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서

하나님의 전신갑주 2 (에베소서6장13절-17절)

남수연 2021. 1. 28. 22:01

www.youtube.com/watch?v=JarOMUQaHBI&t=2303s

지난 주 믿음의 싸움에서 잘 이기고 오셨습니까?

어떤 구청장 후보자가 이런 말을 했더군요.

‘이겨 본 사람이 이긴다’

믿음의 싸움도 이겨 본 사람이 이깁니다.

회피하고, 패배하지 말고,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고 이겨서, 소중한 삶을 지키라고 오늘 다시 우리에게 말씀을 주십니다.

지난번에 진리의 허리띠와 의의 호심경과 평안의 복음의 신발을 착용해야 할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얼른 나머지 장비를 살펴보고 완전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어야겠습니다.

2주가 지났기 때문에 앞서 보았던 세 가지를 간단히 기억해 보겠습니다.

진리의 허리띠는 하나님의 진리와 우리의 진실로 무장하는 것입니다.

의의 호심경은 예수님의 대속으로 의롭게 된 성도로서 주님을 따르는 바른 행실로 마음의 담대함을 지켜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평안의 복음의 신을 신는다는 것은 복음을 믿고 평안의 길을 가는 우리가 누군가에게 이 평안의 복음을 전하는 전령으로 사는 것입니다.

이걸 잊지 마시고 자꾸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 나머지 세 가지를 살펴보고 하나님의 전신갑주 여섯가지를 꼭 기억하고 잘 착용하고 있는지 자주 점검하시길 바랍니다.

이것으로 싸워 이겨야 합니다.

 

4) 전신갑주 네 번째는 믿음의 방패입니다.

16절,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하고

이 말씀에서 먼저 알 것은 악한 자는 모든 종류의 불화살을 쏘아댄다는 것입니다.

불화살이란 단어는 마귀의 증오와 공격성이 얼마나 지독한지를 보여줍니다.

다 불태워버리겠다는 것이죠.

마귀는 우리를 상상 이상으로 증오합니다.

우리를 볼 때 마귀가 어떻겠습니까?

하나님께 범죄 한 주제에, 하나님이 자신의 몸으로 형벌을 다 막아주시고, 자기들로서는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천국의 상속자가 되었잖아요?

그 시기와 질투가 불화살로 날라 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분명히 하나님의 자녀이면 마귀의 가장 미워하는 상대라는 걸 잊으면 안됩니다.

사탄의 불화살은 우리를 죽이자고 증오하며 쏘는 강력한 공격무기입니다.

이 불화살에 맞으면 상상 이상의 타격이 옵니다.

사탄이 쏘아대는 불화살은 전방위적으로 날라 오고, 깊게 파고들고, 치명적인 상처를 입힙니다.

그 종류나 방식도 가리질 않습니다.

유혹, 분노, 두려움, 핍박, 시련, 좌절, 궁핍, 질병, 정욕, 탐욕, 시기, 심지어 배교까지, 사람을 파멸시킬 수 있는 모든 것입니다.

마귀는 사람의 본성과 습관적인 죄에 불을 붙이기도 하지만, 평소 믿음이나 인격과 완전히 다른 생각을 쏘아 넣기도 합니다.

갑자기 이상한 상상력을 머리속에 그려주기도 합니다.

이런 일이 일어나면 정말 곤혹스럽죠.

또 의심이나 터무니없는 생각이 계속 떠오르게도 합니다.

어떤 분은 새벽기도를 잘 다녔는데, 어느 날 갑자기 자기가 기도하는 줄 모르고 사찰집사님이 문을 잠그고 가시는 상상이 계속되더랍니다.

한 일주일 그 생각 때문에 기도에 집중하지 못하다 결국 새벽기도를 포기했다고 합니다.

악한자의 불화살은 다른 사람의 언행을 통해서 날아오기도 합니다.

시편 64장3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죠.

저희가 칼같이 자기 혀를 연마하며 화살같이 독한 말로 겨누고

살다보면 이런 불화살을 맞을 때가 있잖아요?

별로 잘못한 것도 없는데 지독히 나를 미워하는 사람이 생긴다는 거예요.

그게 안 믿는 사람들만 그러는 게 아닙니다.

바울사도 마음을 낙담시키고, 근심을 주고 그토록 괴롭혔던 것은 불신자 보다 고린도교회 교인들이었잖아요?

