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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 2장에서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서 삼일을 보낸 뒤 회개하고 밖으로 나옵니다.
본문 1절에 보면 여호와의 말씀이 두 번째로 요나에게 임하십니다.
물고기 뱃속에서 나온 뒤 시일이 좀 흘렀을 것입니다.
물고기 토사물을 뒤집어 쓴 채 기진맥진한 요나를 바로 니느웨로 보내실 그런 가학적인 하나님은 아니시죠.
성경은 축약되어 있기에 행간의 의미를 읽어내는 게 필요합니다.
거지꼴을 하고 니느웨 가서 전도하면 그 말을 누가 귀담아 듣겠습니까?
우리도 전도하러 나갈 때는 최대한 잘 차려입고 나가잖아요?
요나는 집으로 돌아가 몸도 추스르고 생각도 정리하고 니느웨 까지 갈 두어 달 여비와 물건들을 준비를 하며 어느 정도 시간을 가졌을 것입니다.
가까운 이들에게 이 사명에 대해서 의논도 했을 것입니다.
어쩌면 벌을 받았으니 그걸로 끝나셨으려나 기대도 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시 요나를 니느웨로 보내십니다.
그리고 요나의 전도에 마치 조폭들이 우르르 회개하듯 포악한 니느웨사람들이 회개하는 모습이 드라마틱하게 펼쳐집니다.
죄인이 회개하고 하나님을 믿는 것은 현실보다는 연출 된 드라마처럼 느껴지죠.
어떻게 저런 일이 일어날 수 있지?
자연세계에 사는 다수의 사람들 눈에 믿음은 허구의 드라마처럼 보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에 대해서도 주변사람들이 의아하게 생각하잖아요?
한때는 니느웨주민들처럼 회개하고 구원받아야 할 죄인으로, 구원 이후엔 요나와 같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제자로 따르는 게 우리의 삶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이것을 잘 깨닫고 도움이 될 교훈들을 잘 받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드립니다.
1. 먼저 두 번째 소명을 받고 니느웨 사역에 순종하는 요나에 대해서 살펴 보겠는데 요나에게서 여지없이 우리 모습을 발견합니다.
하나님은 이 사역을 요나가 거절했고 여전히 탐탁치 않게 여기는 것을 아시면서도 이 사명을 다시 요나에게 주십니다.
사명은 선물이고 사명은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그걸 모르고 요나처럼 겨우 겨우 순종하는 우리와 일하십니다.
이런 하나님에게서 우리가 사람과 더불어 일하고 함께 사는 방식을 배우면 좋을 것 같습니다.
저 사람은 가망이 없어 이렇게 속단하고 경멸하는 마음은 오히려 내가 회개해야 할 태도입니다.
예수님도 주님을 부인했던 제자들을 다시 다 찾아가서 사명을 주시잖아요?
오늘 요나로서는 여전히 반갑지 않은 이 사명을 받지만 1장과 다르게 행동합니다.
3절, 요나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일어나서 니느웨로 가니라
사명은 똑같이 엄중하고 위험하고 마땅치 않은데 요나의 마음은 달라졌습니다.
지난 주 물고기 뱃속에서 요나가 회개하고 구원을 경험하게 되잖아요?지옥에 가까운 환난을 겪어 본 사람은 하나님을 떠나지 못합니다.
하나님 없이 인생을 혼자서 이겨낼 수 없다는 걸 알게 되거든요.
그런 가운데서 심판하시는 공의의 하나님과 예수님의 대속의 십자가에 대한 영적 경험도 하게 됩니다.
주님 안에서 당하는 큰 시련은 사실 하나님을 만나고 구원을 얻는 속성 코스 같은 것이죠.
인생이 평탄한 사람은 여간 노력하지 않고는 대개 더딘 코스를 따라 가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하게 되면 이전처럼 세상과 하나님 사이에서 니느웨냐 다시스냐 취사선택하는 그런 무지한 용기는 사라집니다.
어린 양이 인도하시는 대로 따라가는 성도들은 적어도 취사선택을 포기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요나가 니느웨에서 해야 할 일 자체가 좋아진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로 따르고 싶지만 내가 원하는 것과 예수님이 요구하시는 게 다른데서 항상 갈등이 있잖아요?
성령님의 필터를 거치지 않고 나온 내 본성의 욕구들은 하나님의 뜻과 극명하게 배치됩니다.
혹시 비슷해 보일지 몰라도 내적 동기는 완전히 다릅니다.
