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youtube.com/watch?v=_X83lTyMk_8
요나서 4장 본문을 읽었는데 내용이 좀 당혹스러운 감이 있으시죠?
뭐 이런 선지자가 다 있습니까?
선지자들이 사명에 대한 괴로움을 하나님께 탄원할 때가 종종 있는데 이렇게 대놓고 성내는 선지자는 요나가 역대급인 것 같습니다.
버럭 화 잘 내는 우리 모습도 보이죠?
요나가 두 번 화를 내고 하나님이 내가 성내는 게 옳으냐고 두 번 물으시는데, 이것을 중심으로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오늘 우리는 많이 좀 찔릴 것 같습니다.
요나를 해부 해 보면 거기 내가 있거든요.
또 요나서가 단지 이방인 선교의 메시지에만 목적이 있다면 3장으로 끝나면 됩니다.
그런데 이 4장이 있다는 것은 그 이상의 이야기를 하시겠다는 뜻이겠죠.
요나서에서 절대로 놓쳐서는 안 될 이 메시지에서도 은혜 주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1. 요나의 첫 번째 분노입니다.
1절을 보면 요나가 니느웨의 회개와 하나님의 용서에 대해 매우 싫어하고 성냈다고 합니다.
선지자로서 회개하라 외쳤더니 자기 말을 듣고 죄인들이 회개하면 사역이 성공한 것이잖아요?
그런데 왜 화가 났을까요?
표면적 이유는 하나님이 민족의 원수인 악독한 니느웨를 심판하지 않으시는 것 때문에 화가 났던 것입니다.
충분히 이해가 되죠.
만일 우리를 학대하고 괴롭힌 사람이 있는데 벌이 아니라 복을 주신다면 화가 나죠.
죄 지은 사람들 형량이 턱없이 낮게 나오는 것만 봐도 화가 치밀어 오르잖아요?
2절에서 요나는 니느웨가 구원받는 상황이 부당하다고 성을 냅니다.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나님이 니느웨에 가서 심판을 외치라고 하실 때 요나가 벌써 알았다는 것입니다.
심판을 경고하라는 건 용서해 주실 생각이셨다는 것이죠.
왜냐하면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않으시는 분이시니까요.
그러나 자기는 분명히 반대했다는 것입니다.
저들의 만행은 용서 받아도 안되고, 그런 일에 가담해서 우리 민족들의 신의를 저버리는 행동을 저는 할 수가 없다고 말씀드렸지만 결국 이 꼴이 났다는 것이죠.
요나가 첫 번째 화를 내는 이유에서 당연히 우리 본성에서 나오는 문제점들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거의 항상 내가 옳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에 대해서도 그렇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잘 모릅니다.
피조물인 우리가 하나님을 이해하는 수준은 넓은 하늘을 향해 펼친 손바닥 분량만큼이라고나 할까요?
사람에게 백프로 이해되실 하나님이라면 신이 아니시겠죠.
요나가 하나님이 공의를 행하지 않으신다 화를 내는 것도 세상 죄인들 생각이나 다를 바가 없는 정도입니다.
천인공노 할 만행을 저지른 악인들을 보며 사람들은 하나님이 있다면 어떻게 저런 사람들을 벌주지 않고 그냥 두냐고 말합니다.
그런 걸 보면 하나님은 없는 게 분명하다고 합니다.
지금 요나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겨우 세상사람들 정도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판단 받으실 만큼 시시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내 생각과 내 수준에서 재단하고 내 사고 안에 꿰어 맞추려듭니다.
그게 어긋나면 시험에 들고 하나님께 화를 내죠.
천지를 창조하고 경영하시는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단순한 논리로 움직이지 않으십니다.
간단히만 생각해도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죄에 대해 공의만 시행하셨다면 나는 어떻겠습니까?
‘저 사람 틀렸어 혼 좀 나야 해’ 이런 비난과 정죄는 내가 죄인이고,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았다는 것을 자꾸 잊게 만듭니다.
예수님께서 비판하고 판단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이유입니다.
정죄하다 보면 점점 자기가 의롭다고 착각하게 됩니다.
그런데 요나가 화난 이유가 점점 드러나기 시작하죠.
3절, 원하건대 이제 내 생명을 거두어 가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
니느웨가 회개한 것이 사실 뭐 그리 요나를 죽고 싶을 만큼 분노하게 만들겠습니까?
그 일에 나를 끌어들이신 것이 화가 나는 것입니다.
그동안 민족 앞에 의로운 선지자였던 내 꼴이 뭐가 됐냐는 것입니다.