마귀는 우리가 쎈 척하지만 어떤 말 한마디면 넘어갈지 다 아는 것 같습니다.안타깝게도 이런 마귀의 불화살들이 우리를 향해 날라 오는 것은 기정사실이라는 것입니다.

다만 이 사탄의 불화살을 막아낼 수 있는 무기를 하나님이 주셨다는 거예요.

그게 바로 믿음의 방패입니다.

이 마귀의 불화살을 막아낼 수 있는 것은 믿음의 방패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믿음의 방패가 무엇일까요?

믿음의 방패는 한마디로 말하자면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믿음 안에서 내게 행하시는 하나님의 모든 선하심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하나님께 구할 때 반드시 도우신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이 믿음을 발휘하는 것이 믿음의 방패를 드는 것입니다.

이것은 상징적인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이것은 마귀의 불화살이다 싶을 때 물리치려는 마음으로 믿음을 딱 앞세우면 즉시 꺼지는 불들이 많습니다.

본문 말씀에 ‘불화살을 소멸하라’라는 말이 ‘즉시 꺼버리라’는 뜻입니다.

마귀의 불은 크게 타오르기 전에 즉시 꺼야한다는 것입니다.

갑자기 몰려오는 두려움이나 걱정 경험해 보셨을 것입니다.

이때도 믿음으로 하나님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순식간에 평안이 오는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작년에 누구보다 큰 시련을 겪으신 김광해권사님과 은혜자매가 잘 아실 것입니다.

마귀는 내가 고난으로 힘들 때를 놓치지 않고 불화살을 쏘아 근심과 두려움의 불이 타오르게 합니다.

내가 그 불을 어떻게 끄겠습니까?

그런 마음이 들 때마다 하나님이 반드시 나와 함께 하신다는 믿음의 방패를 들고 이겨낸 것입니다.

믿음의 방패를 들기만 하면 반드시 이긴다는 것을 오늘 보장하십니다.

그러려면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믿음과 신뢰가 깊을수록 유리한 건 당연한 것이죠.

하나님을 알기 위한 시간이 많은 것은 믿음이 강해지는 것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세상을 향하는 창문은 넓게 열어 놓고, 하나님을 향하는 창문은 아주 조그맣게 열어 놓고, 그나마 거의 바라보지도 않는다면 어떻겠어요?

불화살이 날아올 때 평소 하나님께 대한 믿음과 신뢰가 있어야 발휘가 되겠죠.

전신갑주는 입고 앉아 있으면 저절로 움직여지는 어벤져스의 의상이 아닙니다.

각 장비들을 최적화 되게 관리하고 사용할 수 있도록 훈련하며 싸워야 하는 것입니다.

말할 것도 없이 예배와 기도와 말씀과 순종과 교제 같은 믿음의 방편을 소홀히 하지 말고 열심히 단련해야 하는 것이죠.

마귀의 불화살이 우리를 증오하며 사방에서 날아오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성도들에게는 하나님이 허용하시지 않으면 단 한 개의 화살도 마귀는 날리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런 공격에 위기감을 느낄 때 하나님을 더 의지하고 연합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겁 없이 혼자 살아내려고 하던 것을 멈추게 하시려는 것이죠.

마귀를 물리치는 것 자체가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모든 고난이 그렇듯이 그걸 통해 하나님을 더욱 믿고 신뢰하게 되는 것이 목적인 것입니다.

다만 한 가지, 우리가 속지 말아야 할 것은 마귀의 불화살은 실제보다 훨씬 과장되게 위협한다는 것입니다.

내 신체의 약한 부분을 건드리고, 상처 입은 자존심을 휘젓고, 이 답답한 상황이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그런 절망감에 당장 죽을 것 같고 당장 큰일이 날 것 같이 부채질하는 것이죠.

기울어진 운동장이란 말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불공정한 경쟁 환경이라는 부정적인 말이긴 하지만 우리의 영적전쟁은 우리 편으로 기울어진 운동장입니다.

대세는 하나님이 정해놓으신 곳으로 기우는 것입니다.

마귀가 이런저런 상황을 나쁘게 만지작거리지만 대세를 바꾸지는 못합니다.

마귀가 겁을 줄 때 굳게 굳게 하나님을 믿으십시오.

믿음의 방패를 드는 순간 대부분을 이길 수 있습니다.

