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나

니느웨에 가서 외치라 (요나서1장)

남수연 2021. 7. 8. 11:50

https://www.youtube.com/watch?v=n_qXEc9nPW8 

오늘부터 몇 주간 소선지서인 요나서 말씀을 배우려고 합니다.

요나서는 유치부 아이들도 다 아는 성경이죠.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은 못된 선지자를 고래가 집어 삼켰고, 삼일 뒤에 다시 토해냈다는 이야기는 아이들이 좋아할 동화이야기 같습니다.

신약성경에 보면 이 요나서에 대해 예수님께서 두 번 언급하십니다.

마지막 날에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한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치 않은 이스라엘을 심판하실 것라고 하셨죠.

또 예수님께 그리스도라는 표적을 구하는 바리새인들에게 선지자 요나가 삼일 물고기 뱃속에 갇혔던 것처럼 인자도 삼일을 땅 속에 있다 나올 것이라며 요나사건을 주님의 부활과 결부시켜 말씀하셨죠.

쉽게 읽혀지는 내용에 비해, 담고 있는 의미는 묵직한 성경이 요나서입니다.

그런 중요한 믿음의 내용들은 차차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도 주님을 잘 따르려고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우리에게 꼭 필요한 은혜를 주시리라 믿습니다.

 

1. 요나서를 잘 이해하기 위해서 선지자 요나와 사역에 대해서 먼저 알아보겠습니다.

1) 1절에 보면 요나가 누구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임하니라

성경의 예언서들의 특징은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임한 사람이 선지자입니다.

요나 역시 공식적으로 하나님이 세우신 선지자인 것입니다.

요나 선지자에 대해서는 다른 구약성경 한 군데에서 그 행적을 더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열왕기하14장25절입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종 가드헤벨 아밋대의 아들 선지자 요나를 통하여 하신 말씀과 같이 여로보암이 이스라엘 영토를 회복하되 하맛 어귀에서부터 아라바 바다까지 하였으니

이 말씀에서 요나선지자에 대해 더 많은 정보를 얻을 수가 있는데요.

요나는 하나님의 종이었고, 가드헤벨 출신이었다고 합니다.

가드헤벨은 예수님의 고향이었던 갈릴리 근처의 한 성읍입니다.

그리고 요나선지자가 활동했던 시기가 나오죠.

북이스라엘의 여로보암2세 왕 때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아다시피 북이스라엘은 남유다보다 우상숭배에 먼저 발을 들여 놓고 타락했다 먼저 멸망합니다.

요나는 엘리사선지자가 죽고 난 뒤, 아모스, 호세아가 나오기까지 그 사이에 활동한 선지자입니다.

요나가 본문 이전 예언사역에서 하나님께 받은 말씀을 여로보암왕에게 전했는데, 그것은 아람나라에게 뺏겼던 영토를 대거 회복시켜 주시겠다는 예언이었습니다.

그리고 여로보암왕 당대에 그대로 실현됩니다.

선지자로 부름을 받아도 이런 예언이라면 좀 할 만 할 것 같습니다.

이 정도니 요나선지자의 입지가 어느 정도일지 감이 좀 잡히죠.

요나는 국왕을 상대 할 만큼 당대에 인정받던 선지자였습니다.

요나선지자의 이렇게 높아진 자아가 오늘 본문의 상황을 만들어낸 데 관계없지는 않을 것입니다.

 

2) 이런 요나에게 하나님께서 다시 새로운 사명을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명은 요나가 도저히 순종하고 싶지 않은 사명이었습니다.

2절,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향하여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되었음이니라 하시니라

니느웨는 앗수르의 수도인데 이스라엘과는 원수의 나라입니다.

바로 그 앗수르의 심장부인 니느웨에 가서 외치라는 것입니다.

‘너희들의 악독을 하나님이 다 보셨는데 이제 그 벌로 너희 나라를 멸망시키겠다’

여러 가지 면에서 이 명령은 납득도 안되고, 하고 싶지도 않고, 하기에도 두려운 사명이었습니다.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명령이 좀 만만한 것도 있지만 도저히 순종하기 힘든 그런 것도 있잖아요?

어떤 특정한 죄를 끊으라는 것, 순종하기 쉽지 않죠.

누군가를 용서하라는 것, 진짜 순종하고 싶지 않죠.

