제부터 아셨을까요?
에베소서 1장4절에서 말씀했습니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천지창조 하시기 전에 이미 나를 아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생각과 계획은 이미 존재하는 것과 다름없기에 이것이 가능한 것입니다.
내가 태어나기 훨씬 전, 하나님의 머리 속에 나를 지으신 그 때부터 나를 알고 사랑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 생애를 통째로 아신다는 것은 우리의 과거와 미래를 대하는 데 엄청난 차이를 가져다 줍니다.
누구나에겐 과거 힘들고 초라했던 시절, 부끄러웠던 일,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최악의 때가 있습니다.
저는 성인이 되어서 예수님을 믿게 되었고 어린 시절은 불교와 무속신앙 속에서 보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기도 중에 이런 옛날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어린 시절 제가 허름한 방에서 종이인형을 갖고 혼자 놀고 있던 기억 속의 한 장면이었습니다.
그때는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던 때인데 그 장면이 떠오르며 놀랍게도 지금 느끼며 사는 하나님의 임재가 그 방에서 그대로 느껴졌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모태로부터 나를 알고 계시고 계속 나를 지켜보고 계셨다는 것을 실제로 좀 경험한 것이죠.
이런 깨달음과 경험들은 말씀을 더 잘 이해하도록 주시는 것 같습니다.
그것을 깨닫고 나니 과거에 대한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가난하던 시절, 수치스럽던 일, 아픈 상처들 그런 것들이 무섭고 끔찍하고 다시 그런 일이 있을까봐 두렵던 것들이 사라진 것입니다.
과거의 악몽을 꿀 일이 없게 되는 것이죠.
지나온 모든 일들이 하나님 안에서 일어났구나, 그때도 나를 보호하고 도와주셨구나를 알게 되니 과거에 대한 생각이 완전히 달라진 것입니다.
그러니까 너무 과거의 일에 애석해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모두가 다 하나님의 감독 아래서 일어난 일입니다.
미래에 대해서는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나의 인생을 통째로 관여하고 계시니 미래에 어떤 일이 올까봐 불안하고 두렵지가 않게 됩니다.
또 우리를 창세전에 구원하기로 택하셨다는 것은 예수님의 대속도 창세전에 작정되셨다는 것입니다.
아담이 선악과에 실패해서 하나님이 플랜B로 예수님의 속죄를 준비하신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베드로사도 역시 이 사실을 베드로전서1장에서 진술했습니다.
18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19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
20그는 창세 전부터 미리 알린 바 되신 이나 이 말세에 너희를 위하여 나타내신 바 되었으니
창세전에 이미 주님께서 피흘려 대신속죄 해 주실 것이 알려졌다고 하죠.
나의 구원의 시작이 내가 누군가의 전도로 교회에 와서 시작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계획하시던 그때부터 나를 마음에 두고 계셨다는 것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둘째 고리, 아신 자들을 미리 정하셨으니, 즉 예정하셨다는 것입니다.
정하셨다는 것은 아셨다는 것과 큰 차이는 없습니다.
그러나 아시기만 하고 정하지 않으셨다면 얘기가 좀 달라지죠.
사랑한다고 연애는 실컷 하면서 프로포즈를 안 하면 결정되는 건 아무 것도 없는 것이잖아요?
물건이 좋다고만 하고 계약을 안 하고 있으면 애가 타죠.
하나님은 우리에게 관심만 있으신 게 아니고 구원하기로 확정하셨다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가 장로교에서 믿고 있는 하나님의 선택과 예정교리입니다.
성경은 거의 모든 부분에서 이 하나님의 예지와 예정을 말씀합니다.
사도행전에서 바울사도가 1차 전도여행 중 소아시아에서 복음을 전합니다.
아브라함부터 예수님의 부활까지의 대하설교를 하고 난 뒤 사람들의 반응은 둘로 갈라집니다.
사도행전13장45절, 유대인들이 반박하고 비방하거늘
48절, 이방인들은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믿어서 영생을 받은 게 아니라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되었기 때문에 믿더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대속과 부활과 하나님 아들되심이 믿어지십니까?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되셨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예정론에 대해 격렬한 반론이 제기 되는 것입니다.
1) 그러면 선택하지 않은 사람들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누구는 선택하고 누구는 선택하지 않으면, 선택 받지 못한 사람들은 아무리 애를 써도 구원을 못 받냐는 것이죠.
