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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에는 힘들고 지루한 코로나상황을 견딘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의 위로와 회복과 기쁨이 임하시길 축복드립니다.
올해는 세상 모든 사람들이 같은 소원을 품고 출발하는 것 같습니다.
코로나의 무거운 어둠이 걷히고 밝은 일상을 회복하는 것이죠.
이렇게 지구촌 사람들이 한 가지 이슈로 통일 된 적은 없는 것 같습니다.
비로소 지구촌이 한가족이 된 것 같은 슬픈 역설입니다.
코로나 상황이 끝나고 다시 옛날로 돌아간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게 될까요?
예전처럼 여행 다니고, 쇼핑하고, 늦게 까지 동료들과 술잔을 기울이고, 야구장 가고, 영화 보고, 그러면서 시간과 돈을 쓰고 다니게 될까요?
물론 사람들은 그런 삶으로 빠르게 복귀하겠죠.
코로나 속에서 일 년을 살아보니 그동안 너무 세상을 과소비하고 살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안 그래도 사는 데 지장은 없더군요.
다시 이전 세상이 돌아와도 그렇게 살지 말았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작년에 우리가 말씀묵상방을 통해 매일 말씀에 인도를 받으며 사는 놀라운 일을 해왔잖아요?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말씀과 함께 살고 점점 더 우리 관심을 하나님께 기울이며 살아가시길 간절히 권합니다.
그게 가장 행복한 삶입니다.
오늘은 바울사도가 기록한 에베소의 말씀을 통해 올 한해에 어디에 중점을 두고 주님을 따를지 마음을 정하려고 합니다.
이 말씀이 올해 우리가 힘써 지켜야 할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습니다.
에베소서는 바울사도이 쓴 편지인데 바울사도가 쓴 편지들은 대개 비슷한 형식을 보입니다.
제 설교를 오래 들으셨기에 설교가 어떻게 진행되는지를 아마 잘 아실거예요.
바울사도의 서신서도 그런 일정한 형식이 있습니다.
먼저 앞부분에서 우리가 믿는 신앙의 내용들을 이치에 맞춰 자세히 설명을 해줍니다.
‘기독교가 뭐냐’, ‘예수님을 믿어서 우리가 어떻게 되었냐’ 이런 내용들이죠.
그 다음에 어떻게 그 믿음대로 살아야 할지 주로 실천적인 부분을 권면합니다.
1장부터 3장까지가 믿음의 내용에 대한 것이고 오늘 4장부터 실천적인 문제를 다루는 것입니다.
오늘 1절에 보면 바울사도가 현재 감옥에 갇힌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사도는 3장에서도 자신이 갇히게 된 것이 너희들 이방인 교회를 위해 복음을 전하다 된 것이라고 기록했습니다.
지금 왜 또 감옥에 갇힌 얘기를 꺼내겠습니까?
바울사도가 전한 복음이 그의 자유를 포기할 만큼 절박하고 진실한 것임을 자꾸 의식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살펴 볼 말씀이 우리에게도 그만큼 중요한 말씀인 것이죠.
1절,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그 첫 번째로 하는 권고는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라’는 것입니다.
1. 여기서 먼저 알 것은 우리는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새해의 첫주일 예배에서 먼저 우리가 부르심을 받은 선택 된 사람임을 되새기며 시작하길 원합니다.
이 부르심이 얼마나 큰 영광인지 앞 장에서 바울사도가 감격의 어조로 힘써 진술했습니다.
우리를 창세전에 택하셔서 죄와 허물로 죽었던 우리를 살리시고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께 속한 모든 영광을 누리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지 않고는 이 영광스런 성도의 무리에 들어올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6장37절에서 말씀하셨죠.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
많은 사람들 가운데 하나님아버지께서 정하신 사람들만이 예수님께로 나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언제든 교회에 나와 예수님 따르는 걸 선택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렇지가 않은 것입니다.
올해까지는 좀 쉬고, 이 일을 마칠 때까지는 좀 미뤘다 다시 교회에 나가야지 생각했지만 결국 못 나오고 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교회 공동체에서 벗어나는 사람들이 이런저런 이유로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멀어져 결국 떠나지만 돌아오는 것은 자기 힘으로 안됩니다.
