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더

에스더서 4장 (죽으면 죽으리이다)

남수연 2022. 3. 10. 00:08

 

https://www.youtube.com/watch?v=-tcrZCP47eQ 

 

오늘 에스더서 4장 본문에는 다 아시는 유명한 말이 나옵니다.

죽으면 죽으리이다

번역하자면, ’그래, 죽기 밖에 더 하겠어?’ 이런 느낌일 것 같습니다.

이 말은 지금도 중요한 결단의 순간을 맞은 성도들에게 큰 용기와 담대함을 줍니다.

에스더서는 오래 전, 페르시아 궁중에서 일어났던, 민족을 살린 거창한 이야기라 현실의 나와 멀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동안 살펴 보았듯이 지금 내게 벌어지고 있는 영적 싸움을 이만큼 선명하게 보여주는 성경도 없습니다.

성도 한 사람의 생애는 한 민족의 영적 전쟁사 못지 않게 위대하고 파란만장합니다.

지난 3장에서 악의 화신 하만의 세력이 감히 필적할 이 없을 만큼 커지죠.

모르드개는 하나님 백성의 정체성을 앞세워 하만에 대적합니다.

그러자 하만은 유다인 말살이라는 오래 된 마귀의 흉계로 하나님나라에 도전합니다.

4장부터 이 도전에 모르드개와 에스더가 어떻게 응전하는지를 보여줍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매일 벌어지는 영적 싸움에서 승리하는 능력을 배우게 되리라 믿습니다.

 

1. 절대 권력으로 무장한 악의 화신 하만에게 모르드개가 어떻게 대항하는지를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유다인의 살육의 날이 공고되자 모든 유다인들은 아무 타당한 이유도 없이, 이런 일이 실제 일어난다는 게 믿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정말 마른 하늘의 날벼락이 이런 것이겠죠.

지난 3장에서 유다인 모르드개와 아말렉사람 하만의 역사적인 원수 관계를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대적인 사탄의 세력을 배후에 둔 아말렉의 후손 하만.

그에게 꿇어 절하기를 거절한 모르드개.

그 결과 피에 굶주린 하만의 주사위는 던져졌고 유다인들이 몰살당할 날은 12월13일로 정해집니다.

이 공고문이 페르시아와 모든 식민지 영토에 파발마를 통해 전해지고 모르드개도 이 참담한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1절, 모르드개가 이 모든 일을 알고 자기의 옷을 찢고 굵은 베 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 쓰고 성중에 나가서 대성 통곡하며

2절, 대궐 문 앞까지 이르렀으니

하만에게 절하지 않은 일 하나가 온 민족이 멸망할 위기로 이어질 줄 모르드개는 상상도 못했을 것입니다.

모르드개는 자기로 인해 발생한 이 엄청난 결과에 얼마나 황당했을까요?

사건이 너무 커졌습니다.

작은 일 하나가 엄청난 결과를 가져오는 경우가 종종 있죠.

때로 하나님은 우리의 작은 믿음의 동기를 통해 판을 크게 키워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기도 하십니다.

하나님이 모르드개의 마음을 읽으셨듯이 우리 믿음의 동기를 읽으셨다면 그 판은 승리로 이끌어 주십니다.

마틴루터의 종교개혁도 카톨릭에 대한 반박 대자보 한 장 붙일 때, 거기서 개신교가 탄생할 것은 상상도 못했던 일입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 인생의 중요한 포인트마다 내 계획과 의지대로만 된 것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손은 우리가 주님을 알기 전부터 역사해 오신 것이죠.사실 모르드개의 개인적인 신앙의 결단을 통해 하나님은 페르시아화 된 유다인 공동체를 다시 구원역사의 표면으로 끌어 올리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악의 세력에 매몰 될 뻔한 교회를 번번히 주님의 능력으로 이렇게 건져 오셨습니다.

조서를 본 그날, 모르드개는 하만을 찾아가지 않았습니다.

이 정도 일이 커졌으면 누구나 당사자 하만을 찾아가 무릎을 꿇고 빌며 상황을 돌이켜 달라고 애원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모르드개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역사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라는 믿음은 구약의 성도들도 우리와 같습니다.

모르드개는 하만에게 굴종하지 않고 굵은 베옷과 재를 뒤집어 쓰고 대성통곡하며 성안으로 들어가 대궐 문 앞까지 걸어갑니다.

모르드개의 행동이 이전에 비해 좀 의외입니다.