그 안에는 내가 그동안 하나님을 얼마나 섬겼는데 내 인생을 이렇게 만들어 놓으시냐는 섭섭함이 있는 것입니다.
아닌 것 같지만 실망스러운 일이 생길 때, 우리 안에는 ‘하나님이 내게 왜 이러셔’ 이런 기분 나쁜 감정이 불쑥 올라옵니다.
제가 지난 주 등에 수포가 하나 보여서 대상포진인가 해서 병원에 갔었습니다.
혹시 대상포진아냐? 이렇게 생각하는 순간 하나님께 짜증이 확, 너무 죄송합니다.
하나님, 이러시면 어떡하라구요. 해야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제가 대단한 줄 알고 있더군요.
이런 상황을 한번씩 겪어보면 없어진 줄 알았던 게 없어진 게 아니라는 걸 다시 확인하게 되죠.
진짜 죽을 때까지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의지할 수밖에 없다니까요.
그런데 차라리 죽여 달라는 요나의 말에서 같은 말을 했던 누군가가 떠오르지 않습니까?
요나로부터 멀지 않은 과거에 북이스라엘에 엘리야선지자가 있었죠.
엘리야선지자를 떠올리라고 의도한 것입니다.
엘리야는 바알숭배를 장려했던 아합왕과 이세벨을 상대해서 여호와신앙 회복 운동을 일으켰던 선지자죠.
엘리야가 바알사제와 갈멜산에서 제물을 놓고 대결한 내용은 아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엘리야의 제물에 불을 내려 주셨고 엘리야는 백성들과 힘을 합쳐 바알사제 450명을 척결합니다.
이젠 사람들이 다 회개하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리라 생각했지만 그게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복수심에 불탄 이세벨왕비가 엘리야선지자를 죽이겠다고 합니다.
엘리야는 이 말을 듣고 최남단 광야까지 도망칩니다.
그리고 로뎀나무 아래서 엘리야가 요나처럼 죽기를 구하죠.
열왕기상 19장4절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
하나님을 섬기는 종들이 다 죽고 자기 혼자만 남았는데 이제 자기도 죽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그런 걱정하지 말라고 하시죠.
내가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칠천명을 남겨 두었다고 하십니다.
우리가 착각하지 말 것은 우리는 단지 무익한 종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를 그 이상으로 대우해 주시는 하나님이 선하실 뿐입니다.
요나도 엘리야도 우리도 하나님의 종, 예수님의 제자일 뿐입니다.
주인의 명령에 앞서지 말고 내 맘대로 넘겨짚지 말고 순종하면 됩니다.
잠언이 이렇게 하나님의 권한에 도전하는 인간의 방자한 본성을 꼬집었죠.
잠언 29장 21절 종을 어렸을 때부터 곱게 양육하면 그가 나중에는 자식인 체 하리라
하나님의 주권과 우리의 종 됨을 망각하면 대충 믿는 성도보다 헌신하는 성도가 더 큰 시험에 빠질 수가 있다는 걸 주의해야 합니다.
또 이 둘을 조합하면 분명히 보이는 것이 있습니다.
엘리야와 같이 열정을 다 쏟아 탈진할 정도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고 해서 당시 북이스라엘이 회개하고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또 요나처럼 전해도 니느웨처럼 회개하고 돌아오는 경우가 있다는 것입니다.
2장의 요나의 기도처럼 구원은 하나님께 달렸다는 것이죠.
우리가 지난 주에 왜 니느웨로 보내셨냐에 답을 생각했었죠.
하나님께서 구원하셔야 할 죄인들이 악독한 니느웨와 뭐가 다르겠습니까?
양의 탈을 쓰고 있을 뿐이죠.
그렇다면 왜 니느웨에 요나같이 불순종한 선지자를 보내셔야 했습니까?
요나가 딱 맞기 때문입니다.
대충 가서 전도하는 요나, 마음에서 우러나지도 않고, 영혼을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전도하는 요나야 말로 구원이 전도자에 달리지 않고 그를 보내시는 하나님께 달렸다는 걸 보여주시는 데 안성맞춤이잖아요?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멋지게 성공해야만 이루실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정말 이거 또 실수했구나, 큰일이다 싶은 일을 통해서도 하나님은 얼마든지 뜻을 이루십니다.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을 과소평가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성내는 요나에게 답하십니다.
4절,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 하시니라
네가 공의를 집행하지 않는 나의 사랑으로 인해 성내느냐?
그렇지 않았다면 너는? 이 말씀입니다.
네가 저 사람 때문에 내게 성을 낸다면 죄와 실수투성이인 너는?
