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로마서1장16절-17절 (복음은 예수그리스도)

남수연 2021. 8. 18. 16:26

https://www.youtube.com/watch?v=dLcAXYdkp68 

우리의 믿음은 논리적일 때 더 확신을 얻게 됩니다.

논리적이라는 게 공부를 많이 한 사람에게만 통한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은 기본적으로 논리적입니다.

시골에서 농사만 짓는 어르신들도 다 나름의 논리를 갖고 계십니다.

아이들도 논리가 안 맞는 부모에게 짜증을 냅니다.

로마서는 이런 면에서 복음에 대한 논리적인 진술로 성도들의 믿음을 견고히 하는 데 탁월한 성경입니다.

요셉과 다윗의 이야기 같은 내용과는 결이 다른 것이죠.

로마서가 편지라는 걸 감안한다면 너무 어렵게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천년 전 로마 성도들 보다 우리 지력이 부족하진 않을 거잖아요?

로마서 안에 있는 ‘콘크리트 같이 견고한 구원의 확신’과 ‘성도의 품격생활’과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대한 진술’은 너무나 귀한 보배입니다.

광맥을 잘 찾아가며 이 보석을 캡시다.

우리는 지난주에 바울사도가 왜 이 로마서를 쓰게 되었는지를 살펴보았구요.

로마의 성도들에게 어떤 유익을 주려고 하는지를 보았습니다.

바울의 복음에 대한 신령한 은사를 나누어 주고, 믿음으로 서로 안위를 받고, 복음의 열매를 맺게 하려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이어서 오늘은 바울이 전하려는 신령한 은사인 복음에 대해 본격적으로 풀어 놓기 시작합니다.

본문 16절과 17절은 로마서 전체의 주제라고 보면 됩니다.

이 이후에 나올 내용들은 이 복음에 대한 의문점에 답하고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구조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울사도가 이미 복음을 알고 있을 로마교회에 다시 복음을 꺼내는 것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많은 신자들이 복음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피상적이고, 그로 인해 복음의 능력을 실제로 알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더 문제가 되는 것은 로이드존스의 말대로 설교자들이 회중들을 다 구원받은 사람들로 간주하고 설교를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는 아직 더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얻기 위해 복음을 듣고 배워야 하는 것이죠.

복음설교를 들어야 구원받을 길을 알게 됩니다.

또 복음 설교는 우리 믿음에 확신을 더해 주고 예수님과의 관계를 더 돈독하게 연결해 줍니다.

이게 확실하고 견고해야 삶의 자세에 힘을 받는 것입니다.

생활의 문제만 자꾸 다룬다고 믿음과 자신감이 생기는 게 아닙니다.

오늘 바울사도가 연구하고 깨달은 복음의 능력을 다 경험하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1. 복음이라는 말을 교회에서 많이 하는 데 그럼 복음이 무엇인가부터 생각해 보겠습니다.

바울사도가 일생을 바쳐 전파하는 것은 복음입니다.

편지 서두인 1절에서 이미 자기는 복음을 위해 택정함을 입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2절에서 ‘복음이 무엇인지’를 진술합니다.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이 말씀을 잘 보면 복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공식이 성립합니다.

그러니까 복음은 예수그리스도인 것입니다.

복음을 믿어야 구원을 받는 것은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는 것과 같습니다.

그 아들은 어떤 분이신지 3,4절에서 이어서 기록하죠.

이 구절 안에 복음이신 주 예수님에 대한 요점이 정리되어 있습니다.

3절, 그의 아들에 관하여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인간의 역사 속에서 다윗의 족보로 오셨던 적이 있는 성육신의 예수님이시라는 것이죠.

4절,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육체적인 죽음을 당하시고 다시 부활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입니다.

이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내용들이 그렇게 만만히 믿어질 내용들이 아니죠.

분명한 이해와 확신이 없으면 복음을 전하기는커녕 내 안에서 일어나는 의구심에도 답을 못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사도가 로마교회를 복음으로 재무장 시켜 복음의 일군이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바울사도의 염원대로 로마교회는 극심한 박해를 이겨내고 결국 로마를 복음화시켰던 것이죠.

오늘 우리도 복음으로 재무장하고 세상을 이기는 믿음을 장착하게 되길 소망합니다.

 

2. 먼저 바울은 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16절,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말에서 무엇이 느껴집니까?

