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더

에스더서3장 (모르드개와 하만)

남수연 2022. 3. 2. 00:34

https://www.youtube.com/watch?v=1hOaOZK6JT0 

 

지난 2장에서는 에스더가 페르시아제국의 왕후가 되고 앞으로 유다 민족의 안전과 이익이 보장될 것을 기대하며 끝이 났죠.

그런데 이어진 오늘 3장에서 빌런 하만이 등장하며 상황이 급반전됩니다.

순식간에 유다인들은 몰살 될 위기에 처합니다.

그러나 이 일 또한 우연히 일어난 일은 아닙니다.

에스더서가 가르치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와 사탄의 나라가 실제로 교전 중이라는 사실입니다.

요즘 우크라이나를 보니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 게 전쟁이라는 게 실감이 납니다.

하나님이 보이지 않지만 막후에서 일하시듯 사탄의 무리도 보이지 않지만 엄연히 우리를 가격해 피해를 입힙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에, 우리도 하나님과 함께 한다면 에스더서의 결말처럼 우리는 반드시 승리합니다.

하나님이 역사와 우리 삶을 그렇게 인도하신다는 견고한 확증을 에스더서에서 우리는 배우는 것이죠.

우리에게서 여전히 해소되지 않은 문제들, 실패하는 이유에 대해서도 오늘 말씀을 통해 잘 이해되길 원합니다.

살면서 여러 가지 시험과 문제들을 만날 때 보이지 않는 원인을 이렇게 파악하고 대응하면 감당하지 못할 시련은 없을 것입니다.

 

1. 모르드개와 하만의 갈등으로 인해 유다 민족 전체가 멸망할 위기로 내 몰리게 되었습니다.

1절은 ‘그 후에’라고 시작합니다.

시간적으로는 에스더가 왕후가 되고 한 5년 되는 때입니다.

그 사이 왕궁의 권력 구도에는 큰 변화가 일어납니다.

1절, 그 후에 아하수에로 왕이 아각 사람 함므다다의 아들 하만의 지위를 높이 올려 함께 있는 모든 대신 위에 두니

하만이라는 사람이 왕의 다음 권력의 2인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2절을 보면 왕의 모든 신하들에게 하만을 향해 꿇어서 절하라는 왕의 명령이 있었다고 하죠.

꿇어 엎드려 절하는 건 종이 주인에게 하듯 절대적 복종을 의미합니다.

이 당시 모르드개는 궁중에서 직무를 맡고 있었습니다.

왕의 명령대로 하만이 지나갈 때마다 모두가 절했지만 모르드개만은 하만에게 꿇어 절하지 않았습니다.

하만이 나타나자 일제히 꿇어 엎드리던 중에 모르드개 홀로 우뚝 서 있었다는 것입니다.

오래전 직장인일 때 단체로 조문 갈 일이 가끔 있었습니다.

지금은 장례문화가 좀 바뀌어서 헌화하고 묵념하는 것이 통용되지만 그때는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윗분들이 분향을 하고 단체로 고인에게 절을 하는데, 저 혼자 우뚝 서서 기도했던 기억이 납니다.

옆에 서 있던 상주분들게도 좀 민망했었습니다.

직장생활 하시며 그랬던 경험들이 다 있으실 것입니다.

이렇게 홀로 우뚝 선 모르드개를 동료 신하들이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았다고 합니다.

3절, 너는 어찌하여 왕의 명령을 거역하느냐하고 날마다 권하되

‘대체 뭐가 잘나서 혼자 왕의 명령을 거역하고 고집을 피우지?’

‘이러다 우리 모두한테 불똥이 튀는 것 아냐?’

이런 생각들을 했을 것입니다.

모르드개는 그들의 집요한 간섭에 결국 하만에게 절하지 않는 이유를 댑니다.

‘나는 유다인이다. 그래서 하만에게 절하지 않는다’

하만은 자기가 지나갈 때마다 모두가 황급히 꿇어 엎드리는 권력의 맛을 만끽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 사람, 모르드개가 꿇지 않자 분노가 훨훨 타오릅니다.

그리고 마침 신하들이 모르드개가 유다인이라는 사실을 하만에게 일러 바칩니다.

원수 진 일도 없을텐 데, 사람 심리가 참 묘하죠.

동료 신하들은 모르드개가 유다인이라 절하지 않는다고 굳이 전하고 불난 집 불구경을 시작합니다.

