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나

요나와 박넝쿨 (요나서4장1절-11절)

남수연 2013. 6. 27. 15:55

 

전에 니느웨의 회개란 제목으로 요나서의 구속사적인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오늘은 요나선지자의 개인적인 사역을 중심으로 말씀을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요나서는 참 쉽고 재미있는 성경입니다.

미니시리즈 처럼 빠르게 전개되고 지루할 틈이 없이 쌈박하게 끝납니다.

요나선지자의 지극히 인간적인 면도 재미있고 뭘 믿고 그렇게 하나님 앞에 큰 소리를 치는 지 신기할 정도입니다.

그런데 그런 요나에게 하나님이 너무 관대하시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이런 생각이 든다는 것은 평소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을 오해하며 믿고있는지를 말해주는 것입니다.

본래 하나님아버지는 우리 계산으로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관대하십니다.

우리도 이렇게 하나님의 관대한 처분을 받으며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실 얼마나 하나님께 불순종하며 삽니까?

우리의 약한 체질을 이해하시는 하나님의 관대한 사랑이 있기에 오늘도 부족한 우리가 아버지 앞에 은혜와 복을 받으러 나올 수 있는 것이죠.

요나서를 읽다보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돌아온 탕자의 비유가 생각이 납니다.

하나님 아버지께는 두 탕자 아들이 있었답니다.

집을 나간 탕자 아들과 집 안에 있지만 아버지와 마음의 담을 쌓고 자신의 세계에서 살고 있는 집안의 탕자 아들이죠.

결국 요나선지자는 집안에 있는 탕자 큰 아들과 다를 바 없는 인물입니다.

이 두 탕자 아들을 다 사랑하는 아버지의 마음이 오늘 짧은 본문에 너무나 명료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인간의 이런 지독한 불순종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아버지의 사랑이 우리들을 끝내 구원하시겠다는 강한 의지를 요나서에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 사랑이 바로 오늘도 우리에게 쉬지 않고 흘러오고 있다는 것을 말씀을 통해 깊이 깨닫고 큰 위로와 도전을 받는 시간이 되길 간절히 소원합니다.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 앞 부분을 잠시 살펴보겠습니다.

요나선지자는 북이스라엘시대에 활동했던 선지자입니다.

하나님이 이 요나선지자에게 사명을 주십니다.

이스라엘의 철전지 원수인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로 가서 40일 뒤 성이 무너질 것을 선포하라는 것입니다.

요나는 화들짝 놀라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배를 잡아 타고 멀리 다시스라는 곳으로 도망을 칩니다.

그러나 바다엔 큰 폭풍이 일고 배는 파선 될 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위기에 몰린 선원들은 누가 이 재앙을 몰고 왔는 지 제비뽑기로 알아보게 되고 요나가 딱 뽑힙니다.

잠언에 사람이 제비는 뽑으나 일을 작정하기는 여호와께 있느니라고 하셨죠.

결국 요나는 선원들에 의해 바다에 던져집니다.

그리고 던져지는 순간 하나님이 준비한 큰 물고기가 덥썩 요나를 삼킵니다.

요나 선지자는 사흘 동안 물고기 뱃 속에서 생존합니다.

폐소공포증이 약간 있는 저로서는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답답합니다.

요나는 결국 불순종을 회개하고 다시 뭍으로 토해진 뒤 억지로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니느웨로 향합니다.

걸어서 사흘 길이라는 니느웨의 큰 성읍을 요나는 겨우 하룻 길을 걸으며 외쳤다고 성경은 기록하죠.

회개하지 않으면 40일 뒤 성이 무너지리라.

참 성의도 없이 전도하는 말이 짧습니다.

혹시라도 깨닫고 회개할 까봐 아마 건성으로 대충 말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소리에 니느웨가 회개하기 시작하는 데 왕부터 짐승까지 베옷을 입고 하나님께 부르짖었다고 합니다.

믿지 못할 일이 벌어진 것이죠.

이스라엘의 숙적인 니느웨가 회개하고 구제되는 것을 본 요나가 불통을 터뜨리는 것이 본문의 시작입니다.

 

먼저 요나의 사역을 중심으로 살펴보며 교훈을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요나는 왜 그렇게 하나님이 간절히 원하신 니느웨사역을 싫어했을까요?

그리고 사역이 성공해서 지금 다 회개했는 데 왜 차라리 죽겠다고 시위를 벌이고 있는 것일까요?

