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youtube.com/watch?v=dNazAJOVq3Y
지난번에 살펴 본 1장에서 요나는 니느웨에 심판을 전하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이 명령에 순종할 수 없었던 요나는 다시스로 도망가고 하나님은 큰 풍랑을 보내셔서 배가 파선되기 직전까지 몰고 가십니다.
결국 풍랑을 일으킨 장본인으로 발각된 요나는 바다에 던져집니다.
그리고 기다리던 큰 물고기가 요나를 삼켜버리죠.
깜깜한 물고기의 뱃속에서 수초에 휘감기며 생사를 넘나드는 삼일을 보내고 요나가 기도를 하자 물고기가 요나를 토해 냅니다.
요나선지자의 경험은 정말 신비롭고 묘하죠.
이런 이야기는 한번 들으면 잊혀질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이야기 안에 강력하고 중요한 메시지를 심어 놓으셨다는 뜻입니다.
이런 초자연적인 말씀을 대할 때는 우화처럼 그냥 지나면 안됩니다.
특별한 에피소드의 본문은 전체의 의미를 잘 살펴보고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요나서를 보면 하나님이 요나선지자를 거칠게 다루고 계신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단지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했기 때문에 풍파를 일으키고 결국 바다에 던져지게 하셨습니다.
요나처럼 우리를 그렇게 대하셨다면 여기 멀쩡한 사람 누가 있을까요?
거칠게 대하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우리 하나님은 그동안 인내하며 설득하셨잖아요?
모세에게도, 예레미야에게도, 사명을 주실 때 변론하고 설득하십니다.
하나님이 일군을 부르실 때 이렇게 강제성을 띄며 몰고 가실 때는 없습니다.
주님을 위한 십자가는 본래 자원하는 사람이 지는 것이잖아요?
피해서 도망치는 사람에게 억지로 지워주는 십자가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요나의 특별한 경험을 통해 우리에게 전달하시려는 분명한 메시지가 있는 것이죠.
하나님의 의도는 두 가지를 찾을 수 있습니다.
뒷장 말씀까지 보면 잘 알 수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 입장에서 죄인에 대한 구원의 진심과 절실함입니다.
요나선지자가 가서 회개와 심판과 구원을 외쳐줘야만 니느웨 죄인들이 회개하고 구원을 받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구원받길 원하지 않죠.
그러나 영벌이 어떤 것인지 아시는 하나님 편에선 절실하실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철없는 우리 아이들이 자기 미래가 어찌될지도 모르고 방황할 때 타들어가는 건 우리 부모들 속입니다.
하나님의 속에 우리의 구원을 위한 얼마나 큰 열정과 격정이 있는지 보여주시는 게 요나서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자식을 사랑하기에 때로 매도 들고, 나 자신도 수없이 때려가며 키우는 게 부모 마음이잖아요?
그런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 주님의 입이 되고 손발이 되는 것이 요나의 사명이고 우리의 사명임을 강력히 이해시키시려는 것이죠.
또 하나는 예수님의 고난과 부활을 요나의 사건에다 담아 놓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 주님의 부활을 요나의 표적이라고 하셨잖아요?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절박하심이 요나를 죽음과 방불한 물고기 뱃속까지 거칠게 몰고 가신 것처럼, 예수님은 정말 거칠게 내몰려 험악한 십자가에 못 박히셔야 했습니다.
요나가 사흘간을 꼼짝 못하고 문빗장에 갇혀있듯이, 예수님께서 사흘을 무덤에 꼼짝 않고 계셔야 했습니다.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나와 니느웨의 죄인들이 하나님께 회개했듯이, 예수님이 부활하고 성령이 오신 뒤 죄인들이 회개하고 구원을 받게 되죠.
구약 요나의 기적적 이야기는 신약시대 일어날 예수님의 부활을 멀리서 비추고 있는 탐조등 같은 것입니다.
그렇기에 요나의 이야기는 누구에게나 적용되진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명을 피했더니 건강 잃고, 재산 잃고, 가족까지 다 잃게 하시고 빈손이 되어 다시 부르셨다는 간증은 좀 주관적인 생각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요나 자신의 구원에 있어서 이 사건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 경험을 통해 요나가 비로소 하나님을 알고 구원을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요나서는 어찌 보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던 탕자의 비유와 흡사합니다.
하나님은 집 나간 탕자 작은 아들 니느웨도 구원하셔야 했지만 집에 있던 형 탕자 요나도 구원하셔야 했던 것이죠.