우리가 누구 때문에 화가 날 때 이 말씀을 그대로 되뇌이면 좋을 것 같습니다.
‘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
2. 요나의 두 번 째 분노입니다.
5절부터에서 요나는 성읍에서 나가 성 밖에 움막을 짓고 들어 앉아 나머지 40일을 채우기까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 성읍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를 보려고 그랬다고 합니다.
니느웨의 회개가 어느 정도 진실인지 모르겠고, 조만간 다시 죄를 지으면 하나님이 심판하실지 모른다는 생각이었죠.
왜 요나가 집에도 못 돌아가고 먼 타국에서 그들의 멸망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습니까?
고국에 돌아갔을 때 맞닥뜨릴 상황이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니느웨를 심판하시려 했는데 요나가 회개시켰다고 소문이 나지 않았겠습니까?
요나가 이 불편한 심리에서 우리 자신이 보이잖아요?
우리가 의식하는 건 사람입니까, 하나님입니까?
요나처럼 하나님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보다 사람들이 자기를 어떻게 생각할지가 더 중요하잖아요?
하나님의 종인데도 주인이 아니라 사람을 더 의식하고 일하는 것이죠.
그 일은 이미 주인을 위한 일이 아니라 나를 위한 일이 된 것입니다.
아닌 것 같아도 우린 이렇게 나를 위해 남의 평가를 의식하고 인정을 바랍니다.
우리가 다 그만그만하지 남달리 성화를 이룬 사람은 거의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큰일을 하는 사람이 있을지는 몰라도 큰 성화를 이룬 사람들은 별로 못 만나 보았습니다.
저도 늘 조심하고, 자주 실패합니다만, 이렇게 사람에게 인정받고 칭찬받기를 원하는 마음은 밑빠진 독이더군요.
그렇게 받는 칭찬은 아무리 많이 들어도 계속 더 확인하고 싶고 목이 마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왼손이 잘 한 일을 오른 손도 모르게 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사람의 칭찬에 밑빠진 독이 되지 않도록 아예 남들 모르게 잘한 일을 묻어 두라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작은 선행과 순종을 하나님만 아시게 하겠다는 원칙을 세워 놓으라시는 것입니다.
그게 참 힘들잖아요?
그러면 뭔가 아쉽고, 내가 아무 일도 안 하는 별 볼일 없는 사람처럼 묻힐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테스트하시잖아요?
우리가 하나님께만 인정받는 삶을 추구하는 걸 아시면 혼자만 알고 넘어가지 않으십니다.
그런 우리와 함께 계속 주님의 일을 해 나가시기에 삶과 믿음에 열매가 그득하게 되는 것입니다.
봉사와 경건생활의 목적을 자꾸 사람이 아닌 하나님께 두어야 합니다.
요나가 종교적으로 위장한 세속적 본성들이 이 박넝쿨 사건을 통해서 확 드러나죠.
사막지대의 뜨거운 태양과 모래바람을 겨우 가리고 움막에 은신한 채 니느웨의 멸망을 기다리고 있는 요나의 모습을 생각해 보십시오.
혹여라도 하나님이 마음을 돌이켜 여리고성처럼 니느웨성을 무너뜨릴지 지켜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걸 보면 요나서가 참 정직합니다.
자기 자신을 이 정도로 부끄럼 없이 공개한 걸 보면 후일에 요나가 정말 회개하고 참회록을 쓴 것이라고 여겨지는 것이죠.
뙤약볕에 앉아 있는 요나를 위해 하나님이 준비하신 게 있습니다.
6절, 하나님 여호와께서 박넝쿨을 예비하사 요나를 가리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머리를 위하여 그늘이 지게 하며 그의 괴로움을 면하게 하려 하심이었더라
이게 결정타가 될 줄 모르고 요나가 마냥 기뻐하죠.
요나가 박넝쿨로 말미암아 크게 기뻐하였더니
하나님의 공의라는 대의명분을 내세우며 길길이 분노하던 요나가 이번엔 햇빛을 가려주는 박넝쿨 하나로 인해 크게 기뻐합니다.
정의의 심판을 보겠다고 앉아있는 순간에 그래봤자 요나에게 제일 큰 기쁨은 박넝쿨 그늘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 그런 존재들입니다.
잠깐이라도 우리 육신을 만족시키는 일이 하나님보다, 다른 사람의 생명보다 더 중요합니다.
맛있는 것을 입에 넣을 때, 좋은 구경거리를 볼 때, 재미있는 놀거리 앞에서, 정말 맘에 드는 물건을 하나 사 놓고 크게 기뻐하는 게 우리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 육신을 갖고 있는 동안은 우리들에게 이런 기쁨을 누리게 하시고 세상의 박넝쿨도 얹어주시는 것입니다.