본문에 나타난 요나선지자의 인격상 그렇게 정의감 때문도 아니고 애국심 때문만도 아닌 것 같습니다.

그건 명분이었을 뿐이고 아무래도 본심은 다른 데 있는 것 같다는 의심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 사역이 맘에 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입장이 분명히 곤란해질 것이 뻔하기 때문이죠.

요나는 이미 이스라엘에서 공식적인 선지자로 활동하고 있던 사람입니다.

열왕기하 14장 25절을 보면 당시 왕이었던 여로보암이 전투에서 승리하고 뺏겼던 땅을 다시 찾아 올 것을 요나가 예언했고 그대로 되었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멋진 사역으로 요나는 이미 선지자로서의 입지가 확보 된 상태인 것이죠.

그런데 이번엔 적대국 앗수르에 가서 멸망을 경고하라는 말씀이 떨어지자 경악합니다.

그 말씀은 곧 회개하라는 것이고 회개하면 살려주시겠단 말씀입니다.

2절에 보면 요나가 니느웨사역을 거부한 것은 하나님이 이미 그들을 용서할 걸 알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앗수르가 얼마나 잔혹한 나라입니까?

요나선지자 이후 한 50여년 뒤 앗수르는 이스라엘을 침공합니다.

온갖 포악과 잔인한 살육을 저지르고 북이스라엘을 초토화시켜 역사 속에서 지워버린 바로 그 나라입니다.

그러니 요나선지자 당시 앗수르에 대한 이스라엘의 혐오감은 우리나라가 일본 생각하는 것 이상이었습니다.

앗수르는 한시라도 빨리 멸망해야 할 나라입니다.

하나님 말씀대로라면 40일이면 멸망당할 것입니다.

거기까진 좋은 데 만일 요나의 그 경고로 인해 그들이 회개하고 재앙을 면한다면 고국에서 요나의 입지는 상당히 곤혹스럽게 됩니다.

실제로 예레미야선지자 같은 경우 바벨론에 질 것이니 항복하라는 하나님의 뜻을 전했다가 매국노로 낙인 찍혀 진흙구덩이에 갇히고 그랬잖습니까?

우리나라의 경우 같은 동족인데도 대북지원 사업을 탐탁치 않게 보는 사람많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어떻든 뻔히 궁지에 몰릴 불리한 사역은 피하겠다는 것이 요나의 본심이었던 것이죠.

우리가 하나님을 위한다고 하면서도 사실 다 내 이익과 현실이 우선인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요나의 이런 속마음 모르셨겠습니까?

다 아시면서도 그런 마음조차 깨지지 않게 존중하며 데리고 일하시는 것보면 정말 그 누구를 우리 하나님께 비기겠습니까?

사건이 진행될 수록 요나의 인간적인 면이 점점 드러나는 것을 보게됩니다.

니느웨가 회개하고 난 뒤에도 고집을 피우고있는 요나의 행동을 보십시오.

성읍 밖으로 나가서 성읍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보려고 기다리고 있었다고 합니다.

초막까지 지은 걸 보면 40일이 찰 때까지 기다릴 작정인 것 같죠?

고국에 돌아갈 일도 끔찍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요나이야기의 백미인 박넝쿨이 등장합니다.

제가 호박잎 쌈을 참 좋아하는 데 올해도 권사님이 맛있는 호박잎 쌈을 먹여주시리라 기대가 됩니다.

중동지역의 뜨거운 뙤약 볕 아래 나뭇가지 몇 개 얽어 옹색한 초막을 짓고 웅크리고 들어앉은 독기 오른 요나의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그런데 그런 그를 위해 하나님이 예상치도 못했던 배려, 박넝쿨을 덮어주십니다.

6절에 보면 이는 그의 머리를 위하여 그늘을 지게 하며 그의 괴로움을 면하게 하려 하셨다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에서 하나님이 얼마나 섬세하게 우리를 보살펴주시는 지 알 것 같지 않습니까?.

이런 말씀을 읽으며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는 걸 느끼지 못하겠다 그런 말씀하지 마세요.

우리가 어떻게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인들 하겠습니까?

이렇게 우리에게도 박넝쿨을 주시잖습니까?

뜻밖에 작은 선물, 소소한 기쁨으로 우리를 지켜보시고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박넝쿨이 시원하게 그늘을 만들어주니 요나가 크게 기뻐했다고 본문에 나옵니다.