하기사 하나님께는 교회 안에 있는 탕자와 교회 밖에 있는 탕자 자식이 늘 있으시죠.
이런 큰 그림을 알면 좀 더 뚜렷하게 요나서를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오늘은 탕자의 비유에서 집에 있던 큰아들과 같은 요나의 구원의 측면에 포커스를 맞춰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1. 하나님을 회피한 요나가 당면한 것은 죽음과 같은 물고기 뱃속이었습니다.
‘차라리 죽을지언정’을 외치며 자살하듯 바다로 뛰어들자 곧 지옥 같은 물고기 뱃속에 들어갔습니다.
그곳은 정말 아무 희망도 없고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곳이었습니다.
본문에서 요나가 경험한 죽음 같은 상황을 생생하게 그려내죠.
패소공포증이 약간 있는 저는 이 좁고 깜깜하고 찝찝한 물고기 뱃속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답답해집니다.
우리는 요나가 왜 그렇게 하나님의 명령에 질색했고 결국 물속 구덩이에 던져졌는지를 믿음의 눈으로 판단해 보아야 합니다.
요나는 지금까지 일구어 놓은 자기 세계가 흔들리자 거세게 하나님께 저항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나선지자는 번영의 시대에 활동하며 번영의 혜택을 누린 사람입니다.
역대 북이스라엘왕 중 가장 강성했던 여로보암2세 시대에 그 번영을 예언했던 선지자가 요나입니다.
민족공동체 안에서의 인정받는 입지, 성공한 선지자 캐릭터였습니다.
김동현장로님이 올려주신 글 중에서 ‘비대해진 자아’라는 말이 바로 정확히 요나이고 우리 안에 있는 요나입니다.
비대해진 자아는 자기가 주체가 되려고 하죠.
그런데 니느웨 사역은 요나의 모든 것을 한순간에 무너뜨릴 것입니다.
원수나라를 살리고 온 선지자는 이제 민족의 돌팔매질을 당하고 높이 올라갔던 위신은 바닥으로 추락하고 말 것입니다.
사람들의 기대를 저버리는 것, 더 이상 인정받지 못하는 것, 경멸의 눈총을 받고 안정 된 삶을 뺏기는 것, 생각만 해도 끔찍하죠.
요나는 자기가 얻은 것을 지켜주지 않으시는 하나님께 분노합니다.
팀 켈러는 요나를 일컬어 방탕한 선지자라고 표현했습니다.
하나님께는 니느웨의 악독한 주민들 뿐 아니라 이 방탕한 선지자도 구원하셔야 할 죄인이었습니다.
3장이 니느웨 구하기라면 2장은 요나 구하기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선물을 충분히 누리며 하나님을 섬길 때는 요나처럼 하나님을 섬기는 데 큰 갈등이 없습니다.
나를 잘 대우해 주시는 하나님께 고마움을 느끼고 나름 헌신도 하고 봉사도 합니다.
그러나 내가 누리던 것들에 손을 대시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나보다 탕자를 더 잘 대우해 주고, 내게는 원하는 것을 주지 않으신다고 생각하면, 큰아들 탕자처럼 내게 염소새끼 한 마리의 호사도 못 누리게 하셨다고 아버지께 분노하게 되는 것이죠.
내가 누리던 것을 저 니느웨의 악질들에게 주고 희생하라고 하신다 생각하면 어떤 마음이 들까요?
‘나를 사랑한다고 하셔놓고 왜 내게 이런 고통을 주시는 데?’
‘저 사람은 분명히 악행을 저질렀는데 왜 형통하게 하시고 나는 이렇게 힘든 데 왜 안 도와주셔?’이러면서 우리 안의 요나가 실체를 드러냅니다.
내가 좋아한 것은 예수님이 아니라 믿음 안에서 보장 된 천국과 현세의 축복과 안정감, 일의 성취감이었던 것이죠.
요나는 그것을 내려놓지 못해 결국 끌어안은 채 바다로 뛰어 든 것입니다.
요나가 정신을 차려보니 그의 앞에는 하나님도 없고, 그렇게 움켜쥐었던 세상의 영화도 없고, 공허하고 어둡고 두려운 무덤 속이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버리고 나 자신, 내 것을 선택한 죄인들이 받을 심판을 상징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우리의 믿음의 장치 안에는 얻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는 자는 얻으리라는 예수님의 수칙이 자연의 법칙처럼 작동하고 있습니다.
