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youtube.com/watch?v=aTdZoTZDDCk&t=1169s
로마서의 핵심되는 구절을 들라면 1장16절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바울사도는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깊이 깨달은 은사를 로마교회에 나누기 위해 이 편지를 썼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왜 복음이 필요한지를 인간의 죄와 죄에 대해서 진노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에 대해 논증을 시작했었죠.
그리고 복음에 대립적이던 유대인들의 율법으로는 구원받지 못한다는 것을 여러 각도에서 설명했습니다.
앞 3,4장도 그런 내용입니다.
지난 주 매일성경 갈라디아서에서 같은 내용을 계속 살펴보았기 때문에 오늘은 5장으로 넘어왔습니다.
5장은 그렇다면 복음을 믿는 우리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냐는 것입니다.
복음을 믿어서 얻은 유익이 무엇이냐는 것이죠.
오늘 본문이 몇 절 되지 않지만 예수님을 믿음으로 얻게 되는 복의 진수가 담겨 있습니다.
성도로서 가장 예수님을 사랑하며 깊이 교제했고, 천국에 다녀왔던 바울의 엄청난 경험담과 신앙이 녹아져 있는 것이죠.
단지 ‘예수님을 믿으니까 죽으면 천국에 가게 되겠지’에서 우리 구원의 지식과 경험이 끝나서는 안되겠습니다.
바울사도가 전해주는 복음의 풍성한 은혜를 잘 듣고 내게 주어진 현재의 구원을 누리며 살아가게 되길 바랍니다.
1. 복음을 믿은 결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우리는 의롭다 하심을 받습니다.
1절,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여기서 의롭게 되었다는 것은 ‘착하다, 정직하다’ 그런 일상의 용어가 아니라 법정에서 쓰는 말입니다.
법관이 심리를 거쳐서 ‘무죄’라고 판결하는 것입니다.
법적으로 무죄 판결을 받는다는 것은 죄에 따른 죄책에서 완전히 자유롭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분명히 죄를 지었다고 양심과 율법에 의해 고발되었잖아요?
사실은 하나님의 법정에서 심판하실 때 죄로 인지하지 못하고 저지른 더 큰 죄들이 훨씬 많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죄에 대해서만 재판을 받는다 해도 그건 상상하기도 싫죠.
예수님과 성경이 일관성 있게 말씀해 온 것은 사람은 반드시 그 일생의 행한대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지난 주 말씀에서도 살펴 보았죠.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우리가 한 점 흠이 없으신 하나님 앞, 공의로우신 심판대 앞에 서기가 얼마나 두렵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내 모든 죄를 대신해 이미 형벌을 받으셨다는 것을 믿었더니 엄청난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섰을 때 내가 평생 지은 죄가 이미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는 무죄다, 너는 의롭다’ 이런 판결을 받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이미 의롭다 하심을 받았지만 바울사도는 우리가 모두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고 했습니다.
지금은 누가 정말 의롭게 되었는지 알 수가 없잖아요?예수님께서 그 날에 양과 염소를 구분한다고 하셨습니다.
그 심판대 앞에서 굉장한 혼란과 절규가 터져 나온다고 주님이 말씀하신 대로 될 것입니다.
‘너는 의롭다, 천국을 상속 받아라’.
이렇게 판결해 주실 때 그 희열과 행복은 상상만으로도 감당하기 벅찹니다.
그동안 예수님이 내 죄를 속죄하기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복음을 얼마나 많이 들었습니까?
이 복된 소식, 이 복음을 절대로 설마 하는 마음으로 의심하거나 외면하지 마시길 간곡히 당부드립니다.
2. 이렇게 믿음으로 의롭게 된 결과 얻게 된 것 세 가지가 1절과 2절에 나옵니다.
1) 하나님과 화평을 누립니다.
1절,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본질상 진노의 자식이었다고 성경은 밝힙니다.
하나님은 죄짓는 것 밖에 모르고 태어난 우리에게 ‘너는 내 자식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을 향해 네 아비는 마귀라고 하셨죠.
우리가 먼저 살펴본 대로 ‘하나님을 알만하지만 모른다고 핑계대고 감사하지도 영화롭게 하지도 않는 죄인들’에게 하나님의 진노가 쌓이고 있습니다.