대단한 명분이나 있다는 듯 정의의 심판을 보겠다고 앉아있는 순간에 그래봤자 요나에게 제일 큰 기쁨은 박넝쿨 그늘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 그런 존재들입니다.

잠깐이라도 우리 육신을 만족시키는 일이 하나님보다, 다른 사람의 생명보다 더 중요합니다.

맛있는 것을 입에 넣을 때, 좋은 구경거리를 볼 때, 재미있는 놀거리 앞에서, 정말 맘에 드는 물건을 하나 사 놓고 크게 기뻐하는 게 우리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 육신을 갖고 있는 동안은 우리들에게 이런 기쁨을 누리게 하시고 세상의 박넝쿨도 얹어주시는 것입니다.

세상의 뜨거운 볕 아래 혼곤하고 괴롭게 살아가는 우리를 위로하시려고 아버지께서 준비하시는 서늘한 박넝쿨 아래 살고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이 큰 기쁨을 주었던 박넝쿨이 다음 날 보니 벌레가 갉아먹어 시들어 버린 것입니다.

이 순간 요나선지자의 좌절은 니느웨가 회개했을 때 받은 충격과 마찬가지인 것을 봅니다.

사라진 박넝쿨 때문에 죽기를 구했다고 본문에서 말씀하죠.

그렇습니다.

때로는 정말 내게 너무나 귀하고 너무나 만족스럽던 그 박넝쿨을 하나님이 거두실 때가 있습니다.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하나님이 그 때 내게서 왜 그걸 거둬 가셨는 지 여전히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일도 있습니다.

남미에서 선교사역을 하고 있는 한 여선교사님의 삶이 방영 된 프로를 본 적이 있습니다.

몇 년 전 유일한 동역자였던 남편선교사님이 병으로 돌아가셨고 함께 하던 사역을 지금은 혼자서 감당하고 있었습니다.

도대체 왜 하나님이 너무 귀한 남편을 데려가셨는 지 지금도 이해할 수 없다며 얼굴에 어두운 그늘이 스치는 것을 보았습니다.

때로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고통도 만나는 것이 이생에서의 고된 삶입니다.

그러나 이유를 알 수 없는 슬픔 속에서도 하나님은 우리를 혼자 두지 않고 그걸 통해 우리 영혼을 다루어 주십니다.

하나님은 왜 요나의 박넝쿨을 거두셨습니까?

10절과 11절에 그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요나가 상상도 못한 창조주 하나님의 모든 죄인을 향한 사랑을 이 사건을 통해 그가 어렴풋이나마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느끼고 그 마음을 조금이라도 나눠 가진다는 것은 한낮 피조물로서는 상상치 못할 영광입니다.

바울사도가 로마서에서 이렇게 감탄하지 않습니까?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그런데 요나에게 하나님아버지의 사랑을 이렇게 직접 말씀해주시잖습니까?

‘네가 수고도 않고 재배도 않은 그 박넝쿨이 그렇게 아까우냐?

그러니 내 형상으로 창조한 저 12만명의 니느웨 사람들이 내게 어찌 아깝지 않겠느냐?

하나님은 우리를 아끼시고 아까워하실 만큼 사랑하십니다.

요나는 잃어버린 박넝쿨을 통해 구약시대 그들이 상상도 못했던 모든 죄인에 대한 창조주 하나님의 무한 자비하신 사랑을 배우게 된 것이죠.

요나서에 더 이상 요나선지자의 투덜거림은 없습니다.

요나서는 끝이 납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의 박넝쿨을 거둬가실 때는 꼭 영적이든 육적이든 더 큰 유익을 남겨주신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세상에서 내가 그렇게 의지하고 만족하던 것이 사라질 때라도 하나님은 우리를 붙들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렇게 약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럴 때 더 성숙하고 정금 같이 단련 된 믿음으로 여기까지 온 것입니다.

저도 옥탑 방에서 방학 내내 식빵에 마아가린만 발라 먹으며 살아봤습니다.

망하지 않았잖습니까?

옥탑 방에서 한 계단 올라가면 옥상이었어요.

한밤중 하늘의 총총한 별들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쏟아져 내리는 걸 느낄 때 그 영적인 충만한 은혜는 세상의 박넝쿨에 비교할 수 없습니다.

빨랫 줄 옆으로 넝쿨 장미가 빨갛게 피어 있었는 데 그 한송이 장미도 얼마나 아름답고 감사하던지.

깊은 감사의 기도를 하고 내려오면 현실의 문제들도 다 헤쳐 나갈 힘이 솟았습니다.