그동안 유다인임을 그렇게 숨겨 왔는데, 이젠 자신이 학살 당하게 된 그 유다인이라는 사실을 공개적으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나는 사악한 권력에 말살 당하게 된 유다인이다’라고 온몸으로 항변합니다.

부끄러워 할 사람은 하만이지 모르드게가 아닙니다.

세상은 피해를 당한 약자가 부끄러워하고 악을 행한 자가 더 당당하죠.

모르드개가 대성통곡한 것은 자기 잘못으로 민족이 다 죽게 된 것에 대한 회한의 눈물이 아닙니다.

힘이 없어 악의 세력에게 또 당해야 하는 성도들의 분노와 애통입니다.

괜히 하만을 건드렸다는 후회도 오늘 본문에서 전혀 느낄 수 없습니다.

오히려 모르드개는 이 영적 싸움에서 역전을 노립니다.

모르드개가 어떻게 이런 믿음으로 거대 악과 겨루는지를 살펴보며 우리에게 적용해 보겠습니다.

 

1)이 사건을 보면 세상에 묻혀 살아갈 때는 잠잠하던 악의 세력이 하나님의 이름을 드러내며 살겠다 결심할 때 드세게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그동안 유대인이라 밝히지 않았던 모르드개는 큰 문제 없이 살아왔잖아요?

이젠 좀 하나님을 잘 섬기고 말씀대로 살아야겠다고 마음을 먹자 뭔가 안 좋은 일들이 생기기 시작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기도 좀 시작하면 일이 더 꼬이는 것 경험해 보셨을 것입니다.

이건 지극히 당연한 영적 전쟁의 증거이고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악에 맞설 때 하나님은 능히 대적하고 이길 용기와 담대함을 성도들에게 주십니다.

왜 나는 믿음이 항상 약할까 생각한다면 그 믿음을 사용하겠다는 결단이 부족해서입니다.

모르드개에게 이전과 다른 비장한 결기가 느껴지는 것은 모르드개가 세상에서 발을 빼고 하나님 편에 섰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은 항상 우리 편이시지만 실제 힘은 우리도 하나님 편에 설 때 발휘됩니다.

마음이 심약해지고 작은 일에도 불안해 떠는 것은 내 쪽에서 하나님께 거리를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신자들이 세상과 죄와 타협하며 살 때 하나님 앞에 자신 있게 나가지 못하죠.

이사야서59장에서 이런 상황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2절,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 놓았고

신자들의 힘은 예수님과 거리가 없이 밀착될수록 강해집니다.

우리와 예수님의 사이를 갈라 놓는 것은 죄와 세속으로 가득 찬 마음입니다.

영적 삶에서 자신감을 가지려면 세속에 젖은 생활과 거리끼는 죄 문제를 해결하는 게 관건입니다.

우리 안에 수많은 죄가 있지만 상황에 따라 성령께서 지목하시는 한 두가지 죄가 있습니다.

그것을 버리고 고치는 게 쉽지는 않습니다.

그렇지만 내적 싸움을 거쳐 그 죄 문제를 해결하고 나면 하나님과의 막혔던 뿌연 안개가 일시에 걷히는 걸 느끼게 됩니다.

내 안의 문제에서 먼저 승리하지 못하면 외부의 대적을 이기는 건 사실상 어려운 일입니다.

나와 하나님 사이를 가로막는 요인들에 항상 주의하고 힘써 해결해 나가는모두가 되길 간절히 권합니다.

 

2) 모르드개는 하나님의 구원을 확신했고, 그 방법에도 제한이 없다는 것을 믿고 있었기에 하만과 싸울 수 있었던 것입니다.

14절, 이 때에 네가 만일 잠잠하여 말이 없으면 유다인은 다른 데로 말미암아 놓임과 구원을 얻으려니와

여기엔 모르드개 믿음의 두 가지 확신이 담겨있습니다.

하나님이 반드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다는 것과, 에스더가 아니래도 얼마든지 다른 방법이 있으시다는 것입니다.

현 상황이 절대로 낙관적이지 않습니다.

아무도 바꿀 수 없는 페르시아왕의 조서가 이미 전국에 뿌려졌습니다.

법령을 바꾸는 것이 얼마나 어렵습니까?

만14세 촉법소년의 나이 문제가 거론된 지 언제인 데 법 개정이 안되고 있죠.

안전의무를 소홀히 해 인명피해가 생겼을 때 경영자와 기업에게도 책임을 묻는 중대재해처벌법이 올해 2월부터 시행되고 있습니다.