그런 분들을 돌아오게 하려고 애를 써보신 분들은 알거예요.
웬만하면 돌아올 것 같고, 본인도 돌아오고 싶은 마음이 아주 없는 것도 아닌데, 그게 끝까지 안 됩니다.
구원은 우리 의지 이전에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지난 한해 모여서 예배드리지 못하는 초유의 사태 중에 우리교회가 흩어지지 않고 여전히 모여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주님의 교회로, 주나산 교회로 부르셨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영광스런 부르심을 받은 사람인지는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그것은 내가 현재 예수님을 따르고 있는지 아닌지로만 증명됩니다.
내가 주님을 진실하게 구주로 믿고 따르고 있는 한, 나는 부르심을 받은 복된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2. 오늘 말씀은 이렇게 복되고 영광스러운 부르심에는 거기에 맞는 합당한 성도의 따름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당연한 일이겠죠.
우리가 하나님께 속했다면 세상과 다르게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합당하게’라는 말은 좌우가 대칭이 된 손저울을 말하는 것입니다.
만일 부르심을 받고 영광의 신분이 되었다면 같은 무게만큼의 실천이 기울지 않게 평형을 이뤄야 한다는 것이죠.
우리의 문제점은 부르심과 구원에 대한 확신은 무거운 반면 실천 쪽에 저울이 턱없이 가벼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믿음의 고백과 평형을 이룰 믿음의 삶이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장성한 믿음일 것입니다.
입으로 고백하지만 삶으로는 안 고백하는 신자들이 많잖아요?
혹시라도 믿는 사람이라는 걸 드러낼까봐 사회생활에서 철저히 조심하며 사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사도행전의 초대교회 성도들이나 서신서의 제자들의 모습은 그와 정반대죠.예수님의 말씀을 너무 지키며 그대로 사니까 구별이 안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5장을 보면 초대교회 성도들이 하는 걸 보고 안 믿는 사람들이 칭송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한편 섣부르게 어울리길 어려워했다고 합니다.
분명하게 세상과 구별된 하나님께 속한 성도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는 세상과 잘 섞이는 세련된 종교를 스스로 자청합니다.
사람이 만든 세상 종교도 보면 모두 다 스스로를 세속과 구별시키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 기독교는 세상을 변화시킨다는 미명하에 세상에 너무 동화되어 버린 사실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역대서 묵상에서 보았던 이스라엘 사람들처럼 가나안의 풍속과 종교에 포섭당해 하나님 신앙이 변질 된 그 모습이 오늘 우리에게 보이지는 않는지요?성경 역사 어느 곳에도 경건한 성도가 세상과 닮은꼴인 모습은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성경이 기록된 때와 세상이 달라졌다고 그럴 수는 없는 것입니다.
성경만이 우리가 세상 끝날 까지 믿고 따라야 할 유일한 기준이자 절대 변할 수없는 하나님 말씀이잖아요?
새해에는 좀 다른 각오로 출발했으면 좋겠습니다.
이제는 세상 속에서 드러내 놓고 세상과 다르게 사는 성도의 능력을 보여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걸 통해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지 다른 뭐가 있겠습니까?
그게 바로 부르심에 합당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이죠.
3. 그 부르심에 합당한 모습은 무엇인지 살펴보겠습니다.
2절,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이것이 부르심을 받은 우리가 올해 더욱 힘써 행해야 할 말씀입니다.
이것을 상세히 나누기에 앞서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할 게 있습니다.
겸손과 온유, 오래 참음, 사랑, 관용, 이런 성품들이 성령의 열매에 속한 것임을 아실 것입니다.
우리 단독으로 이런 사람이 되려고 애쓰는 건 출발이 잘못 된 것입니다.
성경의 가르침은 우리 안에 이런 것이 없고 오직 성령께서 주시는 새마음에서 나온다고 하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구주로 믿을 때 성령께서 우리 안에 오신다고 아실 것입니다.
새신자들은 이 말에 잘 이해가 안된다고 하십니다.