고난을 통해서 우리 죄성이 다뤄지고 심성이 강하게 연마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걱정하는 문제들이 일어날까 미리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아버지께서 우리를 돌보시니 어떤 일도 넉넉히 감당할 수 있습니다.

세상의 박넝쿨이 사라질 때 오히려 더 영원한 것에 소망을 두게 됩니다.

천국의 삶을 소망하고 하나님께 모든 것을 기대하며 하나님을 친근히 하는 삶이야 말로 얼마나 복된 삶입니까?

그런 삶은 요동하지 않습니다.

시편 16장 8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므로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로다

요나선지자가 어쨌든 무척 성질을 부리고 골이 났습니다.

요나에게서 박 넝쿨을 거두신 것이 너무하신 처사입니까?

이젠 그만 고집부리고 집에 가라는 것예요.

언제까지 움막에 웅크리고 앉아 박넝쿨 그늘에 만족하고 있을 겁니까?

박넝쿨이 사라져 더위와 시련으로 혼곤해져가고 있다면 더 좋으신 하나님을 바라십시오.

하나님을 얻으면 모든 것을 얻는 것입니다.

그러니 성도들에겐 아무 것도 문제될 게 없습니다.

모든 것을 맡길 하늘 아버지가 있는 데 뭐가 걱정입니까?

맡길 데가 없는 게 세상사람들이고 맡길 데가 있는 게 바로 성도입니다.

창피할 만큼 얕은 마음으로 하나님을 따른다 할지라도 우리의 체질이 진토임을 아시는 아버지께서 우리를 관대하게 사랑하심은 요나선지자 보다 결코 부족하지 않은 줄 믿습니다.

삶이 우리를 속이죠.

혹시 잘되려나 조심스런 기대를 해보지만 때로 가혹하게 기대가 무너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승리와 영광스런 결말을 준비하고 계심을 믿고 더욱 힘내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드립니다. 아멘.

 

그런데 왜 하나님은 굳이 싫다는 요나선지자를 불러다가 이 일을 시키신 것일까요?

하나님께 선지자가 부족해서 그러셨겠습니까?

보통 우리가 원치 않으면 하나님이 강압적으로 일을 해나가지 않으십니다.

믿음의 성장에도 자발적인 추구가 없으면 신앙은 정체됩니다.

왜 굳이 요나여야 했냐, 이 니느웨 사역엔 요나선지자가 제격이기 때문입니다.

요나의 무성의한 전도는 니느웨의 회개를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시려는 하나님의 의도에 아주 안성맞춤입니다.

니느웨의 회개와 구원은 온 인류를 구원하실 하나님의 구원계획에 대한 예표입니다.

인간의 힘이 아닌 하나님의 의지로만 이 일은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요나의 간곡한 설득으로 니느웨가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이 사실을 극명하게 보여주기 위해선 성의 없는 전도자가 딱 맞는 것이죠.

집나간 탕자를 기다리는 아버지의 마음을 그렇게 몰라주는 집 안의 탕자 같은 우리를 대표하기엔 요나선지자가 딱 맞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모자라면 모자란 대로 우리와 함께 하나님나라를 완성해가십니다.

그래서 이렇게 오래 걸리는지도 모르죠.

내가 원치 않고 내 능력에 맞지 않는 일을 하나님이 시키고 계시다면 어쩌면 그 일에 내가 제격이기 때문입니다

이상한 환경 속에 휘말려 곤혹스러울 때도 그 일이 우연히 내게 일어난 게 아닙니다.

하나님아버지는 우리의 상상 이상으로 면밀하게 우리 인생을 인도해 가십니다.

우리가 진로나 당면한 몇 가지 문제들을 기도하면 그것을 해결해주시는 게 전부라고 생각하십니까?

천만에 말씀입니다.

우리 모든 인생 전체를 위해 하나님은 정말 완벽한 계획을 갖고 신실하게 우리를 인도하고 계십니다.

내가 모르고 있지만 어떤 일들이 지금도 나를 위해 다른 곳에서 시작되고 있다는 생각, 해보지 않으셨습니까?

보십시오.

니느웨 사람들 편에서야 어느날 갑자기 나타난 외국인 선교사가 퉁명스럽게 회개하라는 말을 던지고 지나가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그러나 이 일을 위해 하나님이 하신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요나를 부르시고 요나는 싫어서 배를 타고 외국으로 도피하다 죽을 뻔하고 하나님은 불순종한 요나를 위해 풍랑과 큰 물고기를 예비하시고 이런 엄청난 사건들이 배후에서 벌어진 결과입니다.