하나님이 작정하지 않으셨는데 누가 작정을 거슬러 구원을 받을 수 있냐는 것입니다.
지당한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이 작정하지 않으시면 아무도 예수님의 대신속죄를 믿지 않을 것입니다.
감리교의 구원교리는 예정을 안 믿고 인간 스스로가 자기 의지로 구원을 선택하는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면 구원받을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누가 이천년전 팔레스타인 땅에서 십자가형을 받은 유대인 청년을 하나님으로 믿고 구세주로 믿겠습니까?
아무도 그런 일에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구원받을 자를 정해서 구원으로 이끌지 않으시면 안되는 것입니다.
2) 현대 신학자들은 예정 교리를 비판하면서 사랑의 하나님이 일부만 구원하실 리가 없다, 결국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실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것이 만인구원설입니다.
그것은 마음대로 살다가 구원은 받고 싶은 사람들의 장밋빛 생각일 뿐이지 하나님은 성경 어디에도 모든 사람을 다 구원하시겠다고 한 적이 없으십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피 흘리고 죽으신 사랑을 농담으로 여기는 사람들을 구원하신다는 내용은 없습니다.
이런 반론들에 대해 신학자들이 이 예정교리를 납득되게 설명하려고 애쓰지만 이 교리는 사람의 지혜로는 논리를 만들어 낼 수가 없는 내용입니다.
바울사도 역시 9장21절에서 다만 이렇게 말할 뿐입니다.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
예정론은 아무도 범접할 수 없는 드높은 하나님의 주권을 표출하는 것입니다.
피조물인 인간은 창조주의 절대적인 권한을 인정하고 순복해야 합니다.
우리를 존재하게 하신 분도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을 등진 죄인들을 다시 구원해 영생을 주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멸망 받을 모든 죄인 중에서 하나님이 자비로 원하시는 자들을 일부 구원하신다고 하나님을 부당하다 하겠냐는 것입니다.
바울은 조용히 꾸짖습니다.
20절, 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반문하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냐
여기서 마음에 턱 걸려 넘어가지 못한다면 아직 성령의 사람이 아니라고 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서 선택되지 못한 사람들을 향해 하나님의 변호인이 될 수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성경이 이 사실을 변증해서 설득하려고 할 의사가 전혀 없습니다.
너를 선택하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대속을 안 믿는 이유를 너 자신이 알고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요한복음3장19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마지막 날 예수님은 대속을 괜찮다고 거절한 사람들에게 분명히 말씀하실 것입니다.
‘너는 너의 몫을 받아가라. 네가 스스로 선택한 곳으로 영원히 가거라’
우리도 그랬던 사람들인 것을 분명히 알고 있잖아요?
내가 하나님 앞에 나오게 된 것, 예수님의 대속에 대해서 듣고 믿게 된 것, 그래서 이미 예수님 안에서 완전히 새 사람으로 지음 받았다는 것, 이런 이해 할 수 없는 사건들이 내가 선택해서 된 것이 아닙니다.
저는 어릴 때 전도를 받을 때 제 친구를 아주 박해하며 예수님을 비난했었기에 그게 끝까지 저였을 거라는 것을 압니다.
그런데 지금 이렇게 믿어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이 된 것은 내 선택으로 된 게 아니라는 걸 분명하게 알 뿐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택하심을 받고 구원을 받은 것이죠.
그래서 이 구원이 그렇게 감사하게 받아들여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복음으로써 택하신 자들을 불러내시도록 복음의 일군이 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예정과 선택의 교리는 인간의 지혜로 논의하기엔 너무 높은 문제입니다.
이것을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이미 선택적 구원을 받고 난 사람들입니다.
순서로 치면 구원을 받고 나서야 거꾸로 이 선택과 예정을 이해할 수가 있는 것이죠.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날에 이 모든 것을 공개하시고, 자신을 변호하시고, 그 엄중한 공의와 장엄하신 사랑을 모든 만물에 나타내실 것입니다.
그때까지 우리는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을 겸허히 받아들여야 합니다.
성경과 반대되게 따지는 지적교만이야말로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는 것을 두렵게 여겨야 합니다.
셋째 고리, 정하신 자들을 부르십니다.
신학용어로는 소명이라고 합니다.
아시고 정하시는 것까지는 하나님 편에서만 알고 계신 것입니다.
부르심으로 비로서 우리도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선택을 받은 사람인지 알 수 있는 것은 이 부르심에 있습니다.