수많은 사망자 가족들과 단체가 수년간 농성하고 사회적 분위기가 조성되고야 국회에서 발의가 된 것입니다.

그런 뒤에도 발의한 국회위원들이 작년에 단식농성까지 해가며 간신히 2년만에 통과가 되었습니다.

고용주, 기업 쪽에서의 저항이 얼마나 강했겠습니까?

법을 바꾸는 것이 이렇게 어렵습니다.

유다인들이 몰살 당하게 된 현 법령은 누가봐도 그냥 당할 수 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세속법에 막혀 일을 못하시겠습니까?

오히려 하나님은 이 세속법을 이용해서 승리를 만들어 내십니다.

또 현재로선 왕후가 된 에스더가 가장 가능성 있는 구조의 통로일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에스더만이 유일한 방법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아닌,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사람이나 일에 매달리기가 쉽습니다.

사람을 믿었다 실망하고 씁쓸했던 적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꾸 사람이 무언가를 해 줄 듯 희망을 겁니다.

모르드개는 어떤 사람이든 하나님이 쓰시는 그릇일 뿐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사람에게서 승부하려 말고 먼저 하나님께 승부를 얻어야 합니다.

교회도 사람의 능력으로 세워지고 존립하는 게 아닙니다.

저도 목회를 하다 보면 정말 저 분은 우리교회에 꼭 계셨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없어지면 하나님이 교회의 판을 다시 짜 인도하십니다.

하나님보다 사람이나 다른 어떤 힘을 더 의존한다면 하나님은 그 담을 조만간 허물고 안전한 울타리이신 하나님만 바라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를 구원하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은 우리 생각을 능가하십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이스라엘과 강대국과의 싸움에서 정말 납득이 안되는 방식으로 이기게 하신 경우가 여러 번 나옵니다.

히스기야왕 때 앗수르가 18만5천명의 대군을 이끌고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공격을 감행하려 했지만 그 싸움의 결과가 어땠는지 아십니까?

아침에 일어나 보니 여호와의 사자가 직접 앗수르 진영을 쳐서 칼 한번 휘둘러 보지 않고 승리합니다.

그리고 대군을 이끌고 와서 하나님을 모욕했던 산헤립은 패배해 고국으로 돌아갔지만 자식들의 손에 죽임을 당합니다.

이런 역사들은 인간의 능력으로 불가능한 상황도 하나님께는 문제되지 않음을 극단적인 예시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굳게 의지하는 한 사방이 우겨쌈을 당하고 군대가 치려고 몰려든다 해도 하나님은 어떤 방법으로든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모르드개는 이런 믿음으로 하나님의 반전을 확신하고 있는 것입니다.

 

2. 그렇다면 에스더는 하만의 도전에 어떻게 응전하는 지를 살펴보겠습니다.

모르드개가 재를 뒤집어 쓰고 울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에스더는 큰 충격을 받습니다.

모르드개는 에스더에게 아버지나 다름없는 존재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울 때 우리 마음은 미어집니다.

자식들이 밖에서 울고 들어올 때 가슴이 철렁하죠.

부모는 자식들에게 눈물을 잘 보이지 않습니다.

저도 어머니의 눈물을 본 기억이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입니다.

부모가 애통하게 운다면 의지하던 자식들에겐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습니다.

모르드개가 통곡한다는 소식에 뭔가 큰일이 났다는 걸 에스더는 직감했을 것입니다.

에스더는 내시 하닥을 보내서 사건의 자초지종을 알아오라고 합니다.

내시는 모르드개에게서 이 일의 전말을 듣고 와 에스더에게 전해 줍니다.

8절, 또 유다인을 진멸하라고 수산 궁에서 내린 조서 초본을 하닥에게 주어 에스더에게 보여 알게 하고 또 그에게 부탁하여 왕에게 나아가서 그 앞에서 자기 민족을 위하여 간절히 구하라 하니

에스더는 하만의 흉계로 자기 민족에게 닥친 엄청난 비극을 알게 되고, 자기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알게 됩니다.

그러나 지금 에스더의 상황은 유다인들을 위해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습니다.

일단 왕을 자유롭게 만날 수가 없는 규례 때문입니다.

항상 암살 위협에 시달리던 왕들은 어전이 있는 안뜰에 아무나 접근하지 못하도록 법으로 막아 놓았던 것입니다.

왕후라 할지라도 똑같이 이 법에 적용을 받아 왕이 부르지 않으면 어전에 들어올 수가 없었습니다.