만일 하나님의 명령이 니느웨가 아닌 남쪽 유다 같은 곳이었다면 요나도 순순히 따랐을지도 모릅니다.
남유다는 형제나라고, 자기 조국 북이스라엘처럼 앗수르의 침탈 아래서 똑같이 고통 받고 있잖아요?
요나의 문제점은 자기 판단을 신봉한다는 데 있습니다.
사람이 얼마나 자기를 맹신 하냐면 하나님이 틀렸다고 생각할 정도라는 걸 요나가 보여줍니다.
저 앗스르 백성은 심판해야지 구원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내 생각이 하나님 생각보다 더 낫다고 여기잖아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다른 길을 꺼내실까봐 기도로 묻지도 않고, 듣지도 않고, 얼른 먼저 내 머리를 써서 일하잖아요?지구상에는 78억개의 의견이 있다는 게 맞을 것입니다.
왕년의 여배우 네 분이 살아가는 프로를 잠시 보았더니 마당에 꽃나무를 심는데 어디에다 심을지 의견이 달라서 티격태격 다투고 있더군요.
가족들, 가까운 사람들이 다투는 이유가 큰 문제 때문이 아닙니다.
각자 방식으로 살아도 될 아주 사소한 문제를 갖고 왜 내 말대로 안하냐 서로 다투는 것입니다.
저희 집도 그런 가벼운 다툼이 종종 있습니다.
내 생각이 꼭 맞다고 판결한 사람도 남이 아니라 자기 자신들이죠.
하나님은, 예언서를 봐서도 알게 되지만 심판을 미루고 미루시잖아요?
우리는 너무 쉽게 심판을 합니다.
진리는 타협할 수 없지만 그 외에 문제들에서는 관용해야 함을 성경이 얼마나 우리에게 가르쳐 주십니까?
내 의견과 경험이 아무리 옳아도 항상 주님 말씀 아래에 놓아야 합니다.
만가지 말씀으로 가르쳐 놓으셨잖아요?
요나도 자기 생각이 맞는지 틀리는지는 말씀을 기준으로 해야 했습니다.
유일한 선민 내 조국, 이런 것은 민족의 신념이고 요나의 생각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모세오경에서 이스라엘은 이방을 향한 제사장국가라고 하셨습니다.
당연히 이방나라에 하나님을 전하는 게 분명한 하나님의 뜻이잖아요?
고린도후서 10장5절 모든 이론을 무너뜨리고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
말씀에 근거하지 않은 내 모든 생각들을 항상 사로잡아 그리스도께 복종시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가는 이 여정에서 요나처럼 다른 마음이 아니라 주님의 마음과 점점 더 일치되어 따르게 되길 간절히 축복드립니다.
2. 요나는 니느웨에 도착해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선포합니다.
3절, 니느웨는 사흘 동안 걸을 만큼 하나님 앞에 큰 성읍이더라
당시 앗수르의 수도인 니느웨는 현재 이라크의 모술입니다.
이라크전쟁 때 자이툰부대가 파병되었던 곳입니다.
드라마 태양의 후예의 모티브가 이라크 파병이었죠.
최근까지 IS가 장악했다 이라크 정부군이 탈환했지만 완전 폐허가 된 도시입니다.
역사를 보면 요나 시대의 앗수르는 고대 바벨론을 점령하고 일대의 패권을 잡았던 나라입니다.
요나선지자 이후 앗수르는 최강국으로 성장합니다.
그리고 삼십여년 뒤에 요나의 나라인 북이스라엘을 처참히 짓밟아 멸망시키고 남유다의 히스기야왕은 성전 금까지 다 벗겨 조공을 바치죠.
그러나 앗시리아는 그 잔혹함으로 인해 결국 백년 뒤에 신바벨로니아에 멸망당합니다.
오늘의 은혜를 이어갔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하나님이 그렇게 사이좋게 지내라고 하시는데 인간의 죄가 전쟁을 일으켜 죽이고 다투고 미워하다 결국 심판을 받는 것이죠.
우리에게도 경고하셨습니다.
갈라디아서5장14절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서 이루어졌나니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
그런데 이런 악독한 나라에 가서 심판을 경고하라고 하시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만일 심판이 목적이시라면 그냥 지진이든, 홍수든 내리시면 되잖아요?
가서 하나님이 심판하시겠다고 전하라는 뜻은 무엇입니까?
회개하면 용서해 주신다는 의미입니다.