성령님이 그럼 가슴에 계시냐, 머릿속에 계시냐 이럽니다.
물론 성령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보좌에 계십니다.
요한 계시록을 보면 보좌 앞에 계신 일곱영이 성령님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영이시기에 하늘에 계신 동시에 우리 안에까지 존재하실 수가 있는 것이죠.
성령께서 거듭나게 하실 뿐 아니라 우리의 성화를 도와주십니다.
그런데 성령이 이렇게 내주하시는 성도라 해서 거듭난 새사람이 저절로 성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 4장부터 6장까지가 무슨 필요가 있겠습니까?성령께서 예수님의 성품으로 우리를 조련해 가시지만 그것이 우리의 협조와 자발적인 노력 없이는 한 뼘도 성숙할 수가 없습니다.
성령님의 성화의 사역은 아주 오래오래 걸립니다.
우리가 비협조적이라서 그렇죠.
성령님을 카운슬러, 상담자라고도 하잖아요?
상담자가 뭐하는 사람입니까?
자기 말을 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문제 있는 사람의 말을 들어주는 사람이예요.
성령님은 우리에게 큰 소리로 명령하시는 게 아니라 오히려 우리말을 들어주십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함께 하시며 내 기도소리, 내 한숨소리, 내 독백, 생활 속의 일거수일투족에서 내 이야기를 들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이야기를 하시는데, 누구 얘기를 하시냐면 내 얘기를 내게 하셔요.
성령께서 잔잔하게 나에 대한 얘기를 들려주시면 내가 비로소 나에 대해 알게 되는 것입니다.
뭘 알아야 상담이 되고, 치료가 되는 것이죠.
내가 가족들에게 쌀쌀맞게 대한 것, 냉소적인 말 태도, 이런 걸 다시 내게 들려주시면 뉘우침이 오고 고쳐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그걸 안다 해도 그걸 행할 능력이 없잖아요?그렇기에 다시 그 힘도 주시길 기도하며 애써서 지켜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영광의 신분에 걸맞는 모습으로 점점 변화되어 가는 것이죠.
올해 중점을 두고 지켜야 할 네가지 항목들도 성령님의 도우심 없이는 불가능함을 이해하고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지켜가야 합니다.
첫째는, 겸손입니다.
성경에서의 겸손은 교만과 함께 생각해야 뜻이 분명해집니다.
전에 한 경연프로그램에 나온 어떤 청년이 자기를 소개하는 데 ‘나는 배 아픈 가수다’ 이렇게 소개를 하더군요.
자기는 시기, 질투가 재능이고 남이 잘되는 걸 보면 배가 아파서 그동안 다른 경연프로 같은 걸 보지도 않았다는 거예요.
제가 속으로 ‘저런 걸 깨닫고 말 할 수 있다는 건 보통이 아닌데’ 생각했습니다.
그건 교만한 자기 본성을 제대로 본 사람만 할 수 있는 말이잖아요?나중에 알고 보니 그 청년이 고은아권사님 동생인 이재철목사님 아들이더군요.
노래는 참 난해하게 부르던데 믿음에서 좋은 인성이 나오는 것 같았습니다.
겸손은 참 묘합니다.
내가 겸손 할라고 할수록 교만해집니다.
‘내가 겸손 해야겠다’ 이 마음에는 그래도 내게 잘난 구석이 있다는 게 바탕에 있는 것입니다.
교만과 죄 밖에 없는 내 본성을 깊이 마주하는 데서 저절로 나오는 게 겸손입니다.
성령께서 이걸 자꾸 내게 말해주지 않으시면 이걸 알 수가 없는 것이죠.
올해는 이런 겸손이 우리 모두에게 덧입혀지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둘째는, 온유입니다.
우리가 온유하지 않다는 것을 우리 자신은 잘 알죠.
왜 그렇게 쉽게 발끈하고, 욱하고 치밀어 오르는 게 많은지 모르겠습니다.
성경에서의 온유는 물론 예수님의 온유입니다.
예수님은 본성적으로 온유하십니다
이 온유는 사람으로서는, 많은 시련과 연단 속에서 끊임없이 주님을 의지함에서 점점 얻게 되는 성품인 것 같습니다.