단 왕이 어전 안뜰에 무단으로 들어온 사람에게 자신의 금홀을 내밀어야 살아서 왕을 알현할 수가 있었습니다.

이렇게 살기 위해 만전을 기했지만 결국 아하수에로왕이 내시에게 암살당한 역사에서 인간이 대비한 대로 되지 않는 한계를 보게 되죠.

그런데 에스더가 이미 한 달 동안 왕을 대면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한 달 동안 에스더를 찾지 않았다는 것은 에스더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아주 멀어졌다는 뜻이겠죠.

왕에게 나갔을 때 변덕스런 아하수에로왕이 과연 금홀을 내밀지 화를 낼지 모르는 상황입니다.

또 이 정도로 관심이 식어졌는데 왕이 내린 조서를 철회해 자기 민족을 살려 달라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예측할 수가 없는 것이죠.

게다가 못이기는 척 받은 은이 만달란트나 됩니다.

에스더는 이런 사실을 그대로 모르드개에게 전달합니다.

그러나 모르드개는 에스더에게 단호하고도 엄중한 답변을 보냅니다.

너는 왕궁에 있으니 홀로 목숨을 건질거라 생각하지 말아라

네가 만일 이 일을 안하면 유다인은 다른 방법으로 구조를 받을 것이다.

다만 마땅히 민족을 위해 해야 할 일을 두렵다고 피한 너는 멸망할 것이다.

그리고 유명한 말을 하죠.

네가 왕후의 자리를 얻은 것이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알겠느냐

하나님은 어떤 방법, 누구를 통해서라도 유다인을 구원하시겠지만, 네가 하기를 원하신다는 뜻입니다.

너에게 주신 역할을 안 한다면 결국 너만 은혜에서 제외되는 화를 당할 것이라는 신앙적 조언을, 딸 같은 에스더이기에 더 솔직히 강변하는 것이죠.

모르드개의 이 영적 통찰은 지금 우리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됩니다.

지금의 내 자리는 무엇을 위한 것일지를 우리는 늘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고, 영혼을 구원하는 일, 하나님 나라와 교회를 세우는 일에 무언가를 할 수 있다면, 그 일을 놓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다른 누구를 통해서도 하실 수 있지만 내가 그 일을 하고 하나님의 영광에 함께 하시길 원하십니다.

에스더가 자기의 안전만 생각하고 모르드개의 제안을 거절했다면, 어쩌면 이대로 왕에게 영원히 잊혀지고 폐비처럼 처량한 일생을 보내지 않았을까요?

하나님의 나라가 위기에 있을 때 성도들은 자기 밥그릇만 챙기지 않습니다.

그랬기에 기독교 신앙과 교회가 사탄의 도전을 이기고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이죠.

요즘 우크라이나 전쟁상황을 보며 너무 많은 인명 살상에 마음이 아픕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라를 지키고 있는 우크라이나 국민들을 볼 때마다 울컥하는 감동이 올라옵니다.

해외에 거주하다 나라를 지키려고 고국으로 돌아온 사람들이 6만명을 넘었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전쟁에서 우크라이나의 손을 들어주시길 원하는 마음이 참 간절합니다.

에스더도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하만과 싸우기를 결단합니다.

모르드개에게 수산성에 사는 모든 유다인들을 모아 삼일 동안 금식을 하며 이 일과 자신을 위해 기도해 줄 것을 요청합니다.

우리의 영적 전투는 금식과 기도로 하는 것임을 알 수 있죠.

여기서 금식은 세속적인 욕구로 부터의 단절을 의미합니다.

거룩과 기도는 악을 대적하는 가장 강력한 힘을 하나님께로 부터 받는 것입니다.

에스더는 결심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나도 나의 시녀와 더불어 이렇게 금식한 후에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 하니라

이 결심을 어떻게 우리에게 적용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명령을 위해 이렇게 목숨을 건다는 게 우리에게도 가능할까요?
그러나 사실 목숨을 걸지 못할 가치라면 믿을 가치도 없는 것입니다.

신앙을 위해 내 목숨을 걸 수 없다면 그런 신앙을 뭐하러 갖습니까?

교회 드나든다고 다른 것 대단히 뭐 얻을 게 있습니까?

우리는 내 믿음의 가치를 분명하게 계산해서 알고 확신해야 합니다.

현재 이 땅의 생명이냐 영원한 내세의 생명이냐를 생각해 더 가치있는 쪽이 무엇인지 확정을 해야 합니다.

그래도 우리가 에스더의 입장이 될 때 죽으면 죽으리라 순종할 수 있을지는 지금 그런 상황이 아니라 확신할 수 없습니다.