요나가 그걸 몰랐을 리가 없지만 그래도 믿는 구석은 있었을 것 같습니다.
저 니느웨가 회개할 리가 없다는 것이죠.
테러반군단체인 탈레반에게 가서 복음을 전한다고 그들이 회개하겠습니까?
니느웨가 회개하는 게 불가능하다는 것은 발굴 된 앗수르 유적들이 말해줍니다.
유적지에서 발굴한 벽화들을 보면 점령국 사람들의 목을 베어 산처럼 쌓아놓은 부조도 있습니다.
철퇴로 머리를 때리고, 칼로 목을 베고, 사람의 가죽을 벗기는 장면들이 니느웨궁전 벽에 자랑스럽게 조각되어 있습니다.
성경 나훔서3장1절에서도 앗수르에 대해 이렇게 증거를 남겼습니다.
화 있을진저 피의 성이여 그 안에는 거짓이 가득하고 포악이 가득하며 탈취가 떠나지 아니하는도다
점령국에 대해서만 악독한 게 아니라 그 국민성 자체가 잔인하고 포악해서 서로 간에도 악이 떠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양민들을 심판하시겠다는 게 아닙니다.
역사와 성경 어디를 봐도 니느웨가 회개할 확률은 제로입니다.
그런 확신을 갖고 요나는 니느웨에 하나님의 심판을 외쳤을 것입니다.
4절, 요나가 그 성읍에 들어가서 하루 동안 다니며 외쳐 이르되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하였더니
그런데 믿지 못할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5절, 니느웨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높고 낮은 자를 막론하고 굵은 베 옷을 입은지라
사흘길을 걸어야 할 정도의 큰 성읍에서 단 하루 길을 걸으며 하나님의 심판으로 니느웨가 무너진다고 외쳤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 말을 듣고 금식을 선포하고 굵은 베 옷을 입고 하나님 앞에 엎드린 것입니다.
이 소식이 왕에게 까지 들어가자 왕은 전국민 금식 뿐 아니라 동물들까지 금식하라는 조서를 내립니다.
8절, 사람이든지 짐승이든지 다 굵은 베 옷을 입을 것이요 힘써 하나님께 부르짖을 것이며 각기 악한 길과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날지어다
꾸며 낸 이야기 같은 일이 벌어진 것이죠.
역사상 한 민족이 이렇게 단 기간에 집단으로 회개하고 하나님을 믿었다는 예는 없습니다.
이것이 과연 가능했던 일일까요?
3. 이 니느웨의 회개를 통해 구원을 얻는 회개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구원을 받으려면 죄를 회개해야 되는 데, 그러려면 먼저 죄를 알아야 합니다.
사람이 자기의 죄악을 인지하는 것은 대개 사회법, 도덕 윤리, 그리고 양심에 의해서죠.
니느웨처럼 국민성 자체가 잔혹하고 전체가 다 폭력적이라면 죄를 깨닫기가 더욱 힘듭니다.
수많은 범죄자들이 뉴스에 나오지만 그들이 형벌을 괴로워하지 자기 죄 때문에 괴로워하지는 않습니다.
예수님을 모를 때 죄 때문에 두려워 전전긍긍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도 성령으로 거듭나기 전까지는 죄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고 살았잖아요?
예수님을 믿으면서 그때 보다는 더 바르게 살아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은 죄 문제로 끙끙거리며 삽니다.
회개는 먼저 하나님 앞에 본질적인 죄의 인식으로 시작됩니다.
인간사회의 도덕적 차원으로 죄를 깨닫는 수준과는 다릅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심판과 지옥의 형벌에 대한 두려움을 동반하는 죄인식은 성령님의 역사로서만 가능합니다.
성령께서 뻔뻔한 양심에 무언가 강타를 하셔야 죄인식이 깨어납니다.
오늘 니느웨가 국가전체가 테러집단임에도 불구하고 절대적인 죄를 하나님 앞에서 인식하고 회개했다는 것은 성령께서 역사하셨다는 것입니다.
구약성경 시대나 신약성경시대나 현재의 교회시대나 죄를 깨닫게 하시는 것은 성령님의 사역입니다.
예수님께서 주님의 부활을 요나의 표적이라고 하셨죠.
이것은 단지 예수님이 사흘 만에 부활하신다는 뜻으로만 말씀하신 게 아닙니다.
마태복음12장40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시죠.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 속에 있으리라
그리고 이어서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41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음이어니와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으며
그러니까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사흘만에 살아난 뒤에 니느웨로 가서 회개와 심판을 전하고 니느웨가 회개하고 구원을 받잖아요?
