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서

요한계시록2장1절-7절 (에베소교회 처음 사랑으로)

남수연 2021. 3. 10. 23:27

www.youtube.com/watch?v=JlFMVXsVaLs

우리교회가 11번째 생일을 맞이했습니다.

지난 주 요한사도가 본 환상에서 예수님은 일곱 금 촛대 교회 사이에 계셨고, 교회의 사자인 일곱 별을 오른 손에 붙들고 계셨습니다.

큰 교회든 작은교회든 예수님께서 붙드시지 않으면 세워질 수가 없습니다.

지난 주 한 유명한 목사님이 방이동에 개척했을 때 얘기를 하시더군요.

당시에 신학교에서 강의도 하고 있었고 많은 사역 경험이 있었기에 개척하면 정말 잘 할 자신이 있었답니다.

그런데 막상 하고 나니 사람들이 오지를 않더라는 것이죠.

이년 이상을 매일 개척한 것을 후회하며 교회를 접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그만두기도 떳떳치가 않았다고 합니다.

어느 날은 이젠 정말 교회 문을 닫아야겠다고 결심을 하고 이런 기도를 했습니다.

오늘도 주님께서 사람을 보내주지 않으시면 문을 닫으라는 뜻으로 알겠습니다.

당연히 아무도 안 올 것이었기에 이젠 정말 교회를 접어도 되겠다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교회를 갔습니다.

그런데 웬걸 처음 보는 한 자매가 와 있었던 거예요.

화도 나고, 당황스럽기도 하고, 기도를 그렇게 했으니 결국 교회를 계속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죠.

교회는 이후 우여곡절 속에서 잘 세워지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그날 이후 그 자매를 한번도 교회에서 본 적이 없었다고 합니다.

우리교회도 지난 11년 동안 이런 일을 수없이 겪으며 여기까지 왔습니다.

촛대 사이에 계시는 주님께서 우리 가운데 계시고 우리 모두를 사랑하고 붙들어 주셨다는 증거가 오늘 이 예배입니다.

요즘 우리가 요한계시록 말씀을 배우고 있습니다.

오늘부터 시작되는 부분은 마침 예수님께서 소아시아의 일곱교회들을 직접 진단하고 결점을 고치라시는 중요한 말씀입니다.

곧 다가올 시련을 견디고 믿음을 지켜내려면 이대로는 안되기 때문입니다.

일곱교회가 해결해야 할 문제들은 모두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문제들입니다.

이제 창립11년이 된 우리 교회가 이 말씀들을 잘 듣고 지킴으로 더 장성한 교회로 든든히 세워져가게 해 주시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1. 먼저 예수님은 에베소교회의 수고와 인내를 칭찬하십니다.

지금 요한사도는 복음을 전하다 밧모섬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밧모섬으로부터 약90킬로 떨어진 육지 쪽에 에베소교회가 있었습니다.

지금의 터키인 소아시아 내륙을 따라 순환도로가 있는데 에베소를 처음으로 계시록의 일곱교회 도시들이 4,50킬로 간격으로 성경 순서대로 있었습니다.

에베소교회는 바울사도가 전도하고 목회했던 교회이죠.

바울사도는 순회전도 사역을 하느라 한 교회에 오래 머물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에베소교회에는 삼년 간 머물며 교회와 두란노서원에서 성도들을 가르쳤습니다.

바울사도가 나중에 에베소교회에 보낸 편지가 에베소서입니다.

그 후엔 누가와 디모데가 교회를 맡았고 사도요한이 노년에 머물던 교회이기도 합니다.

그 정도면 얼마나 특별한 교회인지 아시겠죠.

이 에베소란 도시는 로마와 알렉산드리아와 더불어 당대의 삼대 도시로 불리워질 만큼 크게 발달한 문명도시입니다.

에베소는 당시 대도시가 그렇듯이 부유하고, 도덕적으로 타락하고, 우상신을 섬기고, 각종 세상 문물이 몰려 있는 세속적인 도시였습니다.