비대해진 자아를 꾸며 주던 재물, 학식, 인기, 명예, 평판이 우상이 되어 집착한다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그것과 함께 망하는 것이죠.
우리도 자주 요나를 묵상할 필요가 있습니다.
‘너 정말 하나님 자신을 좋아하니, 하나님이 주신 선물을 좋아하니?’
우리가 좋아하는 것이 하나님 자신이 아니라면 어떻게 될까요?
선물을 뺏기거나, 선물에 흥미가 없어지거나, 이젠 하나님이 아니어도 다른 옵션들이 너무 많아졌다면 언제든 하나님께 등을 돌리게 됩니다.
통속적으로 흔한 배반이죠.
요나는 두려운 물고기 뱃속에서 들어가서야 하나님을 버린다는 게 무엇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3절, 큰 물이 나를 둘렀고 주의 파도와 큰 물결이 내 위에 넘쳤나이다
5절, 물이 나를 영혼까지 둘렀사오며 깊음이 나를 에워싸고 바다 풀이 내 머리를 감쌌나이다
6절, 내가 산의 뿌리까지 내려갔사오며 땅이 그 빗장으로 나를 오래도록 막았사오나
이것이 하나님의 빛에서 떨어진 요나가 겪은 현실입니다.
그때가 되어서야 요나는 하나님의 면전에서 사는 것이 얼마나 복된 것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4절, 내가 말하기를 내가 주의 목전에서 쫒겨났을지라도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다 하였나이다
스올의 뱃속에 들어가보니 주님 앞에서 출입하던 때가 얼마나 복이었는지를 깨닫게 되는 것이죠.
선택이 하나님 밖에 없어야 우리는 그제사 하나님을 찾는 게 고질적인 병폐입니다.
걱정거리가 있을 때 왜 하나님을 먼저 찾지 않습니까?아직 세상적으로 써 볼만한 방법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해초가 몸을 휘감고, 냄새나는 위액이 섞인 물 속 감옥에서 요나는 다른 옵션이 없었습니다.
우리가 모든 방법을 써가면서도 정작 하나님을 찾지 않기에 때로 모든 선택을 다 없애신 물고기 뱃속 같은 상황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2. 요나가 드디어 하나님의 도움을 요청하며 기도를 시작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요나의 기도가 반복해서 나오죠.
1절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여, 2절 불러 아뢰었더니, 부르짖었더니 4절, 다시 성전을 바라보겠다, 7절 내가 여호와를 생각했더니, 내 기도가 주께 이르렀사오며 주의 성전에 미치고.
기도하면 삽니다.
어떤 철학자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를 죽이지 못하는 것은 우리를 강하게 만든다’
역설이죠.
우리를 죽이지 못할 만큼의 독은 오히려 강한 치료제가 됩니다.
우리에게 놓여 진 현실은 아무리 혹독해도 결단코 우리를 죽이지 못합니다.
죽일 듯이 달려오는 것들은 오히려 우리를 강하게 만들 것입니다.
단 우리가 믿음 안에서 기도할 때 하나님이 그렇게 되도록 도와주십니다.
요나의 기도에 하나님은 즉시 응답하십니다.
2절, 내가 받는 고난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더니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더니 주께서 내 음성을 들으셨나이다
자녀 된 우리의 변치 않는 지위는 언제든 아버지께 나가면 우리의 기도를 들으신다는 것입니다.
스올의 뱃속과 같이 아무 것도 내 힘으로 해 나갈 가망성이 없을 때 할 수 있는 것이 기도입니다.
기도는 모든 상황에서 가장 신뢰할 방편이지만 안타깝게도 사람들은 기도가 많은 방편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시시때때로 기도하지만 정기적인 기도시간을 지속적으로 가져야 합니다.
기도가 그렇게 일과 속에 단단히 자리잡으면 반드시 기도의 유익과 능력을 맛보게 됩니다.
정해진 기도시간을 갖는 게 정말 중요합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믿음에만 실패하는 게 아니라 일반생활을 실패합니다.
사소한 대화, 업무처리, 감정조절, 대인관계, 이런데서 구멍이 납니다.
더구나 물고기 뱃속 같은 상황이라면 당연히 기도해야죠.
요나가 절망 중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청하지 않고 있었다면 삼일이 아니라 한 달 동안이라도 물고기 뱃속에 머물러야 했을 것입니다.