물론 죄인들도 하나님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아주 공격적인 사람들은 겁 없이 하나님을 비난하죠.
이렇게 하나님의 진노가 쌓여만 가는 사람들의 삶은 어떨까요?
하나님은 죄인의 죄를 역겨워 하시고 판단의 눈으로 보십니다.
누가 나를 경멸하는 눈빛으로 계속 본다면 어떨 것 같습니까?
그 시선만으로도 우리는 불쾌감과 불안감을 느낄 것입니다.
그래서 가끔 살인해 놓고 그 이유가 자기를 기분 나쁘게 쳐다봐서 그랬다고 하잖아요?
사람은 환대하지 않는 눈빛 하나에도 충분히 고통스럽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바라보시는 데 영물인 인간이 그걸 어떻게든 인지하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전능자가 내 죄를 겨누고 계시는데 평안을 누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이사야서48장22절에서 이사야선지자가 기록했잖아요?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 하셨느니라
하나님이 분명히 악을 행하며 하나님과 화해하지 않은 죄인들에겐 평강을 주시지 않는다고 선언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부인하는 죄인들이 아무리 마음 수련을 하고, 기부를 많이 해서 죄책감을 대신하고, 좋은 것만 보고 좋은 생각만 하자고 해도 근본적으로 평안을 얻지 못합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막연하긴 해도 뭔가 그 뒤의 심판을 인식하기 때문입니다.
이사야서32장17절을 보면 이 화평이란 단어가 사람이 마음먹기에 달린 게 아니라는 걸 말해 줍니다.
공의의 열매는 화평이요 공의의 결과는 영원한 평안과 안전이라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죄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가 이뤄졌기에 믿는 자들에게만 이 화평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이 화평을 다 누리시길 축복합니다.
2) 하나님의 은혜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2절,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우리가 믿음으로 얻은 이 은혜는 절대 물릴 수 없다는 것을 은혜 안에 서 있다고 표현한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언제고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갈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신이십니다.
아무리 우리가 예수님의 속죄를 통해 하나님과 화해되고 화평하게 되었다고 해도 아무나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쓱 나가겠습니까?
쓱 나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요한사도가 보았던 하나님보좌를 둘러 싼 천상의 예배를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아름다우심과 영광을 어떻게 표현을 못하니까 온갖 보석의 이름으로 대신하잖아요?
거기에 천천 만만의 거룩한 천사들이 진심을 다해 하나님과 어린 양을 찬양하는 그 예배에 대해 우리가 설교를 들었잖아요.
그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우리는 사전예약도 없이, 허락 받을 필요도 없이 쑥 나가서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4장16절에서 말씀하셨잖아요?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다급한 자식들이 아빠하고 외치듯이, 전화로 급히 엄마에게 문자를 보내서 도움을 요청하듯이,
‘엄마 나 액정이 나가서 그러는데.’
이럴 수 있는 게 다 부모에게 당당한 자식의 신분 때문이잖아요?
아무나 내 집 문을 열고 들어옵니까?
자식들만 당당히 문 열고 들어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고 도움을 구하며 아버지 앞으로 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걸 의심하는 사람들을 성경은 책망합니다.
히브리서 11장 6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매일의 삶의 고충을 아버지 앞에 가서 토로하고 도움을 청하시기 바랍니다.
반드시 상을 얻어 나올 것입니다.
3) 하나님의 영광을 보면서 즐거워합니다.
2절,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 하느니라
많은 경건한 성도들의 간절한 바램은 하나님을 한번 보는 것이었습니다.
모세도 하나님 보기를 원했고 주님 제자들도 아버지를 보여 달라고 했죠.
하나님의 영광을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오늘 말씀이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한다고 하셨는데요?
요한복음, 요한일서에서 밝히시길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이 말씀을 꼭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이든 예수님이든 성령님이든 오감으로 체험하길 원하면 사탄이 광명의 천사를 가장하고 나타납니다.
저는 하나님이 영광스럽고 위대하신 분이시라는 게 너무나 믿어집니다.
영광의 하나님이 믿어진다면 성령께서 우리 영에 그 영광을 새겨주셨다는 뜻입니다.
우리 중에 하나님은 영광스럽지 않다고 생각하는 분이 있으십니까?