그 도시에 에베소교회가 세워진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당시 사회에서 취약한 소수의 무리가 되는 것입니다.

저희 어렸을 때만 해도 동네에서 ‘저 사람 예수 믿어’ 그런 말은 은근 무시하는 말이었습니다.

청년이 되고 보니 그때까지 예수님을 안 믿던 우리 집 자식들보다 가난해서 잘 가르치지도 못했던 그 집 자식들이 더 잘 되더라구요.

지금도 예수님을 믿는다는 게 그렇습니다.

어떤 유명인이 기독교인이라고 밝히는 순간부터 거의 점수가 깎인다고 보면 됩니다.

여전히 우리 사회에도 ‘뭐 교회를 다니고 그래?’ 그런 인식이 깔려 있죠.

우리나라에 교회가 많은 것 같지만 신자 수는 8백만명 정도이하입니다.

최근엔 교회를 안 나가는 가나안성도가 신자 4명 중 1명이라는 통계가 있죠.

교회와서 신앙을 제대로 지키는 사람은 인구 열 명 중 한 명에 불과합니다.

소수는 목소리를 내기 힘들기 때문에 억울하게 불이익을 당하는 것이죠.

코로나로 교회가 욕받이가 돼서 마냥 당하고 있을 수밖에 없잖아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에베소교회가 믿음을 지켜온 것을 칭찬을 하십니다.

2절,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3절,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예수님이 값싼 칭찬을 하시는 게 아닙니다.

진짜 에베소 성도들이 교회를 세우고 믿음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를 알고 인정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동안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을 섬긴 것이 쉽지 않았다는 것을 주님은 아십니다.

국민 열 명 중 아홉 명이 회피하는 그 신앙생활을 우리가 하는 것이잖아요?

우리가 아무 것도 안하고 신앙생활만 하는 것도 아니죠.일은 일대로 해 가며 주일에는 교회 나오고, 봉사하고, 평소에도 믿음 떨어질까 봐 신경 써서 경건생활 하는 게 어디 쉽습니까?

또 우리교회 같이 작은 교회에서는 더 져야 할 짐도 있습니다.

개척교회가 삼년 안에 문을 닫는 우리나라 실정에서 지금껏 교회를 세우고 지탱하기 위해 애써왔다는 것을 예수님께서 다 알고 계십니다.

‘내가 네 수고와 인내를 안다’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해 견디고 게으르지 않고 여기까지 온 것을 안다’

주님이 그렇게 에베소교회를 위로하고 계시고, 또 그동안 주님을 섬겨온 우리 모두를 오늘 칭찬하고 위로하시는 줄 믿습니다.

 

2. 또 에베소교회가 교회를 무너뜨리려는 이단들과 치열하게 싸운 것을 칭찬하십니다.

2절, 또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의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을 내가 안다

1세기 교회는 기독교가 생긴 지 채 100년이 안된 시대입니다.

삼위일체 교리나 예수님의 성육신과 대속에 대한 내용들이 제대로 정리되지 않은 때입니다.

에베소는 그리스와 가까운 지리적 위치 때문에 당시 헬라철학들이 아주 성행했던 도시입니다.

이런 철학에 물든 많은 이단들이 교회에 들어왔습니다.

뒤에 나오는 교회들에게도 이단 문제를 주님께서 지적하시는 걸 보면 당시 교회가 얼마나 이단과 힘겨운 싸움을 했는지를 알 수 있죠.

교회가 바른 진리 위에 세워지고 바른 신앙을 갖는 것은 정말 중요합니다.

성도 각자는 진리를 분명하게 알고 확실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코로나 이전에 신천지가 얼마나 교회에 많은 타격을 입혔는지 모릅니다.

신0지 교리에 넘어가 포섭한 사람들이 무교인들이 아니라 다 교회 다니던 사람들입니다.