바울사도나 모세 같은 사람의 공통점은 기질적으로는 급하고 불같은 성격이었다는 것입니다.
모세가 이백만 이스라엘백성들을 광야에서 이끌다 보니 시련도 그런 시련이 있겠습니까?그걸 다 견디고 나서야 성경이 모세를 평가하기를 세상에서 가장 온유한 자라고 하잖아요?
바울사도 역시 예수님과 복음을 위해 말로 할 수 없는 고난을 받은 사람입니다.
고린도후서 11장에 바울사도가 자신이 겪었던 고초의 내용들을 말합니다.
이걸 한 사람이 다 겪었다는 게 믿을 수 없을 정도의 고난입니다.
우리가 좋은 환경, 편한 사람들과 있을 땐 온유해진 것 같지만 불편한 상황이 되고 보면 금방 공격적이고 거친 감정들이 올라오잖아요?
그럴 때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마음을 평온케 함으로 온유함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올해도 화나게 만드는 사람들과 힘든 상황을 만나게 될텐 데, 그걸 통해 더 온유하게 되는 모두가 되시기를 축복드립니다.
셋째는, 오래 참음입니다.
인내, 이것은 시간, 때에 적용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무언가를 기다리며 참아내는 게 참 우리에게 어려운 것이죠.
작년에도 많이 참고 견뎠지만 힘들었습니다.
우리가 오래 참으려면 이걸 알면 좋을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시계가 내 시계와 시간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시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은 다 내 시계에 맞춰 모든 게 돌아가길 바라죠.
하나님의 인도와 응답을 기다린다면 내가 염두에 둔 시간과 하나님의 시간이 다르다는 걸 알면, 기도하며 더 기다릴 수 있습니다.
언제든 내 시간보다 하나님의 시간이 완벽한 타이밍이란 걸 알고 끝까지 소망하며 주님을 바라본다면 가장 좋은 시간에 맞춰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하고의 오래참음은 좀 더 힘듭니다.
죄인들의 시계는 일정하지도 않고, 좋은 때에 맞춰지지도 않습니다.
내가 일년을 참았으면 이제 저 사람이 알아먹을 때도 되었다고 생각하면 안되는 것이죠.
그 사람 시계는 아직 시간이 안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람들과 얽힌 문제도 하나님의 시간 앞에 가져가면 어떤 사람의 시계든 하나님의 시간에 맞춰 주님의 때에 응답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올해도 하나님을 의지할 수 있는 게 얼마나 축복입니까?
넷째는,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너그럽게 받아준다는 것은 물론 쉬운 일이 아닙니다.
왜 그것이 어려우냐 하면 사람들은 자기 기준으로 만들어진 틀이 제일 익숙하고 편하기 때문에 거기에 맞지 않는 사람은 불편하고 싫습니다.
부모와 자식과도 그렇고, 모든 인간관계가 다 그렇습니다.
그게 먼 관계일 때는 오히려 포기하고 넘어가지만 가까운 관계일수록 더 예민하게 힘들어 합니다.
부부간에 항상 갈등이 생기는 부분을 잘 생각해 보면 내 스타일, 내가 좋아하는 방식을 안 따라 줘서 그런 것입니다.
저희 집 같은 경우는 남편과 저의 음식 취향이 약간 다릅니다.
백목사님은 새로운 맛을 추구하고 맛있다고 느끼는 범위가 상당히 넓습니다.
왠만하면 다 맛있는 것이죠.
그러다보니 음식에 자꾸 이상한 재료를 섞어서 먹어 봅니다.
전에는 된장찌개가 짜다고 김을 넣어봤는데 맛있다고 하더군요.
요즘은 팬케익 반죽에 바나나를 으깨서 넣습니다.
저는 깔끔한 팬케익을 좋아하기 때문에 언제나 질색을 하죠.
한 가지 면에서라도 똑같은 기준을 가진 사람들이 있을까요?비슷한 것 같지만 같이 일을 해 보면 거기서도 또 차이가 납니다.