기도가 없으면 올라올 수 없습니다.
요나가 하나님을 향해 간절히 기도하자 하나님은 물고기에게 말씀하십니다.
10절, 여호와께서 그 물고기에게 말씀하시매 요나를 육지에 토하니라
사람이 어떻게 물고기의 뱃속에서 삼일이나 생존할 수 있냐고 묻는다면 창조주 하나님을 아는 우리는 웃습니다.
또 그것보다 더 큰 기적을 우리는 경험했잖아요?
진짜 나를 송두리째 삼켜버릴 수도 있는 지옥 같은 상황에서 번번이 불사조처럼 살아나온 우리들 아닌가요?
이게 더 큰 기적이잖아요?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저는 약간 폐소공포증이 있는데요.
최수종씨도 야망의 전설이라는 드라마를 찍을 때 차 트렁크에 갇혔던 일로 폐소공포증이 생겼다고 하더군요.
요나처럼 아무 것도 안 보이는 깜깜한 밀폐 된 장소에 갇혀 있다고 생각하면 정말 숨이 막힐 것 같습니다.
제가 보고 싶지 않았던 한국영화가 ‘터널’이라는 영화였습니다.
앞뒤가 꽉 막힌 붕괴 된 터널 안에서 전개되는 재난 영화잖아요?
생각대로 보는 내내 가슴이 답답했습니다.
그렇게 어딘가에 갇히게 된다면 폐소공포증인 저는 어떻게 하겠어요?
그런데 감사하게도 깜깜하고 좁은 막힌 공간에서도 하나님께 기도를 하면 그 증세가 전혀 느껴지지 않습니다.
아주 좁은 공간이어도 하나님을 향해 내 영이 교통하면 오히려 공간이 한없이 넓고 높게 뚫리고 분명히 어둠인데도 전혀 암흑이 느껴지지 않는 신비로운 빛을 느낍니다.
그래서 혹시 어디 갇혔다 해도 염려하지 않습니다.
우리 환경이나 일의 상황이 앞뒤가 꽉 막혀 앞이 보이지 않을 때도 똑같습니다.
하나님을 향해서는 언제든 기도의 길이 환하게 열려있습니다.
기도할 때 그 길을 통해 꽉 막힌 폐소공포증을 이겨낼 분명한 힘을 주십니다.
기도할 때 하나님이 명령하셔서 옥죄는 환경과 악의 세력은 우리를 토해내게 될 것을 꼭 기억하시고 함께 기도합시다.
3. 요나의 기도는 환경과 시련을 이기는 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요나가 놀라운 기도를 하죠.
9절, 나는 감사하는 목소리로 주께 제사를 드리며 나의 서원을 주께 갚겠나이다 구원은 여호와께 속하였나이다 하니라
처음엔 죽음이 두려워 살려달라고 기도했을 것입니다.
죽음과 하나님을 생각하자 육체의 구원이 아니라 영혼의 구원의 절박함을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기도의 순간 성령께서 임하시면 이런 일이 일어납니다.
요나는 선택된 민족의 선택된 종으로 구원은 마땅하다 여겼습니다.
죽음 같은 상황, 자신의 씻기지 않는 더러운 실체에 마주하기 까지 사람들은 꽤 괜찮은 옷을 입고 있다고 생각하죠.
하나님의 눈이 내게 임하셔서 나를 폐부까지 스캔하게 하시면 그제야 우리는 내가 가망이 없는 죄인임을 알게 됩니다.
살려면 누가 내 대신 죽어주는 수밖에 없음을 알게 됩니다.
그게 대개는 요나와 같은 상황 속에서입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성도들은 괴로워서 울다 울다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바닷속 무덤에서 생존을 위해 부르짖다 요나도 하나님을 만납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순간 입에서 나오는 탄식이 무엇입니까?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그리고 하나님이 명하셨던 성전의 제사를 떠올리는 것입니다.
선택받은 민족으로 당연히 얻는 구원이 아니라 그것은 성전에서 드리는 속죄의 제사에 의해 유지되고 있었던 것이죠.
이스라엘은 예수님의 구속을 미리 땡겨서 담보하는 속죄의 제사로 하나님과 언약을 맺고 구원을 보장받은 것입니다.
요나는 고난 중에 기도하다 성령이 임하시자 그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성령께서 죄를 깨우쳐주십니다.
죄를 인식할 때 비로소 예수님의 속죄로 연결이 되는 것입니다.