에베소 교회는 어떻게 예수님이 칭찬하실 정도로 이단을 판별해서 내쫒고 믿음의 진리를 지킬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바울사도가 3년간을 에베소교회에 말씀을 가르친 데서 온 것입니다.

우리교회가 이단들과 신비주의, 은사주의 같은 여러 불건전한 신앙을 가려내는 것은 건강한 교회를 위해 너무 중요한 일입니다.

담임목사인 제가 우선적으로 대처하겠지만 성도들 개개인이 믿음의 내용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는 게 신0지 사태가 주는 경고입니다.

우리 교회에도 개인적으로 찾아오셨던 분들이 건전하지 않은 신앙을 갖고 있어서 제가 정중하게 돌려보낸 적이 몇 번 있습니다.

조금 이상하면 많이 이상한 것이라는 말이 참 맞는 것 같습니다.

겉으로 드러난 것이 조금 이상하면 그 내면적인 것은 정말 많이 다릅니다.

그래서 성경도 잘 알아야 하고, 성경이 가르치는 믿음의 내용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교리를 아는 것은 중요합니다.

신앙이야기에서는 두루뭉술해서 구별이 잘 안 되지만 대체 뭘 믿고 있는지, 교리를 보면 금방 차이가 나타납니다.

전 우리 성도님들의 믿음은 성경의 바른 교리 위에 세워졌다고 자부합니다.

제 설교는 항상 성경의 뼈대인 교리의 렌즈로 성경을 해석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교회가 이래 뵈도 뼈대 있는 교회입니다.

구원의 진리와 믿음의 내용을 잘 모르면 우리 믿음은 허상일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영혼은 자신의 시각에서 불확실한 것에 대해 믿음을 행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어느 날 우연히 믿어지는 게 아닙니다.

어느 날 우연히 교회에 가보고 싶을 수는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우리를 성령님을 통해 감화하시면 그 시작이 이런 저런 경로를 통해 교회에 나오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성경을 배우고 설교를 들으며 새로운 정보를 듣게 되죠.

사람은 어떤 내용과 정보를 들으면 머리가 복잡하게 움직입니다.

이게 무슨 소리인지, 사실인지, 믿을만 한지, 증거는 있는지, 믿으면 내게 무슨 이익이 있는지 머리속에서 생각 작용이 일어나는 것이죠.

그러다 보면 그 신앙의 내용에 대해 내 견해, 내 의견이 생깁니다.

거기까지 상당히 오래 믿음의 내용들을 배우고 들어야 합니다.

예수님만 믿으면 구원 받는다, 끝. 그렇다면 왜 바울이 삼년을 가르쳤겠습니까?

그게 믿어지려면 거기에 관련된 내용이 삼년 이상 배워야 한다는 뜻이겠죠.

그리고 그 내용이 기존의 내 세계관과 본성과 갈등하며 싸우는데도 많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러면서 배운 걸 인정하는 쪽으로 정리되면 믿겠다는 결심이 생기는 것이고 견해가 부정적으로 정리되면 교회를 떠나는 것입니다.

구원의 진리를 내 견해로 인정하게 되면 그 다음은 예수님을 믿기로 결심을 해야 합니다.

배운 진리대로 예수님만이 나의 모든 궁핍과 영원한 사망에서 건져주실 유일한 분이심을 믿고 함께 해주시길 마음에 영접해야 하는 것이죠.

이런 과정을 모르고 교회만 다니면 그 믿음은 불완전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직도 신앙에 대해 이렇다 할 확신이 없다면 대개는 믿음의 내용을 충분히 배우지 않아서 아직 내 견해가 생기지 않은 상태라 그렇습니다.

이런 전체 과정을 알고 있는 것만으로도 꾸준히 신앙생활을 계속할 수 있습니다.

내가 어느 선상에 와 있는지를 생각해 보면 앞으로 어떻게 신앙생활을 해야할지가 나오잖아요?

에베소교회는 성경과 교리를 분명하게 알았습니다.