세상에 나가면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도, 하나님의 영광도 부정합니다.
하나님이 전능하시고, 선하시고, 공의와 사랑으로 이 순간도 온 천하를 통치하시고 나를 다스리시는 그 영광을 예배드리는 중에도 보고 즐거워합니다.
내가 믿는 하나님, 내가 섬기는 예수님은 얼마나 영광스러우신 분인지요!
그렇기에 주님을 믿는 우리도 함께 영광을 얻을 것이지 결코 수치를 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렇게 화평을 누리고, 매일 은혜 안에 들어가고,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즐거워하는 것은 의롭게 되면 당연히 따라오는 놀라운 선물입니다.
이런 것을 알고 누리며 살아가고 있냐 전혀 모르고 살고 있냐는 것은 과연 내가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는지를 가늠해 보는 척도가 되는 것이죠.
매일 이런 선물을 누리고 경험하며 살고 계십니까?
처음 믿음을 갖고 처음 은혜를 받았을 때는 그 새사람의 힘을 처음 느끼며 강력한 기쁨을 맛보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이후에는 옛 죄인의 속성과 새사람이 누가 이기냐의 투쟁이 계속 되잖아요?
*새사람이 힘을 얻으면 하나님과도 나 자신과도 이웃과도 환경과도 화평을 누리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은혜 안에 있음을 확신하고 아버지 보좌를 수시로 들락거립니다.
*누가 뭐라고 하나님을 비난해도 그 영광의 하나님을 바라보고 즐거워하게 됩니다.
매일 기도와 말씀과 성령의 도우심으로 새사람이 승리하도록 힘을 보태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복음안에 있는 이 선물을 항상 누리는 모두가 되시길 축원드립니다.
3. 그리고 세상과의 관계에서는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는 힘을 얻게 됩니다.
3절,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4절,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갑자기 복음의 유익에서 환난으로 주제가 바뀌죠?
복음으로 누리게 된 축복들과 현실에서 당하는 환난의 간극을 설명해야 할 필요 때문인 것이죠.
하나님자녀가 되었음에도 지금의 이 고난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의 인생의 곤고함을 전도서2장23절이 밝혀 놓았습니다.
일평생에 근심하며 수고하는 것이 슬픔뿐이라
이게 인간의 사정이예요.
그러나 우리 성도들이 당하는 환난은 그것과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잠시 환난을 벗어나 안식하고 계신 분들도 전체 그림을 잘 이해해 놓으시기 바랍니다.
환난 중에도 즐거워한다는 게 좀 억측 같지만 그럴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고난은 구차하고 창피해서 사람들은 곤궁에 빠진 것을 숨기려 합니다.
그런데 왜 성도들은 환난 중에 기뻐할 수 있고 환난을 자랑할 수 있습니까?
오늘 본문에서 보듯이 환난이 소망까지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가학주의자도 아니고 환난 자체가 즐겁다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만나는 환난은 인내를, 그리고 연단을, 결과적으로 소망을 이루도록 설계되었기 때문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환난 없이는 절대로 인내를 배울 수 없고, 연단 된 인격을 가질 수 없고, 구원의 소망을 붙들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게 세트로 붙어 있어서 나는 환난과 인내는 빼고 연단과 소망만 이뤄야지 그럴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환난 세트를 우리 인생에서 반복적으로 허용하시며 우리를 양육하십니다.
인생 중에 큰 고난의 사이클이 있는 것 같더군요.
한 고비를 넘을 때 마다 우리가 점점 나은 사람으로 성장해 가는 것이죠.
날 연단하지 마시고 내버려 두라고 하지 마세요.
하나님이 내버려 두신 사람들에 대한 말씀을 알고 있잖아요?
그 형편은 점점 나빠지고 파멸을 향해 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게 왜 이런 시련이 오냐고 이상하게 여길 게 없는 것입니다.
1) 이 환난은 인내를 이룹니다.
환난 없이 누가 인내를 이룰 수가 있겠습니까?
인내는 내 뜻대로 안되고, 즉시 안 되는 상황을 참고 견디는 것이잖아요?
환난이라는 환경에 꼼짝없이 갇히지 않으면 누가 참고 기다리는 걸 스스로 훈련하겠습니까?