긴 시험이라 해도 똑같습니다.

마음이 불안과 두려움으로 불타려고 할 때마다 믿음으로 이 상황을 이끌고 가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마귀의 불을 끄고 또 끄다 보면 때가 되면 걱정이란 잔불도 남아있지 않게 환경이 정리된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나를 믿는 것보다, 다른 누구를 믿는 것보다, 다른 어떤 방법을 의지하는 것보다 하나님을 믿는 게 가장 완전한 승리를 가져다 줍니다.

 

5) 다섯 번째 전신갑주는 구원의 투구입니다.

17절,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이 땅을 사는 동안 모든 전투에서 성도들은 하나님의 구원을 확신하는 투구를 써야 합니다.

이 구원의 투구는 절대로 흔들려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의 대속으로 얻은 이 구원이 확실치 않으면 마귀와의 영적전투가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내가 구원받지 못한다면 헌신하고 섬긴 모든 것이 다 무슨 소용 있습니까?

진짜 그 날에 ‘화로다 나여, 나는 망했도다’ 비명을 지르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요즘 싱어게인이란 오디션 프로그램을 재미있게 보고 있습니다.

거기 이재철 목사님 아들과 또 이무진이라는 어린 대학생이 나오는데 그 노래를 듣는 게 아주 즐겁습니다.

거기 나온 사람들을 보니 왜 그렇게 다들 노래를 잘하는지요.

그런데 출연자 중 한 청년이 노래하기 전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하더군요.

‘늘 그렇듯이 무대를 못할 자신은 없습니다’

얼마나 연습을 많이 했고, 항상 자신감에 차있어 그런 말을 할 수 있는지 참 대단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노래를 부르고 난 뒤, 판정단 심사 결과 탈락이었습니다.

한번도 탈락을 생각해 보지 못했던 그 가수에게 얼마나 큰 충격이고 허탈하겠습니까?

제가 그걸 보며 엉뚱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생을 마치고 하나님 앞에 갔을 때 확신했던 구원에서 탈락될까, 그 때 그 심정이 어떨까 두려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예수님이 비유에서 말씀하셨잖아요?

‘주여, 아니 왜 내가? 내가 얼마나 주님을 열심히 따랐는데요?’우리가 예수님을 믿어서 구원을 받지 못한다면 뭐하러 나를 쳐서 복종시키며 주님을 따르겠습니까?

그러니까 우리의 성숙이 좀 더디다 해도, 구원에 있어서만은 정말 확고한 보장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걸어서 미국 국경을 넘으려던 온두라스 이민 여성이 미국 땅을 바로 앞 둔 국경 다리 위에서 출산했다는 기사를 읽고 가슴이 턱 막히는 것 같았습니다.

지금 남미의 온두라스 난민들은 미국 국경을 넘기 위해 4천킬로나 되는 말도 안되는 거리를 대행렬을 이루고 물밀 듯이 이동 중이라고 합니다.

이번에 바이든 대통령의 관대한 이민정책 때문에 점점 더 많은 이민 행렬이 가세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여성이 멕시코와 미국 텍사스주를 잇는 다리를 몰래 건너려다 진통이 심해져 그만 바닥에 주저앉고 만 것입니다.

바로 코앞이 미국땅인데요.

여성은 행인들의 도움으로 다리 위 멕시코 땅에서 아기를 출산했고 구급차에 의해 멕시코 병원으로 후송되었습니다.

아이에겐 그렇게 원하던 미국 시민권이 아닌 멕시코 시민권이 주어지게 된 것이죠.

아이에게 조금이라도 나은 미래가 보장 된 미국시민권을 주기 위해 그 험하고 먼 길을 걸어왔는데, 여성은 아이를 낳고 통곡을 했을 것 같습니다.

우리에게 확실한 천국시민권이 있습니까?

확실한 구원의 투구를 쓰고 계십니까?

저는 오래 교회를 다닌 사람들이라면 어느 정도 구원받을 신앙을 가졌는지 가늠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몇 가지 척도가 될 만한 기준을 충분히 생각할 수 있습니다.

먼저는 구원을 위한 성경의 진리를 잘 이해하고 분명하게 믿고 있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신지 아직 잘 모르겠다, 예수님이 나를 위해 죽으셨다는 게 잘 이해가 안된다.

그럼 아직 아닌 것입니다.