하나님의 뜻이 내 뜻과 얼추 비슷할 때 우리는 순종을 잘 하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이 내 생각과 다를 때 그걸 순종하려고 해보면 우리가 얼마나 내 고집대로 하려고 버팅기는지를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요나가 버팅긴 이유를 몇 가지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앗시리아는 세계사에서도 정복한 나라에 대해 잔혹하기로 유명합니다.

이스라엘을 위시한 팔레스타인 나라들에겐 공포의 대상이었죠.

열왕기서에 보면 북이스라엘도 다른 나라들처럼 앗수르에 조공을 바쳤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성경에 앗수르 군사들이 북이스라엘을 공격해 얼만큼 잔인하게 사람들을 죽였는지 끔찍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니느웨를 심판하시겠다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런 악독이 하나님 앞에 상달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안 믿어서 심판하시려는 게 아닙니다.

약한 나라들이 저희대로 편안히 살게 두지 않고 가서 파괴하고, 광탈하고, 무수한 생명을 아주 잔인한 방법으로 살상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내적으로도 수많은 범죄와 인륜을 어기는 타락들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흔히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지옥 간다고 전도하기도 하는 데 그것은 오해의 소지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안 믿어서 심판을 받는 게 아니고 자기 죄 때문에 심판을 받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갓 피조물인 인간이, 명백히 존재를 드러내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평생 악을 행한 것에 대한 죄값을 받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가 심판을 면하게 된 것은 예수님이 내 죄값을 대신해 형벌을 당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죠.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저들이 구제받을 길을 거절했기에 이미 자기 죄로 인해 확정 된 심판의 상태에 있다는 뜻입니다.

나중에 요나선지자 이후 불과 몇 십년 뒤 결국 북이스라엘은 이 앗수르제국에 참혹하게 멸망을 당합니다.

그런데 하필 그 악독한 원수 나라에 가서 회개를 선포하라는 것입니다.

요나가 그 명령에 순종하고 싶었겠습니까?

이 사역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요나에겐 최악의 결과를 가져올 것이 뻔하죠.

1972년 박정희 정권 때 분단 이후 최초의 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되었습니다.

직전까지 서로 상대방의 목을 따겠다고 도발하던 남북간이었는데 갑자기 이 일이 성사된 배경에는 남북간의 비밀접촉이 먼저 있었기 때문입니다.

박대통령이 이후락정보부장을 밀사로 보내 김일성을 만나게 했던 것이죠.

그때 이부장이 청산가리를 챙겨갔다고 합니다.

아무도 모르게 북한에 들어가는 데 거기서 어떻게 될지 모르니 자결할 준비까지 했던 것이죠.

요나가 니느웨로 가서 회개하라 외치다 잘못되면 앗수르사람들에게 붙잡혀 끔찍하게 죽을 것입니다.

만일 니느웨가 회개해서 하나님이 심판을 철회하시고, 이 사실이 고국에 알려지면 그 민족의 분노를 어떻게 감당하겠어요?
요나에게는 생각할수록 하나님께 화가 나는 사명이었을 게 뻔합니다.

요나서를 찬찬히 읽어보면 요나의 분분한 심리상태가 느껴지는데요.

마치 ‘하나님은 뭐 이딴 식으로 일을 하시고 그래’ 이런 느낌입니다.

결국 요나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르지 않기로 결정 합니다.

그리고 짐을 꾸려 다시스라는 곳으로 가기 위해 배를 탑니다.

다시스는 구약성경에서 세상의 끝이라 여겼던 스페인의 항구도시입니다.

구약성경에 다시스가 많이 언급되는 데 에스겔서에 보면 각종 보화가 풍부해 무역의 중심지였다고 합니다.

묵상방에 올려드린 지도를 참고하면 되겠는데, 이스라엘의 욥바항구에서 4천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한없이 멀고도 먼 곳입니다.

요나는 왜 이렇게 먼 곳으로 가려고 했을까요?

3절에 보면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려 했다고 합니다.

이 말은 잠시 도피 한다기보다 아주 하나님 얼굴을 안 보고 살기로 했다는 의미입니다.

이제 선지자 사명도 다 접고, 하나님도 잊고 살아야겠다고 세상 끝 다시스로 떠난 것입니다.

자기를 못 찾으시게 하려는 게 아니라 아주 먼 곳에 가서 자기가 하나님 생각을 잊고 살고 싶었다는 것입니다.

가끔 하나님 앞을 벗어나고 싶은 생각이 들 때가 없으시던가요?
그건 인간의 본성 속에 들어있는 죄의 DNA입니다.

그런 생각이 혹시 들 때 화들짝 놀랄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원래 하나님 얼굴 안 보고 살려던 사람들이예요.