사람은 참고 견디는 게 제일 싫은데요.
승승장구 일이 잘 풀리는 사람들은 점점 인내심이 없어집니다.
스마트시대, 모든 게 편리하고 빨리 진행되니까 사람들의 인내심은 점점 사라지는 것 같습니다.
화면이 바뀌는 몇 초를 못 기다려 조급해 하더군요.
인내심은 상황에 반응하는 본성을 통제할 수 있는 능력과 연관됩니다.
통제 못하면 분노조절 장애 같은 게 되는 것이죠.
그러나 하나님이 이루시려는 보다 근본적인 인내는 환난 중에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인내는 훈련을 통해서만 생기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를 환난이라는 어려움 속에 넣으시고 인내를 얻게 하시는 것입니다.
내 힘으로 안 되는 장치를 거시는 것이 환난입니다.
저도 목회하며 제일 힘든 게 이전처럼 내 힘으로 열심히 했는데 결과가 안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문을 닫지 못하게 계속 하게 하시는데 되진 않고, 거기서 인내하는 게 정말 힘들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인내를 이룰 수가 있을까요?
성도들에게 닥치는 환난은 힘들고 괴롭긴 하지만 두려워하거나 슬퍼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이때는 긴급상황이잖아요?
특전사가 된 것처럼 더 신중하게 하나님을 의뢰하며 믿음과 의지를 극대화시켜 살아가야 되는 것입니다.
환난의 때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여전히 매일의 성실한 믿음의 행위들을 하는 것입니다.
기도하고 묵상하고 내 행동 중에서 더 주님께 맞춰야 할 것은 없나 돌아보며 근신하는 마음으로 한걸음씩 주님과 함께 해야 합니다.
환난이 오면 종교적인 열정이나 한방의 은혜체험으로 해결되는 게 아닙니다.
신앙에는 한방에 되는 그런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잠언 24장10절에서 말씀하는 것입니다.
네가 만일 환난 날에 낙담하면 네 힘의 미약함을 보임이니라
환난이 지루하게 이어진다는 것이고 그걸 인내로 이겨내려면 믿음의 뚝심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환난은 우리의 신체와 정신에 과부하가 걸리게 하기 때문에 환난을 지나다 보면 우리의 인격이 극도로 쇠약해집니다.
환난 중에 사람들은 자학하기가 쉽습니다.
믿음으로 환난을 통과하는 나를 주님께서 귀하게 여기시듯, 나도 나를 귀하게 여기고 잘 먹이고 정신적으로 쉴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냥 하나님 앞에 나가 털썩 앉아 있는 것도 좋습니다.
눈물도 나겠지요.
처음엔 아무 말도 안 나오지만 신세타령처럼 하나님아버지께 털어놓다 보면 꽤 힘을 받고 일어날 수가 있습니다.
은혜로운 찬양을 듣고 설교방송 같은 것을 보는 것도 좋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개인적으로 묵상하지만 강단에서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에는 큰 힘이 있습니다.
사도들이 전승해 준 하나님의 말씀이 공적으로 선포될 때 특별한 힘을 말씀 속에 주시는 것 같습니다.
환난은 하나님께서 목적이 있어서 허락하신 과정입니다.
조급하게 고난을 끝내 보려고 바둥대고, 빠른 성과를 보려는 마음은 이 환난으로 얻게 하실 인내와 정 반대이기에 절대 도움이 안됩니다.
하나님께 핸들을 맡겼다 생각하시고 주님의 속도에 잘 맞춰서 환난을 통해 인내를 얻으시길 격려드립니다.
3) 이렇게 인내가 쌓이면 연단을 이루게 됩니다.
연단은 인내를 통해 만들어지고 검증 된 견고한 믿음의 인격을 말합니다.
주변에 좋은 사람들이 내 편이고, 좋은 환경이 있고, 괴로운 일들이 없을 때 보통은 내 인격에 큰 문제를 느끼지 못합니다.
내 맘대로 안되는 환경에, 나를 갈구는 사람이 생기면 그때 내 속에서 오만가지 악이 부글거립니다.
돈이 많아서 척척 쓰다가 지갑이 얇아지면 바닥에 떨어진 교만이 분노합니다.
전에 모르던 비굴감과 실패감과 시기심 같은 죄성들이 터져나옵니다.