반대로 복음에는 사람들이 부끄럽게 생각할 면이 있다는 것입니다.

로마교회 성도들도 무슨 말인지 알아 챘을 것입니다.

왜 우리가 사람을 만나면 시시한 얘기만 지루하게 하면서 내가 믿고 중요하게 여기는 복음에 대해선 얘기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을 꺼내는 게 부끄럽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부끄럽게 생각 할 이유를 몇 가지 생각할 수 있습니다.

1) 자연인들의 귀에 이 복음은 단 한 가지도 정상으로 들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하나님아들 되심과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 주님을 믿음으로 심판을 벗어나 영생을 얻는다는 것은 아주 비상식적인 내용입니다.

따져보면 단 한 가지도 사람의 이성으로 이해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전혀 이성과 상식과 자연이치에 맞지 않는 걸 우리가 믿고 있는 것이죠.

신의 성육신, 대속이나 부활 이런 주님의 사건은 인간역사 속에 있어 본 적이 없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이 말을 꺼내려면 상대방의 조소적인 반응을 예견하기에 왠지 부끄러움을 느끼게 됩니다.

교회 강단에서도 복음설교는 다 이해할 것 같지만 아주 어려운 설교에 해당됩니다.

 

2) 또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는다는 것은 사람에게 납득하기 어려운 이야기입니다.

죄를 지으면 죄값을 받아야 한다는 게 모든 죄인들의 양심에 새겨진 법입니다.

남이 내 죄를 대신하고 그냥 용서받는다는 것은 이상한 논리죠.

그럼 살인자도 믿기만 하면 천국에 가냐는 조소가 나올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겐 차라리 착한 일을 하면 천국에 간다는 게 더 납득됩니다.

 

3) 또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매달려 죽으신 자체를 사람들이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이번에 정부에서 십자가탑을 점검해서 노후된 것은 철거하게 예산을 지원하겠다고 해서 교계와 갈등이 있습니다.

철거는 해 주되 재정이 없는 작은 교회들은 다시 세울 능력이 없으니 결과는 중국처럼 십자가를 철거하는 쪽으로 가지 않겠냐는 것이죠.

십자가는 세상을 불편하게 하는 것입니다.

또 바울이 고린도전서에서 말씀했던 대로 유대인들에게는 거리끼는 것이고 헬라인에게는 미련하게 보인다는 것이죠.

유대인들의 눈엔 범죄자로 처형된 예수님을 메시야라고 믿는 성도들이 불쾌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기 민족이 메시야를 죽인 게 되는 것이잖아요?지금 이스라엘 전체 인구 중에 한 이만명 가량이 기독교인입니다.

어떤 목사님이 예루살렘에 한 5주 머물다 이런 장면을 목격했다고 합니다.

이 성도들이 거리에서 예수님을 전하는 데 검은 색 모자를 쓰고 검은 옷을 입은 정통 유대교인들이 그들을 향해 고래고래 이런 욕폭탄을 퍼 붓더라는 거예요.

‘우리가 쓰레기로 버린 예수를 너희가 하나님으로 만드느냐’

또 당시 세상 사람들을 대표하는 헬라인들에게는 어떻습니까?

로마시민에게는 절대 집행하지 않는 인간으로 최고의 모욕과 고통의 형벌인 십자가에서 죽은 사람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는 것이 얼마나 미련하게 보이겠습니까?

사도행전을 보면 이미 바울사도가 아테네의 아레오바고 강단에서 이 복음설교를 해 보았는데 사람들에게 조롱을 당했습니다.

그들은 만들어진 신은 믿었지만 스스로 하나님이라고 하신 예수님은 조롱했습니다.

그들에겐 하나님이 필요치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사회가 그렇지 않습니까?

거대한 물질만능주의, 과학, 종교다원주의 같은 인간 중심의 바벨탑이 온 세상을 지배하고 있잖아요?

그 앞에 복음을 내미는 게 부끄럽지 않습니까?

예수님만 믿어야 구원을 받지 아무리 착하게 살아도 지옥 간다는 말이 얼마나 편협되고 부끄럽습니까?

전에 세계의 지성을 대표하는 인문학 교수들이 모여 인문주의자들의 선언을 발표한 적이 있습니다.

이런 내용입니다.