세상을 둘러보면 하나님이 없이 사람들끼리 살잖아요?

우리도 그랬던 사람들이고 지금도 핑계거리만 있으면 당장이라도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싶은 본성의 사람들입니다.

매일 하나님 없는 사람들 가운데 하나님과 관계없는 일만하며 살다보면 하나님이 없으신 게 금방 자연스러워집니다.

우리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계속 믿고 예수님을 주님으로 따른다는 게 기적 중에 기적이예요.

성령께서 우리 영에 하나님을 각인시켜 주시지 않으신다면 열심히 신앙생활 하는 것 같다가도 시험이 오면 이게 다 뭔가 싶은 회의감에 빠지게 되는 것이죠.

궐석성도라는 말이 있습니다.

교회의 자기 자리를 비운 성도를 말합니다.

교계지도자들은 코로나가 끝난 이후에도 이 궐석성도의 수가 30%까지 될 것이라는 우울한 전망을 내 놓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2020년을 기준으로 BC와 AC로 나뉘었다는 말이 생길 정도로 모든 분야에서 코로나 이전과 코로나 이후의 삶이 바뀌었다는 것이죠.

교회도 그걸 피해갈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오랫동안 교회 공동체를 떠나 일반사람들끼리 살다보니 그게 정상 같은 생각이 드는 것이죠.

요나가 그런 세상으로 떠나 하나님 부담 없이 살고자 했던 것입니다.

3절에 그런 복선이 깔리죠.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지라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여 그들과 함께 다시로 가려고 배삯을 주고 배에 올랐더라

요나서는 꼼꼼히 연구해 보면 의미를 잘 전달하고자 복선을 많이 깔고 아주 공들여 기록한 성경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명하신 니느웨가 아니라 다시스로 가려고 한다면 요나처럼 이런저런 이유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를 보내신 곳에서 믿음을 잘 지키고 견디고 사명을 다하시길 축복드립니다.

 

2. 이제 하나님의 낯을 피해 도망하는 요나를 위해 붙잡아 오기 위해 하나님은 큰 폭풍과 큰 물고기를 준비하십니다.

4절, 여호와께서 큰 바람을 바다 위에 내리시매 바다 가운데에 큰 폭풍이 일어나 배가 거의 깨지게 된지라

큰 폭풍은 하나님의 명령을 불순종한 요나선지자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이셨을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버거운 사명을 회피하려 먼 나라로 도망치는 초조하고 불안한 요나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셨겠습니까?

가능하면 더 어두운 배 밑바닥으로 내려가, 가능하면 빨리 하나님을 잊고자, 하나님께 등을 돌리고 웅크려 자고 있는 요나의 마음을 왜 모르시겠어요?

큰 폭풍은 하나님의 심판이 아닙니다.

그것은 요나를 다시 사명의 자리로 되돌리기 위해서입니다.

성도들이 때로 죄를 짓고 불순종하다 큰 고난을 당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심판이 아닙니다.

심판하시면 지옥이죠.

비록 우리의 죄로 인하고 우리 잘못에서 기인한 고난이라 해도 단순한 문책이 아니라 선한 길로 돌이키게 하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세게 때리시는 것은 그만큼 큰 역정을 내시는 게 아니라 고집이 세서 쎄게 개입하시는 것입니다.

사람이 얼마나 고집스럽게 안 고치려고 하면 하나님이 큰 폭풍을 보내, 타고 있는 인생의 배가 파선되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하시겠습니까?

거의 죽음 직전까지 가야 돌이키는 게 죄인들입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변하려고 감수해야 할 고통보다 변하지 않을 때 당하는 고통이 더 크다는 계산이 나와야 비로서 변하려 하잖아요?

하나님은 스스로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짐을 벗어버리는 성도들에게도 다시 찾아오셔서 회복시키고 사명을 주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너 싫으면 다른 사람 얼마든지 있다 이럴 것 같지만 그건 사실 우리 생각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고쳐 가시며 끝까지 함께 일하십니다.

오늘 뒷부분은 다 읽지 않았지만 이 폭풍에서의 결말을 아실 것입니다.

예사롭지 않은 풍랑이 점점 심해지자 뱃사람들은 신이 노여워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누구의 잘못으로 이런 재앙을 만났는지 제비를 뽑았는데 바로 요나선지자가 지목됩니다.

제비뽑기는 하나님께 달려있다고 하잖아요?

사람들이 복불복이라고 하는 것 안에도 하나님의 섭리가 개입되십니다.