인내를 통과하지 않은 믿음이나 인격은 오물들이 밑에 가라앉은 시궁창 물 같은 것입니다.
무엇이 휘젓느냐에 따라 온갖 더러운 죄악들이 수면 위로 떠오릅니다.
하나님이 딱 맞는 막대기로 우리를 휘저어서 내가 모르고 있던 죄성이 수면 위로 딱 떠오르게 하십니다.
고난과 불편함이 없다면 영영 모르고 지나갔을 것을 보게 되는 것이죠.
모든 죄성을 그렇게 다 환난을 통해서 드러내지는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한 가지만 핑계하지 못할 정도로 처절하게 보게 되면 아, 내가 이런 사람이구나. 나머지는 다 인정하게 됩니다.
그래서 멋모르고 내가 괜찮은 사람인 줄 알고 은근히 교만하게 남을 평가하고 우월감을 가졌던 인격이 비로서 제자리를 찾게 됩니다.
알고보니 상석이 아니라 맨 꼬래비 자리를 스스로 가 앉게 되는 것이죠.
예수님께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예수님께서 우리를 당연히 높여주시고 싶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런데 먼저 낮아져야만 높여주실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환난이라는 과정을 반드시 허락하실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바울사도가 사울이었던 시절 율법의 의로 교만이 하늘을 찌르던 사람이었죠.고린도후서12장에 나오는 바울의 환난의 목록들을 보면 사울을 바울되게 하는 데 그게 다 필요했나보다 생각을 하게 됩니다.
우리가 한 평생 환난을 당하는 것은 그렇게 고치실 수밖에 없기 때문인 것이죠.
이 사실을 알게 되기에 환난이 올 때 힘들고 괴롭긴 하지만 하나님이 나를 높이시고 축복하실 계획임을 알고 감사하며 감수할 수가 있는 것이죠.
3) 연단의 결론은 소망을 이루게 됩니다.
소망은 삶의 희망을 말하는 게 아니라 천국을 향하고 바라는 것입니다.
환난과 인내와 연단이 결국 천국을 향하고 바라게 만든다는 것이죠.
간단히 생각해 보면 이해가 됩니다.
돈이 한 200백억만 있다 해도 얼른 천국가고 싶은 소망이 있겠습니까?
사업이 막 잘 되고, 연구실적을 학계에서 인정받고, 건강하고, 자식은 척척 대학에 들어가고, 우리가 바라는 이런 것들이 매일 우리에게 주어진다면 천국에 소망을 두겠습니까?
그러지 못합니다.
이 땅에 것에 마음을 뺏겨 그걸 좀 더 누리고 자랑하기에 바빠서 천국은 꿈도 꾸지 않을 것입니다.
환난 중에 탄식을 해야 ‘주여 어서 오시옵소서’. ‘어서 이 세상이 끝나고 천국에 가고 싶은’ 그런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죠.
환난을 통해 내 속에 있는 것들이 다 드러나고 내 속에 가시들이 나를 찌를 때, 내 속에 죄만 없어도 살겠는데. 죄 없는 천국을 소망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점점 이 땅만 바라보던 시선이 영원한 것을 향해 차츰 조정이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우리는 복음을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고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언제나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가 하나님께 도우심을 구할 수 있다는 것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 안에 성령께서 새겨주신 하나님의 영광을 늘 믿음으로 바라는 사람은 점점 하나님을 닮아 영광스럽게 될 것입니다.
이 복음의 선물을 계속 누리며 살도록 말씀과 기도로 새사람을 강하게 하시기 바랍니다.
환난이 유익이란 말씀을 섭섭하게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늘 말씀대로 주님이 유익하게 하실 것을 믿으시고 힘을 내시기 바랍니다.
필포트란 사람은 성도들이 환난 중에서 이 역경을 믿음으로 통과하는 모습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빛의 자녀가 어둠 속을 걷는다’
아무리 고난이 어둠처럼 짙다 해도 우리는 빛의 자녀입니다.
어둠은 빛이 비췰 때 물러갈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의 고난과 어려운 현실은 결국 우리에게 인내와 연단과 소망을 이루고 예수님을 닮은 영광스런 모습으로 변화되어 가게 하실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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