우리는 초자연적인 존재를 믿을만한 충분한 증거를 찾지 못했다.

우리는 인간에 대한 어떤 신적인 목적이나 섭리도 발견할 수 없다.

어떤 신도 우리를 구원할 수 없다.

우리는 스스로를 구원할 것이다.

이런 선언에는 사람들이 박수갈채를 보내고 동의하지만 자기의 죄를 강요하는 것 같은 십자가의 예수님에겐 적개심을 보이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의 십자가는 세상에서 꺼내기가 부끄럽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전도하려고 나가서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말하는 것이 쉽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하십니다가 쉽습니까?

하나님이 사랑하신다는 말은 기분나빠하지는 않죠.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과 구원은 말 꺼내기가 망설여지고 말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나 뭔가 어색하고 오글거리는 느낌이 듭니다.

그러다보니 교회가 복음 대신 세상 시설에 뒤지지 않는 멋진 교회와 각종 유익한 프로그램을 소개하는 것이죠.

우리교회에 어떤 연예인이 나온다, 어떤 정치인이 나온다, 어떤 유명인도 기독교인이다 이런 말을 전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예수님의 십자가보다 성공담을 자랑하려는 것은 세속적인 가치와 뭐가 다른 것입니까?

바울사도는 그렇지가 않다는 것입니다.

부끄러운 십자가까지 낮아지신 예수님이 복음의 알맹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인간의 죄에 대한 고발이고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세상적 실력을 보여 줄 정도가 되면 십자가의 부끄러운 복음이 아니라 성공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몰려옵니다.

대성당들의 시대가 오고 천주교가 몰락한 것과 같은 것이죠.

이번에 여의도성모병원 옆에 있는 순복음교회 소유의 땅이 삼천억에 팔렸다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교회가 너무 많은 부를 소유한 것이 마치 대성당들의 시대 같지 않습니까?

복음은 절대로 실력 행사로 전해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려면 높은 지위가 되면 유리할 것 같지만 절대로 그렇지 않다는 것을 해 보면 압니다.

높은 지위에 있어도 복음을 전하려면 부끄러운 복음을 전하듯이 낮은 자리로 내려와 섬기게 되어 있습니다.

십자군으로는 십자가의 복음을 전할 수가 없는 것이죠.

로마제국의 성도들이 얼마나 부끄러운 복음으로 고초와 박해를 당했습니까?

광란의 박해자 네로황제 때 성도들의 시신에 불을 붙여 가로등을 대신할 정도였으니 더 이상 무슨 설명이 필요하겠어요?

그러나 결국 이 부끄러운 복음이 로마제국을 무너뜨리게 되잖아요?

믿음의 실력을 갖고자 한다면 사랑을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의 실력을 닮아야 하는 것이죠.

바울사도는 그러기 위해 자신이 죄수가 되고 옥에 갇히고 무시당하고 돌에 맞아도 이 남들이 보기에 부끄러워 보이는 복음이 부끄럽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 복음을 믿는 것 외에는 구원을 받을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탐욕과 죄가 점점 더 크게 엉겨 붙으며 멸망을 향해 굴러가고 있는 인생을 멈출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 밖에 없습니다.

다른 것이 있습니까?

나를 멈춘 것은 예수그리스도이시잖아요?

바울사도를 멈춘 것도 복음입니다.

그러니 복음이 부끄럽지 않은 것입니다.

거대 로마제국 앞에, 황제 앞에 당당하게 복음을 제출하는 것이죠.

 

3.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복음이 효력 있기 위해서는 듣는 사람이 이 복음을 믿어야 합니다.

복음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것을 믿는 것 뿐 아니라 주님 자신을 믿는 것입니다.

복음은 예수그리스도라고 했잖아요?

많은 성도들이 예수그리스도에 관한 사실을 믿지만 정작 예수님을 인격적인 관계를 맺으며 믿지 않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교회 온지 얼마 안 된 분들은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 인격적인 예수님을 만나야 한다 그런 말들을 들을 때 무슨 뜻인지를 잘 모르겠다고 합니다.

이 설명은 다양하게 할 수가 있겠지만 저는 이렇게 설명하고 싶습니다.

영적인 인식이나 느낌 같은 것이 아니라 내가 알 수 있는 사실로 판단해 보는 것입니다.