자초지종을 들은 사람들이 어찌해야 할지를 물을 때 요나는 자기를 바다에 집어 던지면 풍랑이 멎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결국 선원들은 요나를 바다에 집어 던지자 배를 집어 삼키려던 폭풍이 곧 그칩니다.

요나는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자신을 집어 던지라고 했을까요?

하나님이 불순종한 자신을 벌주시려고 풍랑을 일으키셨다면 당연히 회개하고 다시 돌아가면 되는 것이잖아요?

그런데 요나는 그냥 바다에 빠져 죽겠다는 것입니다.

죽을지언정 니느웨는 못 가겠다는 고집이었는지, 아니면 거기까지 쫒아오신 하나님께 대한 반항심이었을까요?

요나가 선지자이지만 하나님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것 같습니다.

뒤에도 보면 요나는 번번히 이럴 바엔 차라리 죽어버리겠다고 합니다.

죄인들의 하나님을 향한 뻔뻔한 항변이 그렇습니다.

하나님, 정말 이러시면 저 다 때려 치울 겁니다.

저 죽어버리면 하나님 속이 편하시겠습니까?

저 이제부터 막 살 거예요.

얼마나 다양한 태도로 우리가 종종 하나님께 으름장을 놓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망가지고 싶어도 절대 자기 생각대로 망가져지질 않습니다.

죽이실 생각이 아닌데 빠져 죽겠다는 요나를 위해 하나님은 이미 큰 물고기 구조선을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절망의 순간에 하나님이 보내주신 구조의 손길에 눈물 난 적이 얼마나 많은지요.

하나님이 우리를 이끄실 때도 큰 폭풍만 준비하시는 게 아니라 큰 구조선도 준비하신다는 걸 아신다면 혹시 풍랑을 만날 때도 주님을 신뢰하고 인내할 수 있는 것입니다.

 

3.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요나를 니느웨로 보내셔야만 했을까요?

요나서는 하나님의 인류 구원의 성취에 있어서 성도들의 역할을 명시합니다.

특히 하나님의 구원이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모든 나라를 위한 것임을 명백히 하시는 것입니다.

신약시대 베드로사도만 해도 로마사람 고넬료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고 성령이 임하시는 걸 보고 혼란에 빠졌었죠.

그때 제자들조차도 이방인들에게도 구원이 계획되어 있다는 걸 새까맣게 모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 옛날 요나선지자를 통해서 하나님은 진작에 이방인 죄인들도 구원하실 것을 보여주셨는데 말이죠.

구약성경시대에는 이스라엘을 이방나라를 위한 제사장나라로 부르셨다고 분명히 밝혀 놓으셨죠.

출애굽기19장6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제사장나라이면 하나님과 다른 나라의 중재자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그것을 감당치 못한 것을 호세아서에서 책망하시죠.

너희가 내 말씀을 버렸으므로 나도 너희를 버려 제사장나라가 되지 못하게 하였느니라

그리고 신약시대에서 베드로사도는 이제는 바로 우리가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했고, 요한계시록도 이 사실을 명시하죠.

요한계시록 1장6절 그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우리 구원받은 성도들은 아직 복음 밖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구원의 소식을 전해야 하는 사명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모든 사람들은 둘 중 하나인 것이죠.

복음을 들어야 하는 사람이냐, 복음을 전해야 하는 사람이냐

전도를 받아야 하는 사람이냐, 전도해야 하는 사람이냐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구원을 전인격으로 믿고, 성령을 받으면 어떻게 됩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죠.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땅 끝까지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구원받았다는 것은 성령을 받았다는 것이고 성령이 임하시면 반드시 자기가 믿고 구원받은 그 예수님의 복음의 증인이 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느 정도 복음전파의 부담을 안고 살아가지 않는다면 아직 더 전도 받아야 하는 상태일지도 모릅니다.

성도, 제자, 그리스도인, 증인, 이런 우리의 이름이 벌써 무엇을 위해 살아가야 하는지를 말해주고 있잖아요?

요나가 하나님께 받은 말씀을 가서 전해야 되는 선지자였던 것처럼요.

나 하나만 복을 받고 안전하게 살길 원하는 것은 죄인들이 만들어낸 세상의 기복종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참 신앙에서 기복종교를 벗겨내야 합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나와 이웃을 위해 참된 복을 구하는 게 우리의 사명인 것이죠.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순간 우리에게 주어진 본분을 요약하면 두 가지입니다.