4절, 그들이 모르드개의 일이 어찌 되나 보고자 하여 하만에게 전하였더라

하만의 불같은 분노는 모르드개 뿐 아니라 유다민족 전체를 집어 삼킬만큼 타올랐습니다.

6절, 하만이 모르드개만 죽이는 것이 부족하다고 생각하고 아하수에로의 온 나라에 있는 유다인 곧 모르드개의 민족을 멸하고자 하더라

이 일로 인해 페르시아 전역의 모든 식민지, 이스라엘 본토에 있는 유다인들까지 전부가 몰살 당하게 된 것입니다.

학자들은 당시 유다인들 수가 600만명 정도로 추정합니다.

마치 히틀러가 600만명의 유대인을 학살한 것과 같은 상황이죠.

약간 곁길이지만 하나님이 왜 그 많은 유대인들의 학살을 허용하셨을까요.

에스더서에서는 구원해 주시고 왜 히틀러에게서는 구원해 주지 않으셨냐는 것이죠.

그들이 에스더서와 다른 것은, 예수님이 오신 다음엔 예수님 안에서만 구원과 보호와 은혜가 보장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밖에서는 여전히 죄와 사망, 악인과 사탄의 고통스런 지배 구조에 속할 수 밖에 없는 것이죠.

신약시대는 예수님을 거절하는 이상, 설령 유대인이라고 특별하지 않은 것입니다.

페르시아제국의 절대 권력을 등에 업은 하만은 일사천리로 유다민족 말살 작전에 돌입합니다.

7절을 보면 아하수에로왕 제 십이년 첫째 달에 모여서 학살의 날을 정합니다.

아마 신년맞이 점괘를 보는 중에 유다인들을 죽일 신의 날을 받기 위해 제비를 던졌을 것입니다.

우리도 옛날에 새해가 되면 토정비결을 보며 올해의 운세를 점치고 했잖아요?

그날 제비 뽑기에서 공교롭게도 그해의 마지막 달이 나오게 됩니다.

7절, 무리가 하만 앞에서 날과 달에 대하여 부르 곧 제비를 뽑아 열두째 달 곧 아달월을 얻은지라

하나님의 손은 항상 우리를 위해 움직이고 계십니다.

하만은 당장 유다인을 멸절하고 싶을 분노에 차 있었지만 하나님은 그해의 가장 마지막 달이 걸리게 하신 것이죠.

잠언 말씀이 있잖아요?

16장33절, 사람이 제비는 뽑으나 일을 작정하기는 여호와께 있느니라

하나님은 대비할 시간을 벌어주십니다.

그동안 피할 길을 주시는 것이죠.

그것은 유다인들이 금식하고 기도할 시간을 얻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 피하면 피할 길이 열립니다.

우리는 자꾸 하나님 안에서 안전과 행복을 찾아야 합니다.

힘들 때 ‘이게 내 유일한 낙이야, 나 믿을 게 이거 밖에 없어’ 이런 것을 조심해야 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것이 항상 최고가 되어야 합니다.

또 우리 문제 중에 결론이 나지 않고 지지부진한 일이 있다면 그 또한 기도할 시간이라고 생각하면 틀림없을 것입니다.

사악한 하만은 먼저 날짜를 받아 놓고 아하수에로왕의 허락을 요청합니다.

그만큼 왕의 신임이 두터웠다는 것이죠.

하만의 방법을 보면 악인의 흉계가 어떤지를 알 수 있습니다.

하만은 사실을 왜곡되게 왕에게 보고하는 한편, 은 만 달란트라는 어마어마한 뇌물로 왕의 허락을 받아 냅니다.

전국에 보낸 공문은 특히 마귀적입니다.

정해진 그 날에 남녀노소 모든 유다인들을 마음대로 죽이고 그 재산을 탈취하라는 것입니다.

왕명이라는 명분을 주면 사람들은 결국 탐욕을 위해 움직인다는 걸 하만이 너무 잘 알고 있는 것이죠.

이 정도 궁지에 몰리면 유다민족이 빠져나갈 방법은 없다고 보아야죠.

그러나 하나님의 능력을 앞으로 에스더서가 보여 줄 것입니다.

 

2. 그렇다면 모르드개는 왜 하만에게 절을 하지 않아서 민족적 위기가 촉발되게 했을까요?

그 이유는 오늘 본문 모르드개의 대답에서 찾아야겠죠.