그러니 어떤 사람들이 하나님의 일군이라며 방문해서 말씀을 전하는 데 허튼 소리를 하면 바로 판별할 수가 있었던 것이죠.

계속 성경을 배워 믿음의 내용들을 완벽하게 아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그것이 진리라는 것을 판단해 예수님을 영원한 나의 구주로, 보호자로 믿으시길 축원드립니다.

 

3. 그런데 예수님께서 에베소교회에 한 가지 문제점을 지적하고 책망하십니다.

4절입니다.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희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에베소교회가 처음 사랑을 버렸다고 하시죠.

바울사도 이후 한 삼사십년의 세월이 흘렀으니 에베소교회는 이제 중견교회가 되었을 것입니다.

여전히 니골라당이라는 이단들과 싸우고 진리를 지키려 하고 있었습니다.

6절, 오직 네게 이것이 있으니 네가 니골라 당의 행위를 미워하는도다 나도 이것을 미워하노라

여전히 진리를 지키려고 애를 쓰고 있다는 것을 주님도 인정하시죠.

그런데 안타깝게도 에베소교회는 처음 사랑을 버렸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처음 사랑을 버렸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성도들의 신앙 여정을 돌아보면 정도는 좀 다르다 해도 누구나 하나님께 대해, 예수님께 대해, 교회에 대해 큰 열정을 가진 때가 있습니다.

에베소교회도 그런 때가 있었습니다.

에베소서1장15절을 보면 바울사도가 그때 성도들의 상태를 이렇게 칭찬하죠.

주 예수 안에서 너희 믿음과 모든 성도를 향한 사랑을 나도 듣고

예수님에 대한 믿음은 강했고, 성도들이 얼마나 서로를 사랑했는지 멀리까지 소문날 정도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에베소교회를 보며 바울이 교회가 무엇인지 교회론을 쓰잖아요?

처음사랑은 예수님께 대한 열심과 충성적인 태도와 함께 교회 성도들을 향한 사랑으로 나타납니다.

교회는 세상 어디에 없는 사랑의 공동체가 되어야 교회의 본질에 맞습니다.

인간의 본성에 역주행한 역사 어디서도 볼 수 없던 공동체가 초대교회잖아요?자신의 소유를 가져다 형제의 결핍을 채우는데 거침이 없었습니다.

요즘은 시대가 달라져서 그게 불가능하다는 것은 성경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교회가 서로에 관심을 기울이고 기도로 함께 난관을 이겨내고 사랑의 나눔이 끊이지 않는 것은 하나님 사랑에서 나온다고 믿습니다.

사랑이 식어진 교회만큼 시끄러운 곳도 없을 것입니다.

한 때 서로 사랑하고 걱정해 주던 성도들이 오히려 상처를 주고받는 사이가 되는 것이죠.

사실 누가 내게 상처를 줬다는 말은 안 맞는 말일 수 있습니다.

원래 상처는 내 안에 있던 것이고, 그 사람이 그 상처를 건드린 것이죠.

은혜가 충만할 땐 주님의 사랑이 열등감을 덮어주고 없던 자존감도 생깁니다.

주님과의 사랑이 사라지면 다시 열등감이 고개를 들고 누가 한마디 하면 곧 상처를 받게 되죠.

그동안 이단을 판별하던 냉철한 잣대를 서로에게 대며 비난하고 비판하는 그런 교회라면 얼마나 숨이 막히겠습니까?

우리 교회가 예수님에 대한 처음 사랑을 놓치지 말고, 성도간의 이렇게 아름다운 섬김과 나눔도 잘 이어가게되길 축복드립니다.

 

처음 사랑은 처음 가졌던 열정을 말하기도 하지만 본문의 원어에서 이 ‘첫째’라는 단어는 서수로 최우선이란 뜻이 있습니다.

한 때 예수님이 그들에게 첫 번째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첫 번째가 아니라는 것이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처음과 같은 사랑, 주님이 우리의 첫 번째가 되는 그런 사랑입니다.