진짜 진실한 관계를 맺고 있냐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남을 기만하는 관계를 잘 맺습니다.

기만하는 관계란 진심이 없는 관계입니다.

많은 신자들이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진심은 빠진 관계, 기만하는 관계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기만하고, 믿고 있다고 자기 자신도 기만하는 것이죠.

그 비유를 예수님께서 벌써 들려 주셨잖아요?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그 많은 주의 일을 하지 않았나이까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복음에는 헌신하지만 예수님께는 헌신하지 않는 사역자들도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에 대해서 항상 주의할 것은 예수님의 인격에 집요하리 만큼 집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공부, 사역, 봉사, 이런 것은 본성적인 열정으로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자신께 집중하는 것은 본성적인 것을 죽이고 새사람을 불러 일으켜야 하기에 항상 귀찮고 힘듭니다.

만일 우리가 예수님의 인격과 매일 사귐을 갖지 못하면 생의 목적을 주님께 조정해 놓았던 것이 바로 흐트러져 버립니다.

그러면 사역도 봉사도 섬김도 신앙훈련도 다 무거운 짐이 되는 것이죠.

철저히 예수님이라는 인격에 집중하지 않는다면 믿음은 종교로 전락합니다.

예배나 불공이나 뭐가 다르겠습니까?

복음을 믿는다는 것은 성경에 전해진 예수님 그 분 자체를 마땅히 나의 주인으로 받아들이고 겸손히 사귐을 갖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자꾸 그 관계를 끊기에 삶에서 자꾸 삐끗거리는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제동이 걸리면 내가 또 하나님 없이 가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되죠.

그래서 힘써서 기도와 말씀묵상과 같은 좋은 방편으로 주님과 매일 대면하여 관계를 갖는 게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바쁘고 피곤한 삶을 모르시겠습니까?

그러나 주님과의 깊은 사귐을 대신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우리의 인생의 짐은 몇 날 몇 칠 뛰어다닌다고 훌쩍 사라지지 않습니다.

이 문제가 해결되면 틀림없이 또 다른 문제가 다가오잖아요?

예수님께 의논하며 함께 짐을 져야만 쓰러지지 않고 앞으로 갈 수 있습니다.

요즘 느끼는 것은 정말 사탄이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 자를 찾고 위협적으로 우리에게 발톱을 세운 펀치를 날린다는 것입니다.

깨어서 주님과 연합하고 성도들의 합심한 기도로 악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이 예수그리스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매일 예수그리스도 자신을 향한 살아있는 믿음이 되시길 간절히 축복드립니다.

 

4. 그리고 이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이 어떻게 믿는 자를 구원하시는 지를 18절에서 ‘왜냐하면’으로 다시 설명합니다.

아주 유명한 종교개혁의 역사가 담긴 구절이죠.

18절, (왜냐하면)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1)먼저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기에 구원의 능력이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의라는 말은 윤리적인 하나님의 성품이 아닙니다.

이것은 성경에서 언약적 개념이고 상대적인 관계에서 쓰입니다.

약속을 잘 지키고, 거짓말하지 않고, 무례하지 않고, 책임감이 있다, 그런 사람을 보면 윤리적으로 의롭다고 말할 수 있겠죠.

그러나 아무리 약속을 잘 지키고 거짓말을 안 하고 도덕적으로 완벽한 남편이라고 해도 아내의 기대를 채워주지 못하면 부부라는 언약적인 관점에서는 의롭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와 언약하신 하나님의 의는 혼자 도덕적으로 완벽하시다는 뜻이 아닌 것이죠.

하나님의 의로우심이 창조하신 인간에 대해서도 충분히 그 필요를 채워주셨다는 뜻입니다.

그게 바로 십자가 복음입니다.

십자가의 복음으로 죄인을 구원하시는 것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의로우심에 대한 증명이고, 죄인들의 문제에 대해 의롭게 처신하셨다는 증명입니다.

우리는 성품도 불의하고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불의하지만 하나님은 성품에서도 의롭고 관계에서도 의로우신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 복음이 믿는 자들을 구원하실 능력이 되는 것이죠.

2) 이 복음은 믿음에서 믿음에 이르게 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믿음이 점점 증진된다, 계속 믿음으로 구원을 이룬다 그렇게 해석될 수도 있지만 더 나은 해석이 있습니다.

우선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말씀을 우리가 알고 있죠.