그 대속의 은혜를 깨달은 사람들은 저절로 하나님께 서원을 하게 됩니다.
요나가 자기의 서원을 갚겠다고 하죠.
9절, 나는 감사하는 목소리로 주께 제사를 드리며 나의 서원을 주께 갚겠나이다 구원은 여호와께 속하였나이다 하니라
지옥의 심판을 벗어나게 된 하나님의 구원을 명확히 깨닫게 되면 모든 성도들은 하나님 앞에 무엇이든 서원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사랑하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언약하고 서원합니다.
아기를 낳아 품에 안은 엄마는 속으로 서원하죠.
‘내가 평생 너를 사랑하고 내 모든 것을 바쳐서 키울거야’
하나님도 우리에게 서원하시잖아요?
내가 영원히 너와 함께 하리라
성도들도 예수님의 십자가의 희생, 사랑, 속죄를 알게 되면 서원합니다.
크던 작던 내가 주님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을 하나님 앞에 정하고 누가 뭐라 하지도 않는데 평생 그 서원을 행하며 삽니다.
이게 참 신비한 것이죠.
구원받은 자녀들에게 하나님이 맡겨주신 사명, 그 소원을 각자에게 심어주시고 그 소원을 따라 평생 살아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지난 주 엘리베이터에서 4층 감리교선교본부에서 근무하던 선교사님을 만났습니다.
가끔 주차장에서 차 빼주면서 인사를 주고받던 분입니다.
그런데 곧 인도네시아 선교사로 떠난다는 거예요.
이전엔 중국에서 선교활동을 하다 잠시 귀국해서 재교육을 받고 다시 선교지로 나가는 것이죠.
요즘 인도네시아 하루 확진자가 인도보다 많은 코로나 진앙지잖아요?
제가 걱정이 돼서 백신은 맞았냐니까 2회 접종을 마쳤다고 하더군요.
생각나면 기도해 달라고 하고 저는 걱정스런 마음에 잘 다녀오시라고 인사를 하는 데 짠한 느낌과 복잡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너무 수월하게 예수님을 따른다는 생각에 부끄러웠습니다.
교민들이 확진되어 전세기로 귀국하는 상황에서 이 선교사님은 거꾸로 그곳으로 들어가시는 것이죠.
이런 것입니다.
내 죄와 하나님의 희생적 사랑인 십자가의 대속을 현실로 깨닫고 나면 그냥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어떻게든 내가 감당할 복음의 분량을 묵묵히 감당하며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이죠.
그런 성도들의 공통점은 자기가 한 수고와 헌신에 대해 대단치않게 여긴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내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의 형벌을 대신 당하신 사실에 비해, 그로 인해 받은 내 구원의 영광의 값어치에 비해 모든 것을 드린다 해도 대단하게 여겨지지가 않습니다.
그냥 빚진 자의 마음으로 마땅히 할 일을 한다는 것 이외의 어떤 마음도 아닙니다.
돈을 드릴 때도 아까워서 계산하는 게 아닙니다.
쓸 돈이 모자라서 눈물을 머금고 계산하는 것입니다.
요나가 드디어 빚진 자임을 깨닫고 평생 제사를 드리고 서원을 갚는 사람이 된 것은 물론 물고기 뱃속에서 다 된 것은 아닙니다.
4장까지의 하나님을 다 이해하고, 그 후에 자신의 참회록 요나서를 쓰며 다시 그때를 상기하며 이 기도문을 쓴 것이죠.
말씀을 정리합니다.
성실히 주님을 섬기는 우리들도 자주 요나의 메시지를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내 목적은 주님의 선물을 구함인가, 아니면 주님 한 분을 구함인가.
우리의 땅에 속한 본성은 항상 땅의 영광을 구하고, 얻지 못해 근심하고 염려할 것입니다.
그것을 잘 물리쳐야 합니다.
예수님께 굳게 시선을 고정하고 주님이 인도하시는 대로만 따라간다면 때로 그곳이 스올의 뱃속일지라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아버지를 부를 때 즉시 기도를 들으시고 한 줄기 빛으로 소망을 밝히시며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그것을 명하여 토하게 하여 다시 사명을 감당하게 도와주시리라 믿습니다.
또 상황이 어떻든 구원의 감사로 마음에 품은 헌신과 서원을 묵묵히 지키시면 우리를 통해 하나님은 기쁘게 뜻을 이뤄가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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