그런 믿음도 결국은 하나님이 붙들어 주시는 만큼이겠죠.

다만 우리가 할 것은 매일의 삶에서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지금 내 본성과 자아를 죽이는 것입니다.

그것이 결국 죽으면 죽으리라는 위대한 믿음을 갖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작은 계명을 지키는 것도 시퍼런 자아를 죽여야 하는 만큼 쉽지 않습니다.

우리가 입으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나의 주인이라 고백하죠.

그러나 작은 계명 앞에서 이기심과 자아를 죽이지 못할 때 진짜 사랑과 믿음이 있기나 한 건지 자괴감에 빠지고 스스로가 시험에 듭니다.

그래서 더 좋은 방법은 내가 얼마나 주님을 사랑하냐는 것보다 하나님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에 초점을 맞추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내 사랑만을 본다면 그 하찮음에 실망하고 실패할 것입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것을 생각하고 주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생각을 매일 떠올리고 거기에 내 시선을 흔들리지 않게 고정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자꾸 생각하면 오히려 주님의 말씀에 조금씩 더 순종해 갈 수가 있을 것입니다.

저는 설교를 준비하다 보면 인터넷에서 자료 검색을 많이 해야 합니다.

늘 인터넷을 켜 놓고 일을 하다 보니 종종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서핑하다 시간이 훌쩍 지나갑니다.

그래서 기준을 정해서 인터넷을 사용하려는 데 그게 잘 안되더군요.

그래도 주님이 날 사랑하고 내게 기대하신다는 것을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걸 잘 지키면 예수님께서 ’잘 했다, 참 잘했다‘그러시는 것 같습니다.

주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해 작은 성공을 거두었다면 예수님께서 지금 날 칭찬하고 계시다는 것을 꼭 저처럼 떠올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스스로도 자신을 좀 칭찬하시구요.

미워하는 마음을 바꿔 긍휼히 여기고, 작은 이득을 위해 양심을 버리지 않고, 염려보다 하나님께 대한 신뢰를 둔 믿음으로 사는 그런 것으로 날마다 작은 승리를 먼저 이뤄가야 합니다.

이렇게 일상 속에서 믿음을 선택해서 살아가지 않으면 진짜 중요한 순간 죽으면 죽으리라가 나올 수가 없는 것이죠.

앞 2장에 보면 에스더가 모르드개의 말을 양육 받을 때부터 지금까지 순종했다는 말이 나옵니다.

이런 말이 그냥 기록된 게 아닙니다.

에스더가 옳은 일에, 신앙에 순종하는 훈련을 받아왔기에 오늘 순종의 결단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사탄의 전략은 성도가 세속에 빠지고 죄에 빠져 그 영적 생명이 질식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종종 세속의 달콤함과 추억으로 성도들을 유인합니다.

안 믿던 때가 더 편하고 행복했던 것 같다는 생각을 주는 것이죠.

그것은 마치 졸업식날 먹던 짜장면 한 그릇의 추억, 아버지 월급날에 사왔던 옛날 통닭 한 마리로 과거 전체가 행복했었다는 지어낸 추억, 허상입니다.

‘세상도 살기 괜찮아, 매일 믿음만 생각하고 살 필요는 없어.’

이렇게 페르시아의 유다인들은 세속에 젖어 들어 살고 있었습니다.

결국 하만을 통한 사탄의 일격에 궁지에 몰려 재를 뒤집어 쓰고 애통하게 부르짖는 처지가 된 것입니다.

이 시나리오를 안다면 항상 깨어 있으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머리 속에서 지우지 않고 사탄의 도전에 응전하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역사학자 토인비는 도전은 있는데 응전이 없는 문명은 무너진다고 말했습니다.

악의 세력은 한시도 쉬지 않고 도전해 오는데 응전하지 않는 신앙은 큰 위기를 만날 수 밖에 없습니다.

내 신앙의 승리는 내 인생의 승리일 뿐 아니라 하나님나라의 승리이기도 합니다.

무사안일한 마음으로 방관하며 주님을 따른다면 우리에게 주신 복된 사명은 다른 누군가가 대신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만 하나님나라를 위해 희생하라시는 게 아닙니다.

인간이 지고 가야 할 생로병사의 짐이 가볍지도 않고 누구든 힘들다고 벗을 수도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위한 삶을 살아갈 때 이 인생의 짐을 주님께서 함께 지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우리의 영적 싸움에도 함께 하셔서 승리의 기쁨으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