그것처럼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 뒤에 성령께서 오셔서 죄인들을 회개시켜 구원을 얻게 하신다는 하나님의 시나리오를 보여주고 계신 것이죠.
요나라는 이름의 뜻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요나는 비둘기라는 뜻입니다.
이 괴팍한 선지자에게 비둘기라는 이름이 어울리기나 합니까?
비둘기하면 뭐가 떠오릅니까?
성령님을 비둘기로 표현하셨잖아요?
요나서는 구약의 복음인 것입니다.
어떤 분이 교회 블로그에 있는 요나서 1장 설교 밑에 이런 질문을 하셨더군요.
왜 하필 니느웨로 보내셨는지 알고 싶으시다는 거예요.
왜 니느웨입니까?
성령께서 회개시킬 죄인들의 상태가 포악한 우상숭배자 니느웨입니다.
그보다 더 점잖고 신사적일 것 같습니까?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조차 폭력적으로 십자가에 못 박잖아요?
그런 포악한 우리 죄인들을 위해 주님께서 자신을 내어주시고 우리를 되찾으신다는 게 요나서의 복음입니다.
물론 죄를 회개하기만 한다고 구원받는 것은 아닙니다.
구원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이 내 죄 때문이고 그걸 믿을 때 의롭게 된다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그러나 그 믿음에는 회개가 반드시 동반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참 회개의 모습을 오늘 니느웨 주민들이 어떻게 구현해 내고 있습니까?
5절, 니느웨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
먼저는 심판을 경고하시는 하나님을 믿었다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죄인의 마음에 역사하시면 하나님도 믿어지고 심판도 믿어집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는 금식을 선포하고 베 옷을 입었다고 합니다.
그 심판이 내 죄를 겨냥함을 인식하고 처절하게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게 됩니다.
세 번째는 악한 길에서 완전히 떠났다는 것입니다.
8절, 힘써 하나님께 부르짖을 것이며 각기 악한 길과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날 것이라
하나님이 이들이 말 뿐이 아니라 악한 길에서 떠난 것을 보셨습니다.
10절, 하나님이 그들이 행한 것 곧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보시고,
그리고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리라고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니라
우리에게 이런 회개의 심령과 돌이키려는 행위들이 있는지 조사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 당시 니느웨의 40일은 어땠을까요?
자기 악행을 회개하고, 겸손하게 베옷을 입고, 서로에게 잘못한 것을 고백하고, 하나님의 자비를 부르짖어 구하는 니느웨는 천국이 아니었을까요?
잘 사는 곳이 천국입니까?
용서하고 사랑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면 그 곳이 천국이잖아요?
구원을 선포하시기 이전에 벌써 니느웨가 천국입니다.
예수님의 우주적인 교회는 회개하고 거듭난 영혼들의 모임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많이 모인 지상 교회라면 천국이나 다름없는 것이죠.
초대교회 때 회개하고 성령충만을 받은 모습에서 보여주셨잖아요?
그걸 깨뜨리기 위해 사탄이 아나니아와 삽비라에게 역사해서 초대교회에 큰 상처를 입혔던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회개한 공동체에서 살아가는 것 자체가 큰 축복입니다.
우리 가족들이 회개하고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간다면 가정에 하나님나라가 임하신 것입니다.
우리 모두에게 모든 가족들에게 회개의 은혜가 임하시길 축복드립니다.
난 성령께서 죄인식과 회개의 은혜를 주신 것 같지 않다고 생각되신다면 말씀에 근거해서 그냥 회개하십시오.
그리고 예수님을 구주로 믿으시면 됩니다.
미워하지 말랬는데 미워한 것 회개하고, 욕심내지 말라고 하셨는데 욕심낸 것 회개하고, 남보다 잘났다고 생각한 것 회개하고, 복음을 전하라고 했는 데 그렇게 못하는 것 회개하고.
그러다보면 점점 죄에 민감해 지고, 성령께서 회개케 하는 역사를 행하실 것이라고 믿습니다.
니느웨사람들의 회개가 구원에 유효한지를 따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40일을 지켜보고 뜻을 돌이키셨고, 예수님이 인정하셨잖아요?
마지막 때 니느웨사람들이 일어나 당시 예수님의 전도를 받지 않은 이스라엘사람들을 정죄할 거라고.
니느웨 사람들의 회개와 구원을 인정하시는 것입니다.