우리가 단순히 누구의 전도로 별 특별한 하나님체험도 없이 여기 나와 예배드리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이 곳에 오게 하기 위해 수많은 사람을 동원하시고 환경을 움직이셨습니다.

지금 내게 일어난 일들과 내 삶 역시 그냥 우연이 아닙니다.

지금 불편한 환경이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지만 하나님의 선하신 인도를 믿고 믿음으로 열심히 감당하면 반드시 놀라운 그림의 완성을 보게 될 것입니다.

나의 무능함과 연약함이 오히려 내가 하는 일 가운데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을 알게 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 때가 참 많습니다.

감당하기 힘든 일, 원치 않는 환경 속에서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고 최선을 다할 때 상상도 못했던 하나님의 일이 이뤄질 것을 확신하시길 축복드립니다.

오늘 요나선지자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려는 진정한 의도가 무엇인지 아시겠습니까?

당연히 죄인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아버지의 간절한 열정입니다.

하나님은 구원의 길을 완성하셨습니다.

성자하나님인 예수님께서 피조물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셔서 자신의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스스로 인간의 죄를 짊어지고 치욕과 고통을 감당하고 죄값을 치러주셨습니다.

이제 사망과 심판의 저주를 벗어나 영광스런 하나님자녀가 되는 길을 내신 것입니다.

LA에 글렌데일 공원묘지라고 있습니다.

마이클 잭슨과 엘리자베스 테일러가 묻힌 곳으로도 유명하죠.

그 곳에 엄청난 규모의 미술 작품이 두 개 있는 데 그림의 높이가 건물 7층 높이 정도 된다고 합니다.

한 작품은 우리가 많이 보았던 예수님의 부활이란 작품입니다.

구름 위에 수많은 성도들이 흰 옷을 입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공중에서 맞이하는 그림을 보신 적 있을 것입니다.

또 하나는 잘 알려지지 않은 예수님의 십자가라는 그림입니다.

다른 십자가 고난 그림과 다른 점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신 장면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림 속엔 수많은 사람들이 무리지어 둘러서서 제각기 주님의 처형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화면 중앙에서 사람들이 주님이 못 박히실 십자가를 세우기 위해 준비하고 있습니다.

흰 옷을 입은 예수님은 그 옆에서 하늘을 응시하며 서 계십니다.

이 장면은 실제 못에 박혀 달려계신 모습 못지않게 더 감정이 복받치게 합니다.

이 순간 주님의 마음이 어떠셨을까요?

점점 못 박힐 시각이 다가 올 때 예수님의 마음이 두방망이질 치고 무서움과 외로움 속에 서 계실 그 마음이 느껴져 울컥하게 하는 그림입니다.

이렇게 고통스런 십자가를 담당하셨으니 그 십자가의 길을 통해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바라는 것이 하나님아버지의 마음 아니겠습니까?

구원을 위해 속죄의 값은 완불되었고 길이 열렸지만 하나님께는 스스로 정하신 한계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알 수 있죠.

하나는 누군가 그 사실을 알려줘야 한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그 소식을 들은 사람이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전도’라는 미련한 방법으로 인간을 구원하기를 정하신 것이 하나님의 지혜이고 비밀입니다.

자기가 구원받은 것이 얼마나 소중하고 절실한 것인지를 아는 사람은 이 복된 소식을 전할 수 밖에 없습니다.

만일 누군가 우리에게 예수님을 전하지 않고 교회로 우리를 이끌지 않았다면 어떻게 우리가 이 자리에 있겠어요?

아직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을 보십시오.

그 영혼은 헐벗고 빈사 상태입니다.

외형적인 화려함과 저들이 가진 부요함과 돈과 권력을 보십니까?

부족할 것 없이 잘 사는 것처럼 보이지만 탁류에 휩쓸려 서서히 떠내려가는 그 영혼들의 종착역은 영원히 불타는 못이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이 사실을 믿는 사람들이 영혼을 구하러 뛰어드는 것입니다.

양화진에 가면 복음을 전하려고 조선에 왔다 25세 나이로 급성 맹장염으로 죽은 루비 켄드릭의 묘가 있습니다.

조선시대 말, 그 헐벗고 가난한 미개한 우리를 찾아 온 그녀가 늘 하던 말은 "만일 나에게 천개의 생명이 있다면 모두 조선을 위해 바치고 싶습니다."였다고 합니다.