예수님께는 지금도 십자가에서 나를 위해 죽으셨던 그 사랑이 변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에게도 첫 번째 사랑을 요구하실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님 자신을 위해서라기보다는 우리를 위해서입니다.

어차피 이 짧은 생을 마치고 주님 앞에 가면 우리는 주님을 첫째로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주님의 아름답고 선하신 인격을 사모하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주님의 높다란 하나님의 보좌를 볼 때 그런 분이 나 같은 자를 위해 죽음으로 사랑하셨다는 것에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주님은 잠시라도 우리 관심을 받지 않으면 안되시기에 처음 사랑을 회복하라고 하시는 게 아닙니다.

부모들의 자식을 향한 자석같이 달라붙는 사랑을 자식들은 알 리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부모가 자식에게 왜 너는 나같이 사랑하지 않냐고 하지 않잖아요?

주님은 주님이 첫째가 되지 않는 우리 믿음이 위태하다는 걸 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님에 대한 사랑이 식어져 다른 무언가 첫째가 되면 그것은 예수님과 우리 사이를 점점 멀어지게 할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 안에서 누리던 가장 좋은 것과 부요한 것들을 가로막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지금도 첫째 사랑이십니까?

 

4. 예수님께서는 처음 사랑을 잃어버린 에베소교회에 방책을 내려주십니다.

5절,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그 사랑을 잃어버리게 된 계기가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언제부터 교회를 멀리하고, 하나님에 대한 관심이 식어지게 되었나요?내게 시련을 주신 하나님께 대한 섭섭함에서 시작되었을 수 있습니다.

성공에 몰두하다가, 재미있는 취미생활이 생겨서, 세속적인 모임에 빠져서, 죄를 끊지 못해서, 옛습관인 게으름과 나태함 때문에, 신앙보다 돈을 버는 게 더 우선이라서, 더 영향을 받는 사람 때문에.

잘 생각해 보면 그런 계기로 조금씩 시선을 주님께로부터 옮기고 교회를 향한 발걸음이 줄어들고 처음 사랑이 없어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에선 언제든 누구든 그럴 가능성이 있고 자주 반복될 수 있습니다.

거기까지 가면 안되지만 분명 성령께서 사람과 환경을 통해 경고음을 주실 때 신속하게 회개하고 돌이키는게 다시 사는 길입니다.

주님께서 회개하고 다시 처음 행위를 가지라고 하십니다.

처음 사랑으로 돌아가는 것은 우선 행동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다시 예배를 사모하고, 다시 봉사를 즐거워하고, 다시 물질로 하나님과 사람을 섬기고, 다시 기도와 말씀의 시간을 되찾아야 합니다.

싸늘해진 관계를 다시 덥히는 것은 아시다시피 참 힘듭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돌이키라는 말씀을 들을 때 그 말씀엔 능력이 있어 돌이킬 수 있는 불씨를 던져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힘써 주님께로 한걸음을 걸어야 합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한 걸음을 또 인도하시고 우리는 또 한걸음 주님께 다가가며 처음 사랑으로 점점 돌아가는 것입니다.

돌아가셔야 될 분들이 많으신 것 같습니다.

사실 우리는 매일 돌이켜야 하는 것이죠.

만일 회개하고 돌아가지 않으면 예수님께서는 네 촛대를 옮기시겠다고 하십니다.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열심내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는 뜻일까요?

예수님을 주인으로 영접한 성도들, 구원받은 성도들의 믿음이 취소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 식어지고, 죽어라고 충성하지 않는다고 구원이 취소된다면 예수님의 대속을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진리와 안 맞죠.

이럴 때 이신칭의라는 교리가 올바른 해석을 하게 도와주는 것입니다.

만일 에베소 성도가 끝까지 회개하지 않고 지옥에 갔다면 애초 예수님을 완전한 구주와 주인으로 영접하지 않은 사람일 것입니다.

현재 에베소교회는 최종적인 천국 교회가 아니라 불완전한 이 땅의 교회입니다.