모르드개는 절하지 않는 이유를 ‘내가 유다인이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율법은 우상에게 절하는 것을 금합니다.

그러나 왕에게 꿇어 절하는 것은 성경에도 여러 번 나타나고 우상숭배의 의미와는 다릅니다.

모르드개가 그것 때문에 절하지 않았다고 보기는 애매합니다.

모르드개가 왜 꿇어 절하지 않았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그의 말대로 자기가 유다인인 것과 분명 관계가 있을 것입니다.

오늘 하만을 소개할 때 아각사람 함므다다의 아들 하만이라고 밝힙니다.

아각은 가나안 땅의 부족이었던 아말렉족속 왕의 호칭입니다.

하만이 아말렉 족속이라는 걸 알 수 있죠.

그런데 성경에서 하나님이 완전히 진멸하라고 하셨던 민족이 바로 이 아말렉족속입니다.

출애굽에서 홍해를 건너 진군할 때 이스라엘을 공격한 부족이 아말렉입니다.

이 전쟁에서 모세가 팔을 들고 기도하면 여호수아 장군이 이기고 팔을 내리면 졌기 때문에 아론과 훌이 양쪽에서 팔을 잡아 주었죠.

이 전투에서 승리한 뒤 하나님은 모세에게 말씀하십니다

출17장14절, 이것을 책에 기록하여 기념하게 하고 여호수아의 귀에 외워 들리라

내가 아말렉을 없이하여 천하에서 기억도 못 하게 하리라

16절, 이르되 여호와께서 맹세하시기를 여호와가 아말렉과 더불어 대대로 싸우리라 하셨다 하였더라

하나님이 맹세까지 하시고 대대로 싸우시겠다니, 유독 이 아말렉에 대해서는 뒤끝이 작렬하십니다.

한참이 지나 사울이 왕이 되었을 때 하나님이 또 다시 사무엘을 통해 사울왕에게 아말렉을 진멸하도록 명하십니다.

물론 호전적인 아말렉은 사사시대에도 계속 이스라엘을 괴롭히고 약탈을 일삼아 왔습니다.

사울왕은 이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대승을 거둡니다.

그런데 다 진멸하라고 한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아각왕과 좋은 물건들과 가축들을 전리품으로 챙겨 와 사무엘에게 큰 책망을 받습니다.

결국 아각왕은 사무엘의 칼에 죽임을 당합니다.

그 일로 인해 사울왕은 하나님께로부터 버림을 받고 다윗왕조를 선택하게 되시는 것입니다.

사실 에스더서는 이미 하만과 모르드개의 갈등의 숨겨진 근원을 2장에서부터 조금씩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지난 2장에서 모르드개를 소개할 때 베냐민지파이고 그 조상들 이름 중에서 기스, 시므이가 등장한 것을 보았죠.

이것은 곧 모르드개가 사울왕의 족보에 속했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각왕의 후손인 하만과 사울왕의 후손인 모르드개는 해묵은 갈등이 얽혀 있는 관계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모르드개에게 하만은, 절은 커녕 영원히 진멸해야 할 아말렉 자손인 것이죠.

게다가 조상인 사울왕이 아각왕을 죽이지 않아 왕조가 몰락한 뼈아픈 과거사도 있었던 것입니다.

그 하만에게 꿇어 절한다는 것은 유다인 모르드개의 신앙과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만도 저 괘씸한 모르드개가 자기 민족을 진멸했던 철전지 원수라는 걸 알게 된 것이구요.

이 둘의 후손이 천년이 지난 지금 다시 격돌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행간을 읽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대체 왜 아말렉 족속에 대해서 이렇게까지 진멸하도록 명령하셨냐는 것입니다.

심지어 하나님이 대대로 아말렉과 싸우시겠다고 하셨잖아요?

아말렉이 무슨 큰 민족도 아니고 하나님이 꼭 싸우셔서 멸절시키시겠다는 이유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말렉이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 나라를 무너뜨리려는 사탄의 세력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정체를 신명기 25장에서 모세를 통해 밝히십니다.

17절, 너희는 애굽에서 나오는 길에 아말렉이 네게 행한 일을 기억하라

18절, 곧 그들이 너를 길에서 만나 네가 피곤할 때에 네 뒤에 떨어진 약한 자들을 쳤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이스라엘을 공격했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을 몰라서가 아니라 알면서 두려워하지 않고 공격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몰라서 두려워하지 않았다면야 어쩌겠습니까?