옛날엔 집회에 가서 실컷 회개하면 은혜 많이 받았다고 했죠.
그래서 교회가 부흥했고 잘 사는 복도 받았을지 모릅니다.
요즘은 어떻습니까?
내 욕심을 지지해 주는 설교를 들으면 은혜 받았다고 합니다.
죄를 회개하고 돌이켜야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임하는 것은 변함없는 믿음의 원칙인데요.
오늘 니느웨에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은혜와 자기 죄를 자백하며 눈물로 회개하는 모습은 참 아름답습니다.
이 중에 오직 단 한 사람 요나만 비뚤어져 있습니다.
우리도 종종, 하나님의 말씀보다 내 감정과 생각을 우기며 요나처럼 마음을 강팍하게 가집니다.
그러나 우리의 약함, 약점을 아시는 하나님은 요나의 불충분한 사역도 인정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12장41절에서 말씀하시잖아요?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음이어니와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한 게 요나의 전도 때문이라고 공을 요나에게 돌리십니다.
지난 주도 살펴보았지만 니느웨사역이 요나에겐 정말 그동안 쌓아온 공든 탑을 한순간 무너뜨릴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요나가 앗수르에서 살아 돌아온다는 보장도 없잖아요?
혹시 니느웨가 회개라도 한다면 그 또한 고국에 발을 못 들여 놓을지도 모릅니다.
이런 불안한 마음으로 고향 가드헤벨에서 니느웨까지 무려 700킬로를 걸어가 순종을 한 것이잖아요?
저 같으면 요리조리 피하며 안 갔을 것 같습니다.
제가 신학교에서 공부할 때 안식년을 맞아 한국에 공부하러 오신 인도선교사님을 알고 지냈습니다.
이분은 여성이신데 독신으로 인도에 가셔서 삼십여년 째 사역하고 계십니다.인도 캘커타에 학교를 세우고 1500명이 넘는 학생들에게 교육을 통해 복음을 전해오셨고 새롭게하소서에도 출연하신 적이 있습니다.
지난 주에도 소식을 전해 오셨는데 코로나로 인해 학교가 작년부터 계속 휴교상태라고 합니다.
학생이 없으니 함께 일하던 교사들 수십명이 다 집으로 돌아가고 미션에 지금 혼자 남아 계시다고 하더군요.
휑한 학교 건물을 여선교사님 혼자 남아서 밤낮 지키고 있는 것이 어떨지 상상이 되잖아요?
결국 우울증이 생겼는데 우울증이 죽음까지도 생각할 만큼 무서운 병이라고 하시며 기도를 부탁하시더군요.
머리가 하얗게 세고 70을 바라보는 아주 빼빼 마른 선교사님 모습이 떠올라서 참 걱정이 되고 마음이 아팠습니다.
제가 답장을 보냈습니다.
‘선교사님, 평생 주님을 위해 충성하다 얻은 질병, 힘들고 괴롭겠지만 하나님은 빛나는 훈장같이 보실 거예요. 잘 견디고 이길 힘을 주실 것을 믿고 기도할께요’
그랬더니 이 선교사님이 이런 답을 보내왔습니다.
‘정말 그럴까요, 지금 이런 결과를 보니 제가 한 것이 없는 것 같아서요’
그동안 수고와 피와 땀과 눈물은 무엇이게요?
요나가 마지못해 순종한 것조차 예수님께서 인정해 주시잖아요?우리도 예수님을 잘 따라보려고, 또 복음을 전하고 사람들을 섬기려고 애를 쓰며 살지만 결과를 볼 때 낙담되고 실망스러울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의 온전치 못한 순종일지라도 귀하게 보시고, 적은 열매도 보배롭게 기념해 주실 것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요나는 이제는 하나님을 떠나지 못할 능선을 넘었지만 여전히 그 마음이 하나님과 하나 되지는 못했습니다.
그래도 힘껏 순종한 요나를 통해 하나님이 니느웨 영혼들을 구원하셨고 요나가 전도 잘했다고 칭찬하십니다.
우리가 본성과 다투고 싸우며 예수님을 따르고 순종하는 모든 것을 주님께서 보고 계십니다.
잘 했다고 칭찬하실 것입니다.
다만 회개의 열매가 있는지를 잘 살피고, 항상 내 생각을 하나님의 말씀에 맞추고, 그리스도께 복종하도록 노력한다면 대단한 일은 아닐지라도 평생 주님의 일에 참여하며 보람 있게 따를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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