거듭난 사람도 있고, 성숙한 신자도 있고, 새신자도 있고, 알곡도 있고, 가라지도 섞인 그런 교회죠.

그렇게 섞인 이 땅의 교회도 중요합니다.

그 안에서 예수님의 교회가 성장하고 세상에 사명을 감당하기 때문입니다.

너의 촛대를 옮기시겠다는 것은 끝까지 회개치 않는 이름뿐인 신자나, 그런 교회에게는 결국 주님 앞에 영원히 서지 못할 것을 경고하시는 것입니다.

거듭났지만 첫사랑을 버린 신자들에게 대해서는 우리에게 주신 명예가 사라지고 사명을 못하게 될 거라는 뜻입니다.

성경에서 촛대는 거의 교회를 상징합니다.

그것은 교회가 복음으로 세상의 어둠을 밝히는 유일한 빛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어떤 학문이, 어떤 문명이, 어떤 앞선 지식이 세상의 영적 어둠을 밝히겠습니까?

그것들이 세상을 밝히겠다고 나설수록 세상은 점점 더 영적으로 어두워집니다.

성막에서도 성소 안에 있던 금 촛대는 세상의 유일한 빛이신 예수님을 상징하고 주님의 빛을 세상에 비취는 교회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제사장은 성소를 드나들며 항상 감람유를 보충해 불이 꺼지지 않게 해야 했습니다.

우리 촛대가 빛을 비추려면 예수님 안에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 안에서만 공여되는 성령님이 우리를 계속 타올라 비추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신비로운 환상으로 구약의 스가랴선지자에게 보여주셨죠.

제사장 스가랴가 처음 보는 이상한 촛대를 봅니다.

촛대의 등잔에 제사장이 기름을 붓는 게 아니라, 금으로 된 관이 연결되어 있고 금기름이 계속 공급되는 신기한 환상이었습니다.

이것이 교회가 받을 성령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 있을 때 성령의 충만하심이 계속 부어지는 것이죠.

만일 주님에 대한 사랑을 잃어버리고 주님의 면전에서 떠나있다면 세상을 향한 빛의 사명을 해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성령의 충만한 빛 가운데 살 때 내게서도 어둠이 사라지고 악한 영들도 짐을 싸서 떠나는 것입니다.

회개치 않고 돌아오지 않는 성도들을 주님께서 외면하시면 성령께서 소멸되는 끔찍한 상태가 됩니다.

구원은 받았으되, 사명도, 평안과 축복도, 복을 이어가지도 못하는 상태로 전락하게 되는 것이죠.

구원받았어도 안 믿던 상태와 똑같은 삶으로 회귀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성령의 불이 꺼지면 무지의 어둠이 몰려옵니다.

각종 악은 어둠을 비집고 스물스물 모여듭니다.

그런 신자들이 주변에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주님보다 더 커 보이고 더 중요하고 더 좋아 보이는 것들이 주님에 대한 처음 사랑을 버리게 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고 하셨잖아요?

첫째가 둘이 될 순 없고, 언제든 첫째가 모든 것을 지배하게 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그 앞에서 옮기시고 나서야 그동안 내가 누리던 모든 좋은 것들이 주님 안에서 주어졌던 것임을 깨닫게 되지는 말아야겠습니다.

그때는 너무 늦고 이미 잃어버린 것들이 너무 많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지난 11년 동안 예수님은 단 한번도 우리교회와 우리들에게서 눈을 돌리신 적이 없습니다.

앞으로 주님 앞에 가는 날까지 그렇게 사랑하고 인도하실 것입니다.

이 사랑과 구원을 확신할 때까지 우리는 성경을 배우고 올바른 진리 위에 세워져야 합니다.

서로를 사랑하고 위해주고 함께 성장해 가길 축복드립니다.

그리고 항상 예수님이 내게 첫째가 되는 것이 가장 내게 큰 복이라는 것을 잊지 말고 끝까지 주님이 첫째가 되는 모두가 되시길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