선택되고 예정 되었기에 부르심을 받고 하나님 앞에 나온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부르심으로 압축했지만 이 안에는 회개, 믿음,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하는 내용들이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면 아무리 하나님께 적대감을 갖고 있던 사람들이라도 반드시 하나님께 나오게 됩니다.
교회 맞은 편에 문구점이 하나 있죠.
제가 거기로 사무용품을 가끔 사러 가는 데 어느 날 신앙에 대한 얘기를 좀 나누게 되었습니다.
사장님 어머니가 무당이었고 자기는 하나님이 그렇게 싫었다고 합니다.
친구들이 전도를 하려고 하면 역정을 내고 결국 싸움이 날 상황이 되곤 했다는거예요.
그래서 전도하지 말라는 말을 하려나보다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 최근 들어 자기 생각이 바뀌어서 하나님이 저절로 믿어진다는 것입니다.
옛날처럼 하나님이 싫지 않고 자기는 아직 교회는 안 나가지만 하나님을 믿고 있다는 거예요.
어쨌든 교회로 인도해야 할 전도대상자이긴 하지만 그 분이 때가 되어서 하나님이 부르셨나하는 생각이 약간 들었습니다.
이 부르심이 회개와 구원에 이르려면 유효한 부르심이 되어야만 합니다.
외적 부르심이 아니라 내적 부르심이라고도 합니다.
누군가의 전도로 막 교회에 나오게 되었거나, 혹은 문구점 사장님처럼 왠지 하나님이 믿어지는 상태로는 유효한 부르심이 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구원을 위해 이 부르심이 효력이 있기 위해서는 사람 편에서 옛 삶에 대한 회개와 십자가의 속죄에 대한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주님을 적극 따르는 자로 돌아서야 그 부르심이 효력이 있는 것이죠.
외적 부르심을 입은 신자들에게 성령께서 계속 하나님의 말씀으로 설득하고 가르치셔서 유효한 부르심이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성년이 되기 전 우리 자녀들은 대부분 유효한 부르심에 이르지 못한 상태임을 아셔야 합니다.
성경을 배우고 교회를 다니는 것이지 예수님의 속죄의 의미를 바로 알고 믿는 유효한 부르심의 단계를 아직 거치지 않은 것입니다.
이 아이들이 유효한 부르심으로 변화되고 있는지 지켜보며 기도해야 합니다.
모태신앙인 자녀들이 유리한 것은 주일마다 복음을 듣고 예수님에 대해 배우기 때문에 자기 인격으로 그것을 믿고 받아들일 기회가 더 많다는 것이죠.
우리의 외적 부르심이 다 내적 부르심에 이르러 구원의 효력을 이루길 간절히 축복드립니다.
넷째 고리, 부르신 자들을 의롭다고 하신 것입니다.
신학용어로 칭의라고 하죠.
예수그리스도의 대신속죄를 알고 믿고 주님으로 받아들인 사람들을 하나님은 의롭다고 칭해 주십니다.
로마서 5장에서 말씀드렸듯이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은 죄와 사망에 속했던 옛자아에서 완전히 거듭난 새생명의 자아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이젠 죄가 없기에 의롭게 되었다고 인정하시는 게 칭의입니다.
칭의는 하나님의 법정에서 의롭다고 판결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판결이 바뀔 일은 절대로 없는 것이죠.
오래 전에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했던 화성연쇄 살인범이 이춘재로 밝혀지게 되었죠.
그런데 본인도 자백했고 분명히 그 모든 사람을 이춘재가 죽였는데, 공소시효가 지나서 그 죄값을 치르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13건의 살인죄와 30여건의 성범죄가 결국 ‘공소권 없음’으로 마무리 되었죠.
법이 그런 위력을 가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다고 판결을 내리셨다는 것은 구원의 확신에 있어서 아주 중대한 것입니다.
우리가 거듭났지만 변화 된 내면을 완전히 볼 수는 없잖아요?
육신이 여전히 죄 아래 끌려가는 것을 볼 때 내가 성령을 받은 건지 아닌지 의심되잖아요?
하나님이 너는 죄가 없다, 의롭다, 이렇게 정해주시는 것이 얼마나 필요합니까?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다시 정죄함이 없나니’
이렇게 의롭게 된 사람이 마지막으로 영화롭게 되기까지 맏아들 예수님을 닮으려고 애쓰는 것이 성화입니다.