하나가 되는 유일한 방법은 사랑으로 서로 용납하는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계속 내 기준으로 사람들을 생각하면 나도 항상 마음이 상하고, 상대방도 내가 불편해 질 수 밖에 없습니다.
이 때는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으로 용납해 주시는 걸 생각해야 합니다.
성령님께서 우리가 슬그머니 죄를 짓고, 교묘히 머리를 굴리며 살아가는 것을 얼마나 용납하며 동거하십니까?
하나님의 기준이 우리 기준과 얼마나 다르시겠어요?
그런데도 우리를 사랑으로 용납하시기에 오늘 또 잘못하고도 꾸역꾸역 하나님 앞에 나갈 수가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저는 어느날 용납하지 못하는 마음으로 있을 때 문득 이런 생각을 하나님이 주시는 걸 느꼈습니다.
‘너 그렇게 남을 용납하지 못 하겠니, 내가 너를 그렇게 대한다면 어떡할래?’
무슨 긴 말이 필요하겠습니까?
즉시 그 말씀에 꼬리를 내리고 순종해야죠.
하나님의 영광스런 부르심을 입은 우리들은 거기에 합당하게 겸손, 온유, 인내, 용납, 이 네 가지를 잘 새기고 열심히 지키며 올해 주님을 따르시길 축원드립니다.
4. 그리고 마지막으로 여기까지 한 묶음으로 교훈을 주시는 것입니다.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우리가 하나가 되는 것, 일치되고 연합되는 것을 하나님께서 가장 중요하게 보신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가정에서도 그렇고 교회에서도 그렇습니다.
할 수만 있으면 불신자들과 얽혀 생활하는 직장이나 일터, 학교에서도 사람들과 마음을 맞춰 화평하게 살아야 합니다.
특히 오늘 바울사도는 교회에서의 일치를 염두에 두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성도들의 마음이 뿔뿔이 흩어져 있고, 서로를 볼 때 생면부지 남인 것 같이 무심하다면 그것은 주님이 만들려고 하시는 교회가 아닙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예수님은 교회가 하나 되는 것에 굉장히 관심을 기울이십니다.
하나가 된 교회는 예수님의 뜻을 이룰 힘이 생기고 우리 자신에게도 큰 힘을 줍니다.
저도 가장 힘든 때 교회의 품에서 기도하고, 울고, 힘을 얻으며 이겨냈습니다.
교회를 가까이 하고, 성도들과 가까이하는 게 세상을 가까이 하는 것보다 훨씬 내게 유익입니다.
우리의 어려움 중에 안타까운 마음으로 함께 기도할 수 있는 형제들이 있다는 것만큼 큰 격려가 없고, 실제 그렇게 같이 파도를 넘어가는 것입니다.
물론 죄인들이 모인 교회에서 상처를 받는 경우도 있지만 세상에서 받는 상처와는 비교가 안됩니다.
하나님을 충성스럽게 섬기고 교회를 사랑하다 받은 상처라면 주님께서 기꺼이 치료해 더 큰 은혜를 주십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본문 앞 3장까지에서 바울사도가 강조해 진술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큰 그림인데,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과 우리가 연합되게 하시고,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끼리도 연합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도들에게 있는 가장 큰 신비와 힘은 하나 되고 연합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절대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하나 되기가 얼마나 힘든지는 결혼생활을 해보면 압니다.
단 둘인데도 하나가 되기 얼마나 힘든지 모릅니다.
심지어 내 몸에서 낳은 자식하고도 하나 되기가 힘듭니다.
그것은 성령 안에 있는 성도들이라면 가능합니다.
3절,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이미 한 성령을 받은 우리는 하나가 되었고 그것을 더 힘써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모두가 다 내 편이라면 얼마나 큰 힘이고 행복이겠어요?
그것이 올해 교회 안에서 이뤄지고, 또 가정에서 이뤄지고, 사회생활 중에 이뤄지길 축복드립니다.
그러려면 부르심을 받은 성도들에게 합당한 성품인 겸손, 온유, 인내, 사랑 안에서의 용납을 주 안에서 함께 이뤄가야만 가능합니다.
올해 이렇게 함께 성장하는 모두가 되시길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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