하나님을 알면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대적하는 유일한 존재가 사탄입니다.

아말렉의 배후에 있는 사탄을 보고 하신 말씀입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계획, 성도들을 훼방하는 악의 세력들이 아말렉처럼 시대를 불문하고 존재합니다.

성도들과 하나님 나라, 교회를 공격합니다.

그런데 귀신들 군단이 성도들 눈에 나타나 대놓고 싸우겠습니까?

마귀와 생각이 같아 조종하기 쉬운 사람들을 통해서 목적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하나님나라를 대적하고 교회와 성도들을 공격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귀신보다 더 무섭습니다.

오늘 하만이 그렇잖아요?

일개 개인의 권력으로 한 민족을 말살하려는 악을 행하잖아요?

하나님도 사람을 쓰시고 사탄도 사람을 씁니다.

우리 주변의 여러 가지 환경들도 사탄이 사람을 통해서 역사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모르드개와 하만의 대결은 두 족보 안에서의 갈등, 두 민족 간의 역사가 표면적인 이유지만 그 본질은 하나님의 나라와 사탄의 세력과의 싸움입니다.

 

3. 이 영적 대결구도에서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 싸움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마지막 날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이 싸움은 우리에게 승패가 달린 것이 아닙니다.

우리 힘으로 악인의 배후에 있는 사탄을 상대할 수가 없기에 하나님이 대대로 싸우시겠다는 것이죠.

사탄과 세속적 왕의 권력을 등에 업은 하만은 절대 강자입니다.

그러나 성도들의 배후엔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이 에스더서가 우리에게 주시는 응원입니다.

그렇지만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모르드개와 에스더가 궁중 생활 중에 자기가 유다인인 것을 비밀로 했다는 것입니다.

하만에게 절하지 않는 이유를 밝히려다 보니 유다인인 것을 그제야 말한 것이잖아요?

왜 모르드개는 자신이 유다인인 것을 비밀로 했을까요?

일부러 숨겼다가 상황을 이렇게 반전시키려 한 것은 물론 아닐 것입니다.

아마도 유다인들이 가진 독특한 유일신 사상이 여러 민족이 섞여 살던 페르시아 시대에도 환영받지 못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유일신, 유일한 구원자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의 신앙관은 세상 속에서 지지를 받지 못합니다.

우리의 신앙을 진리 그대로 표출하면 세상은 욕하고 불쾌해 합니다.

진리를 원색적으로 말하면 ‘너희 예수님의 대속을 안 믿으면 너희 죄 때문에 지옥에 간다!’ 이거잖아요?

그래도 포로민 사회 초기엔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처럼 요직에 있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많은 부분 유다인들의 방패가 되었던 것이죠.

하나님을 견고히 의뢰하는 사람만이 가정의 방패이고 교회의 방패가 될 수 있습니다.

지금은 다니엘이 죽은 뒤 거의 오십년이 지난 시점이고 궁중에 유다인들의 입장을 대변해 줄 사람은 없었습니다.

느헤미야는 좀 더 뒤에 나오죠.

그렇기에 1차귀환자들의 성전건축을 방해하는 주변국의 상소문이 페르시아 궁중에 올라왔을 때 왕명으로 사업이 중단되기도 했던 것입니다.

모르드개는 이런 궁중의 상황에서 신변을 위해 유다인임을 밝히지 않았을 것입니다.

성도들이 사회생활 중에서 크리스천이란 것을 밝히기가 쉽지만은 않죠.

괜한 적대감을 보이거나, 가식적인 사람으로 단정하거나, 아니면 약점으로 알고 이용하려고 드는 사람들이 있잖아요?

교회 다닌다고 해 놓고 회식에서 술을 마시기도 그렇고 안 마시기도 그렇고.

조직 사회에 어울리는 게 많이 불편합니다.

그래서 많은 성도들이 믿음을 숨기거나 적극적으로 나타내지 않습니다.

크리스찬이라는 이름을 걸고 사회생활 하는 무게는 꽤 묵직하죠.

그러나 모르드개가 유다인임을 감춘 것은 하나님을 감춘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임을 숨긴다면 예수님을 숨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벨론 포로로 붙잡혀 간 이 포로 사회에 명령을 주셨습니다.

예레미야29장을 보면 예레미야가 이런 편지를 포로사회에 보냅니다.

세속사회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주시는 말씀입니다.