세상의 뜨거운 볕 아래 혼곤하고 괴롭게 살아가는 우리를 위로하시려고 서늘한 박넝쿨을 주시는 것이죠.
오늘 본문을 보면 분명히 그늘을 만들어 요나의 괴로움을 면하게 하기 위해 박넝쿨을 주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큰 기쁨을 주었던 박넝쿨을 다음 날 벌레가 갉아먹어 버립니다.
박넝쿨이 사라지자 요나가 아까 했던 똑같은 말을 합니다.
8절, 요나가 혼미하여 스스로 죽기를 구하여 이르되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으니이다
이번엔 위대한 명분이 아니라 박넝쿨 한 줄기 때문에 죽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르시죠.
네가 이 박넝쿨로 말미암아 성내는 것이 어찌 옳으냐
그러자 요나가 대답하죠.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옳으니이다
박넝쿨의 좌절은 니느웨가 회개했을 때 받은 충격보다 더 큰 것 같죠?
본성적인 내가 원하는 것은 지상의 성공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때로는 정말 내게 너무나 귀하고 너무나 만족스럽던 그 박넝쿨을 하나님이 거두실 때가 있습니다.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하나님이 그 때 내게서 왜 그걸 거둬 가셨는지 여전히 안타까운 일도 있습니다.
그래서 그게 상처로 남아 속으로 하나님께 화가 나 있을 수 있습니다.
줬다 뺐으면 처음부터 없던 것보다 더 마음이 힘들죠.
박넝쿨을 주신 것도 내게 대한 하나님의 호의였고 박넝쿨을 거둬가신 것도 결국은 내게 대한 하나님의 사랑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세속적인 풍요와 만족에 쉽게 빠집니다.
하나님이 박넝쿨을 거둬가셨다면 그게 전부인 줄 아는 우리에게 더 나은 것 영원한 것을 주시기 위해서일 것입니다.
내가 세속적인 안전과 풍요를 더 의지하고 있다는 것을 바로잡아 주시려는 이유일 것입니다.
박넝쿨 그늘이 사라질 때 우리가 고개를 들고 하나님을 보면 저 높이 구름기둥을 세우시고 나를 덮어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게 될 것입니다.
박넝쿨보다 더 안전하고 견고한 하나님의 날개그늘을 의지하라는 것이죠.
3. 그리고 하나님이 요나를 교훈하기 시작하십니다.
하나님이 요나에게 두 번째 같은 질문을 하십니다.
네가 성내는 것이 어찌 옳으냐
이 말씀은 하나님이 박넝쿨을 없애신 것에 대해 요나가 성내는 게 옳으냐는 뜻이죠.
박넝쿨을 없애신 것을 심판에 빗대어 하시는 말씀입니다.
박넝쿨을 벌레가 ‘갉아먹다’는 단어가 ‘치다’라는 뜻인데 심판의 뜻으로 쓰입니다.
그리고 변론 들어가십니다.
10절,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재배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말라 버린 이 박넝쿨을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네가 아끼던 박넝쿨 하나를 심판한 것으로 성내고 화를 내느냐?
박넝쿨이 그렇게 아까우냐?
그러면서 너는 내게 왜 니느웨의 12만명을 심판하지 않느냐고 성냈느냐?
나는 저들이 아깝다.
나는 저들이 비록 악을 저지를지라도 사랑한다.
이런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이런 긍휼과 자비가 없으시다면 우리가 어떻게 죄가운데서 구원을 받았겠습니까?
여기에 요나서의 가장 중요한 메시지가 담겨 있는 것입니다.
공의의 하나님이 왜 악독이 하늘까지 도달한 니느웨를 심판하지 않으십니까?
그것은 니느웨를 사랑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공의로는 심판을 하셔야 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심판하지 못하신다는 것입니다.
따지는 요나에게 하나님은 마치 이렇게 되물으시는 것 같습니다.
그래, 그렇다면 내가 어떻게 해야 하겠니, 요나야?하나님은 그 답을 갖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기 위해 너를 대신 해 자신을 벌하시고, 그 대신 너를 구원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주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으로 이것을 완벽하게 이루시게 되는 것이죠.
요나서가 가리키는 것도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과 구원인 것입니다.
요한복음5장39절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 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저는 요나가 결국 하나님의 공의와 구원을 깨달았다고 믿습니다.
2장의 요나의 기도에서 살펴보았지만 요나가 성전을 향하여 기도하고 제사를 드리겠다고 하잖아요?