평생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과 예수님의 구원의 십자가를 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성령께서 우리 안에 오시는 순간, 이 땅의 내 일생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를 직관하게 됩니다.

어떤 일을 하며 어디서 살든, 지금 가난해서 내 생활조차 감당하기 힘들어도, 이 두 가지를 위해 살아야 함을 깨닫게 되고 그것을 목적으로 모든 생각과 삶이 다시 정렬되게 되는 것이죠.

우리 평생에 거듭난 새 사람은 매순간 성령충만을 통해서 더 풍성하고 견고하게 해야 합니다.

옛사람은 성령님의 지도와 말씀과 경건의 훈련을 통해서 계속 길들이고 다스려야 합니다.

이때 고난과 환경도 연단을 돕는 것이죠.

그러니까 사랑, 인내, 충성, 이런 것들이 성령의 열매이지만 우리에게 사랑을 배우라, 겸손해라 그렇게 한편 말씀하는 것입니다.

옛사람이 잘 조련되면 새사람과의 갈등이 적어지고 조화로운 신앙인격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또 우리가 항상 성령님으로 충만하지 못하잖아요?
그럴 때 옛사람이 잘 훈련된 사람은 크게 동요되지 않고 견고해 보이는 것이죠.

이 옛사람의 죄성이 다루어지지 않고 종교적 열정이 넘치는 사람들 때문에 헷갈릴 때가 많죠.

그런 사람은 좀 변덕스러운 편입니다.

요나도 그런 사람에 가까운 것 같습니다.

본성의 훈련은 세상의 인성교육과 수련을 통해서도 어느 정도 가능합니다.

그래서 불신자분들 중에도 본성을 잘 길들인 사람은 인품이 좋고 선해보이기까지 하죠.

그렇다고 죄성이 없어진게 아니고 어느 방면이든 약한 쪽에서 죄를 짓게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성도들은 주님을 닮는 성화와 복음 전파의 사명, 이 두 가지는 함께 가야 서로 온전해집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올바른 믿음과 인격으로 키워 가시는 데 세상을 향한 사명을 감당할 때 성장하게 하십니다.

경기를 뛰지 않고 매일 훈련만 하라고 선수를 뽑지는 않습니다.

경기를 뛰는 선수와 몸만 풀고 있는 선수의 실력은 점점 벌어질 게 분명하죠.

이번에 미국 마이애미의 아파트가 팬케이크처럼 붕괴되어 많은 인명 사상이 있었죠.

결혼 59주년을 앞두고 아들과 함께 식사를 하고 아파트로 돌아갔던 노부부가 그날 밤 함께 목숨을 잃었습니다.

옆 동에 살던 아들내외는 식사 후 자기들의 집으로 돌아가는 바람에 재앙을 피할 수가 있었다고 합니다.

아들은 믿을 수가 없다며 연신 눈물을 훔치는 뉴스를 보았습니다.

그 아파트가 무너져 내릴 것을 확실히 알고 있었다면 부모들을 거기로 들여 보냈겠습니까?

무슨 수를 써서라도 부모들을 들여보내지 않았을 것입니다.

지금 내 부모가, 내 형제가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들의 행한 대로 심판을 받을 게 확실하다면 어떻게 복음을 전하지 않겠습니까?

그들이 향하고 있는 곳이 어떤 곳인지 분명히 우리는 알고 있는데 사지로 향하는 그들을 방관하고 있는 것이잖아요?

 

말씀을 마칩니다.

오늘은 우리에게 각자에게 주신 사명을 돌아볼 수 있었길 바랍니다.

우리교회는 처음 개척했을 때부터 복음전파의 사명을 감당할 교회되길 많이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해가 거듭될수록 그때의 기도대로 하나님께서 그 마음을 주셔서 함께 협력할 성도님들을 보내시는 걸 보며 놀라울 뿐입니다.

구한 말, 아름답고 꽃다운 젊음들이 가난한 이곳에 와서 복음을 전해주지 않았다면 지금의 이 모든 영광이 어찌 가능했겠습니까?

우리에게 주신 복음과 삶의 복을 낮은 곳, 필요한 곳으로 계속 흘려보낼 때 하나님께서도 계속 공급해 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우리와 우리가 돕는 곳이 함께 풍요로워지는 게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 복되고 보람된 사명을 예수님 앞에서 잊지 않고 행하며 간다면 우리 개인이나 우리교회나 항상 마르지 않는 복과 꺼지지 않는 빛으로 세상을 비출 수 있게 하시리라 확신하며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