7절, 너희는 내가 사로잡혀 가게 한 그 성읍의 평안을 구하고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라 이는 그 성읍이 평안함으로 너희도 평안할 것임이라

이스라엘은 세속사회 바벨론, 페르시아에서 살면서 그들의 평안을 위해 기도해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성읍들의 평안이 이스라엘의 기도에 달려있게 하셨기 때문이죠.

이것은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택하셔서 제사장국가로 삼으실 목적과 여전히 동일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어디에 있든지 하나님의 민족으로 정체성을 밝히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며 섬겨야 했던 것이죠.

우리 주변의 평안이 내 기도에 달려 있습니다.

포로 1세대는 예레미야의 편지대로 그 사명을 잘 감당했습니다.

다니엘은 궁중에서 기도하는 사람으로 통했습니다.

성전재건을 다시 윤허하며 다리오왕은 성전에서 왕과 왕자들의 생명을 위해 기도하라고 합니다.

포로민 2세대에서도 그래야 했습니다.

결국 믿음을 드러내고 기도하는 사람을 안 믿는 분들도 속으로 신뢰하고 의지합니다.

그런데 모르드개와 같이 분명히 민족의 지도자급인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전혀 드러내지 않고 살았던 것이죠.

안식일인들 제대로 지켰을까 의문입니다.

좀 더 일찍 모르드개가 유다인임을 밝히고 다니엘과 같이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으로 인정받았다면 어땠을까요?

모르드개가 기도 못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에스더가 왕비가 된 뒤 4년이 지나도록 하나님을 숨겨오지 않고 자신의 성도 됨을 드러냈다면 어땠을까요?

하만이 왕비의 민족 유다인 전체를 살육할 계획을 세우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 속에서 예수님을 믿는 신분을 숨기고 하나님의 이름을 드러내지 않고 사는 것도 모르드개 경우나 같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세상의 빛과 소금이라고 하셨습니다.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어 놓는 사람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만일 우리가 스스로 빛을 덮어 놓는다면 먼저 내 마음과 삶의 주변부터 어둠이 들어와 자리 잡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적극적으로 따르지 않는 세속적인 삶은 결국 악의 굴레에서 빠져 나올 수 없이 우리를 옥죄고 꿇어 절하라 할 것입니다.

감추고 숨기고 현실에 타협하는 동안 내 안팎에 있는 대적 하만은 절대적 힘을 키워 마치 주인처럼 내게 굴욕적인 복종을 요구할 것입니다.

우리도 대부분 모르드개 같지 다니엘 같은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러나 결국 다니엘이 옳았던 것입니다.

모르드개는 대적 하만이 이제 그 절대적 권력을 휘두를 위기를 감지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우리가 세상과 마귀에 져서 망하게 하지 않으십니다.

어느 순간, 성령께서 감화하시면 분연한 마음이 일어납니다.

‘더 이상 안되겠다! 정면 승부하자!’

‘일어나자, 교회로 가자! 기도하자!’

‘그래, 나는 유다인 모르드개다!’

모르드개가 유다인임을 드러내야만, 하나님의 이름이 세상역사의 전면에 드러나고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증거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계속 믿음으로 예수님을 따르며 하나님을 드러내야 합니다.

그것만이 원수가 집채만큼 커져 나를 짓누르는 걸 막아내고 매일 강하게 살아가는 방법입니다.

항상 공격이 최선의 방어인 것이죠.

하나님이 그런 내 편이 되어 주시고 든든히 지원해 주실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모르드개와 하만의 싸움은 겉모양은 두 민족의 해묵은 감정의 결과입니다.

그러나 그 이면은 선과 악의 싸움, 하나님나라와 사탄의 나라의 싸움이고, 또한 우리 안에 있는 새사람과 옛사람과의 싸움입니다.

싸움을 피한다고 우리 삶이 평안한 게 아니라 맞서 싸울 믿음의 실력을 키우고 실전에서 이겨야 평안과 행복을 지킬 수 있습니다.

모르드개가 세상 속에 안전하게 묻혀 살 목적으로 하나님을 숨긴 것은 마귀이 세력을 키워 꿇어 절하게 될 환경을 만드는 결과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경각심을 가져야 할 부분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살길 결단한다면 하나님은 우리가 강해져 승리하도록 도우실 것입니다.

이렇게 나 자신의 믿음과 가정, 주님의 교회를 위해 담대히 영적 전투를 감당하고 승리하는 모두가 되시길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