죽기 얼마 전 부모님께 보낸 한통의 편지가 전해내려오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아버지 어머니!

이곳 조선 땅에 오기 전 집 뜰에 심었던 꽃들이 활짝 피어났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하루 종일 집 생각만 했습니다.

아마 내년 봄이 되면 온통 우리 동네는 제가 심은 노란 꽃으로 덮여있겠죠.

아버지 어머니, 이곳 조선 땅은 참으로 아름다운 곳입니다.

모두들 하나님을 닮은 사람들 같습니다.

선한 마음과 복음에 대한 열정으로 보아, 아마 몇 십 년이 지나면 이곳은 예수님의 사랑이 넘치는 곳이 될 것 같습니다.

저는 복음을 듣기 위해 20km를 맨발로 걸어오는 어린 아이들을 보았을 때 그들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오히려 위로를 받습니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탄압이 점점 심해지고 있습니다.

그저께는 예수님을 영접한지 일주일도 안 되는 교인 서너 명이 끌려가 순교했고, 토마스 선교사와 제임스 선교사도 순교했습니다.

선교본부에서도 철수하라는 지시가 있었지만 대부분의 선교사들은 그들이 전도한 조선인들과 아직도 숨어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들은 모두 순교를 할 작정인가 봅니다.

오늘 밤은 유난히도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외국인을 죽이고 기독교를 증오하는 곳이라고 부두에서 저를 끝까지 말리셨던 어머니의 얼굴이 자꾸 제 눈앞에 어립니다.

아버지 어머니, 어쩌면 이 편지가 마지막 일 수도 있습니다.

저는 이곳에서 작은 씨앗이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제가 씨앗이 되어 이 땅에 묻히게 되었을 때 아마 하나님의 시간이 되면, 조선 땅에는 많은 꽃들이 피고, 그들도 여러 나라에서 씨앗이 될 것입니다.

저는 이 땅에 저의 심장을 묻겠습니다.

바로 이것은 조선을 향하는 저의 열정이 아니라, 조선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어머니 아버지 사랑합니다.”

그의 죽음이 선교본부에 전해지자 20여명의 젊은 선교사가 그녀를 대신해 이곳 조선 땅에 복음을 들고 찾아왔습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에게 복음이 전해졌고 그 가난에 찌들고 절망이 짙게 덮여있던 이 나라가 하나님의 복을 받는 나라가 된 것입니다.

지난 번에 미얀마에 가서 하나님의 복을 못 받는 사람과 국가가 얼마나 비참한지를 직접 보았습니다.

복음이 없었다면 우리 삶이 그런 모습이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먼저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에, 그 다음은 이 땅에서 피를 흘린 선교사들에게 복음의 빚을 진 자들입니다.

지금 우리는 잘 사는 나라의 대열에 들었지만 영적으론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걸인처럼 살고 있습니다.

목숨을 걸고 위험한 곳에서 전도할 수 없지만 우리 가족과 이웃에게 매일 복스러운 구원의 소식을 전파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 아니겠습니까?

점점 구원의 문이 닫히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미국에서는 노방전도를 통해 지옥을 경고하지 못하도록 “혐오범죄법”이 통과되었습니다.

거리설교 등을 통해서 지옥을 경고 하게 되면 누군가에게 종교를 강요하고 혐오감을 줬다는 죄목으로 증오범죄에 해당되는 처벌을 받습니다.

미국의 한 주에서는 실제 두 할머니가 공원에서 전도하다 체포돼 혐오범죄에 몰리는 일이 있었습니다.

영국에서는 길거리에서 한 목사가 대중 앞에서 성경 구절을 읽었다는 이유만으로 경찰로부터 체포 위협을 받은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이런 일은 앞으로 전 세계 어디서든 발생할 것이고 우리나라에서도 교회의 십자가를 내려야 할 때가 오리라 예상됩니다.

고린도 후서6장은 말씀합니다.

보라 지금은 은혜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소망 없이 죽어가는 가족과 이웃들의 영혼은 빈사상태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앞으로 이들을 이끌면 저들도 우리 처럼 삽니다.

이 간곡한 하나님아버지의 마음에 진심으로 동참하고 전도의 사명을 충실하게 감당할 때 우리의 영혼도 살아나고 환경 속에도 놀라운 축복을 맞게 될 것입니다.

2013년6월23일 주일설교 남수연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