또 하나는 하나님 앞에서 항상 내가 죽을 죄인이라는 죄인식입니다.

남의 죄와 비교할 것 없이 하나님 앞에서 나는 늘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고 싶은 그런 죄인인거예요.

예수님의 피로 의롭게 된 것은 사실이지만 내 안의 죄의 본성으로 인해 하나님 앞에 항상 죄인이라는 자각이 사라지지 않는 것이죠.

다음 시금석은 이 세상의 삶과 다음 세상의 삶에 대한 정확한 저울질이 되었냐는 것입니다.

여기보다 저기가 더 중요하고 더 값어치가 있다는 게 확실하냐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칭찬이 중요하냐 하나님께 받을 칭찬이 중요하냐입니다.

이 땅의 부요함이 중요하냐 천국의 부요함이 중요하냐입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말씀드리자면 내 주인이 아직도 나인지 아니면 내 주인이 예수님이시고, 하나님이신지 자기에게 솔직히 물어보는 것입니다.

내가 50이고 예수님이 50이면 그것은 아닌 것입니다.

성도들의 갈등은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지 못하는 자신과의 싸움이지 하나님과 주도권을 다투는 헤게모니 갈등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확실히 나의 주인이십니까?

이런 것들은 신앙생활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들에겐 아직 희미할 수 있지만 오래 된 신자들에겐 아주 신중하게 짚어보아야 할 문제입니다.

이런 잣대로 볼 때 모든 항목에 확실히 예스라고 답할 수 없다면 진짜 내 구원에 대해 심각하게 고려하고 이 문제를 풀어야 합니다.

가장 좋은 것은 개인적으로 신앙상담을 하는 것입니다.

담임목사인 저와 이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묻고 상담하신다면 함께 기도하며 해결해 갈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성도님들의 믿음과 구원을 위해서 있는 사람이잖아요?

이 구원의 투구가 있는 사람들을 하나님은 현재의 삶에서도 구원하십니다.

현재 세상에서의 구원은 무엇일까요?

망할 것 같은, 죽을 것 같은, 실패할 것 같은 여러 가지 상황들에서 벗어나는 것이죠.

그런 상황 속에서 우리는 기도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구원됩니다.

실제로 하나님은 우리가 완전한 구원에 이르는 그날까지 모든 상황에서 우리를 구원해 주시잖아요?

때로 우리가 소망하고 기대했던 것들이 안 될 수도 있지만 그것으로 끝이 아니잖아요?

하나님은 다른 길을 마련하시고,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하나님은 내 생이 지속되는 한 구원하시고 또 구원하시고, 또 구원하십니다.

그러나 혹여 암에 걸려 죽을 수 있고, 가정이 깨질 수 있고, 실업자가 된다 해도 그것조차 구원의 소망의 투구로 이길 수가 있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구원의 투구는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에도 이미 얻은 완전한 구원의 소망 중에 기뻐할 수 있는 능력이고 힘입니다.

그렇기에 바울사도는 구원의 소망의 투구라고 말한 것입니다.

이 구원의 투구를 쓰고 영원한 소망을 알고 현재의 삶에서도 구원을 누리는 모두가 되시길 축원드립니다.

 

6) 여섯 번째는 성령의 검인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마귀와의 싸움에서 이기려면 성령의 검인 말씀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마귀와의 육탄전에서 지혜롭게 싸울 수가 있습니다.

마귀가 갑작스런 환경의 변화나 다른 사람들의 입을 통해 불화살을 쏠 때 믿음의 방패를 들고 막아내지만 그것으로 안 될 때가 있습니다.

그때 다른 한 손으론 성령의 검인 말씀을 들고 물리쳐야 합니다.

누군가의 눈빛이나 말로 불화살을 쏘는 순간 우리 감정은 불에 덴 것 같죠.

우리 마음판 안에서 이미 벌어진 전쟁을 승리하기 위해서는 말씀의 검을 사용해야 합니다.

이미 미움이 불타고 있다면, 이미 근심이 나를 완전히 사로잡았다면, 무기력과 좌절감에 무릎을 꿇을 것 같다면 우리가 가진 말씀의 검을 꺼내야 합니다.

돌아서서 그를 계속 미워한들 마귀와 그 사람 누구도 나처럼 괴로워하지 않습니다.

나만 미움과 질투와 원망으로 괴로워하는 것이고 이차 피해는 고스란히 내 몫이 되는 것이죠.