후일에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서 드렸던 기도를 회상하며 2장을 기록했습니다.
그때는 이미 요나가 완전한 하나님의 구속을 이해했기에 그때 기도에 자기 믿음이 녹아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이후 열왕기서에서도 요나의 행적은 사라집니다.
요나 바로 이전 엘리야나 엘리사의 마지막까지 소상하게 기록한 열왕기서가 요나의 마지막에 대해서는 침묵합니다.
제가 상상을 해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깨달은 요나는 선교사가 되어서 이방나라 곳곳을 다니며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고 전하고 가르치다 어느 낯선 땅에서 죽음을 맞았을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완전히 성취하신 주님의 십자가를 깨닫고 믿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버렸기에 그 분의 증인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 귀에는 하나님의 부르심이 들리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내 증인이 되리라
양화진에 가면 복음을 전하려고 조선에 왔다 25세 나이에 급성 맹장염으로 죽은 루비 켄드릭의 묘가 있습니다.
조선시대 말, 그 헐벗고 미개한 우리를 찾아 온 켄드릭은 "만일 내게 천개의 생명이 있다면 모두 조선을 위해 바치고 싶습니다."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죽기 얼마 전 부모님께 보낸 이런 한통의 편지가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아버지 어머니!
이곳 조선 땅에 오기 전 집 뜰에 심었던 꽃들이 활짝 피어났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하루 종일 집 생각만 했습니다.
아마 내년 봄이 되면 온통 우리 동네는 제가 심은 노란 꽃으로 덮이겠죠.
아버지 어머니, 이곳 조선 땅은 참으로 아름다운 곳입니다.
모두들 하나님을 닮은 사람들 같습니다.
선한 마음과 복음에 대한 열정으로 보아, 아마 몇 십 년이 지나면 이곳은 예수님의 사랑이 넘치는 곳이 될 것 같습니다.
저는 복음을 듣기 위해 20km를 맨발로 걸어오는 어린 아이들을 보았을 때 그들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오히려 위로를 받습니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탄압이 점점 심해지고 있습니다.
그저께는 예수님을 영접한지 일주일도 안 되는 교인 서너 명이 끌려가 순교했고, 토마스 선교사와 제임스 선교사도 순교했습니다.
선교본부에서도 철수하라는 지시가 있었지만 대부분의 선교사들은 그들이 전도한 조선인들과 아직도 숨어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들은 모두 순교 할 작정인가 봅니다.
오늘 밤은 유난히도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외국인을 죽이고 기독교를 증오하는 곳이라고 부두에서 저를 끝까지 말리셨던 어머니의 얼굴이 자꾸 제 눈앞에 어립니다.
아버지 어머니, 어쩌면 이 편지가 마지막 일 수도 있습니다.
저는 이곳에서 작은 씨앗이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제가 씨앗이 되어 이 땅에 묻히게 되었을 때 아마 하나님의 시간이 되면, 조선 땅에는 많은 꽃들이 피고, 그들도 여러 나라에서 씨앗이 될 것입니다.
저는 이 땅에 저의 심장을 묻겠습니다.
바로 이것은 조선을 향하는 저의 열정이 아니라, 조선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어머니 아버지 사랑합니다.”
켄드릭의 죽음이 선교본부에 전해지자 20여명의 젊은 선교사가 그녀를 대신해 이곳 조선 땅에 복음을 들고 찾아왔습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에게 복음이 전해졌고 그 가난에 찌들고 절망이 짙게 덮여있던 이 나라가 하나님의 구원과 복을 받는 나라가 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의 십자가를 깨닫게 되었다면 평생 단 한명에게라도 이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부모라면 그것은 당연히 먼저 자녀들이어야 합니다.
배우자, 부모들이 최우선 우리가 복음을 전하고 눈물로 기도하며 씨를 뿌려야 하는 대상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편안히 신앙생활을 할 때 무지하고 가난한 옛조선 같은 땅에 가 평생을 씨앗이 되고 있는 선교사님들을 위해 기도하고 물질을 후원하고 사랑으로 동역해야 하는 것입니다.
요나가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 못하고 박넝쿨만 아낀 것처럼 우리도 내 박넝쿨 관리만 하고 있지는 않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 안에 있는 요나를 잘 감지해 다스리길 원합니다.
우리의 분노는 공분도 아니고 타인을 위한 것도 아닐 수 있습니다.
단지 내 명예와 육신의 문제일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 화를 멈추어야 할 줄 믿습니다.
또 하나님의 뜻을 앞서 가며 넘겨짚지 말고 주님의 뒤를 따르며 겸손히 도역을 이루어 가는 모두가 되길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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