황금사슬에 성화라는 단계가 빠졌지만 칭의로 부터 성화는 시작되고 영화에 이르러 성화는 끝나는 것입니다.
다섯째 고리, 의롭게 된 사람을 영화롭게 하십니다.
이 단계가 마지막으로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완성되죠.
우리 죄의 몸도 우리 안에 있는 성령께서 주님과 같은 부활의 몸으로 변화시켜 주십니다.
영과 몸이 완벽하게 된 상태에서 영생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사람을 정하셨고, 정하신 사람은 부르셔서 예수님의 대속으로 의롭다 하시고 마지막으로 영화롭게 하시는 것이 바로 황금사슬, 구원의 서정입니다.
장로교에서는 이 과정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있기 때문에 선택되고 의롭게 된 사람은 하나님이 영화에 이르기 까지 타락할 수 없이 붙들어 주신다, 즉 견인해 주신다고 믿습니다.
감리교나 성결교 같은 경우는 구원을 받았다고 해도 죄를 짓고 다시 하나님을 부인하면 구원이 취소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로마서 전체에서 가르치는 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사람은 반드시 구원에 이르도록 전 생애를 인도하시고 붙들어 주신다는 것을 알 수 있죠.
그렇기에 바울사도는 이 구원의 확실성에 대해 이렇게 감격적으로 마무리를 하는 것입니다.
31절,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33절, 누가 우리를 고발하리요
34절 누가 정죄하리요
35절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물론 이 말씀들을 잘 읽어보면 우리를 대적하는 것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육체, 마귀, 세상입니다.
이것들은 결코 과소평가 할 것들이 아닙니다.
우리 육체와도 지혜롭게 싸워야 합니다.
우리가 아직은 연약한 육신을 갖고 있음을 이해해야지 너무 신령한 쪽으로만 치우치면 육신이 둘 중 하나로 갑니다.
신앙이 인격화 되지 않고 바리새인처럼 종교화 되거나 아니면 아예 육신이 화를 내고 파업을 합니다.
육신에 새겨진 죄가 어느 정도 강한 세력으로 남아있는지 아시길 축복드립니다.
다만 우리 죄의 몸도 이 땅에선 소중하니까 잘 위해주고 달래가며 의의 병기가 되도록 변화시켜 가야 합니다.
삶에서도 때때로 수렁에 깊이 빠진 것 같은 상황을 만납니다.
마음이 침체되어 빠져나오고 싶지만 잘 안될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도 너무 낙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저는 그럴 때 마음을 잠잠히 하고 하나님이 움직이시는 때를 기다립니다.
만일 모든 게 내게만 달렸다면 이만큼 삶을 꾸려갈 사람이 누가 있겠어요?
우리 힘으로 안될 때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손을 대셔서 쓱 빠져 나오게 도와주십니다.
우울하고 낙담 된 마음도 어느 순간 성령께서 일으켜 주시고 다시 편안하게 생기를 되찾게 되니 걱정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레미야 10장23절, 여호와여 인생의 길이 자기에게 있지 아니하니 걸음을 지도함이 걷는 자 자신에게 있지 아니함을 내가 아나이다
우리 걸음을 하나님께서 지도하신다고 하잖아요?
그래서 설령 성도들이 죽음에 넘겨지는 환난을 당한다 해도 넉넉히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가장 큰 승리는 죽음에 넘겨질 때 믿음과 소망을 안고 죽는 것입니다.
그 이상의 승리가 어디 있겠어요?
어떤 상황에서든 결국 우리에게 보장 된 것은 이 한가지입니다.
37절,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말씀을 정리합니다.
구원이 인간의 자유의지와 자기 선택에 있었다면 아무도 예수님께 나올 사람은 없었을 것입니다.
구원의 서정이 황금사슬로 이어져 있지 않다면 누구도 끝까지 믿음을 지켜 영화롭게 되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부르심을 입고 나온 것은 황금사슬 안에 있다는 증거이지만 이 부르심이 구원의 효력이 있는 유효한 부르심인지는 우리 스스로가 점검해야 합니다.
지난 주 나누었던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고 있는지, 정말 주 예수님께서 말 그대로 나의 주인이신지, 다른 모든 것들을 포기할지라도 이 생명의 복음은 포기할 수 없다는 계산이 완료되었는지.
그렇다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에게서 절대로 사랑을 거두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은혜 안에 평안히 살아가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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