그럴 때 사용할 수 있는 말씀을 성령께서 반드시 우리 안에 떠오르게 해 주실 것입니다.

더 겸손하라든지, 아무 염려하지 말고 감사함으로 기도하라든지, 죄를 회개하라든지.

그때 상황과 감정보다 말씀을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말씀의 검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것만이 상황을 종료시킵니다.

우리는 소심하게나마 복음의 빛이 되려고 사람을 대할 때 나를 낮추고 섬기는 착한 사람들이 아닙니까?

그러나 돌아오는 것은 그걸 당연히 여기는 무례함과 오만과 이유 없는 적대감일 경우가 많습니다.

그럴 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얼마나 우리를 통 크게 하는지 모릅니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이 말씀이 사람을 가려서 전도하라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나는 그래도 이 복된 신앙을 좀 전해주고 싶어 선의로 대했지만 모욕으로 돌아왔을 때, 그 때 예수님께서 시원하게 우리를 치료하시는 말씀이더군요.

성령께서는 실망과 의혹과 불안과 두려움의 불화살에 정확한 말씀을 사용해서 이기게 하십니다.

처음에 제가 목회를 하며 신학공부를 하는 데, 과연 내가 할 일을 하고 있는가 의혹에 사로잡힐 때가 있었습니다.

한 날도 그런 낙담 가운데 계속 하나님이 나를 여기에 보내신 게 맞으신지 머리속에 이 질문이 맴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출애굽기 3장에서 모세를 부르시는 장면이 불현 듯 떠오르더군요.

모세가 그러잖아요?

내가 누구기에 이 일을 하겠습니까? 증거가 무엇이냐는 것이죠.

그 때 하나님이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12절,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

가보면 안다는 말씀이잖아요?

제가 이 말씀의 검으로 난관들을 뚫고 여기까지 왔습니다.

지금도 가고 있습니다.

지난 한 주도 잘 생각해 보면 매순간 말씀의 검으로 싸워 다들 이기셨을거예요.

마귀의 어떤 공격이든지 막아 낼 수 있는 말씀의 검을 이미 성경에 적어서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단지 경전으로 읽지 말고, 잘 배우고 익혀서 모든 순간에 성령께서 떠올려 주시도록 숙지해야 합니다.

매일 성경 묵상을 통해 성경 본문 말씀을 꼼꼼하게 읽고 기억하도록 노력하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이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아마도 바울사도가 이것을 잘 기억나게 하기 위해서 신체 부위에 하나씩 연상시켜 설명해 준 것 같습니다.

허리를 만지면 진리, 진실이 생각나도록, 가슴에 손을 대면 성도의 거룩한 행실을, 발을 내려다보면 평안의 복음을, 불화살이 쏟아질 때 믿음의 방패를, 머리를 만지면 구원의 투구를, 손에는 성령의 검을.

너무나 쉽게 기억이 나시죠?

전신갑주를 입으라는 것은 전투복을 입고 그냥 쉬라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고 훈련하며 실전을 치러야 합니다.

훈련이 안된 병사는 전쟁터에서 매일 들것에 실려 와 야전병원에 누워만 있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늘 연약하다는 합리화 뒤에 숨으면 안됩니다.

그게 무슨 방패가 되겠어요?

분명한 것은 우리는 이 세상 주관자, 악의 영들의 공격에 노출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뻥 뚫린 세상에서, 그들의 눈에서 우리를 엄폐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 싸움에서 능히 물리치고 설 수 있는 전신갑주를 주셨습니다.

입고 훈련해야 넉넉히 이길 수 있습니다.

이 싸움에서 지면 나를 제어하기 힘들게 악의 영향을 받을 것입니다.

평온과 기쁨과 만족보다 분란과 분노와 생활의 덫에 빠져 허우적대며 삶을 허비하며 살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어벤져스는 되지 못할지라도 적어도 나와 내 가족은 지킬 수 있는 군사는 되어야 합니다.

느헤미야가 성벽을 중수하며 한 손으로 칼을 들고 싸워야 하는 성도들에게 말했죠.

너희는 저희를 두려워 말고 지극히 크시고 두려우신 주를 기억하고 너희 형제와 자녀와 아내와 집을 위하여 싸우라

바라기는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고 우리 교회에서 함께 훈련받으며 믿음의 용사들이 다 되시길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