에베소서 2장8절,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 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에게 복음을 믿는 선물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믿음에서 믿음으로’ 에서 앞에 있는 믿음은 하나님이 우리를 택하셔서 복음이 믿어지는 은혜를 주신 것을 말씀합니다.

그러니까 복음이 믿어지려면 하나님의 선물인 믿음을 받아야 하는 것이죠.

그렇다면 나는 예수님의 복음이 안 믿어지는 데 선물을 받지 않은 것인가?

그게 뭐야, 왜 나는 차별하고 믿음을 주시지 않아?

이런 생각을 할 수가 있는 것이죠.

거기에 대해서 예수님은 이런 말씀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구원 얻을 믿음은 선물이라는 말씀과 네가 스스로 믿으면 구원을 주신다는 두 말씀은 논리적으로 안 맞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 두 상반되는 진리에 대해 해결책을 제시하지 않으십니다.

이 두 상반 된 진리가 그냥 평행선을 그으며 계속 가는 것이죠.

예수님의 대속의 복음이 믿어진다면 하나님의 선물을 받은 것이니 자랑할 게 없고 복음이 믿어지지 않는다면 더 분명하게 배워 이해하고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성령의 선물을 주시길 기도해야 하는 것이죠.

그리고 뒤에 나오는 믿음은 복음과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의지적이고 행동적인 믿음을 말씀합니다.

선물로 얻은 믿음이 있다면 우리 편에서의 믿음의 행위가 반드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격을 구하고 믿음으로 순종하는 성도들에겐 점점 예수님의 인품이 배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믿음의 진보는 예수님을 얼마나 닮아가냐에 있는 것이죠.

지난 주 한 성도님께서 기도 중에 이런 회개를 하셨다고 말씀하더군요.

그날 기도하는 데 문득 지하철에서 지저분하고 땀 냄새가 나는 남루한 사람 옆을 피했던 게 생각이 났다는 거예요.

얼른 깨끗하게 잘 차려입은 사람 옆으로 옮겨 갔던 일이 떠오르며 그걸 회개하셨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같이 냄새나는 죄인들을 사랑하고 십자가에서 목숨을 대신하실 만큼 아까워하셨는데 우리는 외모로 사람을 차별하며 주님의 사랑을 따르지 못했다는 게 회개가 되었다고 합니다.

믿음에서 믿음에 이르고 있다는 것이 이런 것 아니겠습니까?

만일 우리 믿음의 시작이 내 의지와 결심이었다면 지난 주 이미 믿음을 다 까먹었을지 모릅니다.

이 믿음의 시작이 하나님으로부터 주신 믿음이기에 우리는 계속 믿음으로 행하며 믿음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바울이 전하기 위해 생명을 아끼지 않았던 것은 인간의 유일한 희망이고 죄인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는 복음, 주예수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고 뒤로 가면서 이 복음에 쏟아지는 인간의 질문과 공격에 답합니다.

복음만이 하나님의 의라면 율법은 무엇이냐

하나님이 믿을 사람을 정하셨다면 안 믿는 사람을 어떻게 심판하시냐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는다면 멋대로 죄를 지어도 되느냐

복음에 대해 제기되는 모든 문제에 대한 답변과 논증이 이 로마서에 다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본성 안에 가진 질문들이기도 하기 때문에 신자들도 이 질문의 답을 알아야 합니다.

때때로 의구심이 들 때 나 자신에게 스스로 답할 만큼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로마서를 자세히 공부하는 것은 나의 믿음을 견고히 하고 예수님의 복음을 방어할 수 있는 믿음도 갖게 되는 것이죠.

어느 목사님이 하신 말이 뼈아프게 남아 있습니다.

한국 교회는 사람들에겐 착한 데 하나님께는 착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한국교회가 그동안 얼마나 세상을 섬겼습니까?

그런데 결국 코로나상황에서 그들이 교회를 어떻게 보는지가 드러났습니다.

이는 우리가 진정 섬겨야 할 분을 섬기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인격에, 하나님의 인격에 집요하리만큼 집착하는 게, 그렇게 사랑하는 게 참된 믿음입니다.

주님이 나를 사랑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 복음이 너무 소중하기에 정성을 다해 공부하고 그 예수님에 대해 앞으로 로마서를 통해 계속 더 알아가길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